소설리스트

3. 손님 (21/21)

3. 손님

네리아는 상관이 기다리고 있을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채 반도 가지 못한 상태에서 자리에 멈춰 서게 됐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남자가 기사단 요새 안의 풍경을 낯설어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서였다.

‘……길을 잃은 게 분명해. 저 움직임, 저 표정. 누가 봐도 길 잃은 사람이잖아.’

작위가 있는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의 여식은 아니지만, 검 쓰는 재능을 인정받아 황제의 직속 기사단인 그리폰에 입단한 네리아는 기사 서약을 마친 지 이제 막 두어 달이 지난 상태였다. 그건 황실의 기사도 아닌 황제의 기사라는 직함이 주는 뿌듯함과 신입이라는 위치가 만드는 의욕이 그녀를 활활 태우는 중이란 뜻이었다.

‘황제와 황제의 백성을 돕는 것이 기사의 의무!’

속으로 외친 네리아는 곧장 방향을 틀어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잔뜩 상기된 낯을 하고서였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 네리아가 그에게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공무용 심부름을 할 때나 입는 남청색 제복이 들뜬 그녀의 미소를 더욱 희어 보이게 했다.

“혹시 곤란한 일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네리아와 마주 선 남자는 갑자기 나타나선 친근하게 말을 붙여 오는 그녀가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금세 차분해져 네리아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도움을 주기도 전인데 벌써 감사를 전하시다니. 흠흠. 네리아는 자신의 친절이 너무 과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기사분이십니까?”

남자는 물었다. 제가 입은 제복을 보고 이미 기사임을 알았겠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번 더 물어 준 것 같았다.

북부 끝자락에 자리한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상경한 네리아의 눈에는 조금 생경한 생김새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가 이상하게 생겼단 말이 아니라, 그의 잘생김이 생경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북부 남자는 대개 미남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망언이 실체화된 존재 같기도 했다.

“네. 이제 막 정식 기사가 됐습니다.”

순간 떠오른 잡생각을 몰아내며 네리아는 기운 좋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아무래도 제 목소리가 너무 기운차고 커다랬던 모양이었다. 잠시 멈칫했던 남자는 이내 네리아를 따라 작게 웃어 줬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남자가 꼭 룸메이트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뱀파이어 백작님. 이 남자처럼 창백한 낯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졌었지.

‘하지만 이분은…… 기혼자군.’

남자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재빨리 확인한 네리아가 생각했다.

“제 행동이 신사분께 결례처럼 느껴질까 걱정되지만, 혹시 길을 잃으신 게 아닌가 싶어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 기사단 요새 안에서 길을 자주 잃어 본지라, 길 잃은 분들의 눈빛을 잘 압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네리아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황실이 소유한 마차나 기사들의 병마 외의 탈것은 기사단 요새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황실 기사단의 방문객들은 그 신분을 막론하고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요새 내부가 워낙 크고 복잡한지라 안내자 없이는 길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이 신사 역시 그랬겠지 싶었다.

“결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길을 잃어 곤란하게 된 차였는데, 이렇게 말을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의 외관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분위기와 다르게 말이다.

“원하시는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수도의 중추에 자리한 기사단 요새에서, 기사단 단복을 입고,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돕다니! 네리아의 주먹 쥔 손이 기쁨으로 떨렸다.

“그리폰 기사단의 칼릭스 히페리온 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

남자의 말이 귓전에 닿음과 동시에 네리아의 미소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이 돼서 그랬다.

칼릭스 히페리온, 그러니까 부단장님은 차기 기사단장이 될 나라의 영웅이자 새로운 황제가 가장 아끼는 기사이며 손꼽히는 검사이자 미인임과 동시에…… 손꼽히게 성격이 더러운 분이셨다.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얼굴에 감탄하게 되기보단…… 독을 품은 화려한 꽃을 앞에 둔 것처럼 겁을 집어먹게 되는, 그런 높으신 분.

“그, 그럼 집무실로 가시는 건가요?”

딱딱하던 네리아의 말투가 순간 물렁물렁해졌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물음 하나를 더했다.

“약속은 잡으셨습니까?”

“아뇨. 따로 약속을 잡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바로 만나 뵐 수 있을 거라고…… 그분의 보좌관께 전해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낮게 읊조린 네리아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칼릭스 히페리온이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이 상냥한 신사분이 면박을 당할까 걱정이 됐다. 보좌관과 만남에 관한 이야길 나눴다고 한들, 보좌관은 보좌관이지 부단장님이 아니니까 말이다.

“제가 부단장님의 집무실까지 모시겠습니다. 저 역시 목적지가 비슷하니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리아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집무실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래도록 마음이 쓰일 게 분명했다.

