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지?"
".......그냥 요 앞에 다녀온 거야."
궁색한 변명에 한쪽 눈썹을 올린 가헌의 눈빛엔 거짓말하지 말라는 빛이 역력하다.
유헌은 가헌과 언쟁을 하는 것보단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더 지니고 싶었기에 그를
밀치고 방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팔을 붙잡히는 덕분에 거실로 질질 끌려갔다.
가기는 싫었지만, 가헌의 얼굴이 너무 딱딱하게 그를 건드려 굳이 일을 만들고 싶
지 않았기에 그의 손길대로 소파에 앉아 팔장을 낀 유헌은 몸을 뒤로 눕혔다.
말할게 있으면 해보라는 듯한 그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가헌은 이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전과는 다른 눈앞의 유헌이란 존재는 여러모로 속을 썩이는구나 싶다.
"이번에 시험을 어떻게 친거지?"
"..........."
"교무실에 들려서 알아봤다. 꽤나 잘 봤더군."
반어법을 사용해 자신을 깍아 내리는 가헌에게 눈썹을 올려보인 유헌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반박을 할수도 없는게, 확실히 이번 시험은 엉망이다 할정도
로 성의없게 본 것이다.
평점이 80만 넘어도 잘 본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처참했을 점수에 가헌과 담임이 당
황해 하고 있는 거겠지. 전에는 어리버리해도 시험 하나만은 잘 봤는데, 사람이 변
해 잘 됐다고 생각할 때쯤 공부쪽으로 구멍이 나타나니 당황 할만도 하다.
뭔가를 말하려다 눈을 피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유헌의 모습에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주먹쥔 가헌은 그가 그렇게 시험을 볼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입원하는 동안 진도를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평소대로 잘 하겠거니 하고
놔둔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자신의 불찰이다.
점점 어두워 지는 가헌의 표정에 유헌은 눈썹을 찌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의 존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만 들어가 볼께. 피곤하거든."
"네가 원한다면 재시험을 칠수도 있어. 물론 공부는 내가 봐줄테니 걱정하지 마라."
말로는 원한다는 전제를 들고있지만, 반드시 재시험을 봐야 한다는 억양에 유헌은
정말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지 중 하나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내에서 뭔들 못하겠느냐만 꼭 그래서 집안의
체면을 차릴 생각인 건가.
성적이 꼭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가야지 만족한 인간들이다.
"됐어. 무슨 재시험이야. 귀찮게 그런거따위...."
"아버지에 귀에 이 일이 들어가면 네가 무사할 것 같냐."
물론 가만히 안 있으실 테지.
안 그래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둘째가 금쪽같은 첫째에게 성처를 입힌데다 한강
에 몸을 던지는 등 집안과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만을 하니 요즘엔 아주
잡아 먹을 것처럼 닥달하는 그다.
저 가헌이 학교일에 대해 이것저것 고자질하면 자신은 변명의 여지없이 유학행이
나 정신병동에 들어가게 될테지...
누가 자식을 그리 미워하겠나 싶겠지만, 부친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은 중하교 때 정신병원에 한달동안 있으면서 미련을 버렸다.
피식하고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 보는 유헌의 모습에 가헌은 자신이 실언을 해 그에
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닭곤 표정이 굳어졌다.
전같으면 유헌이 무슨 표정을 짓든 신경도 안 썼을 테인데, 요즘들의 그의 표정이
나 말등에 이상하리 만큼 반응하고 있다.
이런 자신이 낯설면서도 도저히 유헌에게 신경을 땔수가 없으니 이상하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 하지만 재시험 같은거 절대로 안 볼거야."
"........."
"시험 마지막날이잖아? 모처럼 기분좋게 지내자고, 형님."
삐딱하게 가헌을 내려다 보던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던 유헌은 거실 입구에 장
승처럼 서있는 부친을 발견하곤 안색을 굳혔다.
인왕산처럼 안색이 굳은 그는 둘째와 첫째에게 시선을 주더니 조용히 유헌의 앞으
로 걸어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하얀 볼을 내리쳤다.
짝--!
"아버지! !"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벽장에 부딫혀 쓰러지는 유헌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한 가헌은
뛰어나가 유헌과 아버지 사이에 버티고 섰다.
눈빛으로 비키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유헌의 앞에 가로막고 서있는 가헌은 부친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을 지언정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한번도 자신의 말에 거역을 해본적이 없던 첫째였다. 누구에게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그런 아들이었는데, 저 둘째놈이 다 망쳐둔거다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치료가 되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가헌의 오른쪽 눈에 상처 자욱은 종종 떠오
를 만큼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것이었다.
