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7. 첫 번째 애인 (7/10)

7. 첫 번째 애인


아나스타샤에게서 비행기를 탔다는 전화를 받은 유리는 사무실을 서성였다. 도착까지는 못해도 3시간은 걸릴 텐데 유리는 3시간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지켜보는 마야와 일리야는 어깨만 으쓱였다. 마이애미로 돌아오고부터 계속 긴장 상태였는데 오늘은 더 심했다.

아나스타샤를 두고 마이애미로 돌아온 게 문제인지, 아니면 아나스타샤가 와서 벌어질 일이 걱정인지는 유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그들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남하 소식에 스케줄도 이틀씩 미룬 참이었다.

“청소는 잘 됐나? 침대는? 짐은 도착했어?”

“예. 청소는 업체를 한 번 더 불렀습니다. 도청기나 카메라가 있는지 재확인할 예정입니다. 아나스타샤 씨가 보낸 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침대 매트리스는 보스가 고르셨잖아요? 시트도 극세사로 준비했습니다.”

마야가 보고했다. 유리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입술을 퉁기며 신음했다. 일리야가 시계를 확인했다. 3시간 후에 떨어진 폭탄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예상도 안 됐다. 도착하자마자 섹스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이애미를 둘러보다 섹스를……. 일리야는 침을 삼키며 창가로 눈을 돌렸다. 그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왔어요. 스무디 시키신 분? 아니, 왜 다들 그렇게 굳어있어요?”

스무디를 사 온 레이즈빗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딱딱하게 굳은 가족들을 보고 물었다. 마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무디 한 잔을 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리야가 두 잔을 빼내 유리에게 한 잔을 건넸다. 유리는 이슬이 맺힌 잔을 들고 있기만 했다.

“아나스타샤 씨는 언제 온대요? 비행기 탔대요?”

안 그래도 예민한데 레이즈빗이 신경을 긁었다. 유리는 스무디를 책상에 올려놓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레이즈빗은 입을 다물고 스무디를 쪼옥 빨았다. 마야가 킥킥 웃었다.

아나스타샤가 온다. 속죄는 연애였다. 문제는 유리에게 있었다. 라포포르트의 막내 도련님은 여태껏 제대로 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

가볍게 즐기는 유흥과 연애는 결이 달랐다. 유흥은 쾌감만 쫓는 거라면, 연애는…… 더 심오한 것까지 공유해야 한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아나스타샤와 어떤 심오를 공유해야 한단 말인가? 어디 가서 소문내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나스타샤를 기다리다가 지친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마이애미에 도착할 때까지 마이애미 시내를 질주했고, 결국은 비행기 도착 시간에 늦어 마야가 공주를 데리러 가게 됐다.

첫 단추도 제대로 못 끼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함께하는 마이애미 생활이 망했다고 직감했다. 오시프가 내준 주택에 돌아오자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맞이했다. 가슴 윗부분이 도톰하게 드러나는 얇은 반팔 티셔츠에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리! 챠오, 챠오. 보고 싶었어. 날 두고 매정하게 가버리더니, 마중도 안 나오고.”

그는 얼빠진 채 현관에 선 유리를 끌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춰주며 칭얼거렸다. 네가 나올 줄 알았는데. 어딜 다녀온 거야?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유리는 한마디도 못 했다. 뭐라고 해. 긴장돼서 드라이브 갔다가 시간을 놓쳐서 마중을 못 갔다고? 유리의 귓가가 붉어졌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유리, 유리.”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부르며 쪼듯이 입을 맞췄다. 절망에서 끌려 나온 유리가 뒤로 피했다.

“왜.”

“내가 한 말에 상처받았나 해서, 마중 안 나와도 괜찮아. 지금 봤잖아. 집 구경은 시켜줄 거지?”

집을 안내해 실수를 만회하라는 말로 들렸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만회하면 돼. 유리는 비장하게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나스타샤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 뒤를 쫓았다. 아나스타샤를 데려왔던 마야는 둘이 주방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에 집을 나왔다. 여기부터는 상사의 사생활이었다.

주택은 둘이 살기에는 과한 크기였다. 2층짜리 건물이었고 현관 쪽에는 정원이, 거실 쪽에는 수영장이 딸렸다. 1층은 거실과 주방, 욕실 두 개와 방 두 개가 있었고, 2층도 거실과 욕실 두 개, 방 두 개로 설계됐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방을 1층 가장 큰 방으로 준비했다. 그의 취향을 담아 커튼도 흰 레이스로 했고, 앤티크 느낌이 드는 가구를 뒀다. 주방과 거실을 대충 보여준 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쓸 방문을 열었다. 몇 번이나 검수한 인테리어였다. 호텔 방처럼 깔끔했다.

“와, 유리. 네가 꾸몄어?”

거실과 주방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는데 자신이 쓸 방은 인형의 집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유리가 아나스타샤에게 바라는 취향이 드러났다. 짙은 브라운톤의 가구와 하얀 침구류, 햇빛도 잘 들어오는 방이었다. 무섭도록 자신의 취향인 방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걸터앉아봤다. 매트리스가 적당히 흔들렸다.

“멋진데.”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유리의 굳어있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귀엽기는. 아나스타샤는 금세 일어나 유리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쪽, 가벼운 키스에 유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부친 짐은 아직 도착 안 했어.”

“그래? 조금 늦네. 너무 많이 부쳤나 봐.”

콧등이 서로 닿았다. 입술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나스타샤의 손이 유리의 허리에 올라갔다.

“네 방은?”

“내 방?”

“응. 옆 방인가?”

“아니.”

유리는 뒤로 물러섰다. 곤란한 부탁을 받은 것처럼 유리의 눈동자가 바삐 돌아갔다. 아나스타샤가 지낼 1층만 사람이 사는 것처럼 꾸며놨다. 유리가 지낼 2층은 휑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와, 아파트에서 가져온 책상이 전부였다.

“설마 나만 이 집에서 지내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졸라댔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가며 구경할 텐데 안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아직 덜 치웠어.”

“내 방부터 꾸몄구나.”

적당히 변명을 붙인 유리가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청소는 해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방부터 보여줬지. 아나스타샤의 방과 비교되기 싫었다. 누가 봐도 신경 쓴 게 티가 난 방과 필요한 것만 갖다둔 방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과 달리, 유리는 순순히 방문을 열었다. 침대가 창가에 바짝 붙어있었고 널찍한 부분에는 책상이 있었다. 흔한 소파나 스툴도 없었다. 커튼도 달지 않아서 안이 무척 환했다. 유리는 긴장한 채로 아나스타샤의 감상을 기다렸다. 그는 감상도 뭐도 없이 침대로 달려들었다.

덩치가 침대에 부딪히자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탄성이 좋아 아나스타샤가 붕, 떴다. 통통 퉁겨져 침대 모서리에 누운 아나스타샤가 몸을 굽히며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는 눈만 꿈뻑였다.

“여기 침대가 더 큰 것 같아.”

“크기는 같아.”

“그래? 왜 더 커 보이지.”

아나스타샤가 반대로 뒹굴, 돌아누웠다. 널찍한 등이 보였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 용기가 생긴 유리는 슬금슬금 침대로 다가갔다. 편안하게 누운 뒷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막 침대를 짚으려는 순간,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린 유리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 유리. 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거야?”

“…….”

옆에 앉아도 되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유리는 판단이 안 섰다.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치면 사고가 멈췄다. 아나스타샤에게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어리숙한 알파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죽기보다 싫어서 감춘다고 감춰질 문제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연애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해본 사람이 아니던가.

결국, 유리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문질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연애는…… 해본 적이.”

없다고. 차마 없다는 말은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어서 손으로 얼굴을 쥐어짰다. 아나스타샤는 누운 자세에 고개만 어깨에 붙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싱글싱글 웃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

유리가 마이애미에서 무엇을 준비했는지 대단히 기대됐다. 사랑스러운 속죄를 기다리다가는 그가 준비한 샴페인 마개도 못 열고 베이징으로 가게 될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가 먼저 심지에 불을 붙였다.

“뭘 하고 싶은데?”

“……몰라. 저녁에 3분기 중간 회의가 있어.”

“오늘은 일정이 없다고 마야한테서 들었는데.”

말에 웃음이 묻어났다. 유리는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랬던가…….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는 목까지 붉어졌다. 아나스타샤는 부드러운 이불을 손바닥으로 만졌다.

“나랑 누워있는 건 어때? 비행기 타고 오느라 힘들었거든.”

고작 3시간의 비행이었고 유리와 마음만 맞으면 곧장 몸부터 맞출 생각이었지만 소극적인 유리를 보니 아랫구멍을 긁어주는 것보다는 턱밑을 만져 주는 게 나을 듯했다. 아나스타샤의 요청에 유리가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기댔다.

가을 냄새가 났다. 아니, 봄 냄새인가. 달큰하면서 묵직한 향이었다. 허리에 두른 팔이 느슨해졌다. 유리는 용기를 내 아나스타샤의 손등을 손으로 덮었다. 아나스타샤와 어떤 요구 사항도 없이 한 침대에 앉아있을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인형은 만들고 있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궁금한걸. 나랑 얼마나 비슷하게 만드는지…….”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았다. 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푹신한 침대에 향긋한 페로몬을 맡으니 수마가 쳐들어왔다. 유리는 침을 몇 번이나 삼킨 뒤에야 대꾸했다.

“의뢰는 했어. 곧, 뭐가 나오겠지.”

“정말? 나한테도 보여줘.”

게으르게 누워있던 아나스타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유리가 만든 ‘나’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유리는 인상을 구겼다.

“싫어.”

“왜? 나잖아. 내가 날 보는데 왜 싫은 거야?”

“미완성이잖아.”

“날 옆에 두고 비교하면 더 진짜같이 만들 수 있지 않겠어?”

“……뉴욕은 다 정리한 거야?”

