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쪽에 좀 손해가 있긴 했지만, 일단은 손에 얻었으니 만족해야 하는 건가?"
"매번 이런 거금을 저희들에게 사용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툴가쪽에서 작성한 서류의 서명을 하던 요크발의 허리를 숙이며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툴가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가흔과 오브를 넘겨받기 위해 그가 쓴 돈은 그로서도 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던 것
이나, 무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그런 요크발이 미소를 짓는 이유는 눈앞의
사내가 과거의 일을 되풀이 하지않기 위해 무난히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유쾌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툴가라는 사내는 뿌리까지 상인이라는 것을 버리지 못할 인간인 것이다.
서명을 마치고 서류의 내용을 다시금 흩어본 요크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툴가에게
로 넘겼다.
넘겨받은 서류를 마찬가지로 흩어본 그는 내용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뒤
에 서있던 사내가 들고있던 상자안에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이 문서하나로 저택의 규모를 10분지 1정도 더 늘릴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두사람을 넘겨 받도록 할까?"
"이미 데리고 오라고 시켰으니 금방 올겁니다."
"오늘은 거래는 무척이나 만족스럽군, 다음에 사냥이라도 같이 나가는게 어떻겠
나?"
"원하신다면."
무척이나 아끼던 것을 빼앗겨 속이 쓰릴텐데도 여전히 예의바른 모습을 지우질 않
는 그의 모습에 요크발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왕이면 엄청 분해하는 얼굴을 지어주는 쪽이 훨씬 더 즐거울 텐데 말이다.
흥미를 빼앗겼다는 요크발의 표정을 확인한 툴가는 웃는 낯이지만, 소매 밑으로 숨
겨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손등엔 이미 핏줄이 붉어져 나왔지만, 그의 웃음엔 단한치의 변화도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지위를 넘겨준다고 하기전까진 절대 가흔
과 오브라는 녀석을 넘겨주지 않은 심산이었지만, 중앙국의 황제와의 연줄을 은근
히 내비치며 자신의 가문을 압박하려는 것에 눈물을 삼키고 굴복할수 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두렵지 않지만, 수만의 개인 사병을 지닌 황제가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기다 언급을 하진 않았지만 론을 데리고 온것은 그를 끝까지 버틸수 없게 만들었
다.
"론이라는 아이 꽤나 많이 컸군요."
"그렇지? 어릴때는 꽤나 그를 닮았지만, 크면서 점점 달라지고 있어. 황금빛과 가
까웠던 눈동자도 이제는 연갈색으로 바랬고 말야."
".....그렇군요."
비열한 하이에나 같은 녀석.
심드렁하니 론에 대해 말하는 투가 질리면 금방이라도 버릴것 같아 툴가는 내심 초
조해 졌다.
5년전 론을 처음 보자마자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그답지 않게 정성을 쏫아 부었는
데, 눈앞의 사내가 그를 발견하자 그대로 탈취해 가 버렸다.
말 그대로 탈취인 것이 그때는 황제와 대동하고 당당히 론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아무리 마음에 들었던 녀석이지라만, 가문의 존속 문제완 비교할수조차 없는 큰 차
이가 있었기에 어쩔수 없이 넘겨 줄수밖에 없었다.
"............."
요크발이란 놈은 언제나 원하는 것에 파장이 맞아 떨어져 피곤하다.
쓰린 속을 달래며 웃음을 짓던 툴가는 열려진 문 사이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병사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저택내에서 조용히 하라는 자신의
말을 어기는 행동을 하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뿐이다.
"툴가님! !"
굉장히 불안한 예감에 툴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엎드린 사내를 내려 보았다.
"감옥에 같혀있던 두사람이 사라졌습니다! !"
"아직 저택내에 있을 거다. 쥐잡듯이 뒤져라! !"
"만약에 잡지 못하면 네놈들은 다 모가지야!"
"뒷뜰로 내려가 보자. 넌 여기에 남아서 사람들이 오면 뒤진 장소를 체크해줘."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바닥 사이로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틈이 벌
어 졌다가 이내 닫혔다.
위의 상황을 상펴본 론은 사다리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 보는 두사람을 향해 낙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에 가흔과 오브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시선이 한참이나 내려가
는 용이 뭘 안다는 듯이 팔짱을 낀채로 '흐음'거리자 얼굴을 묘하게 이그러 뜨렸다.
가흔의 등뒤에서 난리 아닌 요란을 떨어대는 용의 모습을 보다못한 오브가 내려놓
으라고 강하게 권고해서 일단 자유롭게 두기는 했는데, 이놈의 꼬마가 저 칸이라는
녀석과 똑같이 행동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크기만 달랐지 완전 싸가지없던 칸이란 놈의 판박이다.
"우리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예요. 일단 숙소에는 한사람이 남아서 사람
들의 장소를 배치할 요량인것 같긴 한데....."
"한 사람. 뿐인가요?"
"설마하니 우리들이 이런 곳 밑에 있을거라곤 생각치 못하는 거겠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론의 모습에 턱에 손을 대고 고심하던 가흔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론이 내려왔던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밑에서 그런 가흔의 모습을 보던 세사람은 뭐하는 짓이냐고 작게 소리를 쳤지만,
그런 것을 무시한 그는 끝까지 올라가 사각형으로 나있는 덮개를 살짝 올려 보았
다.
보기완 달린 꽤나 무게가 느껴져 팔이 후들거리고 머리에 열이 났지만, 들키지 않
기 위해서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을 열었다.
이 덮개의 위치는 아무래도 책상 밑인 모양인지 눈앞에 낡은 구두끝이 들어온다.
숨을 죽이고 앞의 사내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가흔은 대담하게도 문을 완전히 열
어 재낀 다음에 바닥위로 올라섰다.
그런 가흔의 모습을 밑에서 보고 있던 세사람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가장 놀랐다
는 표정을 지었다.
끼-익.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지도에 X 자를 그리며 도망간 두사람이 있던 곳에 대해 고심
하던 사내는 목이 타자 오른쪽 위에 두었던 컵에 손을 뻗었다.
어차피 팔려나갈 놈들이 이렇게나 난리를 부리다니.
그 두사람은 이 바로챙 노예장이 선 이례 가장 사고를 많이 친 녀석들로 기록에 남
을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고있던 그는 벋은 오른손에 잡히는 컵이
없자 미간을 찡그리며 지도에 두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수고하는군."
"..........."
한손에 컵을 들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소년의 모습에 경비는 순간
넋이 빠졌다. 아랫층이라 빛이 들어오지 않아 두들어진 그 하얀 얼굴이 몽환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의 얼굴을 넋빠진 듯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에 입가에 걸린 미소를 점점 짙게
짓던 가흔은 컵을 들고있던 반대편의 손으로 그의 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퍼-억!!!
"커--ㄱ! !"
잔을 챙상위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뒤로 자빠지려는 사내의 멱살을 잡은 가흔은 인
상을 찌뿌리는 사내의 얼굴을 책상에 박으며 손목으로 뒷목을 가격했다.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사내의 눈앞에 손을 몇번 휘저은 가흔은
쉴새없이 뛰는 가슴을 달래며 턱으로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 일을 벌인건지 스스로도 알순없지만, 일단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가흔... 너 참 어이없는 녀석이었구나."
