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두개의 달 [상]
"할수 있을거야."
일말의 불안이 담긴 손으로 어깨를 두들이는 소꼽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보던 가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여져 있던 죽도를 집어 들었다.
언제나 들고 연습하던 것이건만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다.
가헌은 작게 입술을 베어물며 움직이지 않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단번에 일어섰
다.
그에 따라 몰리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힘내. 넌 우리들의 자랑이야."
"이번에만 이기면 부장도 꿈은 아니라고. 1학년 부장이라니... 멋진걸!!"
사심없이 좋아해 주는 것을 알면서도 비꼬는 듯이 들리는 것은 자신이 싫어진다.
쓰게 웃으며 손을 들어 몇번 흔들어 주고 대기실에 나섰다.
밖깥 쪽은 안에 들어오지 않은 2,3학년 들이 벽에 기대거나 앉은채로 가헌을 못 마
땅하다는 듯이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실력좋은 하급생은 어디를 가나 반갑지 않은 존재이기 마련이지만 이 사
람들은 유독 그것을 들어내 가헌으로 하여금 불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싫은 사람들이지만 선배이기에 고개를 숙였건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 뿐이다.
"잘난 1학년 힘내라고."
"그래. 검도부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 예선에 합류하게 해준 분이니 말야."
"쪽팔리게 2,3학년이 있는 단체전은 1회전때 깨졌잖냐."
"부끄러운 일이지."
알면 말하지 말란 말이다.
차마 대놓고 말할수는 없기에 표정을 굳힌채 가헌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섰다.
몸에 걸쳐진 무게가 남달리 느껴져 숨이 막혀오는 것 같다.
만약 가헌이 이번에도 이긴다면 저치들의 말대로 비록 개인전뿐이지만, 교내 검도
부 사상 처음으로 결승전에 올라가 우승을 거두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아마 영원히 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담은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가고 있지만 지나가는 가헌을 바라보는 시선의 선망은
발걸음을 옮길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가헌아."
"........."
"안녕. 오랜만 이네."
검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곱게 늘어뜨린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숙인
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른채 그냥 지나갔겠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일하는
회사 사장의 딸로 그냥 무시할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숨을 쉬며 그리로 다가간 가헌은 작게 입을 열었다.
"시간 없으니깐 용건만 말해줘."
딱딱한 가헌의 어조를 눈치챈 모양인지 예쁜 얼굴이 잠시나마 굳어졌지만, 이미 표
정을 풀고 입을 연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용건만 말할게."
"............"
"이번 시합 져줘."
난대없는 말이기도 했지만 어느정도 예상한 말이기에 가헌은 표정변화 없이 눈높
이 보다 아래에 있는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이번 시합에 이기면 유헌이는 정말로 희망이 없어. 아버지가 널 무척이나 맘에 들
어하시는 것도 이번 시합에 져도 널 내 남편감으로 지목하고 있는걸 철회하시리라
고 생각치는 않지만.. 그래도 부탁해."
".............."
"네 쌍둥이 동생이잖아? 게다가 넌 날 좋아하지도 않잖아? 우리는 서로를 좋아한단
말이야. 이번에 유헌이가 이긴다면 아버지도 다시 보시게 될거야. 부탁이야. 정말
로 부탁할게. 다시는 이런말 하지 않아. 이번만 져줘."
"............."
"제발. 부탁이야."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 가헌은 그대로 몸을 돌려 시합
장으로 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모양인지 더이상 가헌을 붙잡지 않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
에 그대로 뒤로 끌려 갈것만 같았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이 없던 아이였는데, 저런 말을 할수가 있다니.
그녀의 성격을 아는 가헌은 그 말을 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생각하
고 쓴 웃음을 지을수 밖에 없었다.
-유헌
전혀 닮지않은 쌍둥이 동생이다.
외모는 닮았을 지도 모르지만, 공부도 운동도 무엇하나 가헌보다 잘하는 것이 없었
다. 잘하는 것이라곤 실없이 웃기만 하는 점이랄까?
하지만 모두 그런 녀석만을 좋아했다.