형에게 저런 상처를 남겨둔 것도 모잘라 한강에 몸을 던지기까지 했지.
게다가 어서 배워온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나선 여기저기서 사고를 일으키고 다니
는 모양인데다 아까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번 시험도 엉망으로 친 모양이다.
지금껏 유헌을 집안에 들여 놓았던 것은 오로지 공부를 잘 한다는 그 이유 하나뿐
이었는데, 이로써 남아있는 하나의 기대 마저도 사라졌다.
"당장 짐 쌀 준비를 해라."
"..아버지! !"
"당장 일어나서 짐을 싸란 말이다! ! 유학갈 채비나 해! !"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있던 유헌은 부친의 말에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
었다.
가헌이 부친을 잡고 달래는 것이 보였고, 그런 그에게 도대체 뭐 때문에 저런 녀석
을 감싸는 거냐는. 한때 아버지라고 불렀었던 사람이 호통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멍하니 앉아있던 유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헌과 붙어있는 부친을 노려 보
았다.
유헌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부친이 그를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안색을 굳힌다.
서늘한, 너무나도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둘째가 타인보다 더한 낯설음
을 느끼게 한 것이다.
한순간이나마 하찮게 여겼던 둘째에게 위압감을 느꼈다는 것에 얼굴을 붉힌 그는
가헌을 밀쳐내고 서있는 유헌에게 다가가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런 녀석은 말보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툭하면 손을 드는 버릇은 관두시죠."
"큭..! 이..이놈이! ! !"
얼굴을 향해 내려온 팔을 잡아채선 나지막하게 말하는 유헌의 모습에 가헌은 안색
을 달리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도대체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유헌을 때리는 아버지는 낯선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팔을 잡고 나직하게 말하는 유헌의 모습따위, 본적이 없다.
상상한 적도 없었다.
벌어질수 없을거라는 것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패닉상태에 빠진 가헌은 부친의 팔
을 잡고 있는 유헌의 팔에 매달려 때기위해 노력했다. 힘은 자신이 유헌보다 세다
고 생각했는데, 유헌의 팔은 아버지의 팔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이것 놔. 유헌! !"
안색을 달리하며 자신에게 소리치는 가헌과 얼굴이 고통으로 점점 붉어지는 부친
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흥이 깨졌다는 표정으로 잡고있던 손을 놓았다.
손을 빼낼려는 타이밍으로 잡은 손을 놓았기에 그대로 뒤로 자빠지는 아버지와 몸
을 비틀거리는 가헌을 바라보던 유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에서 나왔다.
등뒤로 욕설을 내뱉는 아버지와 이름을 부르는 가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
고, 방으로 올라간 유헌은 문을 잠그고 침대위로 쓰러졌다.
".........."
귓가에 치직거리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미간을 찌뿌리던 유헌은 배게를 들어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하얇고 넓은 공간 가운데 서있던 유헌은 혼자라는 느낌이 불현 듯 들자 안색을 굳
히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초조하게 서있던 그는 주위의 적막감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누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계속해서 뛰어 갔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펼쳐진 하얀 공간과 어깨를 짓누르는 적막
감에 유헌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분명 누군가가 있을 텐데.
한방울 흘러나온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 고개를 젖던 그는 오른편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검청의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
그다.
분명 그다.
- 칸! ! !
그림움에 목이 메어 이상하게 튀어 나가는 이름을 들으며 유헌은 미친듯이 그쪽으
로 달려 나갔다.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만히 서있는 작은 몸을 끌어 당겼다.
복받치는 설움에 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큰소리로 울음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눈
물을 흘려대던 유헌은 얼굴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의 얼굴을 좀더 자세하게 보고 싶었다.
눈물을 닦으면서 계속해서 칸의 이름을 부르던 유헌의 그가 반응이 없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같으면 자신보다 더 좋아하면 달라붙을 그가 얌전히 있으니 이상하다.
- 칸 ?
이름을 부르며 하얀 볼을 감싸자 그제서야 황금의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 본다.
그 눈동자에 가슴이 아릿해 지는 것을 느끼며 유헌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헌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살며시 고개를 기울더니 이내 이를 들어내며
화사하게 웃는다.
- 넌 가흔이 아니잖아.
갑작스런 그의 말에 유헌의 얼굴이 굳어진다.
- 넌 유헌이라며?