아나스타샤의 입담을 유리가 이길 리 만무했다. 더 질질 끌었다가는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인형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유리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휘두르는 대로 따라왔다. 공주가 유리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답했다.

“음, 대충 정리했지. 유리가 날 두고 떠나는 바람에 쫓아오려고 서둘렀더니 아직 조금 남았어. 두세 번은 더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아.”

“다 정리하고 와도 돼. 번거롭잖아.”

“번거롭긴, 유리. 베이징에 가기 전까지 내 옆에 있을 거라면서?”

아나스타샤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간이 좁아지고 눈도 가늘어졌다. 반대로 유리의 입꼬리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뭐, 일단은.”

“일단이라니, 유리. 오시프 씨와 약속했잖아.”

“그랬나? 잘 모르겠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능청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는 유리를 아나스타샤가 얼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표독스럽게 삐죽 나온 입술이 점점 벌어지더니 큰 반원을 만들었다.

“유리이. 네가 꾀를 부렸다는 걸 알면 오시프 씨가 날 죽일지도 몰라.”

“넌 아무도 못 죽여.”

유리가 장담하며 볼에 입을 맞췄다. 공주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웃었다. 가슴을 간질이는 말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차분해진 회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맛봤다. 넌 아무도 못 죽여. 나만이, 오직 나만이 널 죽일 수 있다. 평생 도망치지 못한다던 경고가 떠올랐다. 여생을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썩힐 수도 있는 관계였다.

아나스타샤는 편히 유리의 어깨와 등에 몸을 기댔다. 단단한 육체는 아나스타샤가 체중을 실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유리만 있다면 지하 감옥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라포포르트 저택에 지하 감옥도 있어?”

“로마노프 왕조인 줄 알아?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유리는 대꾸하며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머리에 머리를 기댔다. 강렬한 페로몬 향에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유리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면 하나 만들어줄게.”

“좋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창문을 만들어줘.”

아나스타샤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창문이 있는 지하 감옥은 또 뭐야. 유리가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창문만 있으면 감옥에도 들어가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곳도 감옥과 다를 것이 없다.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이애미에 잘 왔어.”

“응.”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춰 환영 인사에 화답했다.

* * *

유리는 돌아다니는 아나스타샤를 눈으로 좇다가, 현관 앞에 캐리어를 들고 선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고용인을 힐끔거렸다. 아나스타샤를 데리러 온 것이다. 뉴욕을 몇 차례 왕래해야 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마이애미에 짐을 풀고 이 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갈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눈만 마주치면 입을 맞추고 옷 안으로 손을 넣기 바빠서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미안, 오로라. 거의 다 됐어.”

행동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오로라는 손목시계를 확인할 뿐이었다. 누가 봐도 가기 싫어서 늦장 부리는 중이었다. 유리는 아직도 슬리퍼를 신고 휘적휘적 거실을 지나가는 아나스타샤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뉴욕에서 급히 사람이 왔는데 미적거려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오로라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집을 구경하다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오로라! 많이 기다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아나스타샤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약속이 파투 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니에요. 30분밖에 안 지났는걸요.”

“그래. 맞아. 지금 출발하면 늦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겠네요.”

오로라의 산뜻한 목소리에 아나스타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왜 지금이야? 뉴욕에 있을 때는 여태 안 된다고 했다가.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는지, 유리를 보고 섰다. 눈썹과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손을 붙잡았다.

“가야지. 네가 책임자잖아.”

“매정해, 유리. 가면 일주일은 있어야 하는데.”

“알아.”

연인은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답을 내주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일주일이나 헤어지는데 “알아.”가 다란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헛소리 말고 얼른 가라는 눈치였다.

“할 말이 그게 다야?”

속내를 알았으니 숨길 필요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묻자 유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마까지 주름이 졌다. ‘헛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수그렸다. 유리가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반대로 했다.

“나 없으면 외로울 텐데.”

“어.”

“응? 솔직히 털어놔도 되는데.”

“없어.”

“거짓말.”

아나스타샤가 턱에 입을 맞췄다. 유리는 현관을 힐끔거렸다. 오로라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캐리어를 들고는 나가버렸다. 유리는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누구 것인지 모를 입술이 벌어지며 혀가 넘나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를 쓰다듬다 그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하……. 유리가 한숨을 뱉으며 입을 뗐다.

“곧장 돌아와.”

“응, 눈도 안 마주칠게.”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유리는 믿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이탈리아인인데다가 알파였다. 뭐, 지금은 날 제일 좋아하는 것 같으니 평소보다 걱정은 덜했다. 유리가 뒤로 물러섰다. 엉덩이에 올라왔던 아나스타샤의 손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기념품 사 올게.”

“그래.”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숨 막히게 끌어안고는 현관을 나섰다. 유리는 일부러 쫓아가지 않았다. 그가 차를 타고 떠나는 걸 바라보면, 뉴욕까지 쫓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는 정오에 한 번, 오후 9시에 한 번 안부 전화를 했다. 받을 때도 있고 못 받을 때도 있는데 받으면 보통 5분 넘게 통화했고 못 받으면 사진과 함께 간단한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삶을 보고 받는 기분이라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서 연락이 오면 휴대전화를 붙잡은 채로 감정을 음미하고는 했다.

아나스타샤는 열흘을 뉴욕에 머물렀다. 유리는 그가 뉴욕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기에 귀가가 늦어져도 독촉하지 않았다. 대신 아나스타샤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밤마다 전화로 이렇게 만날 사람이 많은 줄은 몰랐다며 변명을 늘어놨다.

공주가 미처 예상 못 한 일을 유리는 예상했다. 약속보다 시간이 지체되리라 생각했다. 마이애미에는 아나스타샤를 순전히 호의로 도와줄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됐어. 영영 안 올 것도 아닌데. 그만 자지?”

유리는 보드카를 물처럼 홀짝이며 말했다. 9월이 되었는데도 밤은 후덥지근했다. 쩔쩔매던 아나스타샤가 기분이 상했는지 잠시 숨을 골랐다. 작은 숨소리까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유리는 내가 안 보고 싶어? 나는 유리가 보고 싶은데.]

“보고 싶으면 얼른 끝내고 오든지.”

어디에 쓰러졌는지 푹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침대든 소파든 휴대전화를 쥔 채로 쓰러진 아나스타샤가 상상됐다.

“적당히 몰아. 욕심부리면 양이 울타리를 넘어간다고.”

양을 모두 몰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면 우선순위를 둬야 했다. 평판을 목숨만큼 아끼는 아나스타샤가 그런 짓을 할 리는 만무했다. 이번 주도 뉴욕에 묶여있어야 할 것이다. 지하 감옥을 만들 걸 그랬나. 유리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술을 마셨다.

[알았어. 오늘 일찍 자야겠어. 내일 봐, 유리.]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끊었다. 뭐야. 유리는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를 보며 눈썹을 삐뚤게 치켜떴다. 끊긴 전화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 * *

9시가 넘었는데도 아나스타샤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유리는 5분 간격으로 휴대전화를 노려봤다. 9시 30분이 되어서야 아나스타샤에게 붙여놓은 꼬리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간 사귄 친구, 양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아나스타샤가 불현듯 마이애미행 티켓을 끊었다는 것이다.

“왜?”

유리가 물어도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벌써 비행기에 탔는지 연락이 되질 않았다. 덩그러니 남은 유리는 공주가 왜 급히 귀가하는지 오전 내내 생각했다. 그의 수발인 마야와 일리야가 대신 급한 일을 처리했다. 참 즐거운 직장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 온 유리를 부서지라 끌어안았다. 페로몬이 훅, 풍겼다. 소유를 주장하는 진득한 향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유리는 얌전히 안겨줬다. 열흘이나 떨어졌으니 어리광 정도는 받아줄 수 있었다.

“유리. 너무 보고 싶었어. 음, 내 파우스트.”

유리는 도통 그의 애칭이 뭘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파우스트를 애칭이라 생각해도 되는가.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어 유리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봤다. 보고 싶었던 눈과 코와 입이 오목조목 붙어있었다. 유리가 이제 가자고 잡아끌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다시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이러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공항에 있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벗겨 먹을 생각이니까 적당히 하고 가지?”

뭘 어떻게 한다고? 반가움으로 반짝였던 얼굴이 큰 상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유리만 비추던 눈에 목적과 욕망이 깃들었다. 이제 집까지는 쉽게 데려가겠어. 유리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한마디도 않는 공주님의 손을 붙잡고 걸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현관문을 닫으며 유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발이 엉키고 얼굴이 가까워졌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곧 입술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부드러운 비단 같은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나왔다. 유리는 입을 벌렸다. 숨과 온기가, 페로몬이. 아나스타샤는 아낌없이 자신을 유리에게 새겼다.

유리도 지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머리통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코가 살에 눌려 뭉개지고 고개가 기이하게 돌아갔다. 이를 세워 입술을 씹었다. 자극에 너덜너덜해진 입술은 찢어지지는 않아도 비릿한 맛을 냈다.

아나스타샤가 키스하다 말고 히죽 웃었다. 유리의 손에 뭉개졌는데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진작 돌아올 걸 그랬어.”

“……근시적인 일에 목맬 때가 아닐 텐데.”

현관 앞에서 똑같이 붙어먹었던 유리가 말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입을 맞출 정도로 아나스타샤가 좋았던가. 연애는 다 이런 건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나스타샤가 코를 비비며 얘기했다.

“어제 너와 통화하고 깨달았어. 다 가잘 수 없으면 우선순위를 정해야지.”

“그래서 돌아왔어?”

양 한 마리도 포기 안 할 줄 알았는데. 유리는 생각했다. 진작 우선순위를 정했다면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부르지 않는 이상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뉴욕에 가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아나스타샤가 목덜미에 코를 박고 체향을 들이마셨다. 귓바퀴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가장 중요하지. 양을 쫓다가 파우스트가 흥미를 잃고 돌아가면 어떡해?”

“……아까부터 파우스트 타령이야?”