번거로운 심부름을 끝마치고 돌아온 네리아의 목적지는 상관이 일하고 있을 훈련장이었다. 하지만 부단장님이 계신 집무실 아래층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기수님께 대신 보고를 드려도 되는 일이기도 하니, 목적지가 비슷하다는 소리가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네리아는 뜻밖의 손님과 함께 요새 중앙부로 향하게 됐다.

‘이 손님이 부단장님과 친구 사이는 아닐 텐데……. 무슨 관계려나.’

날씨가 좋아서일까, 옆에 있는 남자가 잘생겨서일까. 부단장님의 냉엄한 얼굴을 떠올리는 바람에 긴장됐었던 네리아의 마음이 조금씩 둥글둥글하게 변해 갔다. 어쩌면 다리가 불편한 남자의 보폭에 맞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서일지도 몰랐다.

네리아의 시선이 슬쩍슬쩍 제 옆의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사실, 저도 그리폰 소속입니다. 부단장님의 손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 더욱 기쁩니다.”

네리아는 작게 속삭였다. 부단장님께 내 칭찬 좀 해 달라 청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라도 할까 걱정돼서였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걸 모르고서 그랬다.

남자와 부단장님이 어떤 관계일지는 여전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분의 사이가 어찌 됐건, 부단장님의 손님이니 더 잘 대해 드리고 싶었다. 약속 없이 방문했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긴 했지만, 애초에 사이가 나쁜 사람이라면 이리 밝은 대낮에 기사단 요새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거다. 잘 대해 드린다고 해서 미운털이 박히진 않겠지 싶었다.

“……저도 그리폰의 기사님을 만나 뵙게 돼서 기쁩니다.”

다행히, 남자는 제 고백을 반겨 줬다.

칼릭스의 집무실이 자리한 건물까지 길게 이어지는 느티나무 길 아래를 걸으며 네리아는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지만, 청탁하려는 간사한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남자의 이름이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남자는 말수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리아와의 대화를 꺼리진 않았다. 그는 네리아의 물음에 친절한 답을 내어 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본인도 그녀에게 몇 가지 물음을 건네게 되었다. 어쩌다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지, 기사단 생활은 어떤지, 대개 처음 보는 신입 기사와 나눌 법한 무난한 물음이었다.

네리아는 자신이 기사가 된 게 너무나 꿈만 같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기사단 생활이 얼마나 즐거운지,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 훈련이 어찌나 힘들고 재밌는지를 신나게 말했다.

그다음엔…….

“상관 때문에…… 힘든 점은 없으십니까?”

정말 에둘러 나온 물음을 받아들게 됐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지 않아? 윗사람들 때문에 힘들진 않고? 네리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 끝자락에 항상 같은 물음을 남겼다.

남자의 물음 역시 편지 속 인사말처럼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상투적인 물음이 어쩐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말하는 상관이 상급 기사나 기수 정도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상관이라는 말끝을 잡고 한 꺼풀 정도를 벗겨 내면 칼릭스 히페리온이라는 이름이 짠,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남자는 제게 칼릭스 히페리온 때문에 힘들지 않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부단장님을 나쁘게 여겨 그런 물음을 건넨 것 같진 않았다.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묻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분명, 오늘 처음 본 신입 기사가 아닌 부단장님을 향한 걱정이었다.

네리아는 그녀가 고향에서 참가했던 가장 멋진 양 선발 대회를 떠올려 봤다. 소중한 친구인 암컷 양 이나와 함께 심사 위원 앞에 섰을 때의 떨림과 식은땀을 흘리게 하던 긴장감을 떠올렸다. 남자는 그때의 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기수님들을, 지휘관님을, 사령관님을, 단장님을, 그리고 부단장님을 존경합니다.”

자리에 멈춰 선 네리아는 눈치껏 입을 움직였다. 그녀는 남자의 앞에 존경해 마지않는 칼릭스 히페리온을 향한 찬사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법 열성적인 목소리와 함께였다.

“전, 부단장님께서 제게 어떤 명령을 내리셔도 그분의 뜻을 따를 겁니다. ……반역과 관련된 것만 아니면요.”

약간의 과장을 섞긴 했으나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너무 충동적으로 제 진심을 드러낸 것 같아 조금 민망했지만, 그래도 네리아는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입단 시험에서…… 부단장님만이 저를 선택해 주셨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를 그리폰 기사단에 입단케 해 주신 그날부터, 저는 부단장님께 충성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제게 황제 폐하 다음이십니다.”

너무 과하게 솔직했나. 그래도 내 이름을 말한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네리아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저 뱀파이어 귀족 같은 미남에겐 남의 마음을 풀어 주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수다스럽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사님께선, 검을 정말 잘 다루시나 봅니다.”

남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네리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자신이 웃는 줄 모르는 눈치인 듯했지만 말이다.