어느새 칸의 뒤에 나타난 에스가 조롱의 눈빛을 보낸다.
서서히 수를 늘려가는 그리운 얼굴들을 바라보며 유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 질을
쳤다.
- 우리의 가흔은 네가 아니잖아.
- 그는 가헌이란 말야.
라프헨과 오브의 말에 유헌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아니야, 내가 가흔이고 동시에 유헌이야.
그때는 내가 이상해서.. 머리속이 망가져 있어서 자신을 가헌이라고 착각한 것뿐.
난, 내가 가흔이라는...! !
-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들을 속인 거군요.
서늘한 은색의 눈동자를 빛내는 노웬의 말에 반박하려던 유헌의 입이 다물린다.
망연한 표정으로 칸에게 시선을 내린 그는 그의 말에 살수도 줄을수도 있을 것 같
다는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 넌 거짓말쟁이야.
칸답지 않은 그 싸늘한, 소름이 돋을 듯한 그 냉기에 유헌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
다. 부들거리는 떨림이 진정되지 않는다.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뒤로 물러난 유헌의 눈은 쉴새없이 눈물을 쏫아내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바로 가흔이야.
내가.. 유헌이란 말이야.
천천히 하얀 세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돼."
".........."
"다들 집에 갔는데 어째서 남아 있는 거야? 우산이 없어서 그러니?"
아까부터 귓가에 들려오던 이 소리는 비가 내리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미할라를 만나 더이상 정보를 모으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은 저절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라도 있지 않는다면 방학중이기에 집안
에서 계속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다.
멍하니 눈을 감았다 떳다하는 유헌의 볼로 은빛의 액체가 떨어져 내린다.
그것이 여자의 모성을 자극한 모양인지 유헌을 잠에서 깨운 여성은 손수건을 꺼내
들어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다시금 눈
을 감았다 뜬 그는 멀리 입구에서 다가오는 가헌의 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 넌 가흔이 아니잖아.
멍한 머리속에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가헌은 책상에 엎드려 있는 유헌과 그의 옆에 붙어 얼굴을 닦아주는 척 하며 여기
저기를 매만지는 여자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렸다.
"실례하지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어머 !"
유헌의 옆에 있다 두들이는 손길에 몸을 돌린 여자는 뒤에 서있는 똑같은 얼굴에
입을 가리며 작은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잘생긴 쌍둥이들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의 눈빛이 흑심으로 바뀌는 것을 경멸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던 가헌은 여전
히 엎드린 채로 눈만 깜박이는 유헌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였다.
"그만 집에 돌아가자. 우산 가져왔어."
"........."
"짐은 이것 뿐이지? 내가 챙길테니 정신차리도록 해."
책들과 노트들을 가방속에 집어넣는 가헌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헌은 그가 다시금
재촉하자 그제서야 부스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이 나가기라도 한듯 멍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그 모습에 미간을 찌뿌린 가헌은 계
속해서 유헌의 물건들을 챙겼다. 물건들을 치우는 가헌의 손길을 멍하니 내려다 보
던 유헌은 손을 들어 눈물에 젖은 눈두덩이를 눌렀다.
몇번 주무르고 나니 멍한 정신이 서서히 깨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가방을 들고 가려는 가헌의 손에서 짐을 들고 어깨에 맸다.
자신이 들겠다고 하는 가헌에게 고개를 저어보이며 몇시냐고 물어본 그는 8시가
넘었다는 말에 미간을 찌뿌렸다.
아까 컵라면을 먹고 잠시 잠을 잔다는게 근 3시간을 내리 잔 모양이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유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헌은 괜찮은 거냐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자신의 볼을 바라보는 시선
에 쓴웃음 지으며 얼굴에 붙어있을 반창고를 떠올렸다.
"괜찮아. 바로 치료를 해서 흉은 나지 않을 것 같고 말야."
"...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는 그 음성에 유헌은 작게 웃어 보였다.
전에는 일방적으로 챙기려고만 하던 가헌이 요새들어 분위기가 상당히 부드러워
져서 그냥 보통 형제처럼 대해주는 것이다.
그와 이런 사이가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유헌으로썬 지금의 상황이 마냥 신기하
기만 했다.
"모르는 거니깐 병원은 꼭 가봐."
"알았어."
걱정 말라는 듯이 가헌의 어깨를 두들이는 유헌이지만, 그도 볼의 상처가 생겼을
때는 꽤나 놀랐었다.