그가 걱정되어 올라온 오브는 책상밑에서 얼굴을 내밀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가흔이 사내를 뭐 패듯이 때려잡는 모습을 다 본 그
로써는 가흔을 살인에 충격을 받은 섬세한 소년에서 의외로 주먹이 쎈, 건드리면
위험한 녀석으로 평가를 정정했다.
"다른 사람들이 곧 올거예요."
챙상위에 올려져 있던 지도를 머리속에 넣으며 X 자로 그려진 장소를 기억한 가흔
은 밑에서 올라오는 용의 몸을 안아 들었다.
사태를 짐작한 모양인지 별만없이 품으로 안겨드는 용을 고쳐 잡으며 이 숙소 근
처. 사람들이 이미 뒤진 곳으로 이동하자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한번 간 장소는 다 돌아보기 이전에 두번은 가지 않는 법이니깐.
탁.
론까지 올라오고 밑의 문을 닫자 가흔은 창에 기대 밖의 상황을 살펴 본 다음, 조심
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이런 곳에 자신들이 있을거라는 것은 예
상하지 못한건지 지키는 자들이 없다.
뒤를 돌아보고 론과 오브에게 시선을 돌린 가흔은 눈동자로 옆으로 가라는 표시를
했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아마 이곳에서 빠져 나갈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
겨나기 시작했다.
"터무니 없는 녀석들이군."
설마하니 마력으로 묶어둔 쇠창살을 무력화하고 빠져 나갈줄은 몰랐던 툴가는 어
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오브라는 녀석의 목뒤에 박아둔 마력칩의 반응조차 없으니 이건 아직 빠져
나가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저택 내를 이 잡듯이 뒤지는 수밖에 없다.
가능성을 저택 내라고 잡아두긴 했지만, 아주 빠져 나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
기에 툴가는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비잔할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
" ? "
중얼거리는 요크발에 말에 툴가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일뿐인 요크발은 앞으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
락을 뒤로 넘기며,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툴가에게 말할수는 없는 거지만, 전에 비잔힐에서 가흔이라는 녀석을 구속했을 때,
녀석을 가둬 두었던 마력막이 무력화 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당시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현장이 다시금 생겨나
니 생각을 달리할수 밖에 없다.
인간으로선 그 누구든 마력을 정지시킬 순 없다.
.........가흔이라는 그 놈 의외로 거물일지도 모르겠군.
"툴가."
"네?"
"개인 사병을 풀도록 하겠다."
통보하는 식의 요크발의 말에 툴가는 미간을 꿈틀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수 밖에 없었다.
저택내에서 타인의 병사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은 꽤나 즐겁지 않은 광경이었지
만, 일단 이 자에게 넘어간 가흔과 오브의 실종에 관련된 상황이고 보니 딱 잘라 거
절할수가 없다.
고객에게 완전히 상품을 넘기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툴가 그에게 있는 것이다.
저벅저벅.
망토를 흩날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요크발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툴가는 내심 가
흔과 오브가 멀리 도망갔기를 바랬다.
지불한 돈에 대해 쪼잔하게 왈가왈부하는 요크발이 아니였으니, 그것에 대한 문제
를 넘기고라도 두 사람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그의 표정이 보기좋게 이그러진다
면 십년묶은 체증이 가라앉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봐."
"네?"
연신 어두운 오로라를 풍기던 주인이 자신을 부르자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는 눈을
꿈뻑꿈뻑뜨며 툴가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이를 들어내며 웃어보인 툴가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병사들에게 쉬염쉬염 찾아보라고 해."
"네..예에?!! 그..그렇지만.. 대공께서..! !"
"사병을 푼다고 하시질 않나. 오히려 이쪽은 방해가 되지 않게 물러나야 하는 건데
같이 움직이니 얼마니 실례인가. 되도록이면 그들에 눈에 띄는 행동은 안하는 게
상책이야."
"하..하지만...!!"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는 사내를 보며 툴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음산하에 입을
열었다.
"내말에 토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대가 지나가면, 난 바람이 되어 속삭이네요오오오~~"
"................귀가 괴롭다는 말은 이럴때 사용해야 하는 거겠죠."
차마 듣지 못할 노래소리에 에스와 옆에 앉아있던 시녀는 귀를 틀어막으로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았다.
둘이 그런 반응을 보이나 마나 마냥 신이 난 칸은 아예 허리를 돌리며 춤과 노래를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명색이 사랑의 연가라는 노래인데 저 경박하기 그지없는 허
리와 엉덩이 춤은 왠말이란 말인가.
올해로 4년차인 저택의 시녀는 이렇게까지 음치인데다 몸치인 무희단은 처음봤다.
아니, 이런 실력으로 무희단이라 하는 칸이라는 소녀의 모습이 차라리 어이없기까
지 했다.
무희단이라고는 하나 상황에 따라 몸을 팔기도 하는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비센 도련님께서 몸소 챙겨주시는 데다, 소녀의 모습
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호감을 품었던 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요새 유행하는 노래와
춤을 알려 달라는 둘이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히 응했지
만, 이렇게 되고나니 자신이 왜 수긍을 했는지 정말 원망스럽다.
자고로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배운다는 제자에 대해 들어봤어도. 하나를 가르키면
열가지의 헛소리를 하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이봐. 이 다음의 춤이 뭐였지?"
"......한손은 허리에 대고,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다 꽃을 바치듯이 앞으로 내미는
겁니다."
"이렇게? 요렇게??"
"............엉덩이는 흔들지 말아 주세요."
진전이 없는 칸의 모습에 시녀는 눈물을 삼키며 지적했다.
열등생을 가르키는 선생의 스트레스를 약간이나마 알게 된 기분이다.
"......;;;;"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 방방 뛰던 칸이 이렇게나 적극적
으로 배우는 모습은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지만, 저런 모습을 보자니 오히려 자신이
발벗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귀족들 앞에서 저런 꼴을 보였다간 비웃음거리가 될게 자명하
고, 그것에 분노한 칸이 난리를 친것은 불보듯 뻔한 일.
지금 같아서 오히려 자신이 춤과 노래를 부르고 저 칸이 악기를 연주했으면 한다.
"사랑이 나비가 되어 그대의 곁에 머무르네~~아아아~~"
"쓸데없는 바이브레이션은 조잡스러우니 관둬 주세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굉장히 피로한 안색인 시녀의 모습에 가엽기까지 하다.
일단 불붙은 칸의 열기를 꺼버릴 방법이 없는 에스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대
로 침대위에 늘어져 버렸다.
그러나 에스가 포기를 하던 기대를 하던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어느새 파티를 여는
저녁시간이 되어 버렸다. 생생한 얼굴로 옷을 입고 단장을 하는 칸의 모습과는 달
리 실상을 알고있는 에스와 시녀의 얼굴은 푸르딩딩.
그야말로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럼..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칸을 가르치면서 묘한 유대감이 생긴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두들이며 손을 올려
작별인사를 했다. 시녀는 이 두사람이 분명 귀족 능멸죄로 밤하늘의 이슬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신이라도 칸의 노랫소리와 춤을 본다면 엄청 화를 냈을거다.
