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엇이든지 잘했어.
운동도 공부도 하다못해 노래든 미술이든 일단 배우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일반인
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
그것이 싫었던 거야.
그가 잘하면 잘할수록 난 어둠에 묻힐수 밖에 없었는데..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어째서 내 이런 비참한 기분을 알아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어째서.
-알아주지 않으니 어쩔수 없잖아.
엎드려 눈을 가리고 있었던 가흔은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바람에 흩날리는 검청색의 머리카락과 자신을 주시하는 황금빛의 눈동자를 바라보
던 가흔은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 가흔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검을 빼들어 정면을 향해 내밀었다.
-알아주지 않는다면..... 힘으로 빼앗는 거야. 알게 해주는 거야.
-.......힘...
-그래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어쩔수 없어.
서서히 이그러지는 아름다운 얼굴에 가흔은 흘리던 눈물을 멈췄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다 부드러울 것 같은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따뜻한 온기에 약간이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몰라. 어째서 알아주지 않는 걸까.
지친 듯한 그 목소리에 가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짓을 해서라도 시선을 끌고싶은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거야....
가흔은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왠지 알 것 같았다.
눈앞의 이 불쌍한 존재는 바로 자신과 닮아 있다는 것을..
결코 진심을 인정할수가 없어 도망가기만 하는 것을.
자신들은 이런 비참한 방법으로 도망가는 것밖에 모르는데 어째서 그들은 거기까
지 내몰아 가는 것인지.......
밀려오는 슬픔에 가흔은 또다시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울고 있어."
침대에 누워있는 가흔의 옆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유크렌의 말에 주
위에 서있던 자들의 시선이 몰린다.
옆으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크렌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굉장히 슬픈색. 아픈 꿈을 꾸는 모양이야."
".......괜찮을까요? 가흔군은.."
고개를 약간 기운채인 유크렌의 말에 라프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치료를 하려고 했지만, 몸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치료 결과가 나타난 그로써도 함
부로 능력을 쓸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쓸만한 안정된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에 자
칫하단 오히려 해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배에서 내려 축제 분위기여야 할 그들은 쓰러진 가흔으로 인해 꽤나 침울한
상태였다.
만약 지금 가흔이 일어나면 그들에게 굉장히 미안해 할 것이다.
멀찍히 떨어져 앉아있던 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흔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
에게로 걸어갔다.
"다들 여기서 나가."
".......엥?"
"모두 나가란 말이다! !"
칸의 난대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들은 라프헨이 라헨에게 던져지고 침대
에 엎드린 유크렌이 오브에게로 던져지자, 그제서 상황을 파악하고 어이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칸이 가흔을 밖으로 나오게 해서 쓰러졌다고도 할수 있는 상황인데 되
려 자신들을 몰아 붙이는 저 행동은 뭐란 말인가.
아연한 표정을 짓고 나갈 생각을 안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던 칸은 급기야 콧김을 내
뿜으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란 말이다아아아아아아~~! ! !"
귓청에 떨어질것 같은 그 목소리가 되려 가흔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어처구니 없기는 하지만, 저런 상태의 칸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보
다 잘 아는 이들은 하나씩 방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탁.
"칸님만 남겨둬도 괜찮을 까요?"
"....설마하니 누워있는 사람한테 해가 될만한 일을 하려고."
"칸이니깐 모르는 일인거다."
칸만 남겨두고 나가게 된 사람들은 애써 긍정적인 생각으로 해보려 했으나 싸늘한
라헨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고 싶어도 저 칸이 중심이 되면 그리 할수가 없는 것이다.
등뒤에 닫힌 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뗄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여정으로 모두들 지친 상태다.
이도 아니고 모도 아니라면 체력을 비축해 두는 편이 현명한 것이라.
오브의 품에 안겨서 묵묵히 가흔이 있던 방을 바라보던 유크렌은 눈빛을 빛냈다.
"......마력의 구성이 바꼈어."
"응?"
"아무것도 아니다."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들자 새침하니 고개를 돌리는 유크렌의 모습에 오브의 혈
압에 올라간다.
이놈의 건방진 꼬맹이 그냥 내던져 줄까보다.
방에서 멀어지는 일행들의 발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운 칸은 이내 그들이 전부 아래
로 내려갔다는 것을 확인하곤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만 기다려. 곧 깨어나게 해줄테니."