부모님도 사촌도 친구들도 그리고 그녀까지도...!!!
가헌을 좋아하는 사람을 뽑자면 유감스럽게도 자신을 싫어하는 그녀의 아버지인
강회장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으로써 가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회
사를 이끌어 나갈수 있는 그럴듯한 프로모션을 지닌 자신일 뿐이다.
왜 그럴까?
어째서 모두 녀석만을 좋아하는 것이지?
삐익----!!!!!!!!!
툭
언제 시합을 시작했는지 알수 없었다.
귓가를 때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가헌의 죽도는 끝이 부러진채 였고, 상대
였던 유헌은 보호구를 벗은 채로 자신의 한쪽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
다.
멀리서 유헌의 동료들과 코치 그리고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
건만 가헌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숨을 간신히 삼킨 가헌은 들고 있던 죽도를 들어 끝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부러진 그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실수였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유헌이의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생각해."
"좋은... 시합이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져서... 조금... 뭐랄까."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유헌의 간호에만 매달린 그녀가 한참이 지난후 가헌에게 입
을 열었다.
이번 일로 유헌은 한쪽눈이 실명 되었다.
게다가 다른 쪽 눈도 위험한 상태여서 외국으로 넘어가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양쪽
다 실명할 위기에 쳐해 있었다.
답지않게 좌절하는 그를 지탱해 준 것은 그녀로, 딸의 헌신적인 모습에 철의 마음
의 움직인 것인지 강회장 또한 그 답지 않게 두사람의 사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이게 어깨를 움츠린 채인 그녀를 아무 감정없이 내려다 보던
가헌은 비를 맞아 칙칙해진 머리에 손을 올려 놓았다.
"좋아해."
흐느끼던 작은 어깨가 순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가헌은 크게 웃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음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싶었다.
"유헌이보다. 너보다 내가 더 많이 널 좋아해."
"내가 유헌이 보다 널 먼저 봤고, 더 먼저 사랑했어."
마치 유형 지난 가요를 읊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노래를 부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정의 고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단조로운 음색에 오히려 본인이 더 질려버릴 정
도 였다.
아무리 뛰어나도 감정이 없는 이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 보는 그녀를 한동안 내려다 보던 가헌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나무 밑을 벗어나면 저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겠지만 상관없다.
들고 있는 우산을 펴지 않은 채로 병원 앞에 있던 공원을 벗어난 가헌은 일정한 목
적지 없이 도로를 올라 갔다. 한동안 더위로 기승을 부리던 여름은 가고 가을에 접
어들어서 인지 유난히 몸을 때리는 빗물이 차갑다.
철퍽.
어디서 날라온 건지 모르겠지만 신문지가 날라와 발치에 부딫힌다.
그것을 무끄러미 바라보다 집어들어 근처의 휴지통에 넣으려던 가헌은 구석에 쪼
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곤 들고 있던 우산을 그 근처에 내려
놓았다.
의문이 떠올라 있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가헌은 몸을 세우고 다시 걸음을 옮
겼다.
"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은채 계속 걸음을 옮기던 가헌은 멀리
한강다리가 보이자 너무 오래동안 걸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뛰다 싶이 걸어서 숨이 목까지 차올라 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천식
환자처럼 내뱉을 것 같아 침을 삼키며 애써 참았다.
다리 한 가운데에 서서 난간에 양팔을 올리고 기댄 가헌은 밑으로 보이는 한강의
전경을 감상했다. 더러워 질대로 더러워 져서 그 밑에 보이지 않았지만 수면위로
부딫히는 비의 모습은 볼만했다.
".............."
머리에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평상시 였다면, 맨정신으로 비 맞는 짓 따윈 절대로 하지 않는다.
유헌이처럼 비가 좋다고 올때마다 맨발차림으로 뛰어 나가 부모님을 곤혹스럽게
하는 짓 따윈 절대 하지 않는다.
".............."
............정말로 부모님이 곤혹스러워 하셨을까?
