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용이군요."
"네?"
노웬의 천막에 들어가자 안제 모였는지 에스와 칸 그리고 젤과 노웬의 모습이 보였
다. 갑자기 몰리는 시선은 가흔의 어깨에 올려진 꼬마를 발견하자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노웬의 눈빛에 칸에게 포도주를 건낸다음 꼬마를 내려 안아
들고 무뚝뚝하게 '지금까지 음식을 훔쳐 먹은 장본인 같다.'라고 말했다.
엄한 경비를 따돌리고 음식을 자꾸 훔쳐먹는 녀석에 대해선 노웬의 귀까지 들려 올
정도로 현 용병단 내에서 꽤나 유명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이런 꼬맹
이가 범인이라니...
숲속에서 길을 잃던 꼬마를 주워 온것이 아니냐고 물으려던 칸은 그러나 무뚝뚝하
게 입을 연 젤의 말에 그대로 안명을 경직시켰다.
"..용?"
설마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의 얼굴을 일일이 바라본 젤은 묵묵히
소매를 걷어 하얗디 하얀 팔을 들어내 보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의 닭살이 돋아 있었다.
"굉장한 마력이네요. 너무 거대해서 온몸에 닭살이 돋는데다 숨까지 막히는 군요."
말을 마치면서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탁자에 둘러 앉아있던 칸과 에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젤쪽으로 물러 났
다. 비록 자신때문은 아니였지만, 무슨 병균이라도 되는 듯이 물러나는 사람들을
보고 기분좋을 사람은 없을 거다.
미간을 찌뿌리는 가흔과 그 품속에 안겨있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노웬
은 턱에 손을 올려 놓으며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리 그라도 용이라는 존재는 꽤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젤의 말을 의심할수 없는게 그녀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상당히
상위에 위치해 있어서, 다른 나라 아무대나 간다해도 궁정 마도사 자리 하나쯤은
얻을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단 내려 놓으시겠습니까? 얼굴을 확인해 봐야 겠군요."
테이블 위를 두들이는 것을 보아 그리로 내려 놓으라는 것 같은데 이런곳에 올려
놓아도 괜찮을까?
아까 몇마다의 대화로 보아 분명 칸과 비스무리한 성격인것 같았는데, 나중에 일어
나서 이런 곳에 올려진 것을 알면 분명 또다시 목청을 높이겠지.
망설이면서 노웬의 말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가흔은 잠들어있는 꼬마의 얼굴
을 내려다 보았다.
어린 아이지만 얼굴 윤곽이 꽤나 뚜렷한게 여자였다면 커서 대단한 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꼬마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는 가흔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웬은 뒤에 서서 긴장한 듯이 얼굴을 굳히고 있는 젤을 바라보 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아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흐-음. 용이란 말이죠. 이거... 운이 좋군요."
씨--익
그답지 않게 이를 들어내며 웃는 폼이 꽤나 불안해 등뒤에 식은땀을 흘리는 가흔이
었다. 그런 가흔의 생각은 바로 적중해서 어딘선가 상자를 꺼내 그안의 목걸이를
꼬마의 목에 채운 노웬은 책임지라며 녀석을 가흔에게 던져준 것이다.
이런저런 말도 안하고 이런 목걸이 하나 달아준 다음에 돌보라니...
게다가 아까 젤은 분명 이 녀석이 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용을 어떻게 돌보라는 거지? 아니면 이런 초록 머리카락의 사람들은 용씨라도 지
칭되는 건가?? 하지만 꼬마가 무슨 괴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나무가지를 들고 콕콕
찌르는 에스와 칸 두 사람을 보면 그것도 아닌것 같고.....
갑자기 벌어지는 일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흔이다.
"자-- 그럼 칸님 가흔군을 마차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제길... 이상한 일은 죄다 나만 시키고..!!"
"어서 나가 주십시오."
웃는 얼굴로 손을 젖는 노웬에게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일방적으로 이상한거 하나
떠맡았는 데도 불구하고 별 다른 말없이 용으로 추정되는 꼬마를 안고 천막에서 나
가는 가흔의 모습에 몸을 돌리고 뒤를 따랐다.
요새들어 둘다 꽤나 잘 붙어다니는 것 같더니 한명이 가면 다른 한명을 따라가곤
하는게 꽤나 편리하다.
사라지는 가흔과 칸의 모습을 확인한 에스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
았다. 꼬마가 사라지자 차가운 안색의 젤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화색이 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역시나 그 꼬마는 용이었던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에스였
지만, 가볍게 볼수만도 없는게 어째서 용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이런 산중에 있
는 것인가. 게다가 남의 음식을 훔쳐 먹기나 하고...
용은 어릴적에 중앙국에 속해있는 레아나를 본것이 처음이지만, 저런 꼬맹이도 용
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다.