잠든 가흔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은 칸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여왕의 안식처에 가면 온갖 기묘한 화초들이 있다.
개중에 분명 가흔을 깨어나게 할 약초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로 가기로 마음
을 먹은 칸이지만, 다른 일행들이 자신의 생각을 알면 막으려 들것이 분명하기에
억지를 부리는 모습으로 녀석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다행히도 눈치빠른 노웬이나 젤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탁.
손목의 붕대를 고쳐 감고 몇번 주먹을 쥐었다 편 칸은 호흡을 고리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맘을 먹으면 맘대로 들어가 약초를 얻을 수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전에는 쳐다 보지도 않았던 약초를 얻기위해 여왕지를 지키는 기사들과 검을 겨루
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지지만 가흔을 위해선 갈수밖에 없다.
가방을 등에 맨 칸은 미리 확인해 두었던 창의 문을 열고 옆 건물에 나있는 난간으
로 뛰어 올랐다. 손쉽게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간 칸은 흙이 묻은 손을 털고 하늘까
지 뻗어진 여왕의 기둥을 바라 보았다.
"....이번엔 좀 봐주라고 여왕님."
여왕의 안식처는 외부인이 들어오면 자체적으로 울림을 흘러내 적의 침입을 알린
다.
전처럼 어떠한 난동을 부려도 얌전히 있었던 것처럼 이번도 조용히 있기를....
옛날엔 저곳에서 일부러 놈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피를 흘리는 짓을 제외하곤 별에
별 짓을 했었지만, 저 깐깐한 여왕님은 침묵을 지켜줬던 것이다.
달려나가 다른 건물의 지붕으로 뛰어올라 또다시 다른 건물로 뛰어든 칸은 이를 들
어내며 웃었다.
"설마하니 변덕쟁이 아가씨처럼 신분이 달라졌다고 냉대하면 배신이라고."
유쾌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사라진다.
".....칸님은?"
"위에 가흔하고 같이 있어."
식당에 들어찬 인원들을 눈으로 확인하던 노웬은 라헨의 대답에 안색을 굳히며 들
고 있던 짐들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다급한 걸음걸이로 위로 올라가는 노웬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져보인 그들은
이내 마찬가지로 집이는 바가 있어 그의 뒤를 따랐다.
덜컹! !
"............없다."
가흔만이 누워있는 방안의 모습에 라프헨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칸의 행동을 단순한 치기로 치부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가 그동안 가흔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어떤 무모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 입을 막고 뒤로 물러나는 라프헨의 몸을 안아든 라헨은 싸늘하게 식
어있는 눈동자의 노웬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갈 곳이라면 그곳뿐이지만, 마음 속으론 그 장소만은 피해주었
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제-길.."
탕! !
신경질 적으로 벽을 친 노웬은 이를 갈았다.
가흔이 칸에게 좋은 현상이라고 치부한 과거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지금까지 일들을 되집어 보면 전부 저 소년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태반이 아닌
다. 가흔을 노려보는 노웬의 시선에 안색을 달리한 오브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집었다.
"뭡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은빛의 눈동자에 얼굴을 경직시킨 오브지만 이내 웃는 낯
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럴때가 아니라 칸 녀석을 찾는게 우선일것 같은데요.
제가 따로 사람을 풀까요?"
"........아닙니다. 집이는 대가 있으니깐.... ....라헨, 젤 잠시 따라 오십시오."
오브의 말에 애써 냉정을 찾은 노웬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옆방으로 걸음을 옮
겼다.
지금은 저 소년에게 감정을 소비할 시간이 없다.
저 골치아픈 사람이 일을 치기전에 찾는것이 급선무.
터져 나오려는 한숨에 잠시 자리에 멈춰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는 노웬이었다.
삐걱.
삐걱.
다른 사람들이라면 다 자고있을 늦은 시간이지만 노웬 일행들이 들어가 있는 방안
은 아직 밝은 채이다.
근처를 지나던 여관은 불이 켜진 방의 체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자고있지 않는 손님이 있는 방은 특별히 신경을 써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들 빨리 자두는 게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라 체크를 하는 그녀의 손길이 기분좋을
리가 없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눈가를 비비던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졸리다는 생각을 했
다.