이상한 아이라며 쓴웃음을 짓긴 하셨지만 결코 싫은 내색을 하셨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유헌의 하는 행동을 보며 바보같은 짓이라고 말하는 자신을 더 처지 곤란한
눈동자로 바라보곤 하셨지.
".......제길."
갑자기 현기증이 닥쳐온다.
무거운 머리를 몇번 털어 보았지만 어지럼증은 점점 강해져 간다.
"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감겨지는 눈을 필사적으로 뜨려고 노력한 결과 보이던 것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차가운 수면이었다.
쿠당!!
"빌어먹을 꼬맹이!! 두번 다시 나타나지 마!!!"
"...제..길!! 멍청한 놈이!!!"
"이 녀석~!!"
"쳇!"
닫으려는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기세에 욕설을 내뱉으려다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
나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저 덩치로 이런 작은 골목에 들어 올수는 없을 거다.
상대방은 그것이 분했던지 골목 어귀에 서서 커다랗게 고함을 지른다.
"재미없는 녀석. 통행증만 주면 되는 건데 말야."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기며 여기저기에 나있는 틈새로 솜씨
좋게 빠져나간 칸은 이내 큰 도로로 빠져 나올수 있었다.
커다란 장정이 이길로 오려고 했다면 큰 길을 찾아 뺑 도느라 한시간이 걸렸을 거
다. 이럴때는 작은 몸이 고맙게 느껴진다.
"라프헨!!"
"늦었군요. 그래, 뭐라고 하던가요?"
자신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화색이 되어 묻는 라프헨의 얼굴에 되려 미안해진 칸은
입술을 비죽히 내밀여 양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무일푼으로 통행증를 받으려던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저 커다란 푸른 눈동자가 실망에 젖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간 가슴아픈 일이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참으려고 했지만...
통행증 대신 몸을 요구하는 변태 녀석에 작태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았어야 하는 건가.
"어쩔수 없죠. 처음부터 무리린 것을 알고 있었으니... 수고 하셨어요. 칸."
"그다지... 미안."
"오히려 힘든 일을 시킨 제가 미안한 데요. 그럼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떨까요?"
"알았어. 라프헨도 이제 곧 어두워 지니깐 들어가서 쉬도록 해."
"네."
돈이 없기에 문을 꽉꽉 닫아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허름한 여관에 자리 잡을 수 밖
에 없었다.
이런 곳엔 질나쁜 무리들이 모이기 마련이니 라프헨 같은 미인이 딱하니 자리에 있
는 것은 '잡아 듭쇼.'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여러번의 위험한 일을
거친 당사자는 알아서 한다는 식이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맹한 구석에 차마 눈을
땔수 없게 만든다.
칸은 다른이들의 걱정에게 아랑곳 없이 아직도 앉아 미적거리는 라프헨의 손을 잡
아 끌었다.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들어가. 이러고 있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라헨에게 할말이
없다고!!"
"하지만 아까 식사를 시켜 두었는데.."
"걱정하지마. 방으로 올려다 줄테니깐."
"....그럼 부탁할께요."
"그래그래. 얼른 올라가."
아예 계단위로 올려놓고 양손으로 내젖는 칸의 모습에 라프헨은 쓴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올라 갈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하듯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몸을 돌려 올라가는 뒷모습에 칸은 머리를 긁적
였다. 씻은 지 몇일이 지나서 인지 손가락에 때가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있다 라헨이 오면 씻으며 마을 밖에 숲에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운이 좋아 통행증을 받아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당분간 맘편히 씻는 것도 할
수없을 테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나가게 된다면 말이지..."
개성이 강한 사람들로 모여있어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신들의 무리에 쉽게 지나
갈수 있게 해주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보기에만 수상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점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게속 한곳에 정착해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어서 이곳에 벗어나 다른 여
행지로 향해 일행들과 합류해야 할텐데, 정말이지 걱정이 태산이다.
게다가 칸은 방으로 돌아간 라프헨의 안위가 너무도 걱정이 된다.
이럴때 그의 형제인 라헨이 곁에 있다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텐데, 새벽 나절에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질 않는다.