"뭐, 일단 한동안 시끄러웠던 음식도둑은 이걸로 해결되서 에즈의 신경도 가라앉겠
지만... 것참, 다른 세계의 인간에 이어 이번엔 용입니까? 뭔가 가흔군을 받아 들이
고 나서 우리들의 모험담이 꽤나 터프해 진것 같군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대는 노웬의 모습을 바라보던 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까 그 용.... 겔당글 산맥의 휴면기에서 깨어났다는 그 용이 아닐까 합니다."
"소문의 용인가."
"그렇습니다.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보면 분명 녹의 용."
젤의 말에 노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남쪽에서 서로 올라가는 길로 선택했던 겔당글에 잠들어있던 용이 깨어나 결
국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겔당글의 용은 녹의 용으로 알려져 있는데, 1000년전 마도전쟁으로 소수의
용만이 존재하는 지금 그로써도 저 용의 정체가 그곳의 용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
었다. 하지만 녹의 용은 적어도 1800이 넘는 나이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인이 아닌 저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원래 괴벽이 있는 자들이니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다.
"뭐, 이로써 저희들에게도 든든한 아군이 생긴 거군요."
"그렇죠. 아주 커다란 행운입니다."
"....이봐요들....;;;"
난대없이 나타난 용의 존재에 그닥 놀라지 않고 강제로 구속의 목걸이까지 채워 놓
고선 용의 존재로 아군으로 치부하는 둘의 모습이 기가 막혔지만 아무말도 못하고
땀만 흘리는 에스였다.
그나저나 가흔이 그의 신변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에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노웬은 슬슬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은 상황이라는 판단에 지금까지 그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입을 열었
다.
"전에 가흔군이 젤을 위험에서 도와 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의 재빠른 행동이 아니였다면 큰일이 날뻔했죠."
"그래. 그렇지만 가흔이 그 때 젤의 마력을 봤다는 것은 모르는 내용이겠지."
".................네?"
뭔가 잘못들은 건가해서 에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잔을 내려 놓았다.
지금까지 누가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의 마력을 봤다는 소린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애초에 불가능이기에 없는 것인데 노웬은 갑자기 저런 말을 해서 사람을 헷
갈리게 하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못 들었어요하는 것같은 표정을 짓는 에스에게 웃어보인 그는
입가를 올렸다.
"가흔군이 젤의 마력의 파동을 봤다는 소리를 라프헨이 들은 모양입니다."
"....그런.."
"그래서 우리들도 나름대로의 복선을 깔아두긴 했는데 저렇게 훌륭하게 걸릴줄은
몰랐는 걸. 아니, 예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뭔가 잘 못 들은것 같은 소리에 에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앞으로의 그의 반응을 익히 예상할수 있었던 노웬은 팔짱을 까며 몸을 뒤로 물렀
다.
"라프헨의 말을 듣고 가흔 그가 특이체질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지요. 뭐라해도 다른
세계의 인간이니.. 그런데 용이 깨어났다는 시기를 헤어려 보니 가흔 그가 나타난
시간과 일치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
"확률이 희박한 도박이었지요. 설마하니 정말로 저 용이 가흔에게 올지는 몰랐지
만, 일단 그는 왔습니다."
말을 하며 노웬은 젤이 뒤에서 내민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노웬의 말을 미쳐 이해하지 못한 에스는 상자안에서 들어난 붉은 보석에 안색을 달
리했다.
"노웬님!! 당신이란 사람은...!!!"
분명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어째서 이런 대륙 보물급인 붉은 피의 보석이 그에게 있는지는 알수없지만, 문제는
이 심장에 이끌려 일단 드래곤이라고 추정되는 소년이 왔다고 생각할수 있다.
다른 용의 파장을 눈치 챌수는 없겠지만 알게 모르게 끌리는 법.
그래서 용들은 대륙의 왕가나 드래곤의 무덤이라는 산맥근처에 자리를 잡고 그 파
장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흔과 용의 관계는 이해할수 없다.
노웬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에스의 얼굴을
보며 노웬은 입가를 비틀었다.
거사를 치루기 위해서 자신은 필히 악인의 역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용의 기사가 있다고들 하죠. 그들의 조건은 바로 마도력을 알
아보는 자. 용은 인간의 기를 알아차리지만 그 근본은 알수없어 자신의 기사를 알
아보지 못하니 인간쪽에서 마도의 흐름을 보고 자신과 파장이 맞는 용을 찾아 그들
의 심복이 되는 것이죠. 뭐, 여기서 약간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나 할까?"
"무슨 그런.... 전설은 전설일 뿐, 저런 거대한 존재들에게 인간의 기사가 필요할 이
유는."
"여러가지의 용도가 있다는 것이죠. 에스군."
턱을 받치고 미소를 지어보이는 노웬은 점차 안색이 달리지는 에스의 얼굴을 감상
했다.
에스의 저택에 돌아와 비잔힐가에서 거래가 제대로 종결되지 않고, 에즈들이 구매
한 것들에 약간의 열이 받은 그는 그날 밤 라프헨에게서 들은 가흔에 대한 이야기
에 단숨에 머리의 열이 식혀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고대전설, 그리고 정보길드에서 얻은 용이 일어난 시기.