“날 꼬드겨서 마이애미로 오게 했잖아.”

누가 누굴 꼬드겼다는 거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비유에 인상을 구겼다. 무리하지 말란 소리였지, 돌아오지 않으면 도망가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번듯한 회사가 마이애미에 있는데 어딜 도망간단 말인가? 콧잔등까지 찌그러졌다. 아나스타샤는 심기 불편한 숨소리를 들었어도 유리의 목덜미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알파끼리도 각인할 수 있는 거 알아? 오메가와 한 것처럼 평생 가지는 않지만…….”

알파끼리도 각인은 된다. 오메가와 달리 1, 2년이면 각인이 풀리겠지만 흉터는 남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밀었다. 아나스타샤는 접착력이 다 된 포스트잇처럼 툭 떨어졌다. 숨에서 페로몬이 느껴졌다. 유리가 말했다.

“나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 짓을 했다가는…….”

유리는 말을 아꼈다. 각인은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가족에게서 어떤 보복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아, 어떻게 라포포르트의 귀한 보석에 흉을 남기겠어. 네가 원한다면 내게 해도 좋아.”

“……헛소리할 거면 씻고 올라와.”

그럼 그렇지. 장난이다. 유리는 잠시나마 진심으로 아나스타샤의 안위를 걱정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두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나스타샤는 씻으러 가지 않고 유리를 쫓아왔다.

“나 뉴욕에서 씻고 왔어. 깨끗한데.”

“싫어.”

유리는 욕실 문을 열어줬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유리를 쳐다보며 신호를 보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막 겨울잠에서 깬 곰처럼 아나스타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싫어’는 말 그대로 ‘싫어’였다. 조금 살을 붙이자면 “더 하면 죽이겠다.”겠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언어를 완벽히 해석했다.

아나스타샤는 군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씻는 건 수의를 입는 일보다 쉬웠다. 이런 일로 유리와 다퉈서 기회를 날릴 순 없었다. 무려 유리가 먼저 벗겨 먹을 거니까 얼른 집에 가자고 조르지 않았던가. 아나스타샤는 꼼꼼히 몸을 닦고 수건만 두른 채 침실로 나왔다.

유리도 다른 욕실에서 씻었는지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석에 끌리듯 유리에게 쪼르르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뭐하러 입은 건지. 아나스타샤는 보들보들한 옷 위로 유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굴곡을 익혔다. 눈을 감고도 유리를 그릴 수 있도록. 시원한 보디샴푸 향은 유리가 풍기는 페로몬에 흩어져 더는 향을 맡을 수 없었다. 묵직하고 강압적인 알파의 향이 아나스타샤를 압도했다. 공주는 알파의 존재감을 체감할 때가 좋았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경계할 때 흐르는 긴장감은 어떤 마약보다 강렬했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아나스타샤는 샘처럼 고인 침을 삼키며 유리를 응시했다. 보석 같은 눈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투명한 회색 홍채에 잔뜩 고양된 아나스타샤 자신의 추한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아나스타샤는 그 안에 비친 자신을 향해, 그리고 유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악당보다는 악마가 어울려. 날 이렇게 유혹하는 걸 보면.”

“……누가 누굴 유혹해.”

아나스타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유리가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당겨 올렸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들리면서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감겼다.

“다 벗고 비빈 건 당신이야.”

“나야 늘 벗고 다니잖아. 벗겨 먹을 게 없어서 아쉽게 됐어.”

아니면 지금이라도 입을까? 아나스타샤가 허리에 두른 수건을 풀 것처럼 매듭을 붙잡았다. 유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턱을 짚은 채로 손을 침대 쪽으로 뻗었다. 손가락 위에 얼굴을 올리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손끝에 턱이 걸린 것처럼 손가락과 함께 휘둘려 침대에 나뒹굴었다.

“나 급해.”

유리가 상의를 벗으며 침대 위로 기어들어 왔다. 무릎 한쪽을 침대에 올린 채로 상체를 숙여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는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며 유리와 마법의 입맞춤을 나눴다. 입술끼리만 장난스레 문대며 페로몬을 음미하는 키스였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등을 짚었다. 손목을 그러쥐고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얇은 면바지가 판판하게 펴지며 속옷을 입지 않은 아랫도리가 적나라한 윤곽을 드러냈다. 입술을 뗀 아나스타샤는 아래 상황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급한 건 성격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바로 넣지 못할 텐데.”

급하게 올라와도 뒤를 풀어야 하니 엎드린 자세가 편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에도 유리는 비키지 않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바지 밴드 부분에 반쯤 가려진 문신이 아나스타샤의 눈에 들어왔다. 어른이 된 증표를 앞에 두고 어른의 유흥을 즐기려니 아랫도리가 빠듯했다.

“급하다고 했잖아.”

“유리, 닦달한다고 아래가 저절로 젖지는 않아.”

아나스타샤가 바지를 슬쩍 밑으로 내리며 달랬다. 아무리 급해도 적당한 여흥을 즐겨야 했다. 알파 남성은 일반 남성보다 2배로 손이 많이 갔다. 페로몬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고 뒷구멍도 오메가처럼 젖어 드는 건 아니었다.

바지를 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머리 색보다 짙고 굵은 음모로 뒤덮인 성기에 정신이 팔린 아나스타샤는 입맛을 다셨다. 벗기다 말고 넋을 놓고 성기를 쳐다보는 아나스타샤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리가 마저 바지를 벗었다.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손이 유리의 엉덩이 사이로 들어왔다.

항문 주름은 젖어있었다. 물기가 덜 말랐다고 생각한 아나스타샤는 주름을 더듬었다. 물이 끈적하게 손끝을 따라다녔다. 놀이동산에 간 아이처럼 마냥 밝던 아나스타샤의 안색이 차차 굳어갔다. 알파가 스스로 젖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 풀었다는 건데.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올려다봤다.

유리가 웃고 있었다. 뭔가를 보여줬다는 뿌듯함에 젖은 얼굴이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볼이 뜨거웠다. 그는 유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배꼽 위에 입을 맞췄다.

“……이래놓고 유혹이 아니라니. 유리, 네 안에 악마가 없는 게 확실해?”

“영혼은 아직 안 팔았거든.”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갑작스럽게 돌아온다기에 급히 준비한 것뿐이다. 열흘이나 못 봤으니 오자마자 이 짓을 하리라 생각했다. 알파는 사람에게도 흔적을 남겨 소유를 주장하고 싶어 하니까.

“안 돼. 이 이상 악마랑 계약하지 마.”

라포포르트의 알파가 스스로 뒤를 풀 줄은 꿈도 안 꿨는데. 깜짝 선물을 주면 기대하게 되잖아.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타이를지 고민했다. 유리가 손에 힘을 줬다. 아나스타샤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수그러졌다. 음모가 입에 닿았다. 아나스타샤는 완전히 발기해 목을 쳐대는 성기를 단숨에 삼켰다.

“하아…….”

성기를 삼킨 아나스타샤가 코를 음모에 비볐다. 목구멍을 열어 성기를 애무하는 모습이 능숙했다. 사람이 얼마나 닳아빠져야 헛구역질 없이 좆을 삼킬까?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움직였다. 선단이 좁은 목구멍과 입안에 번갈아 담가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나스타샤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와 유리가 풀어놓은 뒷구멍을 만져댔다.

“읏…… 이런 짓 안 해도 되니까 얼른…….”

유리는 말을 흐렸다. 머리를 눌러 빨라고 종용하기는 했지만, 뒤까지 만져달라는 건 아니었다. 전희를 즐기기보다는 아나스타샤에게 내가 네 것이라고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유리는 그를 내려다봤다. 반듯한 코가 음모에 쓸려 빨갰다. 성기를 반쯤 뱉어내 숨을 돌리더니 다시 성기를 입에 담았다.

뒤를 매만지던 손가락도 주름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에 고여있던 젤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사정할 때까지 좆을 물고 안 놔줄 것 같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열기에 들뜬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드디어 성기를 놓아준 아나스타샤가 따지듯 말했다.

“영혼은 안 팔았다면서.”

꼭 내가 아는 유리가 이럴 리 없는데, 의심하는 말투였다. 자존심 상한 유리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뒤 혼자 푼 게 영혼을 팔 일이야? 나도…… 나도 빨리하고 싶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나, 이런 얘기를 굳이 발가벗고 해야 하나…….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한 전초전에서 모아둔 집중력을 써버린 유리는 어깨를 떨궜다. 힘이 빠진 유리를 아나스타샤가 침대에 눕혔다.

“온몸으로 난 네 거야, 하고 있잖아. 무섭단 말이야. 라포포르트의 막내 도련님을 함부로 가져도 되는 건지…….”

아나스타샤가 위에 올라탔다. 상황이 반전됐다. 허리에 걸쳤던 수건이 맥없이 풀렸다. 아나스타샤의 발기한 살덩이가 드러났다. 짝짓기에 용이하게 생겼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아나스타샤가 성기를 유리의 안쪽 허벅살에 문질렀다.

“저주 인형을 냉큼 받는 게 아닌가 싶어. 날 지하 감옥에 가둔댔잖아.”

아나스타샤는 고뇌에 빠진 듯 중얼거리며 유리를 내려다봤다. 유리가 달래줄 걱정이 아니었다. 맞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내 거다. 영원히 가둬놓고 내 아나스타샤로 기를 것이다. 그는 위로와 감언이설 대신 스스로 무릎 뒤를 잡았다.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알파 남성이라는 객체를 떠나서, 유리는 라포포르트 가문의 자존심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도련님께 남자를 알려주는 것. 아나스타샤는 어떤 후폭풍이 닥쳐온다 해도 유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악마를 따라 지옥 불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면 들어가야지. 유혹에 사로잡힌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덮치듯 몸을 가까이 맞댔다. 늑골이 으스러지라 끌어안고 성기를 회음부와 항문에 문질렀다. 무릎을 잡은 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과 배, 성기까지 완전히 밀착되었다.