측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칸에게
다가간 에스는 볼을 꿈틀했다.
그렇게나 싫어하다니 요란하게도 꾸며댄다.
"슬슬 가봐야 할겁니다. 그 비센이라는 도령이 오기전에 먼저 나가있어 줘야죠."
"남자가 먼저 와야하는 거 아냐? 에스코트하려면."
"저희들은 파티의 내객이 아닌, 무희단이라는 것을 알아주시죠."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머리통을 잡아 흔드는 상상을 하며 에스는 붓을 들고 볼을
터치하는 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몇일동안 여장을 했다고, 속까지 물든 것인지 하는 짓마다 맘에 들지 않는다.
아직 화장이 끝나지 않았다고 난리치는 칸을 끌고 문을 열자 마침 도착한 모양인지
잘 차려입은 비센이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칸의 얼굴을 확인하고
미소를 짓는다.
노골적으로 변하는 그 얼굴에 에스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무적의 콩깍지가 쒸여도 단단히 쒸였다.
"굉장히 아름답네요. 역시나 당신에겐 붉은 색의 옷감이 잘 어울리는 군요."
"이몸에 안 어울리는 옷은 없다고."
"그렇죠."
손가락을 저으며 말하는 칸의 모습에 에스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침대가에 놓여
있던 악기와 칸의 무기를 잡아 들었다.
들고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사사껀껀 자신을 관찰하는 저 노집사가 자신들이 없는
동안 방안을 뒤지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그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귀한 도령에게 달라붙는 자신들의
정체를 꽤나 밝히려 하고 있으니, 위험부담이 높아도 차라리 들고 가는 편이 더 안
심이 될것 같았다.
벌써 저만큼 사라지는 두사람의 모습에 달리다 시피해서 따라붙은 에스는 진행되
고 있는 두사람의 대화에 청각을 집중했다.
"그럼 여행 도중에 일행분께서 사라지신 거군요."
"글쎄. 친구의 미모가 너무 뛰어나서 난 납치를 당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리로 오
는 길인걸? 그러다 댁을 만난거고."
"납치요? 친구분은 당신처럼 대단한 미인인가 보군요."
어린아이같은 칸의 화법에 비센은 더없이 즐거웠다.
가볍게 응대하며 칸을 내려다 보던 비센은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얼굴에 숨을 죽
였다.
"................그래. 아름답지."
자신의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짓다가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답하는 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인지라 비센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렸다.
아이같이 장난스럽고, 가볍지만 결코 천하게 느껴지지 않은 활기를 사방에 뿌리고
다니던 칸이 저런 성숙한 표정도 짓을수 있을거라곤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정말로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자신의 모든 연줄을 이용해서라
도 반드시 찾아 내자고 결심하던 비센은 앞에서 걸어오는 사내의 얼굴에 고개를 갸
웃했다.
저자는 카일형님의 심복이란 자가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곳에 있는 거지?
"비센님."
"무슨 일인데 자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후작께서 긴히 할말이 있으시다고 부르십니다."
"...형님께서?"
안 그래도 칸에게 오기전에 형님의 방에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어 그냥 나왔었다.
이렇게 심복을 시켜 자신을 찾는 것을 보면, 급한 얘기라는 건데 칸을 두고 가기가
좀 껄끄럽다.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그
러나, 뒤에서 헛기침을 하는 노집사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집사를 따라 먼저 파티장에 가 계십시오. 불편하시면 제가 곧 올테니 그때 같이 가
시던 지요."
"아니. 혼자서 갈수도 있어."
같이 가자는 말을 기대했던 비센은 먼저 가도 무방하다는 칸의 반응에 약간의 섭섭
함을 느끼며 몸을 돌려 형님의 서재로 향했다.
잘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 비센을 배웅한 칸은 몸을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늙은이에
게 턱을 치켜 세웠다.
"어서 앞장서. 늙은이."
"뭐..뭐야?! ! 이 천한 무희단 계집이..! ! 헉? ?;;"
턱을 올린채로 오만하게 말하는 칸의 모습에 순간 혈압이 올라 삿대질을 하던 노집
사는 자신을 노려보는 칸의 금빛 눈동자에 입을 다물었다.
비센가에 종사한지 4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저렇게 눈빛만으
로 자신을 제압한 사람의 수는 극히 드물었다.
고작 어린 무희계집에서 눌렸다는 수치심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인정할수 없는 위
압감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땀을 흘리는 집사를 흘겨보던 칸은 코웃음을 치며
뒤에 서있던 에스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저택의 구조를 보아 파티장을 할만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빤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 노집사를 앞장 세우려 한것은 단지 그를 놀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좀...심하신것 아닙니까? 이로써 저자는 우리들은 더 의심하게 됐다고요."
"상관없어. 어차피 몇일만 보고 말 사람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되도록이면 얌전히 계셔 달라는 부탁은 무리일까요?"
"무리. 절대무리."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칸의 얼굴을 내려다 보던 에스는 고개를 저으며 눈앞에 보이
는 거대한 문에 시선을 주었다.
초저녁부터 시작해서 새벽의 동이 틀때까지 하는 것이 일반적의 파티의 형식인데,
아직까지 문을 열어두지 않다니... 시작하지 않은 건가?
그러고 보니 주위에 자신과 칸을 제외하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질 않는다.
묘한 불안감에 미간을 접은 에스는 칸에게 얼굴을 숙여 보였다.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요?"
"걱정마. 이런건 익숙하니깐. 모처럼 나타난 도련님을 환영하는 파티라면 그렇잖
아?"
탁.
커다랗게 화려한 문에 양손을 댄 칸은 에스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문을 열면 불을 켜고 축포를 터트리는 거지.
그리고 환영합니다~라고 외치는 거야."
끼기기긱.
칸의 손에 의해 열리는 문의 바라보며 에스는 그러면 당신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
가면 안되는 거잖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칸이
하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재밌는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던 칸은 어두운 내부에
역시나 하는 득이의 표정을 지으며 에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보았다.
"거봐. 내가 말한대로...."
파---앙! ! ! !
" ? ! "
콰당탕--! !
"...................칸님! ! ! ! !"
갑작스럽게 문 사이로 뻗어나온 하얀빛 무리에 배를 정통으로 맞고 뒤로 나가 떨어
지는 칸의 모습에 팔장을 낀채로 비스듬히 서있던 에스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
다.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몇번을 굴러서 한참뒤로 밀려난 칸에게 달려가려던 에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고저없는 박수소리에 안색을 굳히며 돌아 보았다.
어느새 활짤 열려진 문사이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밝은 빛이 발하고 있었다.
"불은 켜졌지만, 미쳐 축포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네놈...! !"
"환영합니다. 두사람 모두."
넓은 공간에 길게 이어진 붉은 융단 끝.
몇개의 계단 위에 올려진 상석 한가운데 서서 양손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에스는 이를 갈며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카일 폰 그라센..!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에스의 목소리를 감상하듯이 눈을 가늘게 뜬 카일은 미소를
점점 진하게 띄었다.