턱을 괴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살점이 두둑히 잡힌 인상 나쁜 여관의 주인이
한손에 음식을 들고 테이블에 내려 놓는다.
"됐어. 그대로 들고 위로 올라갈테니 말야."
"...꼬마. 그럼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들고 가겠다는 건데!!"
"싫으면 음식은 그냥 가져 가겠다."
"어리게 보인다고 얍보는 거냐?!! 이래뵈도 난..!!"
" 칸 "
울컥해서 못할 말을 할뻔했던 칸은 뒤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여관 주인도 마찬가지로 몸을 굳히며 음식이 든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는다.
"주인. 언제부터 음식에 추가세를 받은 거지. 난 기억에 없군."
"아... 하하.. 그게... 제..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이만..!!"
다급하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는 주인의 등뒤로 혀를 내밀어 보인 칸은 어느
새 앞으로 다가온 라헨을 올려다 보았다.
벌레하나 못 죽일 것 같은 낯짝을 지닌 라프헨과 달리 그의 형은 라헨은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할만큼 험상궃고 덩치가 어마어마한 장정이었다.
그의 팔 근육이 라프헨의 허리만 하니 왠만한 사내라 할지라도 그와 마주하게 되면
꼬리를 말고 물러난다.
"늦었잖아. 라헨. 라프헨이랑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경박스런 말은 집어쳐라. 제발 무게있게 행동하지 못하겠나?"
"이런 외모에 그런 말투를 사용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큰 폐가 될것이오. 라헨공"
라헨의 지적에 장난기가 발동해 표정을 굳히고 말투를 낮게한 칸의 모습에 그는 고
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도 장난기가 변함없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도를 지나치면 해가 되기 마련이다.
라헨은 이 어린 주인이 자신의 마음을 제발 좀 알아차렸으면 했다.
"휴- 라프헨은 위에 있나?"
"응. 어서 들어가자고. 아, 오기 전에 너랑 내 식사도 챙기는거 잊지 마."
"잠깐."
쟁반을 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칸은 라헨의 저지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아침부터 여기저기 돌아 다녀서 무척이나 배가 고픈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헨은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손가락을 들어 문밖을 가
르켰다.
"잠깐 도와줘야 할 일이 있다."
" ? 먹고나서 하면 안돼?"
".......안된다."
숟가락을 물고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한 모습이 확실이 사랑스럽긴 하지만 지금은
칸의 장난에 놀아줄 때가 아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낼꺼다-라는 뜻을 명백히 밝히며 라헨은 몸을 돌려 먼저 밖
으로 나섰다. 칸은 그런 라헨의 뒤를 투덜거리며 따라가지 않을수 없었다.
확실히 라헨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연신 궁시렁대며 라헨의 뒤를 따르던 칸은 그가 점점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자
눈쌀을 찌뿌리며 팔을 끌었다.
"더 이상은 들어가지 마. 질이 나쁜 녀석들과 만나 일을 벌이기라도 하면 피곤해 지
는 건 이쪽이다."
"걱정마. 다왔다."
" ?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수가 없군."
"보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거야."
칸의 팔을 부드럽게 뿌리친 라헨은 큰 걸음으로 쓰레기 파묻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
다. 그런 곳엔 왜 가는거냐고 묻고 싶엇지만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는 그이기에 솟
아나는 의문을 누르고 근처로 다가갔다.
바스락.
바삭.
"쓰레기는 왜 뒤지는 거야? 아직 돈이라면 남아있어."
장난스런 말에도 묵묵히 쓰레기는 뒤지는 모습에 참다못한 칸은 라헨의 어깨를 잡
아 뒤로 밀쳤다.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뒤지는 거야!! 이런 곳에 있는 것보다 라프헨의 곁에 있어
주는 편이 더....!!"
뭉클.
라헨을 밀쳐내고 대신 쓰레기 더미들을 집어 던지던 칸은 손에 잡히는 따뜻한 온기
에 그대로 굳을수 밖에 없었다.