가랑이를 넓게 벌리고 다른 사내를 받을 준비를 마친 유리는 기대감에 들떴다. 성기가 구멍 위를 뭉근하게 누를 때면, 입에서 실 같은 신음이 나왔다. 언제 넣을 거야? 언제…… 언제 날 즐겁게 해줄 거냐고. 안달 났다.

“헛짓거리할래?”

‘얼른’ 같은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비슷한 협박을 뱉었다. 유리의 으름장에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나스타샤는 마운팅을 그만두고 성기를 손으로 받쳐 구멍 끝에 맞췄다. 뭉뚝한 귀두가 닿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유리.”

어쨌거나 원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니 된 것 아닌가. 유리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선단이 안으로 들어온다. 때에 맞춰 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풀어진 뒷구멍과 이완된 몸 덕분에 성기는 무리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얌전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유리를 보며 감동하고 말았다. 무릎 뒤를 잡은 손은 여전히 핏줄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느리게 들썩이는 흉부와 쉴새 없이 꿀렁이는 목울대, 배부른 고양이처럼 가늘어진 눈매까지, 유리가 지금 상황을 즐긴다고 말해줬다.

“유리, 너무 사랑스러워.”

“……넣다 말고 뭔 소리야.”

헛소리 말고 집중해. 금방이라도 골골거릴 것 같던 표정이 찌그러졌다. 유리는 혀를 찼다. 아나스타샤가 키스를 퍼부었다. 무릎을 잡은 손이 풀어지며 아나스타샤의 맨 등을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는 포세이돈의 현신이었다. 닿는 곳마다 황홀한 촉감을 선사했다.

거칠게 혀를 얽었다. 숨 쉴 틈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앞으로 밀어붙이자, 허공에 뜬 유리의 다리가 골반을 감쌌다. 뒤꿈치가 엉치뼈 부근에 닿았다. 아나스타샤도 등 아래로 손을 넣었다. 서로를 완전히 포박한 채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이 코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성운 같은 홍채의 모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유리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눈동자를 구경했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서 뭘 보고 있을까. 시선이 저절로 입술로 향했다. 아나스타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빠르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숨 막히게 키스했으면서도 질리지도 않고 입술을 비볐다. 안에 들어찬 성기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새 또 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세워 앉았다. 밀착되었던 밑부분에 빈틈이 생겼다. 자연스레 성기도 살짝 빠져나갔다.

가슴이 불편할 정도로 긴장됐다.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볼에 문댔다. 헉, 허. 숨 쉴 틈이 생김과 동시에 성기가 내벽 깊숙이 들어왔다.

“흣…… 윽, 아……!”

눈앞이 환해졌다가 까매졌다. 아나스타샤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살끼리 쳐대는 소리가 연신 울려댔다. 안쪽에 박을 때마다 전립선을 지나는지 아랫배부터 시작해 발끝, 코끝까지 전율이 퍼졌다.

“윽, 아읏…….”

유리는 안간힘을 다해 아나스타샤에게 매달렸다. 손톱을 세워 등을 긁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다. 어깨에 이마를 대고,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자기 성기와 간혹 뿌리를 보여주는 아나스타샤의 것과 음모를 바라봤다.

음모가 고환 가까이에 붙으면 발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좋았다. 아나스타샤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졌다. 유리는 신음도 흘릴 수 없었다. 억눌린 숨소리에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췄다. 앙다문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 으읏. 으응. 몰아붙이는 대로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유리는 등을 사정없이 긁으며 쾌감을 분산시켰다.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바짝 붙이고 무릎을 들었다. 유리의 엉덩이가 허공에 떠서는 그의 성기를 받치는 꼴이 됐다.

“아……!”

머릿속에서 번개가 산발적으로 내리친다. 유리는 허리를 떨었다. 눈꺼풀에 열이 올랐다. 웃기게도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유리의 성기는 허연 정액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괴롭힘당한 내벽에 열이 올라서 공주가 얼마나 싸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을 가득 채운 성기가 여유롭게 느껴졌다. 유리는 그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아나스타샤는 사정 직후의 여운을 느끼는 듯, 유리의 가슴과 목, 배에 차례대로 입을 맞춘 뒤에야 성기를 빼냈다.

“하……. 씻을까?”

그는 상쾌한 얼굴로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침대 옆을 손으로 두드렸다. 아나스타샤가 냉큼 옆에 누워 목 뒤에 팔을 넣어줬다. 방금까지 자신을 끌어안았던 팔은 땀으로 축축했다. 유리는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볼을 댔다. 아나스타샤가 젖은 머리칼에 입을 맞춰줬다.

“잘 거야? 안 씻으면 찝찝할 텐데.”

“분위기 깨기 싫어.”

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하는 소리겠지……? 아나스타샤는 말을 아꼈다. 다시 아랫배에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으나 신호를 무시하고 유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응…….”

아나스타샤는 눈이 감긴 유리의 얼굴을 감상하며 아이를 재우듯 머리를 다독였다.

“너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거든. 사실, 악마한테 영혼을 팔뻔한 건 내가 아닐까?”

공주가 못했던 말을 구구절절 늘어놨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어 유리를 훑었다. 흉부가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유리, 자는 거야?”

섹스 처음 해보는 애도 아니고 끝나자마자 잠들면 어떡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나무랐다.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요 귀여운 파우스트를 어쩌면 좋아. 아나스타샤는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눈을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아침인데도 열렬했다. 침대에서 나오기 전에 옆에 곤히 잠든 유리를 감상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은 단잠에 빠진 천사처럼 보였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으나, 몸을 살짝만 기울여도 깨어날 것을 알기에 아나스타샤는 군데군데 눈도장을 찍었다.

도망치듯 뉴욕에서 내려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마이애미 생활은 즐거웠다. 추수감사절에도 유리를 핑계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유리도 마찬가지인지 마이애미에 머물렀다. 아나스타샤는 간단히 아침을 차리고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집안을 채웠는데도 유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냐 씨.”

마야가 주방으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갔다. 아나스타샤는 잔에 에스프레소를 따르며 눈인사했다.

“유리는 아직 안 일어났는데, 카페라도 한잔할래요?”

“아뇨……. 다른 일 때문에요. 보스도 깨우는 게 좋겠어요.”

마야가 커피를 거절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잔 밑을 밀었다. 마야는 하는 수 없이 선 채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설탕도 안 넣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마야는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돌렸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길 기다렸다.

“오시프가 올 거예요.”

“오시프가요? 갑자기?”

“네, 보스가 가족 행사에 빠졌으니까요.”

매년 9월 첫 번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소소한 가족 모임이었다. 열 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다른 날은 몰라도 부모님의 생신, 결혼기념일과 9월 모임은 꼭 전원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바다 건너에 지내는 유리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부모님은 유리가 참석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지만, 오시프는 달랐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꿈뻑였다. 아직 오시프가 온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마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곧 올 거예요. 그러니 얼른 보스를 깨워야…….”

띵동. 때마침 초인종이 울었다. 둘의 시선이 현관에 쏠렸다. 망했다. 마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야 나름대로 ‘보스의 봄날’을 지키기 위해 몇 가지 대책을 세웠는데, 대책마다 보스가 필요했다. 아나스타샤 혼자 오시프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주방을 나섰다. 마야는 그의 등을 애잔하게 쳐다봤다. 둘 사이에 끼어봤자 좋은 꼴 못 보지. 마야는 주방 뒷문에 몸을 숨겼다.

마야는 유리의 명령으로 아나스타샤를 쫓아다닌 경력이 긴 만큼 그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유리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오시프가 그를 올려다봤다.

“오시프 씨!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반가워요. 들어오세요.”

오시프는 환대를 받으며 자신의 집에 발을 들였다. 늘 따라다니던 두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오시프가 재킷을 벗으며 집을 둘러봤다. 가구며 장식이며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시선은 아나스타샤에게 멈췄다. 방금 일어난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멋쩍어하며 팔을 쓸었다.

“쥐가 말을 제대로 못 전했나 봐?”

“하하, 쥐가 알려줬더라면 치장이라도 했을 텐데요. 이런 모습을 보이네요.”

아나스타샤는 얼굴까지 붉히며 민망해했다. 흠. 한심하다는 듯 숨을 뱉은 오시프가 찬찬히 그를 훑었다. 아나스타샤는 개의치 않고 그를 응접실 겸 거실로 안내했다. 아나스타샤를 종처럼 부린 오시프가 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리는?”

“아직 자고 있어요. 깨울까요?”

“아니, 됐어. 곧 일어나겠지.”

유리가 늦게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오시프는 좋았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 장식해둔 쿠션이 들썩였다. 커피를 가지고 다시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그를 살폈다. 가족 행사에 빠진 막내를 혼내러 온 형치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아나스타샤가 산뜻하게 꾸며둔 거실에 시가 향이 퍼졌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의 반대편에 앉았다. 왜 왔는지 새와 쥐도 아는 상황이었으나, 아나스타샤는 한 번 더 확인했다.

“오신 이유라도?”

“이유가 있겠어. 유라가 가족 모임에 몇 번이나 빠졌으니 걱정돼서 가족 대표로 왔지. 9월 모임에는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결혼기념일에도 오지 않으면 그땐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경고도 할 겸.”

그는 하얀 연기를 덩어리로 뱉으며 얘기했다. 어쩐지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가족을 어떻게 챙기는지 몰랐기에 오시프의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모임이었으면 갔어야지. 못가거든 통화라도 했어야지. 아니면, 통화를 했는데 오시프가 멋대로 들이닥친 걸지도. 아나스타샤는 여러 가설을 세웠다. 뭐가 됐든 오시프가 마이애미에 왔다는 사실을 변치 않았다.

“재미있나?”

“예?”

“내 동생이랑 말이야.”