자신의 생각이 상상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근래에 들어 갑자기 압박을
가하는 중앙국에 맞물러 뭔가 하나의 변수를 찾던 그에게 그것은 할만한 도박이었
던 것이다.
"정말로. 그 꼬마가 용이라고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젤이 말했는 걸요. 게다가......"
"..........."
"기절하고 있는 사이 붉은 피의 보석을 테이블 밑어서 접근 시키니 그의 가슴쪽에
붉은 기운이 떠돌기도 했고 말이죠."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노웬의 얼굴을 보며 에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용이라니.. 어릴적인 숙부에게서 듣고 스스로 서적을 통해 알아본 것. 그리고 중앙
국에서 봤던 존재가 그것에 대한 에스의 지식 전부였다.
갑자기 나타나 이것이 용이라고 해도 그런 현실성없는 이야기를 갑자기 믿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요새 음식을 먿어대던 범인을 잡은 것은 에즈의 짜증을 듣지않
아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용이라니... 그런......."
"그런 이유로. 에스군 가흔군의 옆에 붙어서 그 녹의 용의 감시를 부탁드립니다."
내심 웃어보이는 노웬이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당황을 했기에 계속 미소를 짓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나다니... 에스가 돌아가면 젤과
좀더 대화를 나눠봐야 겠다.
용이라니..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변수인 것이다.
게다가...
"인간으로 변했다지만 구속구를 하기전인 용과 아무렇지도 않게 접촉을 할수 있다
니.. 재미있군."
용을 안고서 들어온 가흔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웬은 미간을 눌렀다.
바야흐로 칸의 일행 사이에 이변이 생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풀란 말이다! ! 이런 무례하고 비천하고 지저분하고 어리석고 멍처....읍읍
읍~~! ! !"
"입좀 다물어라. 시끄러운 꼬맹이."
"퉷!! 누가 꼬마라는 거냐?!! 네놈이야 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것 같은...크엑!!!"
"그러니깐--- 시끄럽다고. 네놈."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먼저 천을 구겨 입안에 쳐넣었더니 그것을 뱉어내고 또다시
목청을 높이는 꼬마에게 질린 칸은 급기야 입에 물고있던 빵을 들어 억지로 구겨
넣었다.
수분의 흡수가 빠른 빵에다 그것을 깊숙히 넣어져 용은 안그래도 목이 마른데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몇일전부터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두 다리를 의지하던 유쿠렌
은 이들 무리를 발견하곤 약간의 음식을 조달받은 것받에 죄가 없는데 이놈들은 자
신의 목에 이상한 것을 달아 마력을 막고선 온몸을 포박한 것이다.
정말이지 성년이 된지 1500여년.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 ! !
"..좀 불쌍하네요. 나이도 어린데."
"하지만 용이라는 데요?"
"흐-음. 용이라 전 처음봐요."
"! ! !(남의 볼 찌르지마!!!)"
아무리 위협을 하려 두눈을 크게 뜬다해도 사랑스럽기만 한 용모에 큰눈을 더 크게
뜨는 것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귀여웠기에 라프헨은 환호를 올리며 용의 볼을
찌르고 있던 손가락을 치우고 온몸으로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차를 마시며 보고있는 가흔은 어설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라프헨에게 안겨 거의 질식할것 같이 얼굴을 창백하게 굳어버린 꼬마를 보자니 불
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젤에게서 그의 정체가 용이라는 것을 듣고 나니 그다지 연
관되고 싶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외관은 꼬마인데다 저런 사랑스러운 얼굴...
"확실히 귀여워..."
"게다가 피부도 보드랗군요. 아기같아요."
"정말... 이런 자연스러운 머리색이라니... 염색한 것들만 봐왔는데 말이죠."
"제 머리카락보다 약간 어둡네요. 그래도 귀여워."
미개한 인간인 주제에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주무르다니...! ! !
각양각색으로 주물러 지는 얼굴 근육을 이상하게 비틀며 입안의 빵을 우걱우걱 씹
어대는 용이었다.
어찌되었건 입안의 이것을 없애야만 뭔가 말을 하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또 귀여워 라프헨과 가흔은 그의 몸을 마구 주물러 대고 있었으니, 그
것을 지켜보는 라헨과 칸의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에스는 마차 밖을 쳐다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용의 얼굴을 그렇게 마구 주무르다가 나중에 큰일 당해도 몰라요..."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계속해서 용의 얼굴을 주물러 대는 두사람이다.
"뭐야. 저런거한테나 붙어있고.. 라헨 안 그래도 좁으니깐 라프헨 데리고 나가란 말
이다! !"
".....라프헨이 여기 있기를 원하니 어쩔수 없어."
"정말이지. 무른 놈들밖에 없냐? 여기는..!!"
그런 자신도 가흔에게 한없이 약하게 구는 주제에 자신에게 뭐라 그러는 칸의 모습
이 얄미웠지만, 생각대로 말했다가 말도 안되는 어거지 백마디를 듣는 것보단 참는
게 나았다.