덜컹.
"다 돌았니?"
"응. ...하-암.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네..
.......잠깐 엎드려 있을 테니깐 일이 있으면 깨워줘."
다른 어떤 여관보다 청결과 친절을 우선으로 하는 그들이 속한 여관은 그만큼의 할
일도 많아 상당히 체력이 요했다.
그런 일을 아침일찍 부터 일어나 돌아다닌 친구를 위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는 읽던 책을 덮어놓고 교대로 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머리를 대자마자 코고는 소리를 내는 친구를 어쩔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
던 그녀는 그위에 모포를 덮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축제기간과 맞물려 요새는 할일이 많아, 왠만한 일론 지치지 않는 자신도 요새는
꽤나 피로를 느낀다. 어깨를 주무르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서늘한 바람이 볼을
스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해안가인지라 저녁에는 되도록이면 복도의 창은 다 닫아 두는데...
끼-익.
"...이상하네."
구석에 열려진 창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몸을 반쯤 내밀어 좁은 골목으
로 이어지는 밑을 내려다 보았다.
쓰레기 통을 뒤지고 있었는지 작은 도둑 고양이가 뛰어 다니는 모습에 기분 나쁘다
는 듯이 미간을 접은 그녀는 창을 닫고 근처에 두었던 등을 들어 올렸다.
친구가 한번 돌았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한번 더 돌아보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던 그녀는 순간 닥치는 현기증에 놀라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집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다니..
"......이..이게..."
벽에 몸을 천천히 미끄러 뜨린 그녀는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내 일정한 간격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들어낸다. 손가락으로 앞을 가르키고 분산하라는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
이는 한 사내의 지시에 따라 다른 곳에 숨어있는 자들이 물흐르듯이 움직인다.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남자는 등뒤로
다가오는 마도사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
왔다.
껄끄럽기는 하지만 이번 일의 일등공신이니 홀대할수는 없다.
"모두 잠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이 약초는 마력과 섞이면 꽤나 효력이 강해지니깐요."
손안에 든 푸른 구슬속에 떠다니는 초룩 잎사귀를 바라보던 마도사는 자신을 내려
다 보는 카일을 올려다 보며 믿어 달라는 듯이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쯤이면 이 여관에 묻고 있는 자들 모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그 칸크빌레 일행을 포함해서.
마도사의 표정을 바라보던 카일은 회심을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명령은 모두의 생포,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만 만약이라는 사태를 대비해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칸크빌레님과 가흔님의 신병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칸크빌레는 오후에 혼자 이탈했다. 그쪽은 요크발이 있으니 상관없고...."
마도사를 내려다 보던 카일은 청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가흔이라는 소년은 황제폐하께서 친히 왕림하셨으니깐 문제없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황제이기에 가흔이라는 소년이 걱정된다.
슬쩍 보기엔 꽤나 미형의 소년이었는데...
그만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은 그로써도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황제가 하는
일에 감히 자신이 나설순 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에 어깨를 으쓱여 보인 카일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것 좀 풀어 볼래?
-...이건 이렇게 하면 돼.
-우와.. 굉장해. ....도 너처럼 잘하니?
-....나보다 더 잘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겠다.
그건 그렇겠다.
아무 사심없이 말하는 소녀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던 소년의 얼굴에 경직된다.
그런 모습을 미쳐 눈치채지 못한 소녀는 뒤에서 부르는 친구들의 소리에 대답을 하
고 앉아있는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채 떠나 버린다.
가만히 앉아있던 소년은 주위에 떠들썩하게 웃고있는 무리들에 시선을 주다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단의 무리에 다시금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 가운데서 당연하다는 듯이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것을 보는 것이 싫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내리고 펼쳐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야.
자신을 이름을 부르고 책상을 두들이는 손길에 읽던 책에 시선을 때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끝날때 같이가자.
-....같이?
-그래. 청소당번이지? 기다릴게.
할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다시 친구들의 무리로 돌아가는 뒷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
은 천천히 얼굴을 숙였다. 그 얼굴엔 홍조가 띄어져 있어 지금 소년이 얼마나 흥분
한 상태인지 알수 있게 해준다.
.........처음으로 그가 같이 가자는 말을 해준 것이다.
전에 어쩌다 가는 길목에서 만나면 대화없이 같이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는데....