기분 좋아 보이던 모습이 알코올처럼 증발했다. 빙하 결정 같은 새파란 눈이 아나스타샤를 관통했다. 말머리 앞에 ‘감히’가 생략된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그럼요. 남부는 처음이거든요. 마이애미는 9월 말이 돼도 따뜻해요. 아직도 서핑을 즐길 수 있죠. 요트도 말이에요. 곧 핼러윈이라고 군데군데 꾸며둔 걸 보면 재미있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오시프도 웃었다. 웃음이 넘쳐나는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연유로 마이애미에 왔는지 아나스타샤는 알 수 있었다. 몸짓, 눈빛이 말하는 바는 “재미 봤으면 이제 꺼지라.”였다. 아나스타샤는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오시프의 형제애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베이징에는 언제 간다고?”

“내년에는 가야죠.”

“그거 다행이군. 아무리 불장난이라지만 제대로 된 직업도 없는 한량이랑 지내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

하하,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화풀이하러 온 사람에게 대들어 봤자 더 큰 화를 받아내야 할 뿐이다. 그는 유리가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은 언제나 아나스타샤의 편이었기에 아나스타샤가 압박감에 숨 막혀 쓰러지기 직전에 유리가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고요한 집안에 기시감을 느껴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내려왔다. 머리는 산발에 잠옷도 상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시프의 입술이 빳빳하게 펴졌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유리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오시프는 손가락 사이에 시가를 끼운 채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내 집 오는 데 문제가 되나? 일리야한테 말해뒀는데 못 들었나 보지?”

“하! 웃기지 마! 일리야가 아무리 형이 풀어놓은 끄나풀이라 해도 귀띔 안 했을 리 없어.”

흠. 오시프가 웃었다. 어딘가 만족하는 숨이었다. 불쌍한 아나스타샤는 형제 싸움에 끼어 눈동자만 굴리며 화자를 힐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유리는 보란 듯이 아나스타샤 옆자리에 앉았다. 형이 끼어들어 봤자,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고 온몸으로 소리쳤다.

오시프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그는 아나스타샤가 가져온 커피에 재를 털었다. 하얗게 탄 재가 설탕처럼 커피 위를 배회하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가 연기가 짙어졌다.

“아버지가 선을 보는 건 어떠냐고 하시던데.”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유리가 대답했다. 9월 모임에 안 나타났다고 잔소리할 줄 알았더니 뜬금없는 선 자리 이야기를 꺼냈다. 덧붙이자면, 라포포르트의 열 명이나 되는 자식 중 기혼에 자식을 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는 늘 다들 멀끔한데 왜 결혼을 못 할까 걱정하셨다. 유리는 그 이유를 안다. 아마, 부모님도 알고 계시리라. 유리는 오시프를 노려봤다.

“상관있지. 네 선 자린데.”

“뭐?”

가뭄이라도 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유리의 표정이 단숨에 펴졌다. 회색 홍채의 동그란 모습이 보였다. 오시프는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벌어진 입에서 흰 연기가 김처럼 흘렀다.

“큰형도 결혼을 안 했는데, 내가 미쳤어?”

“하하, 빨리 갈 수도 있지. 수잔이 앵거헤드 손녀 얘기를 꺼냈다던데, 어때? 미국인이니까 마이애미에도 더 머물 수 있어.”

“됐어. 나는 지금 연애 중이야.”

“늦어도 연말에는 약속을 잡았으면 좋겠는데. 볼쟈도 참 괜찮은 오메가를 알고 있다니까…….”

“내 말 안 들려? 됐다고!”

유리가 고함쳤다. 애먼 아나스타샤만 화들짝 놀랐다. 오시프는 말귀를 못 알아들은 짐승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왜? 선본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 나를 봐. 그렇게 선을 봐 놓고 자식새끼 하나…… 없는 걸 보면, 불구일지도 모르지.”

오시프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호소했다. 유리에겐 통하지 않았다. 선은 곧 혼사였다. 오시프야 위에서 압박할 입이 부모님밖에 없으니 제멋대로 굴었다지만, 유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선 자리에 나간다면 “어때?”라는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방해하지 마. 지금은 아나스타샤와 있을 거니까.”

“유라, 아나스타샤와 지낸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야. 설마…… 키사, 평생 아나스타샤와 지낼 생각이었어?”

마치 지금 깨달았다는 것처럼 오시프가 눈을 삐뚜름하게 뜨며 느릿느릿한 어투로 물었다.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몰라’와 ‘아마’로 못 해도 반년은 모르는 척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반년은 무슨, 두 달도 못 갔다.

“못 할 것도 없지.”

“하하. 유리. 귀여운 손주를 아버지께 안겨주기 전까지는 안 될 거다.”

오시프가 비아냥거렸다. 알파와 알파가 영원을 약속하다니. 우스운 고백이었다. 유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봤다. 막내 도련님의 표정이 비틀어졌다. 종마처럼 제 미래를 쥐고 휘두르는 형제의 콧대를 짓밟다 못해 으스러트릴 기회를 찾은 것이다!

“용건은 그게 다야? 다 했으면 얼른 가. 선보라는 얘기하나 하려고 온 거야?”

“그래, 가야지. 방해받기 싫다는데.”

오시프는 남은 시가를 커피잔에 담가버리고 재킷을 걸쳤다. 아나스타샤는 커피잔을 짠하게 바라봤다. 어쩐지 저 커피잔이 지금 제 처지처럼 느껴졌다. 라포포르트의 차남은 태풍처럼 들이닥쳐선 안개처럼 사라졌다.

오붓했던 2층 주택이 순식간에 풍비박산 났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를 배웅한 뒤, 벽에 몸을 기댔다. 돌풍에 날아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버틴 기분이었다. 방금 일어났는데 자고 싶었다. 오시프와 대면에 진이 빠진 건 아나스타샤뿐이었다. 유리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현관문을 닫았다. 보석처럼 투명한 회색 눈동자에 음기가 가득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눈이 오시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피는 못 속이는구나. 순수한 감탄이었다. 유리는 반쯤 널브러진 아나스타샤를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갔다. 공주는 얌전히 악당에게 이끌려 침대에 눕혀졌다.

“선은 봐야겠네?”

아나스타샤가 누운 채로 물었다. 침대맡에 등을 돌리고 섰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매섭게 노려봤다. 말 다 했냐고 따지는 듯했다. 형이고 동생이고 쉬운 쪽이 없다. 그는 일어나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집안에서 보라면 봐야지. 별로였다고 하면 되잖아.”

“그게 될 것 같아? 할머니랑 아버지가 주선하는 자리야. 둘 중 하나는 골라야 할 거라고.”

오……. 아나스타샤는 바닥을 바라봤다. 아나스타샤가 살아온 방식과 너무나 다른 가족이었다. 뜻을 거스를 수 없다니 순응해야지. 아나스타샤는 그를 용서하고 속죄를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를 사랑하는 집요한 악당은 끝낼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손에 넣은 아나스타샤인데 이렇게 포기한단 말인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위에 앉았다. 그를 다리 사이에 가두고 손 옆을 짚었다.

“애를 가지면 돼.”

유리의 말을 곱씹던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볼이 빨개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유리는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입을 앙다문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봤다. 확실한 방법은 임신뿐이었다. 첫 손주를 부모님이 본다면 상대가 알파든 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태어난 애를 부모 없이 키우라고 할 만큼 매정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임신하는 사람도 유리 본인이니 오시프가 쉽사리 훼방 놓지 못하리라!

완벽했다. 다만 ‘임신’이 얼마 만에 이뤄지냐는 것이다. 유리가 추궁했다. 알파끼리 섹스했을 때 임신할 확률이 얼마나 되지?

“러트가 언제야?”

“뭐? 유, 유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잠깐만. 애를 낳겠다고? 나랑?”

알파잖아. 알파도 아이를 낳을 순 있긴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말을 더듬었다. 유리는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미 마음이 섰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이를 만들어도 괜찮았다.

“그래.”

“아니, 아니지. 유리! ‘그래’가 아니지! 네가 한 말 기억 안 나? 파워볼이 더 확률이 높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싫다는 거야?”

“유리. 애를 가지면 네가 갖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침착하게 얘기했다. 알파끼리 연애를 어떻게 하냐며 경멸하던 인간이 선보기가 싫어서 임신을 대안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그래.”

싫은 건 안 해. 짧은 대답 뒤로 마음이 읽혔다. 아나스타샤는 침을 삼켰다.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임신이라니. 애라니! 생각도 안 해본 단어가 속을 들쑤시고, 평탄하게 그렸던 미래도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나스타샤가 생각한 노후에는 삶의 동반자도, 자신을 닮은 귀여운 아이도 없는데 어느새 유리와 유리를 닮은 아이가 자리를 만들고 앉아있었다.

“갑작스러운데. 유리, 선본다고 반드시 결혼하라는 법은 없어. 그리고 겨울까지 아직 시간 있잖아. 내년이면 나도 베이징에 가 있을 거고.”

“내가 선봤으면 좋겠다는 거야?”

“물론 아니지. 그렇다고 널 임…… 신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아나스타샤의 고백에 유리는 험상궂은 표정을 했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목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 아래로 맥박이 느껴졌다.

“난…… 좋은 아빠는 못 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목을 비틀어버리기 전에 덧붙였다. ‘아빠’ 소리에 유리의 눈썹이 이마를 찌르고 올라갔다. 기회였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좋은 아버지가 되겠어? 문란하고 사람 관계도 복잡하잖아. 거기다,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아이가 성인이 돼서도 지독한 범죄에 노출될 거라고.”

그가 말할 때마다 유리의 손이 진동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까지 느껴졌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손아귀에 있었다. 실토하자면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걱정거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파가 문란해서 감점되는 경우는 없었다. 기능을 다 한다는 지표였다.

“그런 점이 좋은 거야.”

귀엽게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키울 걱정을 하고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좋은 아버지’가 무엇인지 고뇌해야 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잡아 허리를 붙잡게 했다.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는 허리에 올려준 손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시도도 안 하겠다? 파워볼 확률보다 높다고 했잖아.”