묵묵히 검을 닫아가는 라헨의 모습에 혀를 찬 칸은 용에게 달라붙어 얼굴에 상기한
채 부비적 대는 가흔을 라바 보았다. 전보다 약간 화색이 보는 얼굴이 보기 좋았지
만 저런거에 달라붙어 있는게 영 거슬린다.
그렇다고 꼬마놈을 막 대할수도 없는게 젤에게 용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저런 어린 녀석보다 훨씬 큰고 강한 용을 만난적이 있었던 칸에게 있어서 용들은
되도록이면 만나기 싫은 존재인 것이다.
그 큰용한테 당한일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용들은 전부 재수없다고, 오랜 산게 최고지.. 하여간.."
투덜대는 칸의 말에 미간을 찡그린 에스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뭐라 말하려다 참았
다. 가만히 잘 지내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옛날일을 회상하며 한마디씩 하는 것은
좀 참아 주었으면 한다.
에스도 노웬과 같이 칸이 좀더 강해져서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만 나아가 자신들에
게 뭔가 강한 믿음을 주었으면 했다. 옛날이 무색해 질 정도로 무력하게 지내는 그
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하곤 했다.
슬슬 결전의 날이 가까워 짐에 따라 체력이 떨어짐에 따라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럴때 뭔가 활기를 불어 넣어 줄만한 일이 없을까나..?
"이런 천한 것들!! 당장에 손을 떼지 못해?!! 읍~ 어딜 잡는 거야?!!"
"입술이 너무 도톰해서.. 한번 만지고 싶었어요. 안되는 거였나요?"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안돼지!! 멍청한 것!!!"
손이 풀어져 있었다면 눈앞에서 얼굴을 갸웃거리는 초록머리의 머리를 한대 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용은 아직 입안에 남아있는 빵 부스러기를 삼켰다.
갑자기 휴면에서 깨어나 충분한 음식섭취가 필요한데 이놈들은 자신을 굶겨 죽일
생각인지 묶어놓고 희롱하기만 할뿐 물 한모금도 주지 않고 있다. 만약 자신이 본
체의 모습이었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백번은 날려주고도 남았을거라 생각하는 용
이었다.
"뭔가 마실거라도 줄까?"
"..........뭬라?"
"그러니깐 마실것을....."
개중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인간이던 가흔이 물잔을 내밀자 용은 입술을 비죽대며
잔에 입을 대었다.
목안에 걸려있던 것들이 같이 넘어가는 감촉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평소 너그럽고 관대하기로 유명했던 자신의 심기가 이처럼 불편하지 않았다면 미
개한 인간일지라도 한마디 치하를 했을건만.... 혀를 차고 싶은 기분에 잔에서 입을
때고 얼굴을 든 용은 그러나 두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의 기세에 움찔
했다.
묘했다.
뭔가 뭔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인간은 상당히 묘한 존재였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머리속에 하나의 막이 쒸인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공복감과 나른함에 이성적인 사고를 할 여력없이 마구 걸음을 옮기다 이곳
에 와 약간의 음식을 섭취할때도 온전한 사고를 할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과 접촉을 하자마자 그 멍함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숲의 안개가 날이 밝자 완전히 사라지는 것 처럼. 그래서 지금은 꽤나 살
아 날뛰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 이녀석에게 마력을 분명 발사했는데
도 불구하고 이놈은 아무렇지도 않았지.
설마하니 잠들어있는 동안 마력이 봉인된 건가?
"...얼굴에 뭔가 묻었나?"
아니면 반말한다고 노려보는 건가??
존댓말을 해야 하는 건가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던 용은 고
개를 돌려 칸을 바라 보았다.
눈앞의 검은 머리는 이 세계의 존재같지 않은 미묘한 이질감과 동시에 확실히 어긋
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데다, 저 앞에서 검을 만지는 녀석은 역성장의 흔적이 남
아있다. 게다가 앞에 앉아 지신을 귀여워 죽겠다는 녀석의 신체흐름은 비틀어져 있
고, 저 덩치큰 검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마구 풍겨대고 있었다.
그나마 밖에 앉아있는 에스라는 녀석이 이중 제일 정상적으로 보였지만 일반적으
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볼땐 꽤나 우수한 종자.
도대체 뭐하는 녀석들이냐.
잠들기 직전 폴리모프를 해서 약간의 인간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렇게 개성이 강한
집단은 또 처음이다.
게다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이 구속구.
용인 자신을 이러게 간단히 묶을 수 있는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아 어느 왕궁의
망명왕족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놈들은 나라를 세워 자신을 그 나라에 종속시키려는 속셈? ?
"..농담이 아냐...."
으득.
아직 에어션트급도 되지 않았는데 나라에 엮매이는 건 절대.
절대절대절대 사양이다.
반드시 이놈들을 밟아주고 나서 이곳을 떠날것이라고 결심하는 유쿠렌이지만, 갑
자기 이를 가는 모습은 귀엽기만 했다.
"용의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회색의 머리카락을 늘여뜨린 여자는 이마에 그려져 있던 붉은 인을 서서히 지우며
눈동자를 들어냈다.