-...야. 우리는 같이 가는게 아냐?
-어머니께서 데려오라고 했어. 갈때가 있다고.
-...그렇다면 어쩔수 없지만. ...야, 내일 우리집에서 놀지 않을래?
다시금 떠들썩해진 무리들과는 반대로 앉아있던 소년의 얼굴에 천천히 굳는다.
어머니가 같이 오라고 했기 때문에 같이 가자고 한거야?
등을 돌린채로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작은 어깨를 바라보던 소년은 입술
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르지만 눈물이 날만큼 비참한 기분이 든다.
"이제 깬거야?
"..........."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날거라고 했지?"
열이 올라 흐릿하게 보이는 주변에 눈을 굴리던 가흔은 허리를 숙인채 자신을 바라
보는 소년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 했더니 전 마을에서 자신에게 열매와
읽을 책을 주었던 이자크라는 소년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던 가흔은 그러나 입안에 바싹마른 상태인지라 혀로 입술
을 핣으며 상체를 기대고 있던 곳에서 몸을 때어 내려고 했다.
"..........?"
그제서야 자신이 여관의 푹신한 침대 위가 아닌 숲속의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대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가흔은 안색을 달리하며 자신을 내려다 보는 소년을 올
려다 보았다.
표정을 굳힌채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의 얼굴을 꽤나 재미있던지 소리내어 웃어보
인 이자크라는 소년은 천천히 허리를 세워 일어났다.
나무에 등을 기댄채 자신을 올려다 보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을 지극히 편한 자세
로 내려다 보던 그는 웃음기가 어린 음색 그대로 입을 열었다.
"여왕은 부정한 것에 대해 꽤나 깐깐하지. 그러니깐 괴로운 걸 꺼야."
".........뭐?"
"아마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자신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 달갑지 않아 밀어내려
하는 데도 끝끝내 땅에 들어섰으니 그렇게 괴로운 거다."
"..무슨.. 소리를..."
알수없는 소리를 해대는 소년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린 가흔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두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나른한 몸에 기운을 넣어주는 일은 상당히 힘든 일로, 몇번이나 나무 등치
에서 미끌어지는 가흔의 모습에 이자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허리 아래로 내
렸다.
스릉.
"............무슨 짓을...."
가흔의 눈이 부릎떠지는 것을 내려다 보며 이자크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밝은 달빛에 부숴지는 예리한 검날을 음미하듯이 바라보던 그는 검을 한손
으로 쥐고 머리 위로 올렸다.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도 모르는 너같이 불안전한 것이 칸크빌레의 곁에 있어
그를 기쁘게 하니.................무척이나 불쾌하다."
나지막하게 말하며 검을 가흔을 향해 내리치는 이자크의 움직임에 그의 얼굴을 반
쯤 가려주던 망토가 격하게 젖혀지며 새하얀 머리카락을 허공에 뱉어낸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는 그 하얀 실들에 시선을 빼앗긴 가흔은 배 한복판에 느껴지는
격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서걱.
".........걱정마라. 고통은... 순간이지-"
"................! ! !"
눈앞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이자크의 얼굴을 확인한 가흔은 배의 통증보다 더
큰 충격에 눈을 부릎떴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피뭉텅이를 뱉어낸 가흔은 부들
거리는 손을 뻗어 이자크의 볼에 대었다.
새하얀 얼굴과 황금빛의 눈동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바랬을 뿐 자신의 눈앞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분명 그였
다.
"........칸...?"
쉴새없이 흔들리는 가흔의 눈동자와 마주하던 황금빛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사라지
고 한없이 싸늘한 기운이 서린다.
".....................인사하지.
중앙국 황제 이자키엘 두르 판 라켈화넬 유헬시스 37세다."
"................."
"초면은.. 아니지. 우리들."
"..................칸...."
스스로 인식도 못한채 칸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뒤로 빼는 가흔의 움직임에 이자크
의 얼굴에 가엽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아직도 배에 꼽혀있는 검에 살이 베어져 내장에 흘러 나올것 같은데도 몸을 움직이
는 가흔의 어깨를 위에서 누른 황제는 다른 손으로 가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발작적으로 치워내는 가흔의 모습에 한숨을 쉰 황제는 가흔의 배에 꽂혀
있는 검을 빼들었다.