그런 칸의 표정을 확인한 라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맞은 편 벽에 기대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헨의 행동에 벙쩌있던 칸은 조금의 용기를 끌어모아 천천히 얼굴을 돌
려 쓰레기 더미속에서 나타난 하얀 얼굴에 올려진 자신을 손을 다급하게 떼어 냈다.
"............"
죽은 이처럼 새하얀 얼굴이지만 아까의 그 온기를 확인했기에 시체라곤 할수 없다.
본적없는 검은 머리카락에 눈썹과 감겨져 있는 속눈썹도 검은색. 입술만이 붉게 빛
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미인들을 봐왔다고 자신하고 있었건만, 이런 특색있는 미인은
처음이다.
하지만...
...하지만~~~
".....짐더미가 하나 더 늘었다는 거잖냐~~!!!!!"
당황하는 건지 절규하는 건지 알수없는 목소리가 좁고 더러운 골목을 울렸다.
머리가 멍멍한 느낌이다.
잘 가누어지지 않은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뭔가가 몸을 내리 누르는 건지 조금
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려고 해도 고정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 단지 보이기만 할 뿐.
그것도 제일 보기싫은 두사람을.
"...!!!!"
언제나 사이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던 두사람이건만 지금의 모습은 마치 싸우는 듯
하다.
왜 그럴까? 싫어하던 자신이 사라졌으니 좀더 기뻐해야 하는게 아닐까?
기뻐해야 하는게....
기뻐해야....
툭.
볼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가헌은 미간을 찌뿌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겨우 눈 떴네."
"........."
"정신이 드니? 날 알아 보겠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금색 머리카락을 좇으며 시선을 좀더 위로 들자 초록색 눈
의 주근깨가 귀여운 앳띈 얼굴이 보인다.
시선이 마주치자 기쁜듯이 웃는데 송곳니가 살짝 보인다.
"슬슬 일어나지 않을래? 배고프지?? 뭔가 먹을거라도 먹자."
"................"
"3일동안 누워만 있었다고. 편안한 침대위라면 괜찮겠지만, 지금 있는 곳은 상당히
흔들리는 마차 안이잖아? 일어나서 훌훌 털어 버려야지 아픈 것도 사라진다고."
"................"
"자꾸 나만 말하니깐 내가 수다쟁이 된것 같네? 난 원래 근엄한 사람인데 말야."
소리내어 상쾌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꾸 흔들리는 것이 움직이는 곳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시선을 돌린 가헌은 움직이는 내부를 천천히 흩어 보았다. 나무로 덧대어 진듯한
내부엔 짐더미 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게 꽤나 넓은 장소 인듯 하다.
이런 곳이라면 트럭이나 봉고차 같은 건가?
아니 요즘에 나오는 차는 내부가 이런 식이던가?
누워서 눈동자만 굴리는 가헌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은 콧잔등의 주근깨를 찡그
리며 그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불시에 자세가 바뀐 가헌은 숨을 들이켰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가헌 주위의 이불
을 정리한 소년은 씨익하고 웃으며 근처에 놓여있던 물잔을 들어 보였다.
"마셔봐. 무지 시원하다고."
"............"
"음.... 자 봐~"
갑자기 잔을 내밀더니 이번에는 잔안의 물을 한모금 들이킨다.
그리곤 다시 내밀어진 잔을 바라보던 가헌은 가만히 잡아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을 바라 보았다.
뭔가를 바라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리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미간을 찌뿌리는 가헌의 모습에 소년은 걱정스러워져 눈쌀을 찌뿌리며 다가섰다.
"왜 그래? 어디 아픈거야?"
"........[모르겠어]"
" ? ? "
이틀 전 칸의 일행과 합류하여 간신히 도성을 빠져나온 그는 갑자기 나타난 눈앞의
소년을 보는 순간부터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볼수없는 검은 색 일색의 모습이건만, 피부는 옥같이 하얗고 입술은
붉다. 게다가 자그마한 생김새지만, 엄청나게 단정한 미형이고 말이다.
에스는 자신의 마차에 배정되었을 때부터 자고있는 그 모습도 좋았지만 역시나 눈
을 뜬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대로 깨우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깊었던가.