“생길까 봐 무서운 거야. 유리, 그땐 돌이킬 수 없어.”

아나스타샤의 경고에도 유리는 듣는 둥 마는 둥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완전히 기댔다. 가슴끼리 맞붙었다. 흉부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리가 속삭였다.

“아나스타샤.”

“못 해.”

“하고 싶어.”

“안 돼.”

말로는 구슬릴 수가 없었다. 유리는 생각했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강렬한 향의 페로몬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유리는 몸을 비틀었다. 아나스타샤의 흔적을 맡으니 침이 고이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유, 유리.”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다. 유리는 타고난 천성으로 아나스타샤를 유혹했다. 숨이 가빠졌다.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을 맞춰왔다. 동시에 옷 안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하아, 읍……. 누구의 숨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유리의 가랑이에 사타구니를 문대면서 “안 되는데.”를 읊었다. 안 될 리가 있나. 유리가 허리를 흔들어 아나스타샤의 주의를 끌었다.

“네가 좋아.”

고백은 술책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말이 꾀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날 좋아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게 뭐가 나쁘지? 파워볼보다는 확률이 높지만, 오메가나 일반 여성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확률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넘쳤다.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기분이었다. 여태 문제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으리라.

* * *

악당의 손에 넘어간 공주는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오시프가 다녀간 뒤로 유리는 공격적이었다. 아니, 그건 공격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유리! 그만, 그만! 어제 그렇게 해놓고 또 해? 어제만 그런 게 아니야. 그제도 했잖아. 그 전날도! 오시프가 다녀간 뒤로 매일 했어!”

아나스타샤는 뒷걸음질 쳤다. 처음으로 총을 안 찬 유리가 무서웠다. 유리는 덤덤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거 가지고 안 돼.”

“뭐, 뭐가 안 돼. 유리, 나 좀 살려줘. 힘들다고.”

사실 죽을 것처럼 힘들지 않았다. 유리와 마음만 맞는다면 매일 해도 좋았다. 마음이 맞을 때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종마처럼 씨를 싸질러야 했다. 유희가 없는 관계는 사절이었다.

“낮에 자면 되잖아.”

“낮에는 나도 일해야지!”

“그래서, 발정기는 언젠데?”

발, 발정기라니! 아나스타샤는 말문이 막혔다. 목부터 열기가 올라왔다. 머뭇거리는 사이 유리가 손목을 붙잡았다. 도망쳐봤자 유리 손바닥 안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췄다. 손목을 잡았던 손이 바지를 벗겨냈다.

아나스타샤가 펄쩍 뛰며 유리를 떨쳐냈다. 둘 사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 며칠을 어지럽게 엉켰던 페로몬이 분리되는 듯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아나스타샤는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 내 몸만 보고 사귀는 거야?”

“뭐?”

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나스타샤도 같은 심정이었다. 무슨 말이야. 몸을 노리는 쪽이라면 나겠지! 몸만 노렸으면 날 스토킹했겠냐고! 슬프게도 의지와 상관없이 주둥이가 나불거렸다. 종마로 전락한 울분이었다.

“네 형은 변명인 거지? 씨가 탐나는 거잖아. 배에 품고 나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

눈썹이 찌그러졌다. 아나스타샤는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휘두를 것 같은 유리의 험악한 인상을 보고 후회했다. 상처받을 텐데. 걱정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후련했다. ‘유리’와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지 ‘라포포르트’의 종마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참 호흡만 고르던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벙긋거리다 차근차근 유리를 설득하려 했다. 오시프가 다녀간 뒤로 유리는 잠자리에 집착했다. 집착은 강요로 이어졌고, 곧 잠자리는 의무가 됐다. 시간이 없으면 대낮 사무실에서 서서라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너와 잠자리를 갖는 게 재미가 없어.”

“안 돼.”

유리가 다시 다가왔다. 지금 유리에게는 아나스타샤의 기호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오시프가 바라는 대로 선을 보고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해서 아나스타샤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칼 갈 바에야 몇 달 고생하는 게 나았다.

유리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가 팔을 뿌리쳤다.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하고픈 말은 하나였다. 그러나 눈빛으로 서로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둘의 관계가 마저 흐르지 못하고 욕조에 고인 물만큼 얕았다.

긴장감이 둘을 휘감았다. 서로를 유혹하던 페로몬이 이제는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 했다. 아나스타샤는 싸우기 싫었다. 상처 주기는 더더욱 싫었다. 유리가 어깨를 잡을 것처럼 팔을 올렸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옆으로 비켜섰다. 상처가 생겨야 끝나는 다툼이었다.

“난 종마가 아니야.”

“뭐?”

“나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

유리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을 것 같은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내년 겨울도 함께하려면 애가 먼저 있어야 해.”

“선 때문에 그래? 그건 가볍게 나갔다 와도 돼, 유리.”

“아니! 제길. 당해놓고도 모르겠어? 오시프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유리가 화를 내며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나스타샤의 몸이 유리 쪽으로 틀어졌다. 형제가 무서워서 애부터 갖는단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거북했다. 연애와 결혼은 다른 선상에 있었다. 라포포르트가 임신했는데 상대를 가만둘 리 없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이는 얕았고 갈등은 깊어졌다. 사랑으로 덮기에는 턱도 없는 굴곡이었다. 유리의 속을 이해 못 한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아무리 형이 무서워도…… 유리, 생명은 생기면 돌이킬 수 없어.”

유리는 침묵했다.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아나스타샤가 추궁하듯 말을 붙이자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분노가 가슴을 짓눌렀다. 이해하고 싶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망상만 키우는 것이다. 유리는 나와 얘기할 마음이 없구나. 아나스타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이상의 추궁은 원하는 대답을 끄집어내려는 종용이었다. 그는 창밖을 쳐다봤다. 마이애미의 오후는 화창했다.

“레오파드는 널 끔찍이도 싫어해.”

얘기는 제자리였다. 그러니까 네 형이 날 싫어하는데 왜 네가 임신 얘기를 꺼내냔 말이야. 설마, 오시프가 손주 어쩌구 하고 놀린 것 때문에? 그건 비아냥이지 진심으로 한 얘기는 아니리라. 그런데…… 괜찮은 방법처럼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라포포르트를 이해해야만 했다.

한 국가의 대들보인 라포포르트 집안은 부모의 말이 절대적이기는 했으나 오시프가 패권을 쥐고 있었다. 유리의 집안 사정은 아나스타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리는 심통 난 얼굴로 아나스타샤의 손을 슬쩍 붙잡았다. 귀여운 손짓에도 아나스타샤는 지금 유리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뉴욕에 다녀와야겠어.”

이제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잡은 손을 빼냈다. 손이 가벼워졌다.

“형도 곧 출산이야. 수술하기 전에 가 봐야지.”

유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사내가 아니었다. 지금 보내버리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유리는 잡지 못했다. 잡고 나서 어떤 말로 구슬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돌아봤다.

“그럼, 안녕.”

아나스타샤가 도망쳤다. 유리는 내버려 뒀다. 간단히 짐을 챙겨 떠나는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유리는 홀로 남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샤의 사지가 멀쩡하니 됐다. 애초에 가까이 지낼 생각도 없었는데 일이 꼬이고 꼬여 소꿉놀이까지 한 것이다. 유리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피를 흘린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 * *

라이엇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후후 불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서 고요해야 할 저택에 훌쩍이는 울음이 터졌다. 라이엇은 개의치 않고 코코아를 맛봤다. 쓴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었다. 내일 다비드 씨께 갈 때 챙겨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훌쩍. 울음이 더 커졌다. 라이엇은 그제야 부부 침대 위에 머리를 처박고 우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낮 비행기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택에 올 줄 알았다. 아나스타샤가 가꾸던 목장은 본인과 다비드 씨가 관리하도록 반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에 뉴욕에 올 일이 없었다.

연락도 없이 급히 돌아오는 이유는 한눈에 반해서 마이애미까지 따라갔던 연하와 일이 잘 안 풀렸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라이엇의 감이 말해줬다.

그는 느긋하게 코코아를 마셨다. 한참 이불을 눈물로 적시던 아나스타샤가 턱을 들었다. 라이엇에겐 뒷모습만 보였다.

“종마라고 했어.”

사건을 짐작할 수 없는 문장으로 한탄이 시작됐다. 라이엇은 잔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아나스타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종마냐고 했어! 왜 그랬을까. 기분 나쁠 텐데. 그렇지만…… 라이언, 유리도 심했어.”

“무슨 일인데?”

“심각한 일이야! 유리, 유리가.”

아나스타샤가 뒤를 획 돌아보며 소리쳤다. 라이엇은 순진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아나스타샤는 말을 골랐다. 사실을 고해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도와주지.”

“……유리가 애를 갖고 싶대. 이반 씨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 알겠지? 라포포르트가 알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이번에는 진짜 시체로 뜰 거야. 아나스타샤는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임신이라니. 라포포르트는 오메가가 없는데. 라이엇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문득 유리 라포포르트에 관한 소문이 떠올랐다. 발현 전 포궁 크기가 평균 이상이라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던 막내아들. 평균보다 컸다면, 흔적기관으로 남지 않고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힘들 텐데. 라이엇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기분 내면서 어울려주지 그랬어.”

“어울려줬지. 처음은 말이야. 나는…… 내가 섹스하면서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경험을 했어.”

목소리가 공포에 질렸다. 라이엇은 숨죽여 웃었다. 애인의 정력을 못 견디고 도망쳤다는 소리 아닌가. 남의 일이라 그런지 흥미진진하게 들렸다.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쉬었다가 하면 되잖아.”

“못 쉬게 하니까 그렇지! 내가 아니라 내 자지만 원하는 것 같았어.”

“다들 네 자지만 원했어.”