"컥!!"
그 움직임에 가흔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격한 숨소리를 냈지만 황제의 표정에 별
다른 변화는 없었다. 천천히 가흔의 위에서 몰라난 황제는 가흔이 기대고 있는 나
무 맞은 편에 있는 노송에 등을 기댔다.
칸과 완전히 닮은 그 얼굴이 감흥없이 통증에 고통스러워 하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
보는 것은 공포였다.
덜덜 떨리는 턱을 경직시키며 가흔은 자신의 배를 누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금 목에서 비릿한 핏덩이가 쏫아져 나왔지만, 저런 자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흔의 모습에 황제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마치 칸크빌레와 같군."
".................. ?"
"그래. 그날 밤. 내가 칸크빌레를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시킨 그날 밤과 같아."
뭔가를 회상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황제는 가흔을 바라보며 호의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도 너처럼 피를 흘리면서도 결코 무너지려는 모습을 보이려하지 않았지.
..............가엾게도 말야."
미간을 찌뿌린채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의 얼굴에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움
직이는 것을 느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서서히 꺼져가는 가흔의 눈빛을 바라보며 이자크는 나즈막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너는 이세계의 인간도 아니니... 들어도 상관은 없겠지."
계속해서 흘린 피와 열때문에 가흔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두덩이를 흐르고 지나가는 땀을 작은 고개짓으로 털어내며 황제를 올려다 본 그
는 황금빛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저런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아주 오래전에. 무척이나 비극적인 한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다."
가흔이 듣든 말든 황제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웬일행이 있는 문근처에 모여있던 사내들은 각자가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후 문
을 발로 찼다.
탕--! !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문짝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선 사내들은 그러나 아무
도 없는 방안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 할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들 일행이 이 방에 있다는 것을 확인 했고, 그 후 아무도 나가는 것을 발견
하지 못했는데..! !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사내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지만, 그중 카일의 명령으
로 지금까지의 시나리오를 짠 바단의 안색은 특히나 심각했다.
자신의 주인의 성미에 일이 그르친 것을 안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
"바단님! ! 이쪽에 비밀통로가...! ! !"
부하의 말에 바단은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일이 확인차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지금의 상황을 어찌 해명하라는
말인가. 놈들이 도망간 입구를 찾아 빨리 뒤쫒아 한녀석이라도 잡아둬야 자신의 목
이 안전하게 붙어 있을 거다.
"저리 비켜!"
구석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있는 사내의 어깨를 거칠게 밀친 바단은 마룻바닥에
나있는 사각의 틈을 발견했다.
성인 한사람쯤은 거뜬히 지나갈수 있는 크기다.
설마하니 이런 장소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녀석들이 자신들의 작전을 피해 먼저 도망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늘...
초조함에 이마에 땀이 베어나자 그것을 거칠게 닦아낸 바단은 비밀통로가 분명한
문을 손가락으로 끌어 위로 올렸다.
한시라도 빨리 녀석들이 뒤를 쫒아야..! !
".........이건.."
그러나 기대했던 검은 구멍으로 이어진 통로가 아닌, 낮은 바닥에 깔려있는 손바닥
만한 마력진을 발견한 바단은 안색을 굳혔다.
굳은 바단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바닥의 마력진을 확인하곤 숨을 들이키
며 재빨리 등을 돌려 방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붉은 빛
을 발한 마력진에서 쏫아져 나온 불꽃이 방안의 사내들의 몸을 감쌌다.
화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 ! !"
"부..불이.. 으-아악---! !"
마력진의 문양은 건물 하나쯤은 쉽게 무너뜨릴수 있는 위력을 지닌 폭염의 불꽃이
었던 것이다.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방밖으로 굴러나와 몸에 붙은 불을 끄려던 사내들은 다시금
터지는 황금빛 불꽃에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재로 화했다.
강력한 화염은 비단 그들이 있던 방뿐만이 아닌, 건물 한층을 통째로 불태우고 있
었다. 요란한 파괴음을 울리며 불타는 건물에 주변에 위치해 있던 건물들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린다.
불타는 여관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건물들의 모습을 그곳과 조금 떨어
진 버려진 저택에서 바라보던 노웬은 덮고있던 망토를 뒤로 넘기며 등뒤의 화살을
빼들어 활에 장전했다.