하지만 독설의 대가인 단장에 싫은 소리듣기는 절대로 싫기에 지금까지 참아온 것
이다.
그리고 막상 눈앞의 얼굴을 보니 역시나 참기를 잘한 것 같다.
하지만... 이사람 뭔가 괴상한 말을 한것 같은데 말이지....
"[네가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역시나 착각이 아닌건가.
에스는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하는 눈앞의 미인을 보여 어설픈 미소를 짓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을에 그대로 억류해 있었던 걸 구해준 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말야."
".............."
"어째서 이 내가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탕!!!
"제대로 요리하지 않으면 다시 일주일이 불어날 겁니다. 칸님."
"......쳇. 목석같은 여자."
탕!!!
"거기 있는 칼로 써시는게 좀더 잘 들겁니다. 칸님."
".....아...하하.... 고마워...;;;;"
손가락에서 불과 1미리로 안 떨어진 곳에 정확히 안착한 날카로운 단면의 식칼을
확인한 칸은 촉촉히 젖어가는 등을 느꼈다.
정말이지. 귀도 좋고 실력은 더 좋은 여자다.
이쪽 놈들은 조금도 정이 안가는 녀석들 뿐이라고 생각하며 양파를 써는 손길에 힘
을 주었다. 매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저런 여자 앞에서 조금의 습기라도 보
이게 된다면 그대로 죽는게 더 속편할 거다.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눈앞의 양파의 감자의 산을 보자니 그대로 도망가고만 싶다.
"에즈, 이곳에 칸님께서 계신가요?"
천막을 걷고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 칸은 쾌재를 불렀다.
운이 좋으면 이 지겨운 일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갈수 있을 거다.
도대체가 100여명분의 요리를 나랑 저 마녀 둘이서 만들라니.. 미친 인간들 밖에
없는 곳이다. 여기는.
"무슨 일이지요? 칸님은 준비량의 반도 채 만들지 못하셨습니다."
"아, 그런 것 같지만... 저기 지금 노웬님께서 부르십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만 가보시죠. 칸님."
선심 쓰는 듯이 말하는 투에 순간 울컥했지만, 순간의 실수 이곳이 벗어날수 있는
기회를 잃을수는 없었다.
투덜대며 천막을 빠져나가는 칸의 모습에 지금까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에즈
는 얼굴 근육을 조금씩 움직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정말이지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놀리는 재미가 있달까?
칸을 데리러 온 청년은 그런 에즈의 모습을 바라보다 어쩔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그러면 칸님의 미움을 받습니다."
"받는다 한들 어때? 도저히 이 재미를 버릴 수가 없는 데 말야."
"....노웬님도 그렇고, 에즈 당신도 그렇고. 정말이지 어쩔수 없는 사람들이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놀릴 때마다 풍부하게 변하는 칸의 얼굴을 알기에 진지하게 말
리지 못하는 자신을 가만히 자책하는 청년이었다.
"불렀다고 노웬."
"제가 언제 불렀다고 그러십니까?"
".........."
기세좋게 천막 안에 한발을 들이댄 칸은 노웬의 싸늘한 목소리에 그대로 굳을수 밖
에 없었다.
설마하니 아까 그 놈이 액면 그대로 자신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게 해주기 위해 거짓
말을 한건가?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고마운 일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나니
아까 그녀석을 잡아 족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노웬의 성격을 알기에 그대로 나갈수도 없는 노릇.
칸은 식은 땀을 흘리며 들어선 상태 그대로 굳어 있을수 밖에 없었다.
붉게 변한 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웬은 자신의 은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미
소를 지었다.
"장난입니다. 제가 불렀죠. 자, 여기에 앉으시겠습니까?"
"...!!!!!"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간신히 참아냈다.
자신은 잘못을 하면 귀여운 실수지만 남이 그러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으로
아는 남자다. 굳이 빌미를 주어 나중에 피곤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붉으락 푸르락하게 변하는 칸의 얼굴을 자못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노웬은
곁에 서있던 여자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당시들이 주운 한 소년에 대해 할말이 있기 때
문입니다."