일주일전 보충을 위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같은 반의 부회장인 예리가 사귀자
는 말을 꺼냈었다. 물론 응할수는 없기에 그 자리에서 거절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달라 붙거나 근처에 여자애들이 오면 마치 여자친구인 것처럼 애들을 쫒아 내길래
그냥 '귀찮게 하지마.'라고 말했을 뿐인데 뺨을 맞았다.
여자에가 무슨 힘이 있겠느냔 만은 뺨을 맞을 때, 예리의 손목시계에 볼이 긁혀 당
시엔 꽤나 많은 피를 흘렀었다. 만약 볼에서 피가 흘러 그쪽으로 정신이 쏠리지 않
았다면, 여자고 뭐고 자신도 한대 때렸을 지도 모른다.
그 일로 학급내 예리의 지지가 꽤나 떨어지고, 자신에게 동정표가 몰렸으니 좋은
일이라고 할수도 있는건가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다 볼의 상처따윈 잊고 있었는데,
가헌은 그게 아니였는지 볼때마다 괜찮냐고 묻는 것이다.
하긴 자신과 똑같은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은 좀 안좋은 볼거리이긴 하다.
"집에 아버지 계시지?"
"아, 응.."
"...병원이나 들렸다 갈까."
요새 부친과의 관계는 최악이다.
볼때마다 노려보는 부친을 쳐다보지도 않아 그다지 부딫히지는 않지만, 노골적으
로 치워 버리고 싶다는 눈길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정말 질려 버리겠다.
유헌의 맘을 아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에 가자고 말한
가헌은 도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비를 맞고 내려오는 교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보여 미간을 잠시 찌뿌린
가헌이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빈택시에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는 길에 뭐나 먹고 들어가자."
"그래."
가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앞으로 멈추는 택시에 가헌의 팔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앞에 물 웅덩이가 있어 물이 튀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뒤로 물러난 가헌은 아까 보았던 교복입은 무리 중 하나와 부딫히게 되었
다.
별로 사과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였지만, 이쪽의 실수이고 이런 녀석들은 사과하지
않으면 트집을 잡는 것이 정설이기에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비가 붙을 상대를 찾고있던 중이었는지 가헌의 말에 미간을 찌뿌
리며 험한 욕설을 퍼붓는다.
순식간에 굳어지는 유헌의 얼굴에 가헌은 안색을 달리하며 그의 앞에 섰다.
"어쭈? 이 자식 노려보는 것좀 봐라."
"먼저 부딫혀 놓고 그런 싸가지없는 표정 짓는건 어느 나라 풍습이냐?"
"야아- 너무 그러지 마라. 애들 운다. 면상도 반반한게 기생 오래비들 같은데 말
야."
우선도 쓰지 않고 다녀서 온통 빗물에 젖은 그들은 일부러 유헌과 가헌쪽으로 물을
튀기며, 저들끼리 요란하게 떠들어 댄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쉽게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번도 이런 일을 당한적이 없었던 가헌은 안색을 굳히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이런 놈들은 몇푼주면 알아서 물러나는 법이다.
"사례비는 주도록 하지."
"...형."
지갑을 꺼내들고 눈앞의 녀석들에게 흥정하려는 모습에 자신의 이마를 집었다.
언제나 무리의 중심에 있어 이런 놈들과 마주할 일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일을 당할
필요도 없었던 그는 현 상황에서 가장 최악의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가헌의 행동에 얼굴을 험악하게 찌뿌리며, 둘을 둘러 쌓다.
가헌에 의해 세워진 택시는 주변 분위기에 벌써 출발한지 오래, 주변을 지나던 사
람들은 험악한 분위기에 안색을 굳히며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자신들을 뭘로 보는 거냐며, 거지로 보는 거냐는 둥 자기 비하 발언을 저들이 하고
선 그것에 더 열이 받아 험한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 유헌은 점점 기분이 가라앉음
을 느꼈다.
안 그래도 최악의, 다시는 꾸고 싶은 않은 꿈을 꾼 탓에 꽤나 신체의 밸런스가 안좋
은 유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자식-! ! 생님 주제에 우리랑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집에 돌아갈 생각들은 마라, 아가들아."
음산하게 중얼 거리면서 앞에 서있는 가헌의 어깨나 머리를 툭툭치는 모습들을 보
며, 자신이 형이 꽤나 참는구나 싶었다.