"카일님. 옆의 남자는?"
"건드리지마."
카일의 옆에 서서 한손을 든채로 있던 복면을 쓰고있던 사내는 싸늘한 카일의 대답
에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내렸다.
에스는 카일을 옆에 묵묵히 서있는 키가 큰 사내가 칸에게 마력 파동을 날린 마도
사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저 남자가 저런 실력의 마도사까지 거느리게 된 것인가.
뒤에 쓰러져서 꿈틀대는 칸의 모습이 신경쓰이지만, 앞의 남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가만히 서서 만약에 상황에 바로 뛰어갈 준비를 하며 들고있는 악기와 칸
의 검을 다잡았다.
칸이 정신이 차린 상태라면 운좋게 위기를 모면할수 있을 것이나, 방금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면 자신들의 입장은 최악이 되어 버린다.
짝.
" ? ! "
카일의 박수소리에 소리없이 나타나 칸과 자신의 주위와 파티장을 가득 메우는 병
사들의 모습에 에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렇게나 많은 자들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아니, 그보다 저 카일이 이곳에 있는데 왜 자신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입술을 잘근 깨물며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에스의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카
일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에게 거리를 좁히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점점 자신들에게 육박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마냥 바라보기만 하던 에스는 엎드려
있던 칸의 손가락이 순간이지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자박.
"아아, 곤란해. 칸크빌레에게서 떨어지도록 해. 에스라한."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에스의 몸짓에 카일은 손을 들의 그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그 자신이 직접 칸의 상태가 어떤지 알수없기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접촉을 한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될것이다.
녀석들은 악운에 강한 자들이니깐.
"쓰러져 있는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봐."
에스의 실력은 이미 확인된 바가 있지만, 저 칸크빌레에 대해선 아무리 심혈을 기
울여도 부족한 감이 있다.
꽤나 멀리 굴러서 구석에 쳐박혀 있는 칸의 몸을 창으로 뒤집은 사내는 그의 눈꺼
풀을 뒤집어 보았다. 뒤로 넘어간 검은 자위를 확인한 사내는 고개를 들어 입을 열
고 자신의 주인에게 보고를 하려 했다.
푸확.
"............?"
사내는 어째서 입을 열려는 순간 자신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지 이유를 알수
가 없었다. 멍한 눈으로 피에 젖은 자신의 손을 확인하던 사내는 천천히 몸이 기울
어 지는 것을 느끼며 눈동자를 깜박였다.
도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가.
쿠--당! !
"에스! ! ! !"
팔찌를 일자로 눌러 사내의 목을 벤 칸은 온통 피에 젖은 모습으로 에스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날라오는 검들을 솜씨좋게 피한 그는 자신에게 던져지
는 하연 천으로 감싸쥔 막대기를 풀어 헤치며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그런 칸과 에스의 모습에 당황한 카일은 옆에 있던 마도사에게 벼락같이 외쳤다.
"다시 한번 녀석을 노려! !"
"그랬다간 주위에 있는 자들이 말려 듭니다."
"상관없다 !"
싸늘하게 일갈하는 카일의 모습이 바로 그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팔을 뻗은 마도사
는 그러나, 노렸던 검청의 소녀앞으로 갈색의 청년이 막아서자 자신의 팔을 비트는
카일을 쳐다 보았다.
이를 갈며 두사람을 바라보는 카일의 옆모습에 마도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직된
다.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라면 부모까지 죽일수 있는 남자이건만, 저 갈색머리의 청년
은 유독 특별하게 대하는 것 같다.
"검청머리의 녀석을 잡아! 팔,다리 하나쯤 없어도 되니깐 잡으란 말이다!!
멍청한!! 갈색머리는 상처하나 내게해선 안돼!!"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마도사는 미간을 접으며 입술을 깨물
었다.
수십명의 병사들에게 뒤덮여 잘도 피해가며 하나씩 베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
동안 지켜보던 마도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실수라는 것은 누구나 하는 법이지.
"에스..!!"
자신에게로 손을 뻗은 마도사의 모습을 확인한 칸은 등뒤를 마주하고 있는 에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서 의도를 파악한 에스는 순간적으로 육박하는 하얀 빛무리에 몸을 날
려 칸을 자신의 앞으로 돌려 안았다.
퍼-엉! !
"에스라한-!"
내장이 뒤 흔들어지는 충격에 이를 악문 에스는 앞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몸을 필사
적으로 버티며 칸의 몸을 들어 위로 던졌다.
마력의 파장과 에스가 던진 힘에 그대로 창문을 깨고 허공으로 날라간 칸은 어두워
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필사적으로 착지할 곳을 살폈다.
금새 시야로 들어오는 칙칙한 땅의 모습에 눈을 감은 칸은 등뒤에 있던 천을 앞으
로 끌며 몸을 작게 움크리는 동시에 몸을 회전 시켰다.
이내 둔중한 통증과 충격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만한 충격을 버티기엔 자신의 육체는 너무나 작았다.
쿨럭-
"...제길.."
바닥으로 점점히 떨어지는 핏방울에 시선을 주던 에스는 무릎을 끓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자신의 누이가 이런꼴을 본다면, 그런 상황도 모면못하고 이런 꼴이냐고
하며 눈물을 보일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에 그녀는 없다.
그래도 칸을 일단 위기에서 모면하게 한 것은 정말 잘한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알면 친창해 주었을 사람들의 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리며, 에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액체를 뱉어냈다.
파악 퍼지며 바닥을 적시는 붉은 핏줄기에 에스는 가물가물한 시야속에서 미친듯
이 달려오는 카일의 모습을 확인하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미칠 정도로 집착하는 녀석이니 이대로 죽게 냅두지는 않
을 거다.
치사하긴 하지만, 일단 녀석에게 치료를 받은 다음에 도망을 치도록 하자.
그리고 다시는 마력에 맞서는 짓은 하지 말자.
우릿하게 올라오는 지독한 통증에, 이것을 버티고 일어난 칸은 정말 괴물이라고 생
각하는 에스였다.
덜커덩.
올해로 70줄에 넘어가는 노인은 저녁마다 노예상가인 바로챙가에서 나오는 음식
찌거기들을 비료로 팔면서 생을 유지하는 자였다.
오늘도 부산하긴 하지만 어김없이 음식 찌꺼기를 얻어 저택에서 나온 그는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 전 지나는 으슥한 길목에서 마차를 멈추고 뒤로 돌아보며 인자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여기면 되겠니?"
부시럭.
"프-하."
"...냄새."
쓰레기 더미에서 얼굴을 내미는 꼬마와 여자의 모습에 노인은 입가의 수염을 우그
러 뜨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짜고짜 마차에 올라타서 나가달라고 할때는 그도 놀랐지만, 이만한 손자, 손녀들
이 있는 그러썬 다급한 그들의 청을 거절할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식들은 전부 동에 가 살고 있으니 해를 당한다 해도 다 죽어가는 자신만
이 입을 것이기에 노인은 나중에 일에 대한 두려움도 적었다.
천을 둘러싸고 탔다고는 하나 아주 음식 찌꺼기들이 묻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마차
에서 나온 카흔과 오브, 그리고 유크렌은 몸에 묻은 것들을 떼어내며 인상을 찌뿌
렸다.