".............."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불타는 건물을 구경하려 몰려든 인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카
일의 모습을 찾아내곤 천천히 화살을 끌었다. 잠시 숨을 멈췄다 뱉는 동작과 더불
어 날카로운 파공음을 그리며 날라간 화살은 당황한 표정의 카일의 어깨에 박힌다.
갑자기 날라온 화살에 어깨를 맞고 비틀거리는 카일의 주변으로 다시금 높은 비명
소리가 울린다.
그것을 확인한 노웬은 서있던 창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경고의 의미로 한발 정도는 괜찮겠지요."
평소때는 정숙하라는 그답지 않게 먼저 일을 치는 행동에 방안의 사람들의 입가에
어이 없다는 미소가 맺힌다.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응대하던 노웬은 이내 안색
을 굳히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젤, 그리고 샤한은 칸님에게로 갑니다.
라헨등은 남아서 놈들의 행적을 살피고 있도록-"
"노웬님. 그러면 가흔은..!"
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자신들이지만, 가흔은 이미 놈들의 손으로 넘
어간 뒤였다. 칸만은 운운하고 가흔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 노웬의 모습에 안색
을 달리한 라프헨은 미간을 찌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라프헨에게 시선을 주던 노웬은 굳은 안색을 풀어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았
다.
"칸님을 찾는다곤 하지만 설마 그에 대해서만 추적하겠습니까.
젤이 있으니 두사람 다 찾아올수 있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행이지만.. 왠지 느낌이 안 좋아서.."
"괜찮을 겁니다. 한번쯤은 부딫혔어야 할 상대였으니 한번 놀아보는 것도 좋겠죠."
노웬의 도발적인 말에 방안에 있던 용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얌전히 이동만 하는 와중이었던 지라 그동안 제대로 된 몸풀기를 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주던 노웬은 더이상 지체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어깨
까지 내려온 망토를 머리 위로 눌러썼다.
"만약의 상황엔 이것을 쏘시면 됩니다. 그리고 유크렌시아님을 부탁드립니다."
라헨에게 발광탄을 넘긴 노웬은 오브의 품속에 안겨있는 용을 바라 보았다.
라헨 그가 진심으로 지켜주는 사람은 그의 동생인 라프헨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유크렌시아는 앞으로 전세를 역전시킬만한 최후의 수다.
결코 놈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목걸이가 풀어져 자유롭게 둘수는 없는 것이다.
노웬의 부탁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라헨은 어서 가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문쪽을 가르켜 보았다. 그런 라헨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노웬은
젤과 샤한에게 시선을 주고 문을 열고 방에서 나섰다.
".....너무 요란하게 한게 아닐까요?"
"녀석들에게 경고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무엇보다 이쪽은 그들보다 수가 적어."
".............."
"경계를 하게해서 쉬이 덤비지 못하게 해 시간을 끄는 것도 중요하다.
당분간의 시간을 얻은 것 같으니 어서 칸님을 찾고 다음 일을 진행해야해."
딱딱하게 굳은 노웬의 얼굴에 시선을 준 젤은 건물이 불타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마력량에 눈치를 채서 일행들을 먼저 빼돌린 것은 좋았지만,
같은 층에 머문 다른 이들은 미쳐 피하지 못했다.
암묵적으로 살인이 금지된 곳에서 이런 일을 벌여 무고한 이들을 죽게한 것은 잘못
이지만, 그보단 같은 층에 고위층 인물이 있었는가에 대해 더 걱정이 크다.
그쪽에서 이쪽의 꼬리를 잡을 만한 권력의 소유자라면 앞으로의 일들이 상당히 피
곤해 지는 것이다.
부디- 죽은 이들중에 그만한 요인들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흔군은... 어쩔까요?"
".......그것도 나중 일입니다. 우선은 칸님의 기부터 잡도록."
머뭇거린 뒤에 나오는 노웬의 말에 샤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매번 일을 치는 그 꼬맹이를 찾아 왔다가 또다시 다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
이라 이건가. 실제로 그런 녀석을 잡아가서 그쪽으로 유도하려는 것만 봐서라도 확
실히 뭔가 음모가 있을거라는 냄새가 풀풀난다.
샤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꼬마, 분명 내가 너무 나대지 말라고 했다.