"그 녀석? 그 녀석이 왜?? 그리고 말은 바로하라고 주운 건 내가 아니라 라헨인데?"
"당신이 거절했다면 라헨은 망설임 없이 그를 버렸을 겁니다."
"............"
칸은 노웬의 말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 자리에서 두고 가라고 했다면, 라헨은 버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 말도 않했지.
그렇다곤 해도 굳이 자신이 원한 것만도 아닌게 여관으로 데려가자 라프헨이 엄청
좋아했던 것이다.
"내탓만이 아니라고. 그건 모두의 동의가 있었기에..!!"
"그렇군요. 그런 그 얘긴 나중에 하고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다른 주제로 이야기
를 해볼까요?"
"당사자?"
노웬의 시선을 따라 등뒤로 시선을 준 칸은 천막을 제치고 들어온 인영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
은발의 남자 하나와 검청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을 확인한 가헌은 걸음을 멈추었
지만, 뒤에 있던 에스가 등을 밀자 한발 앞으로 내딫었다.
그런 모습에 묘하게 거슬리는 칸이었지만, 노웬 앞에서 차마 내색할수는 없는 노릇
이기에 앞에 넣여진 차를 다서 거칠게 들이켰다.
"자 여기에 앉으면 돼."
".........."
"자자.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음... 못알아 들으니 정말 답답하네."
칸과 노웬이 앉아있는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가헌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힌 에스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병을 들어 물을 따라 주었다.
쪼르륵.
맑은 소리가 천막안을 채웠건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칸 그리고 가헌의 앞에 물을 채워 놓은 에스는 어서 아무말이라도 하라는 듯이 노
웬을 바라 보았다.
그런 에스의 모습에 살짝 눈썹을 찌뿌린 노웬은 이내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자, 길거리에서 주운 소년1과 그런 소년은 주은 소년2 그리고 소년1을 돌본 소년3
가 다 모였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것같군."
"누가 소년2라는 거야?!! 이래뵈도 난..!!"
"그말 들으면 이번이 200번 째겠군요, 칸."
"으윽~~"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하는 노웬의 모습에 이를 가는 칸이지만 차마 들어놓고 대들
수는 없었다.
그런 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웬은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정체를 알수없는 이 소년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니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세요. 그 잘난 목, 계속 붙이고 살고 싶으면 말입니다."
"........흥."
조용히 말하는게 더 박력이 있는 법이다.
순간 싸늘해진 공기를 눈치챈 가헌은 눈동자를 들어 눈앞의 두사람을 살펴 보았다.
한쪽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로. 양쪽으로 자연스레 늘여뜨린 은발과 예기가
흐르는 은색의 눈동자가 두들어지는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생김새 대로 목소
리는 낮은 가운데 날카로움이 풍겨 쉽게 친해질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년은 검청색의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렸고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금색을 띄고 있었다. 생김새는 분명 어리지만 분위기가 능글
맞은 것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
만약 이중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을 굳이 고르자면 자신의 옆에 있는 에스라는
남자가 가장 무난할 듯 하다.
"먼저 소년을 주은 것은 라헨이지만 그것을 묵인 한 것은 칸입니다. 만약 이 소년이
길거리를 지나가다 흔히 볼수 있는 소년이었다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그러할수 없
도록 만드는 외모에 알수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군요."
"알수없는 언어?"
"주은 후로 계속 잠들어 있었으니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에스의 말에 의
하면 이 소년은 우리들과 확연히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군요. 라프헨의 말로는
대륙 그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문자체계라고 합니다."
"뭐야? 뭐가 그렇게 어려워. 그냥 알아듣게 말하란 말이야."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니 남들이 당신을 놀림거리로 상대하는 겁니다. 칸."
울컥하려는 칸의 팔을 붙잡아 앉힌 에스는 그에게 차를 권했다.
에스에겐 두사람이 다투는 모습은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 였지만 무척이나 맘에 드
는 이국의 소년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꼴은 보여주기 싫었다.