인간이란 본디 사악해서 저택에서 빠져 나왔다 하니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들만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이걸 쓰면 그나마 악취는 안날거다."
노인이 내민 작은 주머니를 받아든 가흔은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다 나오는 것이 작
은 잎사귀 몇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올려다 보았다.
"입에 물고 있으면 악취가 사라지는 약초야. 꽤나 효능이 좋단다."
그리고 가격도 비싼거지.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하는 손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장만하는 것이지
만, 이젠 찾는 이도 없으니 더 이상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런 노인의 모습에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한 가흔은 용과 오브에게 한장씩
물려주고 자신도 입에 물었다. 싸한 공기가 입속을 맴도는가 싶더니 아까부터 코끝
에 맴돌던 악취가 조금 가신것 같았다.
신기한 듯 서로를 바라보는 세사람을 내려다 보던 노인은 인사를 건내며 마차를 출
발 시켰다.
"정말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을께요."
"다음번에 만나면 아는 척이나 해주려므나."
"건강하세요."
"잘가. 늙은 인간."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작별인사를 고하던 가흔과 오브는 용의 건방진 말에 손을 들
어 머리를 내리쳤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뭐라 발작을 하려는 용의 입을 틀어
막은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는 마차에 손을 흔들며 한동안 좁은 골목에 서있었다.
그리고 마차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빠져 나왔군요."
"그래."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손안에서 파닥거리는 용을 놓아준 오브는 자리에서 구부
리고 앉아 맞은 것에 대해 분풀이를 하려고 입을 열던 유크렌의 정수리에 턱을 댔
다.
결과적으로 고개를 숙인채 오브에게 머리를 내주게 된 유크렌이 벗어나기 위해 파
닥거리는 몸짓을 즐기던 그는 눈을 들어올려 별들이 박혀있는 하늘에 눈동자를 고
정시켰다.
저녁까지 찾지 못한 자신들이 이미 빠져 나갔을 거라해서 한층 한산해진 경비를 틈
탄 것도 좋았지만, 타이밍 좋게 나타난 노인 덕택에 무사히 빠져 나갈수 있게 되었
다. 물론 중간에 론의 도움이 있기도 했지만...
요크발의 잔악성을 아는 오브가 다시 돌아가려는 그를 막았지만, 끝끝내 주인에게
도 돌아가야 한다며 웃는 그 얼굴엔 어쩔수가 없었다.
도망 나왔어도 가슴에 남는 이 앙금은 분명 자신을 상품취급하며 뭐 보듯이 한 툴
가라는 놈에게 한방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되죠?"
"어디로 가긴. 발챠를 벗어나야지."
" ? "
"요크발이 사병까지 풀었다고, 오늘내로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녀석에게 붙
잡힐 거야. 엄청 집요한 녀석이라서 말야."
게다가 난 놈에게서 훔쳐낸 것들도 있단 말이다.
이번에 잡히면 분명 목과 몸이 따로 놀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목을 쓰다듬은 오브
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쌍의 눈동자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든 안되든 일단 장소를 이동하는게 좋을 것 같다.
이곳엔 그래도 친구라고 부를수 있는 사람들도 몇몇 있으니 말이다.
"자- 가자."
자박.
호기럽게 외치며 한걸음 앞으로 나가려던 오브는 순간적으로 뒤에서 들려오는 발
자국 소리를 잡아 낼수 있었다.
웃으면서 오브의 뒤를 따르려던 가흔은 순간적으로 굳는 그의 얼굴에 안색을 달리
하며 다리에 붙어 있는 용의 몸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지
만, 만약의 상황에선 이 작은 몸을 들고 뛰어야 하는 것이다.
손가락을 들어 입 앞에 세운 오브는 한걸음 뒤로 멀어져 가흔과 유크렌의 자신의
뒤로 하게했다.
설마하니 요크발의 사병들이 여기까지 뒤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자박.
자박.
수를 늘려가는 발자국 소리에 안색을 굳힌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기도 뭣도 없는 자신들인데 병사들이 공격을 해온다면 손도 못쓰고 당할 판이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발걸음에 몸을 경직시킨 두사람은 골목 어두운 곳에서 서서히
실룻엣을 이루는 두 인물을 놀려 보았다.
병사같지 않게 가벼워 보이는 차림에 자니가는 사람인가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
지만, 아까 노인은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병사가 맞을 경우를 대비해 주먹을 쥐는 오브의 뒤로 가흔은 눈
을 가늘게 뜨며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듯이 가흔의 품에 안겨져 있던 유크렌이 약간 톤이 높은 목소
리로 입을 열었다.
"잘난 척하는 인간이랑, 그 재능있는 마도사 계집이잖아?"
"엥?"
유크렌의 말에 얼빠진 얼굴로 돌아본 오브는 손가락을 들어 자세히 보라는 유크렌
의 말에 고개를 돌려 달빛에 비치는 두인영의 얼굴을 확인했다.
육안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두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오브는 저도 모르게 풀리는 다
리 힘에 벽에 손을 기대며 어이 없다는 듯이 중얼 거렸다.
"탈출하자마자 아군을 만나는 건가.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어이없다고 해야 하나."
"...노웬. 젤."
그런 오브의 뒤에 서있던 가흔은 둘과 몇 발자국 앞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두
남녀의 모습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떨어진지 불과 열흘 정도 되는 시간이었는데 마치 몇년동안 떨어졌다 만나는 것처
럼 반갑기 그지없다. 안도의 기색이 역력한 가흔의 얼굴을 확인한 노웬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예의 그 서늘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냈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가흔군.
그리고 오브씨는 예상외의 곳에서 만나게 되는 군요."
"피로해 보이시네요. 어디 다치신 덴 없나요?"
안아든 유크렌의 기의 흐름에 별다른 이상이 없자 그제서야 가흔에게 시선을 돌린
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가흔은 노웬의 뒤를 둘러 보았지
만, 둘뿐으로 나머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의아해 하는 가흔의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노웬이 미소를 지으며 두사람에게 손짓했다.
만나서 반가운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은 쫒기는 신세.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없는 밀폐된 공간으로 장소를 이동하는게 좋다.
"칸님은 샤한과 에스, 유크렌시아님과 함께 가흔님을 구하려고 한발 먼저 출발했습
니다. 여기에 유크렌시아님께서 계시는 것을 보아 칸님도 함께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아니요. 용은 툴가라는 자의 저택 지하에서 발견했는 걸요."
그것도 묶여진 모습으로.
자신의 말에 안색을 어둡게 한 젤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노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모습에 일말의 불안을 느낀 가흔은 저도 모르게 젤의 옷자락을 쥐었다.
마도사란 본디 표정 관리가 엄한 법이다.
걱정스러운 가흔의 얼굴에 금새 원래의 안색으로 변한 젤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가흔의 손을 풀어 걱정말라고 답했다.
"어떤 경위로 유크렌시아님과 칸님등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분이
라면 안전한 곳에 계실거라고 믿습니다."
"................"