“아,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네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겸손을 떠는 성격은 아니지만, 부단장님의 손님께 이런 말을 들으니 공연히 멋쩍어졌다.

“그분이…… 사람들의 반대에도 기사님을 택한 건, 기사님께서 시험장의 가장 훌륭한 검사셨기 때문일 겁니다. 최고의 검사가 최고의 기사가 되는 것만큼 멋진 일이 없으니까요.”

“…….”

“다음엔, 검을 쥔 기사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네리아에게 시선을 건네며 남자는 말했다. 줄지어 선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을 맞아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기사가 내 천직인가 봐.’

언젠가 최고의 기사가 될 훌륭한 검사라니. 상상만 해도 마음이 떨렸다.

길 잃은 남자의 안내자 역할을 하다 이런 대화까지 나누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부단장님이 고작 말단 기사인 절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뿌듯함이 들었다. 더 발전할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네리아의 심장께를 데웠다.

“네.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입을 다물었다 열길 반복하던 네리아가 말했다. 그녀 역시 남자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이 짧은 만남을 통해 얻게 된 기쁨을 남자에게도 전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

네리아 역시 남자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저 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집무실 바로 앞까지 안내해 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를 낮춘 네리아가 남자에게 말했다.

네리아는 황제 직속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에 소속된 관료들이며 보급관들의 집무실과 사무실이 자리한 건물 앞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부단장님과 사령관님, 기수님들……. 저와 남자가 만나야 할 이들이 참 편하게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네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남자를 봤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민망하다는 듯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그의 옆에 선 네리아가 아니라 저 앞을 향해서였다.

“헤르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너무나 낯선 온도를 품고 있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부단장님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남자만을 보고 있다고 해야 맞았다. 순간, 네리아는 자신이 나무로 변하는 저주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부단장님과 함께 있던 사령관님은 부단장님 대신 기수님에게 무어라 말을 건넨 뒤 뒤를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멀찍이 서 있는 손님에게도 눈인사를 건넨 걸 보니 사령관님 역시 제 옆의 손님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떠난 사령관처럼 남자에게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네는 기수들을 눈에 담으며, 네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다. 헤르난. 확실히 기억나는 이름은 없었으나…… 지금껏 부단장님이 누군가의 이름을 저리 친밀히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이 됐다. 제 옆에 있는 손님이 예사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네리아는 남자의 옆에서 몇 걸음 물러섰다. 부단장님이 그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실 반쯤은 뛰어오는 게 보여서였다.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

남자의 앞에 선 부단장님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의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였다.

“미리 말을 해 줬으면 내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 이 복잡한 길을 혼자서 헤치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쓸모없는 케인 대신 내가 널…….”

“아뇨. 이쪽의 기사님께서, 제가 길을 찾는 걸 도와주셨습니다.”

물러나 있던 네리아에게 시선을 준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칼릭스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네리아에게로 향했다.

남자를 마주할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 무감한 눈을 한 칼릭스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네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네리아는 급히 칼릭스에게 묵례를 건네고는 맑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최대한 선량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네리아 로스.”

녹슨 목각 인형처럼 움직이는 네리아에게 칼릭스는 감사를 표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였다.

네리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부단장님이, 제 이름이며 성씨를 알고 있었다. 그건 부단장보다 한 계급 위인 단장님이 일개 기사인 제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자네와는 차후에 다시 말을 나눠 보지.”

그는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어투로 말을 전하기까지 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당황한 네리아는 한 번 더 인사를 하곤 두 사람에게서 조금 더 물러섰다.

칼릭스는 그를 찾은 손님 헤르난에게 몇 마디 말을 더 속삭였다. 떠날 준비를 하는 네리아의 귀에도 얼핏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보처럼 굼뜨게 움직이게 됐다. 기수님들이 저를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자상한 얼굴을 한 부단장님이 너무나 낯설어 다리가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편지를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급한 소식이라고 해서요.”

헤르난의 약지에 자리한 반지로 네리아의 시선이 내려갔다. 단장님의 장갑 아래에 저것과 똑같은 반지가 숨어 있겠구나. 두 남자의 관계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왔습니다?”

“……왔어.”

한층 짧아진 말을 받아 낸 칼릭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욱 화사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네리아는 자신이 물러서야 할 시간임을 알았다. 부단장님의 너무 사적인 모습을 훔쳐봐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묵례를 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또 한 번 꾸벅 인사를 마친 네리아는 자신을 기다리는 기수들에게로 다급히 뛰어갔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부단장님이 손님의, 그러니까 부단장님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드디어 왔구나.”

황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린 네리아를 기수들이 반겨 줬다. 네리아보다 높은 직급을 가진 엄격한 기사들이었지만 고압적이진 않은 다감한 선배들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네리아의 어깨가 안도의 한숨을 쉬듯 아래로 처졌다.