이 자들은 친한척 하다가도 방해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뒷통수를 치는 인간들이라
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게 잘못이다.
눈가에 어른거리는 검은 머리를 애써 지우며 샤한은 노웬의 뒤를 따랐다.
"한 가장이 있었지. 철저하게 능력중심이고 냉정하고 비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
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철학이라는 게 있어서 권력이 쥐여지자 주위에서 말리고
비난을 퍼부어도 끝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지.
그런 그에게 쌍둥이인 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우수했어.
아니 그중에 아우쪽이 좀더 우수했지."
".............크..ㅅ."
가물가물하는 시선을 끝끝내 잡으며 가흔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정신의 끈을 놓는다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다른 누군가도 아닌 바로 자신
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이자크는 노래를
부르듯이 다음 말을 이었다.
"능력중심이던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아우보다 형쪽에 좀더 큰 애정을 주었다.
그 애정이라는 게 조금 끈적한 것이긴 하지만.... 뭐, 아무튼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형쪽은 자신이 집안을 이어 받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어.
아우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도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선택하리라 의심하지 않았지.
하지만 말야.. 선택된 것은 아우쪽이었어."
".................."
"형은 미친듯이 분노했고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의 목을 베었다.
아우는 탑에 유폐되었고 그를 지지하던 자들은 반역자로 몰려 모두 참수 당했지.
그런데 그런일을 벌이고서도 형쪽의 살해는 멈추지 않았다.
적대하는 세력을 베고, 침략국을 베고, 조약을 체결하려는 나라를 베고, 베고, 또
다시 베고...... 그에게 살해된 자들의 수는 헤아릴수가 없는 정도이니.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닌가."
일정한 음율을 타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기억하다 뿐인가. 눈을 감으며 지금도 생생히 들
려오고 있어. 그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들의 울부짓음이 말야."
눈을 감고 달빛을 향해 두팔을 내민 이자크는 미약하게 끊기는 가흔의 숨소리에 들
고있던 팔을 천천히 내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검은 자위가 거의 뒤로 넘어가려는 모습이 죽지 일보직전인것 같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채인 가흔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황제는 자신의 머리
카락이 흙과 가흔이 흘린 피로 젖어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탈색된 피부와 입가에 흘러내려 엉망인 가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자크는 고개를 숙였다.
"괴로운가? ........칸크빌레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도 괴로웠겠지.
그래서 내가 복수한거야. 내가 그를 황제자리에서 끌어 내린거야."
사-삭.
바람이 가흔의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이미 수많은 검에 베여 피를 흘리는 그를 죽이려고 검을 들었지만, 죽이진 못했지.
어째서 일까. 그토록이나 무시하고 미워하고, ..신경도 쓰지않은 반신이었는데....
오히려 쓰러지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으니 이상한 일이지."
".............."
"그래서 그를 죽인채 해서 내가 있던 탑에 가둬 두었어. 그런데 그에게 반한 자들이
그를 탈출시키려고 하자 화가 나서 성장을 되돌려 버렸지.
...............나 자신도 이렇게나 어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말야."
".........카...."
"그를 부르는 거야? 그가 올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쉴새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는 이내 피식하고 웃어며 가흔의 볼을 올려쳤다.
찰싹-
화끈하게 울리는 통증에 미간을 접은 가흔은 눈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 보았다.
그가 이자크라는 소년이고 중앙국의 황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까지는 꽤나 많은 시
간이 필요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황제는 손을 뻗어 가흔의 배를 눌렀다.
"커-ㄱ---!!"
울컥.
통증에 또다시 피를 한모금 내뱉는 가흔의 모습에 이자크는 웃으며 아프냐고 물었
다.
그런 물음에 노려보는 것으로 응대하는 가흔의 모습에 이자크는 또다시 물었다.
"아픈가?"
"...다..당연한..말으.....ㄹ..."
제대로 굴려지지 않은 혀로 입을 열자 황제는 입가의 미소를 더 진하게 띄우며 또
다시 가흔의 배를 눌렀다. 벌려진 상처사이로 내장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감각에
가흔은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노려 보았다.
이 녀석은 칸과 닮았을 뿐 미친놈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디가 그렇게나 아파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거냐?"
"............"
"정말로. 정말로- 너는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럽냐고?
당연히 고통스럽다.