"저희들은 발챠에 연고가 있는 분의 저택에 숨어지내고 있었답니다. 여러분들도 그
곳에 지내시면서 나머지 일행들을 기다리도록 하죠."
젤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가흔의 얼굴에 노웬은 우선적으로 자신과 젤만
이 공간이동을 이용해 발챠에 도착해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공간이동이요?"
"말 그대로. 장소와 장소의 간격을 좁혀 육체가 이동하는 것이죠. 덕분에 3일동안
몸져 누워 있어야 했답니다. 전 아직 거기까진 익숙치 않은 병아리 마도사니깐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젤의 모습에 가흔은 할말을 잊었다.
영화속에서만 보던 그 공간이동을 해서 먼저 발챠에 도착했다는 것인가?
전에 잇던 세계에선 공간이동은 이동시. 육체에 세포의 움직임이 배로 활발해져 인
간의 몸은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가흔
의 얼굴을 본 젤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에 자신의 실례된 짓을 했다고 깨달은 가흔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얼굴을
돌렸다.
원래있던 세계와 다른 곳이다.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종종 잊곤한다.
그런 가흔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이던 젤이지만, 옆에 걸어간 노웬과 시선이 마
주치자 안색을 굳혔다.
공간이동으로 발챠에 도착후 3일동안 쓰러져 숙면을 취하다가 바로 어제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흔의 머리카락 같은 신체의 일부분이 있어 그의 위치
파악은 간단했으나 그 장소가 문제가 되어서 손놓고 있다가 그가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 감지되어 발각될 위험을 무릎쓰고 노웬과 나오는 도중 잠시 전 칸의 기가 위
험할 정도로 비뚤어 진것을 느낀 것이다.
불안해 하면서도 가흔의 옆에 있는 유크렌시아의 모습에 칸도 함께 있을줄 알았는
데, 없다니....
점점 어두워 지는 젤의 얼굴을 보는 노웬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요크발과 만났다니... 그렇다면 그자도 발챠에 있다는 말이군요."
"최악인걸?"
어태까지 자신말을 쭈욱 듣던 노웬은 요크발의 이름이 나오자 미간을 접었고, 그들
이 신세지고 있는 집의 주인인 더벅머리 사내는 입에 물고있는 이쑤시개를 흔들며
이가 들어날 정도로 웃었다.
그 웃음이 실로 악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으려던 가흔은 다음말을 재촉하는 듯한
노웬의 시선에 멎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은 별거 아니예요. 중간에 빠져 나와서 론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저택
을 빠져 나왔다는 것뿐. 아, 중간에 모포자루에 쒸어진 용을 만나기도 했죠."
중간에 마력이 걸려있는 쇠창살을 무력화 하고 빠져 나왔다는 것과 툴가의 저택 지
하에 있었던 칸크빌레라는 자의 초상화를 봤다는 것만을 빼고 거진 다 말한 가흔은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초상화는 자신이 말하기 껄끄러워 말하지 않았고, 지하 감옥건은 오브가 당부한 게
있어 말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그 두가지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서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해 진것은 아닐
까하고 생각하던 가흔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올리는 사내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
어 보였다.
눈을 가리는 회색의 더벅머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이 사람은 일반적으로 눈이 보
이질 않으면 인상이 나쁘다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로 느낌이 좋은 사내였다.
그게 개성적인 외향 덕분인지 시종일관 웃고 있는 입 덕분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런데 유크렌시아님은 어째서 그런 곳에 계신겁니까?
에스군이 맡기로 하지 않았나요?"
부탁받은 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책임지는 사람인데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는 노웬의
말을 들으며 몸을 움찍하니 경직시키던 유크렌은 확연히 티나는 안면 경직을 일으
키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들이 잘못 한거라고. 난 절대 잘못한게 없어. 절대절대절대 말이야."
".....보나마나 이 녀석이 놈들을 두고 도망친걸 꺼야. 그러다 이쪽 놈들에게 납치를
당해 그런 곳에 있었던 거고."
정곡을 찌르는 오브의 말에 유크렌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입가를 부들부들 떨었다.
"무엄한 놈! ! 누가 도망을 간다는 거야?! !"
"어쩜 칸이란 놈하고 하는 말이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냐?
너 그 녀석 동생인거 아냐?"
"이놈이~~! !"
주먹을 쥐고 덤벼드는 자신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며 혀를 내보이는 오브의 모습에
더 열이 받은 유크렌은 양손을 휘저었으나 길이의 엄청난 차이로 오브의 몸엔 단
한번도 닿지 않았다.
그 유아틱한 모습에 고개를 저은 가흔은 대화를 나누는 더벅머리 사내와 노웬의 모
습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웬을 만나면 칸을 만날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물어 보고 싶은게 잔뜩인데..."
지하의 초상화에 그려진 칸크빌레라는 자와 칸이 무슨 관계인지 머리속에서 떨어
지지 않는다. 어쩌면 동일인물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보는 그였지만, 그렇다면
칸은 중앙국의 전대 황제이고, 노웬들은 그를 보필하는 기사같은 것이 되어 버린
다.
아니, 이미 왕좌에서 물러났으니 그들의 움직임을 볼때, 왕위를 찬탈하려는 극악무
도한 무리로도 정의할수 있겠지.
점점 스케일이 커져 가려는 상상에 머리를 휘저어 털어낸 가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점점 지치는 느낌이다.
하다못해 칸이 자신에게 사실을 알려준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잠시 칸의 안부를 걱정하는 가흔이었다.
가흔은 넘어지면서 튀긴 흑탕물과 흙에 울상을 지으며 옆에 서있던 소년을 바라보
았다. 그런 가흔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는 들고있던 우산을 앞으로 끌어 그가 비
에 젖지 않도록 해주었을 뿐. 일으켜 준다거나 괜찮냐는 말을 하진 않았다.
그 냉대에 가흔의 코끝이 점점 빨개지며 입술은 앙 다물어 졌다.
어째서 그런 한심하다는 표정을 날 보는 거야.
일이날 생각을 안하고 바닥에 앉아 있기만 하는 가흔을 바라보던 그의 어머니는 타
고 있던 차에서 내려 가흔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옷에 튀긴 물방울들을 신경쓰며 미간을 찡그린 그녀는 싸늘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너란 앤 정말 어쩔수가 없구나.
"..............."
짹짹.
얼굴위로 비치는 햇빛에 눈살을 찌뿌린 가흔은 몸을 뒤집으며 배게를 자신의 머리
위로 눌렀다. 하지만 이미 떠버린 해를 지게 할수없는 노릇이기에 시야를 자극하는
밝은 빛에 미간을 찡그리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수 밖에 없었다.
일어나자 마자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물을 한모금 마신 가흔은 창을 열어 넓은
저택의 광경을 바라 보았다.
창을 열었을 때.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툴가의 저택에 순간 긴장한 그이지만, 이곳
이라면 안정하다는 노웬의 말에 안도를 한숨을 쉬었었다.
이렇게나 넓은 곳이니 그 툴가도 쉽게 손을 대진 못하겠지만, 요크발이라는 붉은
머리도 이곳을 건드리지 못할까?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자는 대공이라던데...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계보를 천천히 되새기며 그의 위치를 파악하려던 가흔은 그
러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으며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당분간 골치아픈 일은 생각하지 말자.
