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04. 엇갈린 운명
데스퍼라도(Desperado)
엇갈린 운명
미친 듯이 불어대는 비바람에 반데라스 성곽에 수많은 깃발들이 날려갈 정도로 펄럭이고 있었다. 예키츠 지방을 덮고 있던 하늘에 변고(變故)라도 났는지 번개가 쉴새없이 사방에서 번쩍거리고 있었고 온 대지를 찢어버릴 듯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폭풍우가 밤부터 시작해 그 다음날 아침에야 잠잠해졌다. 반데라스 성곽 주위에는 지난밤의 광란으로 인하여 여기저기 뿌리가 뽑혀진 나무들이 뒹굴고 있었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있었다. 그날 정오가 되서야 하늘에는 여러 빛줄기들이 잿빛 구름을 뚫고여기 저기 대지를 비쳐주었다. 잠시후 한없이 하늘과 대지를 덮고 있을 것만 같은 구름이 동쪽으로 몰려가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태양은 아직도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대지 위를 비추면서 마치 지난밤 산고(産苦)의 고통을 달래려는 듯 부드러운 온기를 풀풀 내뿜고 있었다. 그날 해가 질 무렵 오후가 되서야 반데라스 성문이 열렸다. 케시어스가 성문 밖으로 나오자 성문이 저절로 닫혔다. 성곽 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케트오스가 무심(無心) 표정으로 케시어스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시어스는 저편 언덕 위에 올라서서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가족과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반데라스 성을 한참 바라보았다. 비록 케시어스와 그녀의 가족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들간에는 무언(無言)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케시어스는 발길을 돌려 길을 재촉했다.
그로부터 3 일 후 오전 어느 때 리크는 해안 언덕에서 저 아래 밀물의 바닷가를 처벅처벅 걸어오는 케시어스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케시어스!"
"리크.."
"후. 드디어 돌아왔군. 그런데 가만있어보자 헉! 너 얼굴이.."
순간 리크는 케시어스의 왼쪽 뺨이 흉터가 말끔히 사라진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흉터가 없어졌잖아!"
"응. 저기..아..아버지가 고쳐 주셨어.."
"우와! 아버님이 의술도 하실 줄 아니?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정말 잘 됐다."
"어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야! 넌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니?"
"좀 피곤해서.."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일단 가서 쉬어야지. 후. 아무튼 그 동안 네가 보고싶어서 혼났어."
"내..내가 보고 싶었다고?"
"왜. 징그럽냐? 하하."
"아니.."
"그나저나 그 동안 내게도 놀라운 변화가 있었어. 아마 들으면 놀랄걸.."
"변화라니?"
"후. 네가 없는 동안 인근 마을에 내려가서 나름대로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무슨 일?"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어."
"병을 고치다니? 설마..너 근원인지 뭔지 완전한 기억을 찾은 건 아니겠지? "
순간 케시어스의 안색이 굳어졌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리크에게 다그쳐 물었다.
"하하. 기억을 찾다니 무슨 소리야. 그나저나 네가 없는 동안에 심심풀이로 [진동수조합]이라는 개념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이상한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어."
리크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바로 이 손이 약손이라는 것을..지난번 이곳에 사냥놀이를 하러 인근 마을 아이들이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하 아이가 동물을 쫓다가 바위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지 뭐야. 난 근처 과수원에서 있다 우연히 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갔더니 한 아이가 발목이 부러진 체 고통스러워 울고 있더라고. 그 아이가 하도 애처롭게 보여서 손을 갖다대고는 부드럽게 만져주었는데 글세 이 오른손에서 백색의 빛이 일더니만 그 아이의 다친 발목이 원상태로 돌아오더라. 후. 나도 모르게 [진동수조합]이라는 개념의 의식이 떠오르면서 내 안의 의식이 빛이 손을 통하여 그 아이의 부러진 뼈를 원상태로 재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 어쨌든 그 이후로 이런 사실들이 아이들 입을 통하여 인근 마을에 알려지면서 본의 아니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단 말이야."
"정말?"
"하하. 못 믿겠으면 오늘 오후에 잠시 나를 따라와 봐. 마을에 가기로 했거든. 오늘은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몰려 올 거야. 주변 여러 마을의 병자들이 다 모일 테니..아무튼 고통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낫는다면 좋은 일을 하는 거잖아. 이따가 같이 갈 거지?"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들어가서 쉬자."
리크는 케시어스의 어깨를 그의 한 팔로 부드럽게 감싸주더니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리크의 가슴에 푹 안긴 케시어스는 두 눈을 지긋이 감고는 그의 향취를 느끼고 있었다.
"리크.."
"왜?"
"사랑해.."
"후후. 갑자기 뜬 금 없이 사랑한다니."
"....."
그날 오후 케시어스는 리크를 따라서 파르테라 불리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파르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여러 사람들이 애타게 리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리크를 보자 황급하게 다가와서 예의를 표했다.
"오. 성자(聖者)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성자라니요?"
"아무튼 저를 따라오시지요. 지금 마을 뒤편 루벤이라 불리는 바위 언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리크는 마을 촌장쯤으로 보이는 노인의 손에 이끌려 루벤 언덕으로 갔다. 제법 높은 바위언덕에 올라선 리크는 언덕 아래를 보고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바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헉! 이럴 수가?"
언덕 아래에는 넓은 저지대에는 족히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니 리크가 놀래는 것도 당연했다.
"웬 사람들이.."