아무것도 없는 흰자위가 기분 나쁘기만 했지만 옆에있는 사이키가 아무말도 안하
고 표정을 굳히고 있기만 한 이상 요크발 그도 내색하지 않고 팔장을 끼고 있었다.
여러번 왔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곳이다.
어두운 지하에 자신같이 화려한 인간이 왠 말이란 말인가?
손수건을 들어 지하의 퀘퀘한 냄새가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듯이 코를 막는 사내의
모습을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여자는 핏기없는 입술을 열었다.
"칸크빌레님 일행과 조우한지 하루만에 사라졌습니다. 그들과 함게 있다고 밖에 생
각되지 않는군요."
"용을 기를 일시에 사라지게 할만한 물건은 그리 흔한게 아니야."
"앞서 비잔힐에 파견된 자들의 말에 의하면 몇몇의 신보가 분실 되었답니다."
여자의 말에 사이키는 미간을 접었다.
비잔힐의 가주인 남자가 사라지면서 신보를 가지고 간 모양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노웬의 손안에 들어가 있겠지.
펴지지 않는 사이키의 이마의 주름을 확인한 요크발은 입가를 비틀었다.
언제나 뻔뻔한 낯짝으로 평정을 유지하던 그의 모습이 꽤나 고까웠던 그로썬 이런
얼굴은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그런 요크발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이크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요새들어 황제의 명에 따라 저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가고는 있지만, 뭔지 모르
게 불안한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은 그 가흔이라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나타났을 때부터 더욱더 강해졌다.
"일렌."
"네."
"용에 대해선 레아나님께 맡기고 그대는 칸크빌레님과 가흔이라는 소년에 대해 추
적하라."
"잠깐 기다려 그 미인소년에 대해 뭘 알아보라는 거야? 우린 칸크빌레만 신경쓰면
된다고."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가흔의 묘한 분위기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던 요크발은 가
능한한 그 소년을 가장 온전한 상태로 손에 넣고 싶었다.
사이키는 평소엔 얌전해도 한번 일을 추진하면 몽땅 쓸어버리는 타입이기에 요크
발은 초조해 졌다.
그런 요크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이크는 정면에 시선을 두었다.
"그 소년...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것같은 기분이 듭니다."
"뭐? 무슨 소리야. 그런 꼬마가 무엇을 하겠다고."
"나중일은 모르는 것이니깐요. 그럼 올라가 보죠. 황제폐하와 알현이 있습니다."
기다리게 하면 실례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고지식한 사이키에게 질린 감이 없지 않지만, 얼굴이 반반해서 봐준다며 요크발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기분나쁜 지하에서 올라왔다.
주변의 마을보다 한층은 더 높은 산맥의 지대를 평평하게 깍아 여타의 왕국보다 10
배는 족히 넘는 대지 위에 쌓여진 하얀성.
사람들은 그 성을 신기루 성이라 부른다.
도저히 인간계의 건물같지 않은 기묘한 구조와 주축들. 그리고 하늘 높이 뻗어나간
수개의 탑들은 마치 하늘과 이어진 사다리 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주변에 산들이 많으니 안개가 자주 껴 성 자체가 구름에 쌓여있는 듯이 보이니, 그것
은 황제의 권의와 맞물려 백성들에게 커다란 위압감과 선망감을 갈수록 높게만 만
드는 하나의 장치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왕의 지위는 신과 동등할만큼 높아져 아무리 대귀족이라지만, 황제를 만
나기 위해서는 수십개의 문과 수천의 병사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황제와 직접 만날수 있을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요크발과 사이크
는 병사들의 별다른 제지없이 황제의 후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성 밖깥쪽은 화려하기 그지없건만 황제와 가까워 질수록 정원
이든 건물이든 삭막함을 짙게 뿌리고 있었다.
자고로 건물은 살고있는 주인을 닮아가는 법이라고 했다.
끼--익.
왕과 통하는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붉은 양탄자와 수십개의 황금 기둥이
화려한 빛을 뿌린다. 다른 나라의 사신들은 입구에서 점차 깍이던 허세들을 여기서
부터 그나마 남아있던 것까지 완전히 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번 봐왔지만, 볼때마다 자신의 취향인 화려하기 그지없는 내부모습을 만족스럽
게 바라보던 사이키와 왕좌 앞까지 걸어진 요크발은 멋들어지게 허리를 숙이며 황
제에 대한 예우를 차렸다.
남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것 자체를 커다란 수치로 아는 남자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존재이건만 그 최상의 예우를 받는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그동안 편안 하셨는 지요."
"그다지."
심드렁하게 답하는 황제의 목소리에 허리를 좀더 숙인 사이키는 그동안의 일에 대
해 의례적인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문서를 여러장 보내기도 했고, 황제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행적을 알아 보
았겠지만, 여기선 이런 말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와 대화할 내용이 없어지는 거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요크발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는 것
은 절대 있어서는 알될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남쪽으로 입성한 칸크빌레 일행은 현재 겔당글 산맥을 피해 그랑푸렌 쪽으로 이동
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서쪽입니다."