똑똑.
끼-익.
"일어 나셨나요?"
"아....예."
"치워 드리겠습니다. 세면하실 물은 여기에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든 대야를 근처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시녀는 깍듯이 허리를 숙인 다
음 가흔이 누워 있었던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자신이 하겠다고 만류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왠지 기운이 없는게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싫다. 하지만 남들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 싫기에 창가에서 일어
서 세수를 한 가흔은 대야 옆에 놓여진 푸른 입을 입안에 넣고 몇번 씹은 다음 뱉어
냈다.
혀끝이 아릿한 이 강렬한 맛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지만, 입냄새 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기에 가흔 그가 치약대신 종종 애용하는 풀이었다.
"다른 분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신 후입니다. 아침을 올려 드릴까요?"
".........에 ?"
"지금은 10시가량 되었답니다. 점심을 위해 일단 가볍게 드실만한 음식을 올려 드
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브라는 분께서 일어나면 정원으로 오시라는 전달을 부탁하
셨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양손을 배 앞에 댄채로 허리를 깊숙히 숙여보인 시녀는 세면을 마친 대야와 풀을
버린 접시를 들고 가흔의 방에서 나왔다.
기계처럼 정밀한 움직임 이었지만, 저 정도의 서비스라면 별 5개의 호텔은 거뜬이
들어갈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콧등을 긁었다.
세수를 해도 머리의 멍함이 사라지지 않아 샤워라도 해볼까하고 생각하던 가흔은
창밑을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하곤 그리로 시선을 주었다.
자신이 묵는 곳은 3층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는 한 자신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다리를 창턱에 대고 앉은 가흔은 바람에 흔드리는 적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요크발
을 떠 올렸다. 안좋은 만남만이 있었던 자이긴 하지만, 가흔이 만난 붉은 머리중 가
장 미남인 자이기도 했다.
혹여나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진 않을까하고 기대하던 가흔은 그러나 그가 그
대로 밑을 지나가 버리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미적거렷다간 잠보라는 별명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옷을 대충 챙겨입고 밖으로 나간 가흔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서 올라오는
젤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미녀의 모습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그런 가흔을 발견한 젤이 눈가를 휘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어 나셨나요?"
"늦잠을 자서.. 부끄럽군요."
"아뇨. 그동안 힘든 일을 격으셨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젤의 부드러운 말에 오히려 늦잠을 잤다는 것에 대해 민망하게 느껴진다.
뒷목을 주무르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던 가흔은 시선을 돌린 곳에 있는 붉은 머리
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여성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가흔의 모습을 자뭇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미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
다. 그 작은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품에 가흔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분위기 만으로도 주위를 부드럽게 풀어준다는 사람이 있다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게다가 눈앞의 여인은 20세의 아들을 둔 미망인이라고 하니 분위기 만이 아니라 나
이도 안먹는 사람인가 보다.라는 실없는 생각이 잠시 든다.
"가흔님 이분의 성함을 알고 계신가요?"
"아.. 분명 율시아님이시라고."
"알고 계셨군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면 소개해 주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죠."
젤의 말에 웃어보인 가흔은 고개를 돌리다 문밖에서 들어오는 유크렌의 모습에 눈
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어디서 구른건지 온몸이 흑투성이다.
그 모습에 벙찐 표정을 짓고 있자 자신의 표정변화가 의아했는지 고개를 돌리던 젤
과 율시아 부인이 용의 모습을 발견하고 입을 가렸다.
지저분한 모습은 둘째치고라고 씩씩대는 폼이 무척이나 귀여웠던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계단에 서있는 젤과 율시아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가흔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유
크렌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씩씩대던 유크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흔의 모습에 보이
자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입술을 실룩 거렸다. 울기 직전인 그 표정에 당황한 가흔
은 용의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옷이 더러워 진다는 것보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 그에게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요? 용. 왜 그래요?"
"..........."
부드러운 손길로 볼을 쓰다듬으면 언제나처럼 화를 내며 분통을 터트릴 거라는 가
흔의 생각과 달리 기어이 유크렌의 눈에 한방울의 눈물이 맺힌다.
그것을 발견한 가흔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유크렌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멀찍
히 들어 올렸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입술을 깨물고 훌쩍대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처량맞고 사랑스러웠지만, 우는 아이를 단 한번도 달랜 적이 없는 가흔은 그런 한
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냅둬, 전부 자기가 잘못 한거니깐."
"오브?"
먼지를 털며 들어오는 오브가 툭하내 내뱉은 말에 가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사람 만이 아는 어떤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자신은 전혀 모르니 무슨 상황인지
짐작조차 할수가 없다.
그런 가흔과 가흔의 팔에 매달린 유크렌의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오
브는 툭하니 내뱉었다.
"이 집안 아드님한테 덤비다가 호되게 당한거지 뭐. 실력도 안되는게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지금껏 안당하고 산게 용하다. 용해."
".......으..우엥..."
"울지마. 제뜻대로 안된다고 울기나 하는 꼬맹이 딱 질색이다."
냉정한 오브의 말에 유크렌의 얼굴이 아주 이그러 졌다.
그 얼굴을 처지곤란하게 바라보던 가흔은 한숨을 쉬며 작은 몸을 안았다. 한팔로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손으로 등을 두드려주자 간혈적으로 흐느낌 소리가 들린다.
지금껏 아무리 못된 일을 당해도 드래곤의 체면을 지키느라 눈물 한번 보이지 않으
려고 무던히 애쓰던 그가 도대체 무슨일을 당했기에 이렇게나 울어 대는 것일까?
얼굴이 받쳐진 어깨쪽에서 점점 느껴지는 뜨거운 물기에 고개를 들던 가흔은 오브
의 등뒤로 들어오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죽였다.
"........이런 곳에서 울고있는 건가?"
" ! ! "
사내의 말에 자신이 느껴질 정도로 몸을 경직시키는 유크렌의 행동에 안색을 달리
한 가흔은 작은 몸을 강하게 끌어 안으며 사내의 시야에서 용의 모습을 가렸다.
그런 가흔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려보인 붉은 머리 사내는 품속의 유크렌에게 시선
을 잠시 주다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가흔의 옆으로 다가온 오브는 살며시 귀뜸했다.
"칸과 닮았지?"
"........."
"머리카락은 붉고, 나이가 좀더 많다는 것만 빼면 마치 칸이 성장한 모습같아.
처음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요번 툴가의 저택에서 만났던 론을 잠시 칸으로 착각한 자신과 달리 단번에 닮지
않았다고 한 오브조차도 칸과 닮아다고 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
흔은 고개를 저었다.
틀리다. 칸과 닮았지만, 그와 말로 표현할수 없는 무엇인가가 틀리다.
분명 외양은 칸과 비슷하다고 해야 겠지만, 닮았다는 표현은 툴가 저택 지하에서
보았던 칸크빌레 전에 걸려있던 그 냉막한 표정의 남자와이 사이에 더 어울릴 듯
싶었다.
더이상 우는 것은 수치라고 느꼈는지 히끅거리며 숨을 죽이는 유크렌의 머리를 부
드럽게 쓰다듬으며 가흔은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오브에게
던졌다.