그가 누르는 배는 불에 데인 듯 뜨겁고 열이 오르는 머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다, 피가 하도 많이 빠져나가 오한이 들면서도 뜨거운 피부가 지금 당장 죽어도 이
상하지 않을 상태인 것이다.
"..후훗."
그 작은 머리로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쉴새없이 움직이는
검은 눈동자에 황제는 고개를 숙여 가흔의 얼굴 바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
다.
접근한 얼굴에 안색을 굳히며 숨을 들이키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느껴진다.
"아픈것 따윈 정말로 고통스러운게 아냐."
"............."
"너에게 그런 것 따윈 무의미해. 너에겐 이 세계에서 얻은 감정이나 통증이나 그 모
든 것들이 의미없어. 그러니 애써 느끼려 하지마."
"....무...무슨... 헛..소리를..."
"아프지 않아. 괴롭지 않아."
".........크..ㄱ.."
"넌 아픈게 아니야. 피를 흘리는 게 아냐."
눈앞에서 쉴새없이 움직이는 저 붉은 입술을 막고 싶었다.
알아 먹을수 없는 말을 해대며 몸을 점점 앞으로 기움에 따라 배에 가해지는 통증
이 배가 된다. 그런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며 점점 얼굴을 더 앞으로 갖다댄 황제는
예의 나른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넌 아주 편안한 상태야. 그렇게 믿어."
"이곳에서 너를 상처입힐수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어."
"이곳에서 얻는 것들 모두가 너에겐 무의미해."
"자- 이것 봐."
지껄여 대는 말에 따라 머리속에 엉망이 되는 느낌이다.
저도 모르게 황제의 말을 되새기자 점점 통증이 완화되는 것을 느낀다.
가흔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접근한 황제는 다가 설때와 마찬가지인 움직임으로 서
서히 가흔의 몸에서 물러났다.
반쯤 실신할 것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말을 따라 달삭이는 핏기가신 입술에 황제는
입가의 미소를 점점 더 진하게 지으며 가흔의 배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내었다.
두손이 가흔이 흘러내린 피로 흠뻑 젖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것봐. 더이상 피도 나오지 않아. 넌 괜찮아."
"..나....ㄴ.. 괜찮..아..."
"그래. 그런거다. 귀여운 녀석."
사락.
또다시 한가닥의 바람이 불어 가흔의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눈을 찌를 정도로 길어진 앞머리가 왔다갔다는 하는 것을 바라보던 가흔은, 눈앞의
소년이 배를 누르고 있던 자신의 손을 떼내는 것을 느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얌전히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가흔의 모습에 만족의 표정을 지어보인 황제는
배에서 때낸 가흔의 손을 각각 한손씩 잡고 가흔을 바라 보았다.
"이것봐. 넌 괜찮잖아."
".........."
황제의 말에 천천히 등을 일으켜 자신의 배에 시선을 주던 가흔의 눈이 서서히 크
게 벌려진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경악의 빛을 확인한 황제는 잡고있던 가흔의 손을 놓고 그의
배를 쓰다 듬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잔뜩 쉰소리로 부정의 말을 내뱉는 가흔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리며 황제는 배위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때내었다.
그에따라 손에 가려진 자신의 배가 더 자세히 보인다.
이자크의 검에 찔린 자신의 배는 상처하나 없었다.
믿을수 없는 현실에 가흔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터질것 같았던 배의 통증도 뿌연 안개가 낀것 같았던 머리속도 괜찮아졌다.
알수없는 상황에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가흔을 바라보던 황제는 앞으로 넘어온 머
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입술을 열었다.
"마력을 무효화 시키는 힘에, 서쪽에 들어섬에 따라 몸의 불편을 느꼈다면 뻔한거
다. 소년이여."
"..........무...무슨..."
"아직도 모르는 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곧 부숴질 것 같은 이 표정에 조금의 충격을 줘서 산산조각 내는 것도 나름대로 즐
거운 일이다.
자신의 말을 사형선고처럼 기다리는 그 얼굴에 일말의 쾌감을 느끼며 이자크는 천
천히 입술을 열었다.
"넌 정신체다."
"..................."
"좀더 쉽게 말하자면 꿈을 꾸고 있는 상태랄수 있겠지."
이자크의 말에 가흔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