"그랑푸렌이면, 요크발 그대의 영지가 있는 곳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랑푸렌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에스가 경악을 한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변태라며 질색하는 요크발이라는 남자의 거대한 영지가 들어가 있는 지역으로, 서
로 올라가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피해 가기도 어려운 남자인데 굳이 마주쳐서 무엇하겠느냔 만은 그들은 어리석게도
요크발과의 만남을 이끌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도를 짐작할수 없는 사이키로썬 그것에 대한 접근을 최대한 신중히 하려하고
있지만, 옆의 붉은 머리 남자는 마냥 들떠있었다.
"사자굴로 들어오는 어리석은 놈들이 아닙니까. 황제시여, 조금만 기다리시면 칸크
빌레의 목을 그대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호언 장담을 하는 요크발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황제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
늘게 접으며 붉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을 보고 볼록해지려는 아랫도리에 당황한 요크발이건만, 상대가 발정을 하
든지 말든지 관심없다는 듯이 예의 그 나른한 음성으로 입을 연 황제는 자신의 귓볼
을 주물렀다.
"지금 당장 데려와."
".......네?"
색기가 넘친다라는 말로도 표현 할길없는 유혹의 움직임에 한동안 넋이 빠진 요크
발은 무례하게도 황제의 말에 대꾸를 하는 행동을 해 옆에 있더 사이키의 미간을 찡
그려지게 했다.
하지만 그런 요크발의 행동에 별다른 제지를 하지않은 황제는 자신의 빛바랜 햐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칸크빌레든, 가흔이라는 그 이상한 꼬마든. 둘중 하나를 내게로 데려와라."
".....황제폐하. 아직 시기가...! !"
"시기라는 건 내가 정하면 그만인 것을. 설마하니 못한다는 건 아니겠지?"
한없이 싸늘한 눈동자는 순간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사이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마를 바닥의 고급스런 붉은 융단위에 비볐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사이키와 요크발을 바라보던 황제는 손가락으로 꼬던 머리카
락을 입가로 가져다 대며 나가는 듯이 손을 내쳤다. 그 움직임에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키의 어깨를 잡아 일으킨 요크발은 다시금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려 알현
실에서 나섰다.
끼--익.
쿵.
워낙에 거대한 문은 열릴 때도 닫힐 때도 꽤나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얼마쯤 알현실에서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쯤 요크발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
무르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런 요크발의 옆에서 사이키는 안색은 굳힌채로 입가를 꾹 다물고 있었다.
아까 황제의 호통에 기가 죽은건가하고 위로를 하려던 요크발이지만,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쉴새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확인하곤 들어올리던 손을 내려놨다.
그나저나 칸크빌레와 가흔이라는 소년 중 하나라는 건가.
어느 것이든 완전한 상태의 것만을 원하는 황제이니 이번엔 상처하나 없이 둘중하
나를 낚아야 하는 건가.
여간 어렵지 않은 분부에 요크발은 이를 들어내고 웃었다.
자고로 어려운 일일수록 투지가 샘솟는 법이다.
덜커덩
요즘들이 재미들린 움직이는 마차에 턱을 올려놓고 흔들리는 데로 몸을 가만히 냅
두는 행동을 하며 가흔을 어두워 지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해가 짧아지는 것이 슬슬 추워질 것 같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가흔은 터져나오는 하품을 하며 몸을 들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뒤를 돌아 보았다. 타칭 용씨는 엎드린 채로 잠에 들어 있었는데 그위에 올려져
있는 칸의 모포를 발견한 가흔은 미소를 지었다.
마주칠때마다 이를 들어내긴 하지만, 자신보다 어린아이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마
음은 없었는지 저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곤 하는 거다.
"이봐! 내 모포 못 봤냐?! !"
"어라? 칸님. 아까 라프헨이 들고 갔던것 같은데 말이죠."
"라프헨? 이 녀석 어디에 있는 거야??"
....아무래도 라프헨에 멋대로 칸의 모포를 가져와 용에게 덮어준 것 같다.
일어나 용에게 다가간 가흔은 그에게 덮혀져 있던 모포를 들어 그위에 자신의 모포
를 다시 덮어 주었다. 칸의 모포를 잘 접어들고 마차밖을 내다보자 여기저기 마차안
을 기웃거리는 칸의 두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미소를 지은 가흔은 칸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칸은 자신의 이불을 들고있는 가흔의 모
습에 화색을 들어냈다.
"뭐야? 가흔이 가지고 있었던 거야? 미리 말했으면 안 찾았잖아."
"칸이 찾는 소리에 마차안을 둘러보니 눈에 뛰더라고 고요."
신나하며 모포를 받아든 칸은 그것을 자신의 몸에 둘렀다.
엄살많고 짜증이 심한 그는 저녁에 갑자기 닥친 추위가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멀리 라헨의 말위에 타고 있던 라프헨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과하는 듯한 행동
을 취하자 괜찮다며 손사례를 친 가흔은 움직이는 마차를 따라 걷고있는 칸을 바라
보았다.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와 있는게 어때요?"
