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16. 탈출
데스퍼라도(Desperado)
탈출
바위 뒤에 숨어있던 파슬렌과 소피아나 역시 천살전사 대장인 게아트가 세도스 아저씨를 리크라 부른 것에 대해 무척 놀라고 있었다.
"오빠. 세도스 아저씨를 리크라고 하는데..저들 아는 사이인가?"
"그런 것 같은데."
세도스는 게아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나를 아는가?"
게아트 역시 의아스런 표정으로 세도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진짜 나 게아트를 모르겠는가? 후후. 리크 설마 나를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젠장 이거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군. 한때 하몬의 후계자까지 사기를 치더니 나 같은 하급계열의 수호전사는 네 인생에서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는 건가?"
솔직히 세도스는 게아트라는 자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고 느닷없이 자신을 리크라고 부른 것에 대해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도스는 앞에 있는 자자 자신의 과거를 아는 자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하면 자신의 기억을 찾아줄 실마리가 이 게아트라 불리는 자가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일부러 얼굴에 미소를 짓고 그를 잘 알기라도 하는 말투로 바꾸었다.
"흠. 게아트 이제 보니 생각이 나는 것 같군. 그나저나 네 놈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쳐졌기에 그토록 원한에 사무쳐 있나.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네놈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네 놈의 자서전 얘기나 지껄이라고? 하하. 이거 참 기가 막혀서. 아직도 그 옛날 사기 치던 시절이 그립긴 그리웠나 보지? 어쨌든 좋아 내 굳이 네 놈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없지. 어차피 잠시 후에는 뒈질 놈이니까?"
게아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자신의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리크를 천천히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리크 가벤더. 후후. 그 옛날 네놈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후 난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날로 제대를 해버렸지. 그후 네 놈의 뒷조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나름대로 여러 놀랄만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어. 그러니까 넌 가문도 베일에 쌓여있고 심지어 주민 기록조차 없었어. 후후. 하긴 적어도 희대의 사기 극을 연출하려면 사전에 자신의 행적을 싹 지워야만 했겠지. 더구나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지만 그런 대로 독특하고 강력한 잡식성 마법으로 공을 쌓더니만 어느 순간에 케시어스 3군단장의 신임까지 얻게 되더군. 한술 더 떠서 그 누구도 구경 못한 갈비아스라 파동검술이라는 것을 내 세워 하몬의 후계자라는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네 놈은 한마디로 치밀하다 못해 천재적이기까지 했지.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하하하.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기아몬 신전에서 하몬님이 직접 출현하시면서 네 놈의 사기행적은 그날로 끝이 났지. 그리고 이런 산골에 숨어 지내다니. 자 이게 네놈의 영광스러운 과거행적이다. 이제 만족하는가. 이 더러운 사기꾼 새끼야. 하하하하."
그때였다. 게아트 뒤에 있던 천살전사들 중 누군가가 앞으로 뛰쳐나오더니 갑자기 세도스에게 다가갔다.
"리크 수장님! 저..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세도스는 또다시 누군가가 자신을 아는 척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살전사의 검은 전투복 차림의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예의를 표했고 잠시 후에는 흐느끼기까지 했다.
"흑흑. 3군단 중앙 연대 제 17막사소속 르베니우스입니다. 리..리크님."
물론 기억을 잃어버린 세도스가 그를 알 리가 없었다. 그때 게아트가 버럭 소리질렀다.
"이..이런 건방진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긴 나서는 거야. 당장 네 자리로 돌아가!"
"아니오 할말을 해야겠습니다. 리크님은 진정 영웅이셨습니다. 그런데 사기꾼이라니 그건 말도 안됩니다. 저는 리크님이 3군단 17막사 시절부터 저 머나먼 카밀로스탄 대륙 횡단과 마지막 전투 인 하몬디아 제국의 전쟁 때까지 3군단에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리크님을 잘 압니다. 비록 하몬님이 나타나셨지만 그전까지는 리크님이 하몬의 후계자로서 진정 병사들을 아끼고 전 인간제국의 희망을 심어준 분입니다."
"이런 개새끼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퍽! 팍!]
"욱!"
게아트의 발이 사정없이 르베니우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당장 네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목을 따버리겠어. 미친 새끼 같으니.."
지금까지 잠자코 듣기만 했던 세도스가 말문을 열었다.
"후후. 리크 가벤더라..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 나를 리크 가벤더라고 하니 분명 내 과거의 인물이 분명하긴 하겠군. 허나 이 거 실망인데. 지난날 내가 얼마나 멍청했기에 내 앞의 게아트라는 놈을 살려두었단 말인가?"
순간 게아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전투 동작을 취했다.
"흠.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겉으로는 선한 표정과 온갖 위선적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을지 몰랐지만 난 네 놈이 진작부터 이중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
"이중적이라..하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 그렇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내 과거의 모습에 대해 무척 화가 나는군.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였기에 너 같은 놈이 아직도 내게 지껄이게 나 두었냐는 점이지. 후후. 여하튼 과거는 과거 지금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겠나?"
세도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왼쪽에 지면에 놓여있던 약 2M 길이의 긴 막대기 낫을 집어들었다. 아마 농민들이 도망칠 때 떨어트려 놓은 도구였던 것 같았다. 순간 게아트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풋 하하. 그 위대했던 리크가 현재는 다 떨어진 농군의 차림새를 하고 있고 무기마저 낫이라. 이거 불쌍해서 못 봐주겠군. 쯧쯧."