그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검도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수만 믿고 덤비는 눈앞의 잔
챙이들은 아무것도 아닐텐데.... 아마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상당히
굴욕스러운 지금의 상황을 억지로 참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 녀서들은 가헌이 봐준다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을 실컷 두들이고 나서 지
갑까지 탈취해 갈 생각이겠지.
유헌의 검은 눈동자가 검게 가라 앉는다.
"야-야- 쫄았냐? 다시 한번 말해봐라. 사례비이~ 웃기고 있네."
"아주 쫄아 붙었네."
묵묵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 보는 미형의 쌍둥이를 괴롭히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
인지라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 푹 빠졌다.
일단 말로써 실컷 괴롭혀 준다음에 다음에 주먹으로 두들여 주자.
물론 녀석들의 지갑이나 값비싸 보이는 저 시계들도 가져가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테지. 저것들을 팔면 꽤나 많은 돈이 들어 올테니 당분간 돈 걱정없이 놀수있을 거
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고있던 소년은 눈앞에서 반짝이며 휘둘러지는 호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두눈에 느껴지는 통증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아
짐승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제가 다친 곳은 없습니다."
"너도 유헌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체온계를 입안에 넣으려는 행동을 피하며 웅얼거리는 가헌의 모습에 의사는 미간
을 찌뿌렸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외양만을 봐서 병원에 온 가헌과 유헌이 멀쩡
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같이 온 4명의 교복입은 무리들은 상태가 무척이나 심각했지.
어두워 지는 가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의사는 한숨을 쉬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
에게 쉬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에서 나왔다. 멀쩡한 아이를 병실에 들여논 것이 탐
탁치 않았지만, 저들의 대단하신 부친때문에 어쩔수가 없다.
밀려드는 피로감에 방에서 나오자 마자 금연구역인데도 담배를 꺼내무는 사내의
모습에 챠트를 들고 서있던 간호사는 동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병원내에서도 꽤나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 저들 형제의 아버지를 봐서라도 매번 신
경을 쓰는 그의 노고가 불쌍했던 것이다.
"그래서 놈들의 상태는?"
유헌들과 같이 경찰차로 우송된 소년들의 안부를 묻는 의사의 말에 간호사는 순식
간에 안색을 달리하며 손에 들고있는 챠트를 넘겼다.
넘겨받은 챠트를 건성으로 넘기던 그의 얼굴 빛이 서서히 흙빛으로 변하더니 나중
에 손으로 입을 틀어 막는다.
그런 그의 행동에 간호사는 숨을 들이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는 단지 보고를 받는 것뿐이지만, 자신은 그 소년들의 상처를 직접 눈으로 봤었
던 것이다.
"한명은 두눈이 가로 일자로 찟어져 봉합 수술에 들어갔지만, 안구의 손상이 심해
축출했습니다. 다른 두명은 각각 팔과 다리가 다른 각도로 부러졌고, 한명은 배에
구멍이 뚫린 뻔했어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갔다면 사망했을
수도 있을 상처입니다."
"....맙소사."
입에서 담배가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이번 일을 어떻게 하면 수습할지에 대해서면 생각할 뿐.
아니 이것을 단지 수습하려고만 해도 괜찮은 것인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하던 그는 숨기려고 했던 계획을 바꿨다.
.......아무래도 두사람의 부친에게 연락을 돌려야 겠다.
"김간호사. 가헌군 아버님께 연락을 하도록 해."
".....네."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진 그녀는 이내 짧게 대답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번일은 정도가 너무 싶해 가만히 묻어 둘수만은 없었던 것
이다.
툭툭.
의자에 앉아 멍하니 책상을 두들이는 것도 이젠 질렸다.
가헌은 의사와 대화 후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괜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아니지만.. 병실의 침대에 앉아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헌이 있는 병실로 옮겼다.
따로 할말이 있다고 해서 그와 다른 병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유헌이 있을 병실의 문을 두들여 보았지만 반응이 없자 한숨을 쉰 그는 그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몸을 기댄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는 유헌의 혼이 빠진것 같은, 생기가
없는 모습을 보여 가헌은 잠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수 없었다.
저런 모습을 과연 누가 불가 몇시간 전에 우산으로 4명의 소년들을 차마 볼수없으
리 만치 잔인하게 두들긴 장본인으로 보겠는가.
"..무슨 일이야?"
"괜찮나 해서...."
얼굴은 그대로 창에 붙인채 눈만을 돌려 묻는 말에 대답하니 그렇구나라는 듯이 긍
정의 소리를 내며 다시 창가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모습이 아까의 불안을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간 가헌은 무엇을 보
고 있나해서 몸을 창가 앞으로 내밀었지만 보이는 것은 비오는 텅빈 거리였다.