“어쩌다 저분이랑 동행하게 된 거야?”

“길 안내를 해 드렸습니다.”

“저분이 누군지 알고?”

“손님께선…… 부단장님의 배우자분이십니까?”

남자 기수의 물음에 곧장 답을 하는 대신, 네리아는 그에게 다른 물음을 던졌다. 예상대로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응. 저분이 스칼라 남작님이셔. 부단장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봤지? 완전 다른 사람 같지 않아?”

놀란 네리아에게 이번엔 여자 기수가 말을 걸어왔다. 말속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쟤가 오늘 본 건 아무것도 아냐. 난 언제였지? 맞아, 두 달 전이다. 사령관님 따라 파티에 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일주일 넘게 악몽을 꿨어요. 아주 상냥한 부단장님이 나오는 꿈이었지.”

“배우자분을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

남자 기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네리아는 감탄처럼 말을 내뱉었다.

“많이 사랑하시지. 일방적인 짝사랑 같기도 하지만. 왜, 배우자를 억지로 옆에 붙잡아 두고 있단 소문도 있잖아.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말이야. ……나야, 우리 부단장님이 그럴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짝사랑은 아니실 겁니다.”

입을 뗀 네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스칼라 남작님께서도 부단장님을 많이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의 눈빛이며 목소리에 확신이 묻어 있었다.

“나도 네리아의 말이 맞다고 봐. 어떻게 사랑 없이 부단장님 같은 분을 견디겠니. 자, 두 분의 사랑을 축복하며 우리는 이만 일터로 돌아가 보자고.”

눈을 접어 웃어 보인 여자 기수가 네리아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 줬다.

“네. 알겠습니다!”

기운차게 답한 네리아는 건물 내부로 향하는 기수들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길을 잃은 남자에게 오늘 자신이 느낀 감사함을 전하지 못한 게 아쉬워 그랬다.

칼릭스와 헤르난은 이제 더는 네리아가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붙어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속삭임을 나누는 새들을 닮아 있었다.

끊어진 목소리 사이로 떨어진 단어들이 바람에 실려 오기도 했다. 고작, 편지, 정말? 따위의 말이 네리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부단장님이 남자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주는 게 보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얌전한 모습으로, 그는 제 배우자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런 부단장님을 앞에 둔 남자는 선뜻 말을 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쭈뼛댔다. 하지만 부단장님의 기다림이 길어지지는 않았다. 쑥스러움이 묻어난 미소를 내보인 남자가 결국 입을 열게 됐으니 말이다.

네리아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를 귀에 담는 대신 스칼라 남작의, 헤르난의 입 모양을 눈에 담아 봤다.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와……. 네리아는 입을 벌렸다.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릭스는 제 소중한 이에게 무어라 말을 속삭였다. 더할 나위 없이 환한 웃음이 머물던 입술로 헤르난의 이마에, 뺨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행복을 그에게 나눈 거였다.

세상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기라도 할까, 네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역시. 부단장님의 짝사랑은 아니라니까.’

정말이지…… 호먼 기수님은 질투가 많아서 탈이었다. 부단장님이 배우자를 협박해 제 옆에 억지로 붙들어 두고 있는 거란 괴상한 소문을 휘두르다니. 음해와 모략은 기사들에게 독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다음엔…… 정말, 남작님께 검을 쥔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한 네리아가 저 멀리 앞서가고 있는 기수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신입 기사다운 절도 있는 걸음으로 걸어서였다. 다만,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이전과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보드라운 햇살을 품은 바람이 네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떨어진 나뭇잎을 훔친 바람은 장난스레 덤불 속 꽃들을 흔들어 대다가는 이내 서로를 눈에 담은 두 남자에게로 향했다.

“입 맞춰도 돼?”

이미 입을 맞춰 놓고. 칼릭스는 언제나처럼 헤르난에게 한발 늦은 물음을 건넸다.

칼릭스를 찾은 뜻밖의 손님, 헤르난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칼릭스를 향해 설핏 고개를 끄덕여 줬다.

“……대신, 짧게.”

밖에선 더욱 걱정이 많아지는 그답지 않은, 조금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제 앞에 떨어질 허락만을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의 손이 곧장 헤르난의 뒷머리를 감쌌다. 좁혀진 거리 속에서 두 사람의 이마가 붙었다 떼어지고 코끝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헤르난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칼릭스가 입을 맞춰 오길 기다렸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탓에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빛을 받은 헤르난의 얼굴을 두 눈에 담고, 칼릭스는 순간을 음미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그는 헤르난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손끝을 간질이던 바람마저 달아난 아늑한 고요 속에서, 칼릭스와 헤르난은 입을 맞췄다.

〈다섯 번째 아침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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