"내가 불쌍하다니. 과연 그럴까. 후후."
"뒈져도 그런 여유가 나올지 모르겠군. 자 천살전사들이여 저 사기꾼 놈을 척살하거라!!"
그 순간 신기하게도 세도스가 들고 있던 길다란 낫이 푸른빛을 발했다. 세도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념파동을 낫과 조율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세도스는 어느 정도 [진동수조합]에 대한 개념을 깨우쳤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할 때 그 에너지를 사용했었다. 그후 그러한 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사용했고 그러던 중 케시어스에게 일격을 당했던 것이다. 비록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창성인의 잠재된 힘은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상념에 반응하고 표출화 되었던 것이다. 분명 세도스는 자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왜 생겨났는지 는 몰라도 직감적으로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알았다.
모든 물질의 근본질료가 진동(振動)의 형태로 우주 속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 상념의 파동을 그 진동과 조율하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은 의식이 우주 속에 진동의 형태로 현존하고 있고, 우리 상념의 파동을 그들의 진동과 조율할 수 있으면 허공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듯이 그들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 등이 세도스의 머리 속에 자연적으로 각인이 되어있었다. 우주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정보가 있고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그 정보와 일치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면 에너지가 증폭되고, 그 정보와 일치하지 않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면 에너지가 약해지는 것 등.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를 읽는 것은 단순히 세도스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 개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과연 현재 공격하는 천살전사들이 창성인인 세도스의 그 첫 번째 [진동수조합]에 의한 희생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슈슈슈슛]
"악!"
"컥!"
"욱!"
무기개념자체가 달랐다. 세도스가 들고 있던 평범한 낫은 이미 그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천살전사들의 검(劍)이 낫에 닿자마자 절단이 되고는 자신들의 주인의 몸통마저 분리되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게아트 역시 수호전사 출신이지만 그의 혼용마법(混用魔法)으로 불러낸 검광은 세도스의 낫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M의 거대한 낫이 한번 휘둘러 질 때마다 천살전사들의 목 수십 개가 나가 떨어졌고 다시 휘두르니 수십 개의 몸통이 분리가 되었다. 너무나도 참혹한 전투광경이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 혹은 도살이라고 봐야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근 300여명의 천살전사들이 도륙 당했으니 이젠 게아트와 몇몇 호위전사들만 남아 있었다. 게아트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혼(魂)마저 나가 버린 듯 하였다.
[쩍!]
[팍팍!]
하지만 세도스는 마지막 여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낫은 수직으로 게아트와 나머지 천살전사를 두 쪽냈다.
"다 죽였나..?"
세도스는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듯 하다가 순간 눈빛이 번뜩 거렸다.
"흠 아직 한 놈이 살아 있었군."
[스스스스]
낫은 세도스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단 한 명의 천살전사가 있던 곳 앞에서 멈추었다. 전투 가 벌어지기 전부터 한자리에서 계속 무릎을 끓고 앉아있던 천살전사는 바로 17막사 출신인 르베니우스였다. 그는 차마 자신의 옛날 상관인 리크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도스는 서서히 낫을 허공으로 치켜들고는 그의 목을 내리치려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낫을 땅바닥으로 내려놓고는 르베니우스를 살펴보았다.
"넌 뭐야?"
"3군단의 17막사 시절이 기억 나지 않습니까? 리크님..이제 보니 기억을 잃어버리신 것 같군요.."
"그런 거야 네가 상관할거 없지. 그나저나 너도 천살전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군."
"네."
"흠. 네라니? 마치 자랑스럽다는 대답 같군.
"그건 아닙니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잘 안다고?"
"천상인 숙주를 죽이는 임무를 부여받고 천살전사팀에 합류했지만 설마 죄 없는 마을 사람들까지 학살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토록 존경했던 최고 명령자 하몬님의 명분 있는 설득으로 많은 전사들이 잔악무도한 천살전사로 바뀌었다는 것 이 이제는 허탈하기까지 하니..후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저는 그 동안 마지못해 제 임무를 하고 있다는 합리화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조금 전 리크님을 뵈오니 그 옛날 3군단 시절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한순간에 살아갈 의욕이 없어지더군요."
르베니우스는 갑자기 검을 자신의 목줄 기에 대고 세도스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진작 자살하려 했지만 리크님을 한번 더 보려고. 어쨌든 무슨 사정이 있어 리크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신 것 같지만 분명 명심하십시오. 하몬이라는 자는 악마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명분과 실리를 가장하여 이 사계(四界)에 엄청난 피 바람을 몰고 온 군주입니다. 모든 사계 주민들이 그의 정치와 권력에 넋이 빠지기라도 한 듯 따라가지만 남는 것은 인륜과 윤리를 저버린 피폐한 영혼들만이 남죠. 바로 저처럼 말입니다...그리고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타레탄 마을 주민들은 이미 천살전사들의 제거 리스트에 올라있습니다. 오늘 온 팀은 레아 제국 남부 지방 소속의 하급 천살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더욱 강력한 자들이 추적을 해올 것입니다. 그럼 이만."
르베니우스가 검에 힘을 주어 자신의 목줄 기를 힘껏 찌르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검이 꿈쩍도 안 했다. 어느새 세도스의 낫이 그의 검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네 마음대로 죽으랬어."
"리..리크님.."
"앞으로 날 부를 때 세도스라 불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