에스의 맘의 아는지 모르는지 가헌은 앞에 놓여있는 잔을 만지작 거리며 천막안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자신이 있었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배경과 인물들이 불안하기만 했다.
가만히 앉아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가헌의 내심을 알기위해 남몰래 그를 살피던 노
웬은 무표정답지 않게 눈앞의 소년이 누군가를 속일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쉽
게 간파해 냈다.
오랜 세월동안 다양한 인간들을 접하고 처벌을 해왔던 자신의 이목을 속일수 있는
존재란 그리 흔하지 않은 법. 만약 이 소년이 그 흔하지 않은 인간들 중 하나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썬 전자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아무래도 눈앞의 두 꼬맹이가 소년을 무척이나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름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요?"
"음... 단장. 말하면 엄청 화낼것 같아서 계속 눈치를 봤는데 지금 말하나 나중에 말
하나 반응은 같을 것 같네요."
"그럼 말을 안하는게 낫겠군."
생긋.
단정한 외모의 미소는 무척이나 강력한 무기가 된다.
노웬의 미소에 잠시 입이 다물어진 에스지만,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기에
힘들게 입을 떼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 기억이 없는 것 같은 데요."
"....요즘 나이가 먹어서 인지 오는 귀가 막힌것 같군요. 그래 에스군 뭐라고 한거
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기억의 열매를 닫힌 상태라는 거죠. 말하기 좀 뭐하지만..."
가헌과 노웬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문 에스는 무릎에 두손을 올려 놓았다.
갑자기 나타났는 데다 언어는 알아 들을수가 없고, 거기에 기억도 없는 것 같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상황에서 기억을 잃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손가락 발가락질을 해도 연신 고개를 흔드는 모습과 내색하려 하
지 않으려 노력하지만서도 보이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는 심증을 확신으로 굳
어지게 했다.
아무리 봐도 기억의 열매를 닫힌 상태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어미인양 달라붙은 것도 귀엽고...
"다음 마을에서 버리고 가는게 좋겠군요."
"단장!!"
"두사람이 굳이 일거리를 안겨주지 않아도 저에겐 여러가지 골치 아픈 일들이 잔뜩
입니다. 더 이상 머리가 지끈 거리는 일은 사양, 절대 사양입니다. 제 말은 여기까
지입니다. 모두 여기서 나가 주세요."
"........그런...."
울먹거리는 에스의 얼굴을 바라본 노웬은 낮지만 확고한 신념이 느껴지는 어조로
다시금 내뱉었다.
"이번 일은 여기까지 입니다. 더이상 나아질 것도 생각해 볼 것도 없으니 당장에 나
가 주십시오."
입 아프게 여러번 말해도 받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칸은 울컥하며, 자리
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가헌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런 칸의 모습에 당황하며 팔을 뻗은 에스는 중간에 뿌리치는 칸의 손길에 팔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가 거둔거니 처분은 내가 알아서 하겠어!!"
"그런- 칸님 노웬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시끄러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칸. 그의 신분이 높다지만 현재 몸을 담고있는 노웬의 집단에선 단장인 노웬 그의
위는 결코 아니다. 그들이 모시는 사람은 노웬이지 칸은 아니기 때문이다.
암묵적인 상하관계로써 일단 손님인 칸은 노웬의 의견을 첫째로 존중해 주어야 한
다. 아무리 그가 그들이 지켜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말이다.
검은 머리의 소년을 끝까지 챙겨줄 것 같이 행동하다가도 노웬의 반대에 머뭇거리
는 에스의 행동에 더 열이 받은 칸은 이를 악물며 밖으로 뛰처 나갔다.
"인정 머리도 없는 것들!! 내일에 상관하지마!!"
펄럭-
탁탁탁.
그대로 가헌을 대리고 사라진 칸이 남긴 자리는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에스는 이 일로 단장과 칸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다행
히도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건방진 건 여전하군요.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줘야 하는 걸까요?"
"......;;;;;"
다행은 아닌것 같다.
차마 대놓고 뭐라할수 없는 에스는 다만. 흐르는 식음땀을 단장 몰래 훔칠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