"별거 아니야.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중간에 저 사내와 만났어. 그런데 갑자기 이
꼬맹이가."
가흔의 품에 안겨진 유크렌의 작은 머리통을 한손으로 잡은 오브가 이를 갈았다.
"'융텐 이녀석 왜 이런곳에 와 있는 거야~! !'라면서 덤벼 들잖아. 몇번이나 걷어 채
이고 던져져도 끝끝내 밀쳐지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저택으로 도망쳐 온거야."
"틀려!! 저 빨갱이 놈은 분명 융텐이야! ! 그러면서 아닌 척 하는 거라고! !"
"융텐이고 나발이고, 저 붉은 머리 도령은 이 저택에 하나뿐인 도련님이라고. 저 미
인 미망인인 율시아 부인의 적자. 알아 들었냐. 이 멍청한 꼬마야. 덩치를 보고 덤벼
야지, 다짜고짜 몸을 날리면 다치는건 너라는 걸 왜 몰라?"
머물고 있는 저택의 주인의 아들과 불화를 일으켜 봤자 얻는 득이 없기에 유크렌이
바닥에 구르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가 속이 편할리가 없다.
덤비긴 했지만, 어린아이를 냉정하게 내치는 모습에 이를 갈다 마지막에 말로써 제
재를 하는 수밖에는...
매정한 말에 울먹이는 유크렌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오브는 한숨을 쉬며 가
흔의 품에서 빼내어 자신의 품에 안았다.
안기지 않으려고 꿈틀대는 작은 몸의 엉덩이를 몇번 두들여 준 오브는 가흔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꼬마는 나에게 맡기고, 넌 가서 노웬이나 만나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할
게 있다더라."
"...네."
"그래. 어서 가봐. 어허. 이놈 귀염성 있게 얌전히 좀 있어라."
유크렌을 안고 걸어가는 오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흔은 고개를 갸웃했다.
융텐이라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넓은 거실에 한동안 서서 융텐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에 대해 떠올리려던
가흔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치며 알았다는 탄성을 질렀다.
분명, 용과의 처음 만난 그 음식창고에서 그의 몸을 들어올린 자신을 향해 분명 드
아글라 산맥의 융텐이 보낸 자가 아니냐고 했었지.
드아글라의 산맥에 융텐이 누구인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드래곤인 유크렌에 알고 있는 자라면 그 역시 용이라는 의미.
".........그런데 그게 저 붉은 머리와 무슨 상관이지?"
설마하니 유크렌의 말대로 폴리모프한 드레곤이라면 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미 계단쪽으로 사라진 사내의 잔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칸이었다.
"노웬이나 만나러 가야겠군."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혼자 먹을 바에는 나중에 다같이 먹는 점심쪽이 좋다.
느긋하게 서있던 가흔은 그러나 노웬의 방이 어디인지 잘 몰랐다.
어제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던 방은 그 더벅머리 사내의 방이었고, 늦어지자 먼저
나와 가흔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잠을 잤다.
노웬은 커녕 다른 이들이 어디에 방을 지정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난감한
기분이 들게 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있던 가흔을 멀리서 주시하던 저택의 시
녀는 공손한 태도로 그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아.. 저.. 노웬 하르스라는 분의 방이 어딘지 몰라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밖깥쪽을 가르키는 시녀의 모습에 가흔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저택은 정문을 기준으로 'ㅣㄱ'이런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ㅣ'자의 건물엔 연회장 같은 파티장소에 쓸만한 커다란 공간이 제일 위쪽에
위치하고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쉬는 방은 'ㄱ'에 더 많이 위치한다고 들었는데.. 아
닌가?
머리를 갸웃하며 시녀의 뒤를 따르던 그는 마침 건물 밖으로 나오려 현관문을 여는
노웬을 발견할수 있었다.
"아, 노웬."
"가흔군. 이런... 실례하겠습니다. 지금 급히 나가봐야 할곳이 있어서요."
"네? 아, 어쩔수 없죠."
노웬 그답지 않게 다급한 표정에 어리둥절하며 가흔은 길을 비켜 주었다.
어느새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오르는 노웬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 고개를 숙이
는 모습에 따라 고개를 숙이던 가흔은 노웬이 나왔던 자리에 서서 이쪽을 걱정스럽
게 쳐다보고 있는 젤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색이 초췌한 것이 마치 뭔가 굉장히 힘든일을 하고 난 사람같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저택앞에 서있던 가흔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돌려 보였다. 많이 진정 되었는지 오브의 옆을 제발로 걸어오는 유크렌의 모습에
작게 웃어보인 그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부는 것이 저녁쯤엔 비가 올 것 같았다.
"이젠 괜찮나요? 용."
"흠, 내가 언제 안 괜찮은 적이 있었어?"
가슴을 피는 용의 허세에 가흔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유크렌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던 가흔은 위쪽을 바라보고 있는 오브의
모습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와 있을 땐 다른것에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앞에 두고 다른 곳에 시선을 향하는 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가흔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오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묘하게 만들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실은 이 저택에 왔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말이야."
"뭔데요?"
주위를 몇번 둘러본 오브는 가흔의 귓가로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저 율시아란 부인 요크발과 닮지 않았어?"
"에에-ㅅ? 설마요."
"아니, 아닌게 아니라. 분위기 덕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뭐랄까 눈가나 입매가 꽤
나 닮은 것 같아서 말야."
첩의 자식인데도 자신을 상인의 가주로 점찍은 빌어먹을 아버지 덕에 이것저것 교
육을 받은 오브는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잘 잊어먹지 않았다.
분명 저 율시아란 부인은 요크발과 닮았다고 강력히 주장하려던 오브는 그러나 용
을 안아들고 깜찍스럽게 눈을 깜박이는 가흔의 모습에 할말을 잊었다.
"둘다 붉은 머리에 미인들이니 착각한거 아니예요? 괜한 소리로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요. 용, 우리 뭐하면서 놀까?"
"내가 어린앤줄 알아?!"
"그래도 심심할 거 아니야."
".........저-쪽 정원에 그네가 있긴 한데.. 뭐 내가 타고 싶은 건 아니고.."
볼을 붉게 물들이며 말하는 용의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가흔은 오브에게 같이 가자
는 동작을 해 보였다.
자신의 말은 아주 들은 척도 안하는 모습이 좀 어이없었지만, 모처럼 한가한 시간
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런 말을 꺼낸 자신이 잘못을 한점도 있지.
머리를 긁적이며 순순히 따르는 그이지만, 아직 가슴속에 남은 의혹은 쉬이 사라지
지 않는다.
넓은 저택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크기에 맞지 않게 조용한 법이나 이 저택은 그 도
를 넓어 온통 정적에 감싸인 것 같다. 먼지 하나없는 깨끗한 건물도 그랬고, 인간미
가 느껴지지 않은 딱딱한 분위기의 시녀들도 그랬고...
그러고 무엇보다.
"저 율시아 부인의 외모에 돔이라는 아들의 성격까지 합하면 완전 요크발이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날라오는 바람에 흩어져 다른이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