라이엇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내밀었다. 억울하고 화도 나는데 무엇 때문에 억울하고 화가 나는지 모르는 듯했다. 라이엇은 미소 지었다. 속이 뒤틀린 아나스타샤가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는 유리랑 대화하고 싶단 말이야! 젠장! 섹스하고 휙 가버린다고. 종마와 다를 게 없잖아!”

“이런, 아냐. 속상하겠네.”

아나스타샤는 다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훌쩍임은 없었는데 우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엇이 다가가 침대맡에 앉았다. 자빠진 모습이 옛날과 겹쳐 보였다. 그때는 아나스타샤가 침대에 앉아있고, 내가 침대에 엎드렸는데. 그는 얕은 향수에 젖었다.

“못되게 굴어서 벌 받나 봐…….”

유리랑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정말 정착까지 생각했다. 한, 5년 정도 말이다. 지금은 가족이라는 새로운 울타리를 두를 자신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넘쳐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다양했다.

“아냐, 이게 벌이라면 달게 받아야지. 네가 울린 알파들의 눈물을 모으면 해수면이 높아졌을 거야.”

“위로하는 거 맞아?”

아나스타샤가 라이엇을 노려봤다. 라이엇은 웃었다.

“아니, 놀리는 건데. 하하, 천하의 아나스타샤가 남자 때문에 울다니. 다비드 씨도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형은 어디에 두고 너만 집에 있어?”

라이엇은 씁쓸한 얼굴로 코코아를 응시했다. 얘기하자면 길고 우스운 이야기였다.

“……귀찮다고 병원에 입원했어.”

“얼마나 귀찮게 했으면 형이 아기 사자를 두고 가버려?”

“그러면 너는 얼마나 잠자리가 별로였으면 도련님이 매일 하자고 닦달해?”

안부와 걱정은 싸움의 불씨가 됐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아나스타샤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라이엇이 백기를 들었다. 출산을 앞둔 부부 사이도 심란하지만, 연애 때만큼 관계가 불안전하진 않다. 어른스러운 쪽이 포기해야지. 라이엇은 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도와줬으니, 이번엔 내가 도울 차례네.”

“내가 다 떠먹여서 겨우 결혼했으면서 누굴 도와준대? 그땐 상대가 내 형이었으니까 가능한 거지.”

“라포포르트는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잘 알걸?”

같이 일했으니까. 라이엇이 덧붙였다. 먹구름이 잔뜩 낀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빛이 번졌다. 주위에 라포포르트를 잘 아는 인물이 있었어! 그들을 알게 되면 유리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세웠다.

“알려줘.”

“라포포르트에게 유리는 사랑스러운 막둥이지. 어찌나 사랑받는지, 이반도 자주 자랑했어. 나는 다 큰 동생 사진 갖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다고.”

가족이 유리를 끔찍이 예뻐하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오시프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잘 알았다. 동생이 알파와 연애한다는데 당연히 싫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알파 연쇄살인 사건이라며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사람을 매수해 자신을 쫓게 만들겠는가. 하마터면 아끼는 막내까지 허드슨강에 수장시킬뻔했다.

“오시프도 마찬가지로 유리를 아꼈어. 아니, 더 유별났지. 그 사이에 네가 껴버린 거야. 너 때문에 어릴 때도 자주 싸웠다던데.”

“내 생일 파티 때 처음 봤는데…….”

“그래. 알파로 발현하고도…… 널 좋아했어. 유리가 여태 좋아하면서 오시프에게 뺏기지 않은 건 너뿐일 거야.”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섯 번째 표적으로 지목된 뒤로도 한참 지나서야 유리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오랜 세월 알파인 동생이 알파를 몰래 쫓아다니는 꼴이 거슬려 형제가 맘껏 놀아보라며 딱 한 번 눈 감아 준 것이다. 형의 알량한 인심이 베푼 기회를 평생 붙잡을 생각이었을까.

그런데 평생 붙잡는 방법이 왜 임신이란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쓸었다. 유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상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반강제로 유리와 삶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파니까…… 물론, 알파도 임신할 수는 있기는 해도 가능성이 현저히 낮잖아. 그래서 결혼에서 자유로울 줄 알았어. 혼전임신이라니, 생각도 못 했다고. 적당히…… 적당히 어울려주면 포기할 것 같아서 안일하게 행동한 잘못이야.”

아나스타샤는 후회했다. 날 좋아하는 유리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리지 못했다. 9년간 한결같던 진심이었다. 유리의 저돌적인 애정 공세는 아나스타샤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는 연애하며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얘기를 나눴어야 했어. 피할 일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좋았다. 초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같은 남자였다. 땅에 단단히 박힌 만큼 변하지 않을 사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유리를 설득해 봐.”

“유리는 겨울에 선을 볼 거야. 부모님이 소개해 준 상대라 거절할 수 없다고 했어.”

라이엇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아나스타샤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유리와 더 오래 지내고 싶었다. 유리와 함께 베이징에 가고 싶었다. 눈을 감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라이엇은 안타까운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유리가 보고 싶어.”

“마이애미로 돌아가면 돼.”

라이엇이 대답했다.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면서 오시프를 생각했다. 과연 아나스타샤가…… 그 남자를 상대로 유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별수 없었다. 유리와 함께한다는 건 라포포르트와 함께한다는 것. 좋든 싫든 오시프와 부딪쳐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눈물을 닦았다. 우울했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심호흡했다.

“일단 내일 형 병문안을 가야겠어.”

“그래. 같이 가.”

라이엇은 아나스타샤의 눈을 보며 웃었다. 마음을 정한 듯했다. 라이엇의 역할은 끝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아나스타샤에게 달렸다. 아나스타샤는 라이엇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뺏어 코코아를 맛봤다. 와……. 이거 왕실에 납품하는 거야? 시판이랑 맛이 다른 것 같아.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마저 마셨다.

“네 건 없어.”

“유리도 맛보면 좋을 텐데.”

“단 거 안 좋아할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치와와는 서로를 노려봤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기 싸움의 승자는 아나스타샤였다. 라이엇은 곧 약혼할 사람에게 주는 축하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 * *

유리는 줄곧 바다를 노려봤다. 건물에 가려 바다는 실선처럼 보였지만, 유리는 그곳을 노려봤다. 실선 같은 바다 너머로 유럽 대륙이 보였고, 그 위로 러시아가, 더 나아가 모스크바의 집이 보였다. 그곳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오시프가 생생히 그려졌다. 물론 그는 지금 미국에 있지만 말이다.

오시프가 있는 방에는 그의 부모도 함께했다. 그들은 유리의 앞날을 걱정하며 라포포르트에 헌신하고 유리의 안식처가 될 오메가를 고르느라 분주했다. 거기에 수잔이 보낸 후보까지 더해져 라포포르트 저택은 막내아들의 혼사로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보스. 오후 미팅에 오시프와 이반도 참석합니다.”

일리야의 목소리에 유리는 악몽에서 빠져나왔다. 이반과 오시프. 오시프는 확실히 마이애미에 있다. 모스크바에는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이 있겠지. 다른 형제도 일 때문에 해외에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괴상한 사람을 부모님께 추천하기 전에 먼저 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경호 인원은 라포트 주요 연구원 열두 명입니다. 로미오, 시에라 여섯 명씩 나눴습니다. 정예를 배정해뒀습니다. 팀장은 어쩔까요?”

“……로미오는 내가 지휘해. 시에라는 마야가 맡는다.”

무기 시연 때문에 연구원 열두 명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리는 창밖을 노려봤다. 바다가 실오라기처럼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아나스타샤는 질려서 떠나고 나는 선을 본 뒤, 약혼하게 된다. 형이 원하는 시나리오지. 오시프가 감독을 맡으면 그가 기획한 대로 흘러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팀원들 불러 둬. 미팅 후에 브리핑할 거니까.”

“예, 보스.”

유리는 마야를 불러 미팅을 준비했다. 아나스타샤는 떠났다. “다녀온다.”라고 했으나 오지 않으리라. 불장난은 이제 그만해야지. 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떠올렸다.

오시프와 이반이 유리가 지내는 주택에 머문다고 한 바람에 유리는 아파트로 도망쳤다. 회사에서도 봤는데 휴식 시간까지 형들과 붙어있고 싶지 않았다. 짐이 빠진 아파트에는 침대와 TV, 소파만 남아있었다. 오히려 잘 됐다. 유리는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텁텁한 담배 냄새가 이불에 배어있었다. 타인이 느껴지지 않는 온전한 자신의 냄새였다. 하……. 끝났어. 유리는 되뇌었다. 조바심에 아나스타샤를 얼마나 몰아세웠던가. 과거를 돌아봐도 대답은 늘 하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나스타샤와 헤어지고 오메가와 약혼했겠지. 오시프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까. 후회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유리는 받지 않았다. 진동이 끊기더니, 다시 울렸다. 그걸 네 번 더 반복했다. 받을 때까지 걸 것 같은 전화여서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뭐야!”

[챠오, 유리? 어디야?]

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나스타샤였다. 떠난 사람이다. 독촉에 못 이겨 도망간 남자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아파트야?]

질문과 동시에 누군가 현관을 두드렸다. 초인종을 두고 문을 두드리는지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대꾸하는 것도 잊고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벌어진 문틈으로 상쾌한 향이 풍겼다. 이런 페로몬을 가진 사람은, 아나스타샤뿐이다.

“나 왔어.”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아나스타샤다. 그대로 굳고 말았다.

떠났던 이가 돌아왔다.

꿈인가. 내가 마약을 했던가. 유리는 믿기지 않아 아나스타샤를 훑기만 했다. 아나스타샤가 반밖에 안 열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콤하고 상큼한 페로몬이 유리를 감쌌다. 그제야 넋을 놓고 아나스타샤를 구경하던 유리가 뒤로 물러섰다.

“늦었지. 형이 입원했더라고. 넷째니까 걱정이 되나 봐.”

그는 뉴욕에서 있던 일을 속삭였다. 어, 어……. 유리가 대답했다. 돌아온 그와 뭘 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임신이라면 됐어. 어차피…… 되지도 않을 테니까.”