"성자(聖者)시여! 주변 마을뿐만 저 멀리 떨어진 지방에도 퍼져 고통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병자들이 당신의 소문을 듣고 이리로 몰려 왔습니다."
"저..성..성자 아닌데. 그저.."
그때 언덕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리크를 보자 저마다 허리를 굽혀 경배의 동작을 취했다. 리크 역시 어떨 결에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예의를 표했지만 그는 내심 이만저만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난 그저.."
"성자(聖者)님. 자 뭐하십니까? 저들의 병을 치료하기 전에 한 말씀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성자(聖者)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싶어한답니다."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저는 성자(聖者)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 건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리크는 모두들 숨을 죽인 체 자신을 바라보자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어차피 제 능력이 저들에 도움이 된다면 한번 해보죠. 그나저나 말씀이니 연설이니 이런 건 사양하겠습니다. 일단 한 사람씩 줄을 지어 제게다가 오게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참으로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백색의 횐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의 행동은 그 누가 보아도 성자(聖者)의 모습을 아니 떠올릴 수는 없었다. 한사람 한사람들에게 정성어린 손길과 신비한 빛의 조화로 병을 고쳐주니 치료를 받는 사람들과 저 뒤로 끝없이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은 리크에 대한 경의의 표정이 절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리크 역시 하루아침에 성자(聖者)란 말을 듣고는 지금도 혼란한 감정이 맴돌고 있었지만 자신을 거쳐가는 병자들이 완쾌될 때마다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리크는 흐르는 땀방울을 닦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케시어스를 찾아보았다.
"흠. 케시어스가 어디를 갔지?"
"나 여기 있어.."
순간 리크는 케시어스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른 병자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 끝에 리크 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케시어스. 너 거기서 뭐해. 거긴 병자들의 줄이란 말이야."
"리크. 나도 병들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장난 칠 때가 아냐. 너 뒤로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 당장 저리 비켜!"
하지만 케시어스의 무척 괴로운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리크는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케..케시어스. 너 진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응. 나 사실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 흑흑."
한순간이었다. 케시어스가 가슴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리크의 중앙 가슴부근으로 사정없이 박아 버렸다.
[슉]
[욱!]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조차 침묵을 지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리크는 가슴에 검이 박혔지만 전혀 고통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고통보다도 더한 충격이 그를 뒤덮고 있었으니 그저 케시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 서야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떠들 석 했다. 리크는 한 손으로 박힌 검을 잡고는 그저 멍하니 케시어스를 바라보았다.
"케..케시어스.."
"리크. 미안해. 네가 완전한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이럴 수밖에 없었어. 흑.."
케시오스는 갑자기 자신이 행한 짓에 충격을 먹었는지 그녀 스스로도 사시나무 떨 듯이 온몸이 부들부들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내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님과 오빠가 소멸된단 말이야..흑흑."
[뚝! 뚝!]
[악!]
그때 리크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보랏빛 빛이 발하더니 리크의 온몸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크가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고 신음을 내자 케시어스가 괴로운 듯 자신의 귀를 두 손으로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리크. 흑. 네 가슴의 박힌 것은 베른의 단도란 말이야! 움직일수록 고통이 심해져. 온몸의 뼈와 근육을 갈갈 이 찢어놓을 거란 말이야."
잠시후 리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케시어스 움직이지 않을게."
"리크.."
"후후.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군. 그리고 나 같은 하찮은 놈이 죽어서 네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하몬님과 하몬의 검이 날 거부하고 세아린 마저 떠날 때부터 별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은 없었어. 단지 짧은 시간만이라도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을 뿐이야."
리크 역시 두 눈가 촉촉해져 있었다. 잠시후면 멸성(滅性)의 에너지 응집체인 베른의 단도가 리크의 몸 내부를 조각조각 끊어놓고 몸마저 녹일 판국이었다. 그 고통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리크는 케시어스 앞에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증거로 신음보다 더욱 처절한 고통의 신호로 리크의 몸이 들석들석 거리고 있었다. 리크는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입술을 악물고 있었으니 그의 입가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케시어스 역시 그런 리크의 몸부림을 보고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안돼!! 그만해! 더 이상은.."
케시어스가 갑자기 리크 가슴에 박힌 베른의 단도를 뺐다.
[쉭!]
[욱!]
베른의 단도가 빠지자 리크는 그 앞으로 고꾸라졌다. 케시어스는 마치 실성한 듯 마구 웃으면서 군중들을 향해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돌진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들이 케시어스를 포위하더니 저마다 돌을 들어 그녀에게 던졌다.
"저 악마 같은 년이 성자(聖者)님을 죽이려고 했어!"
"이 천하의 나쁜 년이.."
"죽어라!"
[획! 쉭!]
[탁!]
케시어스는 그들의 돌을 피할 생각을 안 했다. 곧이어 이마에 선혈이 낭자한 케시어스가 다시 저 언덕 위에 반드시 누워있는 리크를 한번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베른의 단도를 뺐으니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거야. 리..리크 내가 말이야..진정 사랑했던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할만큼 모질다고는 생각 안 했는데..흑흑"
그녀는 아직도 울먹이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리크를 바라보다 한 손을 허공으로 휘저었다.
"리크..안녕.."
[팟!]
순간 케시어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에게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없어져버렸어.."
"악..악마가 틀림없어..성자(聖者)를 해치려는 악마 말이야!"
"그나저나 성자(聖者)께 가보자고!"
"빨리!"
잠시후 수많은 사람들이 언덕 위에 누워있는 리크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