"됐어. 그 안에 있느니 차라리 노웬하고 있는게 낫다고."
"그런가요?"
"그런거야."
딱 부러지게 답한 칸은 가흔뒤로 보이는 용의 모습을 한참동안 노려보다 갑자기 싫
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찌뿌리며 몸을 돌려 자신의 말이 걷고있는 곳으로 달
려갔다.
그 모습을 마차턱에 엎드리고 바라보던 가흔은 자고있던 용이 뒤치닥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올려져 있던 천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와 등불을 밝혔다. 처음엔 미숙하기만
했던 이런 것들도 이제는 왠만큼 숙련되서 처음보는 자라면 가흔이 이계인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밖의 바람에 잠이 잠시 깨었던지 눈을 가늘게 뜨고 등불을 들고있는 가흔을 바라보
던 유크렌은 여전히 묶여있는 자신의 팔을 확인하곤 미간을 찌뿌렸다.
그 모습에 들고있던 등불을 내려놓은 가흔은 주위의 배게들을 모아 유크렌의 주변
에 놓아 주었다. 팔과 몸통의 사이 간격을 조금이라도 넓혀 그가 불편하지 않게 하려
는 의도가 담긴 움직임에 평소 자신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요란하게 구는 그가 조용
하다.
"추우면 하나 더 덮을까?"
"됐어. 땀나 죽겠는데, 이 위에 있는 것도 치우라고!!"
"그러면 나중에 추워서 잠도 안 올껄? 그냥 그리고 있는 편이 좋아."
단호하게 말하는 가흔의 폼에 유크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중의 용. 겔당글 산맥의 유크렌시아가 이 무슨 한심한 꼴이란 말이냐.
잘 자던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부터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냥 무턱대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가, 알수없는 놈에게 잡히고, 뭔가를 채워지고 온몸은 결
박 당하고...
몇일전부터 불편한 몸으로 음식을 섭취했더니 나오는 것도 변변찮다.
하지만, 아무리 불평 불만을 터뜨려도 이 오만방자한 인간 녀석들은 신경도 안쓰니..
"목 말라? 물이라도 마실까??"
평소 자신이라면 아무리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라 할지라도 반말을 지껄이는 녀
석따위 용서할리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 자신에게 말을 놓은 비천한
인간놈들을 볼때마다 울컥하긴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처음에 자신의 마력이 통하지 않아 자신을 신부로 맞겠다며 쫒아다니는 변태용 드
아글라 산맥의 융텐인줄 알고 꽤나 적대감을 불태웠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니기도
했고, 인간들 중에서 자신을 가장 신경써주는 자이기도 했으니....
게다가 녀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눈앞의 검은머리는 가흔이라는 이름을 지
닌 이계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력이 통하지 않는데다 인간 사이에선 절대로 날수없는 순수
한 흙빛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자신과 같은 용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는
데, 이계인이라고 하니 그 머리색과 눈동자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선대 용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선 여러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중엔 다른 세계로 건
너갈수 있는 끈도 있다고 했다.
눈앞의 놈은 분명 그 끈을 잘못잡아서 이곳으로 날라온 놈일거다.
그래, 이세계의 놈이 아니기에 용인 자신이 이런 녀석에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일거다.
"자 마셔도 돼."
눈가를 가늘게 접어 웃는 가흔의 얼굴을 한동나 올려다 보던 유크렌은 입술을 오무
려 몇모금 넘겼다. 그러나 그 이상 마시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가흔은 들고있
던 잔을 내려놓고, 어깨까지 내려온 모포를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더 자라는 듯이 토닥여주는 손길에 기가 막히는 용이었지만, 갑자기 닥치는 수마는
어쩔수 없었는지 금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 든다.
끼-익
"나와요, 가흔. 라헨이 자리를 잡은 모양입니다."
어두운 건물안에서 다른 일행들과 숨어있던 가흔은 밖에서 얼굴을 내밀고 손짓하는
에스의 모습을 확인하곤 쪼그려 앉아있는 몸을 일으켰다.
그 옆에 마찬가지로 앉아있던 유크렌은 가흔이 일어서자 따라 자리를 일어났다.
헤진 천으로 온몸을 감아 손목이 결박당한 것을 사람들의 눈에 가린 용의 작은 몸을
안아든 가흔은 밖에 서있는 에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반다나를 끌어내려 눈을 가렸
다. 어두워서 남들에게 자신의 눈동자가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상황에 대
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저들은 어떻게 지내는 건가요?"
아직 낡은 건물안에 남아있을 사내들을 떠올리고 묻자 에스는 걸음을 옮기며 답했
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있을 때는 뭉쳐있는 것보단 신분을 위장해 무리를 나누는 것이
죻죠. 일부는 마차를 끌고 먼저 밖으로 나가 있을테고 몇은 신분을 숨기고 저희들을
주변을 맴돌며 경호를 할겁니다."
"....상당히 조심하는 군요."
"적진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답니다."