유리가 돌아섰다. 그 얘기라면 하기 싫었다. 막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 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돌아선 유리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등에 닿았다. 페로몬에 몸이 반응한다. 유리는 주먹을 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나스타샤는 맥박치는 유리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종마가 아니라며 화냈으면서. 유리는 침묵했다. 고요 속에 속마음이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귀 뒤에 입술을 댄 채로 이야기했다.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유리. 너를 너무 몰랐어. 네가 처한 상황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

“……됐어.”

다시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아나스타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뉴욕에 있었더라면 자연스럽게 멀어졌을 텐데! 유리의 투정에도 아나스타샤는 요지부동이었다. 유리가 그랬듯 허리를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다.

“네가 보고 싶었어.”

“…….”

“나도 네가 좋아. 너만큼 깊은 감정은 아니어도 이건 확실해. 지금 너와 있고 싶어.”

믿기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고난은 함께해야 부부지.”

“……너, 미쳤어?”

술 마셨나.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결혼이나 부부, 아이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이런 남자를 붙들고 아이를 운운했으니 당연히 도망가지. 유리는 자신의 실수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했다.

아나스타샤가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미쳤다니. 유리. 이제 널 용서하고 받아들일 생각인데.”

“…….”

“차근차근히 하자고. 일단…… 약혼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아나스타샤를 마주하기 부끄러웠다. 임신해야 한다고 닦달했을 때와 다른 인간이었다. 침착하려 해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끌어안은 채 침실로 걸었다. 유리는 머뭇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날렸다. 유리도 함께 쓰러졌다. 침대가 요동쳤다. 유리는 누운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 전부가 현실성 없었다. 약혼이라는 말이 아나스타샤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는 날 묶어둬야 직성이 풀리잖아.”

아나스타샤가 유리 위에 올라탔다. 유리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차분한 푸른 눈이었다. 진심이었다. 그가 유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마에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졌다.

“너는 날 잘 알잖아. 결혼은 못 해도 약혼은 괜찮아. 고작 약혼일 수도 있지만, 어때? 이렇게 묶어두면 안심되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리가 웅얼거렸다.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 중에서 ‘약혼’을 빼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아나스타샤는 말을 멈췄다. 마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었는데, 유리 상태를 보니 순서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널 임신시키겠단 소리지.”

며칠을 지겹도록 따라붙던 유리가 떠올랐다. 자신을 종마로 다루던 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했다. 아나스타샤는 차근차근 유리의 옷을 벗겼다. 유리는 놀란 햄스터처럼 눈만 동그랗게 뜰뿐이었다.

극한의 확률을 뚫고 아이가 생긴다면 아나스타샤는 기쁜 마음으로 라포포르트를 가족으로 맞이할 것이다. 행위가 다르게 느껴졌다. 오늘 우리는 여러 의미로 하나가 된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가슴에 입을 맞추면서 입은 옷을 벗었다. 손길은 정확했다.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맨 어깨를 붙잡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맨다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고 숨은 거칠었다.

“이런 건…… 아나스타샤, 당신답지 않아.”

묻는 목소리가 어딘가 처량했다. 유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

“며칠 전만 해도 임신은 싫댔잖아.”

“맞아. 젠장! 사실 지금도 걱정돼. 너와 함께할 수 있는 건 기쁘지만, 육아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그런데 왜!”

유리가 소리쳤다. 아나스타샤는 개가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네가 원하잖아! 유리. 나는 너와…… 내년도 내후년도 함께하고 싶어.”

깃털보다 가벼운 고백이었다. 고작 내후년까지만 생각하면서 임신과 약혼을 입에 올렸다. 가벼운 만큼 다시 바람이 불면 떠날지도 모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볼을 쓰다듬었다.

“후회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짓는 얼굴은 막 먼지를 털어낸 조각상 같았다.

“인생은 늘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지.”

“난 다른 놈과 달라.”

“알아. 후회는 나중에 할게.”

선택도 후회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아나스타샤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숙였다. 손이 맨살을 쓰다듬었다. 제길, 제길. 유리는 욕을 지껄이며 아나스타샤의 입술과 귀, 볼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앞’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도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눈을 가려줬다. 페로몬을 뿜어내며 유리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는 유리의 다리를 벌리게 한 뒤, 그 사이에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걱정은 그때 가서 하는 수밖에 없다. 유리는 뒤에 닿는 뜨거운 체온에 몸을 움츠렸다. 앞날보다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뚫릴 일을 걱정해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콘돔을 끼지 않은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문댔다. 뜨거운 살덩이는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서 유리의 엉덩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내 러트가 언제인지 물었지.”

아나스타샤가 가쁘게 숨을 쉬며 속삭였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야, 아나스타샤는 친절히 대답하며 성기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알파는 오메가처럼 스스로 젖지 않는다. 유리의 뒷구멍은 아나스타샤가 묻힌 애액으로 젖어 성기를 받아냈다.

“아……!”

“이제 젖기만 하면 오메가와 다를 게 없겠어, 유리. 풀어주지 않아도 수월하게 들어가다니…….”

그는 말끝을 흐렸다. 농담할 여유가 없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성기가 내부를 채웠다. 러트가 가까워진 성기는 빠듯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유리는 고개를 젖혔다. 아나스타샤가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읏…… 하아. 하으…….”

아나스타샤가 몸을 바짝 붙였다. 무릎을 굽히고 있던 유리의 엉덩이가 저절로 들려지며 발끝이 허공에 달랑였다. 아나스타샤의 성기가 뿌리까지 들어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잡았다. 뜨겁고 버겁고 역했다.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에 마약을 한 것처럼 방 안이 핑글핑글 돌았다.

“좋아……. 얼른…… 젠장, 아나스타샤!”

유리는 어깨를 쥐어뜯었다. 아나스타샤의 날갯죽지에 손톱자국이 났다. 유리가 으르렁거리자 아나스타샤가 움직였다. 짐승처럼 거친 움직임이었다. 러트를 앞둔 알파의 성기는 단단하고 굵었다. 그는 거침없이 유리의 직장을 파고들었다.

“아! 으윽! 윽……!”

아나스타샤의 등을 긁으며 유리가 소리쳤다. 고함, 비명과 비슷한 신음에 아나스타샤는 흥분했다. 유리의 몸에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던 그는 본능을 거역하지 못하고 목과 승모근에 잇자국을 남겼다. 이를 세울 때마다 유리의 몸이 경련했다. 하아……!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유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냐, 아냐……. 더, 더 해. 더…….”

유리가 중얼거렸다.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등을 긁던 손이 아나스타샤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잡았다. 아나스타샤가 내벽을 파고들 때, 손도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더 해줘. 더. 무아지경이 된 유리가 절규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턱턱 막히는 숨소리가 신음을 대신했다. 급히 숨을 들이쉬면 강렬한 페로몬이 후각을 지배했다. 이제 ‘나’는 없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됐다. 서로의 체향을 기억하며 거칠게 교미했다.

“흐읏……! 아, 아아…….”

헐떡이던 유리가 먼저 사정했다. 일순간 몸이 수축했다. 배 사이에 낀 유리의 성기가 들썩이며 정액을 토했다. 아나스타샤의 배에도 미적지근한 정액이 튀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뒤, 세게 처박았다.

“아아! 으응……, 아, 아나스타샤아…….”

유리가 몸을 비틀었다. 사정 직후에 전립선을 긁어대며 뱃속을 압박하니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오르가슴을 느껴야 했다. 유리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었다. 젖은 유리의 신음과 숨은 아나스타샤에게 흥분제였다.

오로지 유리만 보였다. 부릅뜬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안에 사정했다. 영원할 것 같은 움직임이 멈췄다.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끌려온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췄다.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혀가 얽혔다.

* * *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내민 머그잔을 받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였다. 한참 힘을 써서 그런지 입에 침이 고였다. 유리는 침대에 앉아 코코아를 마셨다. 몸은 아나스타샤가 씻겨놔서 찝찝한 기분은 없었다. 잠옷 바지만 입고 욕실과 방을 바삐 오가던 아나스타샤가 코코아를 하나 더 타오더니 유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얘기했다.

“후……. 미안, 유리. 화해하고 하고 싶었는데. 멋대로…… 물어놓은 것도 그렇고.”

“아.”

유리가 목덜미를 더듬었다. 피멍이 들었는지 누르면 아팠다. 뭐, 됐다. 유리는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아나스타샤의 등을 상상했다. 그중 몇 개는 흉터가 될 것이다. 코코아를 홀짝였다.

“러시아로 출장 간다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유리는 머그잔을 협탁에 올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마셔도 아나스타샤의 향만 느껴졌다. 대꾸하지 않아도 아나스타샤는 말을 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네 부모님께 선물을 보냈어.”

“……우리 부모님?”

“그래, 에드워드 씨와 블라디미르 씨. 훌륭하게 아드님을 키워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선물은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인 인지오 시모나로티가 보낸 것이다. 공주가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귀한 아드님과 저희 아이의 교제를 축하해야 하니 말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단란한 축하 파티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은근슬쩍 약혼 자리를 마련하리라.

유리는 베개 밑에 손을 넣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반응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리, 잘 거야? 정말 약혼할 수도 있어. 너랑 나랑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거라고.”

“……그러면 선은 안 봐도 되겠네.”

내후년까지는 사람 만나라며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유리는 눈을 감았다. 몸이 나른했다. 유리도 참. 아나스타샤가 투덜거리더니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의 옆자리가 푹 꺼졌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끌어안았다.

“네 형이 날 죽이려고 들면 꼭 지켜줘야 해.”

“당연하지.”

잠들기 직전이었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회색 눈동자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죽어도 내 손에서 죽어.”

“그래. 네 손에서 죽을게.”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목 아래로 팔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머리가 가슴 쪽으로 떨어져 졸지에 품에 안기게 됐다. 따뜻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둘은 어느 순간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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