솜씨좋게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에스의 모습에 혀를 차며 가흔은 걸음을 더 빨
리했다.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짐을 하나 들고있기에 자연히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그런 가흔의 고초를 아는 것인지 품속의 용은 그답지 않게 조용했다.
라헨은 칸들과 다니기 전에 라프헨 둘만이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라프헨이 전엔 꽤나 실력있는 신관이었다는 말에 왜 지금은 안그런지 이유는 그들
의 분위기에 눌려 묻지는 않았지만, 라헨은 그가 전에 동쪽 망국의 기사였다는 사실
을 알려주었다.
가주였던 사람과의 마찰로 라프헨을 데리고 떠돌아 다니며 이곳저곳에 연고지가 많
다는 그의 말에 따라 십여명이 묵을수 있는 숙박지를 금새 찾아왔던 것이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몰래 여행을 다니기에 낡고 다 무너지는 숙박소를 생
각했던 가흔은, 그러나 깔끔하고 잘 정리되어있는 건물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
다.
"무슨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다들 낡은 건물부터 뒤지죠. 이렇게 깔끔한 건물에 있을
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렇군요."
"잘 알아둬요. 실전에 사용하는 거니깐 꽤나 도움이 될 겁니다."
웃어보이는 에스를 따라 뒷문으로 들어선 가흔은 식당인 듯한 곳에 보이는 사람들
의 모습에 시선을 주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계단을 올랐다.
외관보다 화려한 내부의 모습에 가흔은 이곳에 아마 특급호텔 정도는 될 거라고 생
각했다.
끽.
"늦었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려한 침대위에 늘어져 있던 칸이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 한다.
어김없이 가장 좋은 방에 배정받아 커다란 침대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칸의 모습
에 가흔은 저도 모르게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소파로 다가가 그위에 용을 내려
놓고 뒤집어 두었던 모포를 집어 들었다.
이 세상 모든것이 불만이라는 듯 볼을 부풀리고 있는 용의 모습에 어설프게 웃은 그
는 입에 붙어있던 천을 떼어내고 자리를 편하게 잡아 주었다.
"도대체가 네놈들은 허구언날 이몸의 입을 틀어막는 이유가 뭐야?!!"
"시끄러우니까다!! 이 재수없는 도마뱀아!!"
"뭐? 뭐~?? 도..도마뱀?!! 이..이런 조그마한 자식이! !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안 그래도 자신과 멀리 앉는데다 용과 찰싹 달라붙어 있던 가흔의 모습에 심기가 불
편했던 칸은 목청을 높이는 용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침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용의 성장한 모습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찌보면 축소한 도마뱀이 살찐것과 비
슷한 모양이라 그들을 깍아 내릴때 흔히 도마뱀이라 지칭한다.
별 의미없이 말해도 듣는 사람은 기분나쁜 법인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투니
자연히 방안의 분위기가 살벌해 진다.
그런 칸과 용의 모습에 노웬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는 가흔뿐만 아니라 칸도 용과 잘 지내야 하거늘 저 모습을 보
면 계획은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때때로 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런 꼴이라 네놈들에게 이런 모욕을 듣고 있지만, 두고봐라! ! 용이 되면
모조리 밟아 줄테니..! !"
이를 갈며 말하는 투에 에스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쩔수 없는게 지금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라지만 사실은 용이니 그런 그의 말이 헛
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현재로썬 가장 위험한 인물은 칸도 아닌 바로 저 용이라는 존재.
또다시 뭐라 입을 열어 분위기가 더 망쳐 놓으려는 칸의 모습에 온몸을 내던진 그는
손을 들어 칸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에 맞춰서 차를 따른 가흔이 용의 입가에 대주며 웃어 보였다.
사실 용이 없던 세계에 사는 그로썬 외모가 꼬마인 주제에 살벌한 말을 내뱉는 건 단
지 투정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 마셔."
꿀꺽.
가흔이 주는 차를 마신 유크렌은 입을 떼고 몇번 입맛을 다시다가 에스에게 입이 막
혀져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는 건방진 인간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놀리는 의도가 분명한 그 표정에 칸의 혈압이 기하 급수적으로 올라가 자신을 막고
있는 에스를 털어 놓으려고 했지만, 합류한 라헨에 의해 그대로 침대에 쳐박혔다.
"오늘은 다들 여행으로 지쳤을 테니 일찍 쉬도록 합시다. 나중일은 추후 알려 드리지
요."
자리에 앉아 젤의 차를 마시며 방안의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던 노웬은 찻잔
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뒤에 있던 젤의 건내주는 코트를 받아들며 방을 나섰지
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조금은 서글퍼지는 그였다.
안 그래도 심난한 상황.
그로썬 저들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는 하지만... 과연 무사히 이곳을 지나칠수 있을지...."
"사건이 터진다에 애플파이 하나 걸죠."
입가를 가리며 웃는 젤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저어보인 노웬은 숨을 내쉬었다.
"내기가 될수없는 건 말하는게 아니랍니다.
...................................일을 친다에 애플파이 2개 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