볼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유헌과 마찬가지로 창밖을 내려다 보던 가헌은 옆에
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뿌리며 유헌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눈동자를 음울하게 물들인 그는 연신 '돌아가고 싶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좀 자는게 어떨까?"
"........."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보여, 일이 생기면 깨울테니.. 자라."
창가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유헌의 몸을 억지로 일으킨 가헌은 그를 침대에 눕
힌후 목까지 시트를 덮어 주었다.
눈을 멀뚱히 뜨고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며 유헌의 눈위로 손을 올린 가헌은 다시금
'자라.'라는 말을 건냈다. 손바닥을 간지르는 미약한 숨이 가슴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지만, 치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라니 도대체 어딜, 누구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거냐.
혼란한 정신의 유헌의 헛말일수도 있지만,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그 말에 가헌은
미간을 찌뿌리며 다른 손으로 누워있는 동생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자라고 재촉하는 그 무언의 압력에 유헌은 몸의 긴장을 풀며 눈꺼풀을 감았다.
지금 자면 왠지 좋지않은 꿈을 꿀것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가헌의 말대로 자신은
쉬어야 할것같다.
그래야 머리속을 울리는 이 요란한 소리도 사라지겠지...
새근.
수분뒤 금방 잠이 든 유헌의 얼굴에서 손을 때낸 가헌은 근처의 의자를 끌어 그의
옆에 앉았다. 턱에 손을 받친채 한동안 비내리는 밖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돌려 잠
든 유헌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지난 18여년동안 질리도록 봐오던 반신이건만, 요 한달동안 본 모습들이 더 익숙하
고 맘에 든다.
턱에서 손을 빼내 침대에 놓여있는 유헌의 손가락을 건드려 보던 그는 천천히 그의
얼굴옆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유헌의 숨의 자신의 얼굴을 간지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맘에 들어서 가헌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었다.
"유헌이가 또다시 일을 친 모양이더라고."
"어쩔수 없음. 그는 현재 상당히 위험하거든, 미친놈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
"그거 좋은 거야?"
의아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며 사심없이 묻는 말에 기가 막힘을 느낀 미할라는 손바
닥으로 상대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요란한 비명을 올리며 폭군이라고 왁왁대는 상대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쉰 그녀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요새 들어 하도 몸에서 왔다갔
다하니 상태가 별로여서 한동안은 잠잠히 있으려고 했더니, 이 꼴이다.
역시 그 유헌이란 녀석은 외관만 멀쩡했지 속은 상할대로 상해서 이곳에선 더이상
구제할수 없었던 것이다.
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미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상대는 한숨을 쉬며 턱에 손을 받쳤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혔어도 화가 나지 않았던 유일한 존재가 아파서 병원에 있다
는 것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가서 병문안이라는 것도 해볼까하고 생각해 봤지만, 관두기로 한다.
이번에도 팔을 잡히면 그대로 부러질지도 모를 일이니깐.
"어-이 한심한 인간."
"....왜? 무정한 여자."
"이상한 녀석들이 유헌에게 접근하는 것 같다. 가서 막아.라고 하고 싶지만...
네가 가도 별로 도움은 알될것 같구나."
"에? 뭐야? 유헌에게 이상한 놈들이 위협이라도 하는 거야?"
"그보다 질이 나쁠것 같은데?"
한쪽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꼬아보인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위에 누
워있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 보았다.
불쌍한 여자.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게 된다면 저기 창가에
엎드려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실례가 되겠지.
귓가를 두들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뜬 미할라는 병실에 누워 잠들어 있
을 유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너나 나나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허허로운 생각에 피식하고 웃어보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던 남자는 문득 생각나
는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유헌이는 저쪽에서도 이상했어?"
"아니. 오히려 참으로 건실한 소년이었지. 상냥하고 착하고 생각 많이하고 똑똑하
고...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여기서는 저래? 당신말대로 미친놈 같잖아."
하지만 진짜 미친놈은 우산으로 사람을 그렇게 두들기진 않는다.
실은 가헌과 유헌이 불량한 인간들한테 둘러 쌓였을때부터 보고있었던 그는 나타
날 타이밍을 기다리다 갑자기 가헌이라는 녀석한테서 우산을 빼앗아 정확하게 휘
두르는 유헌의 모습에 얼이빠져 다짜고짜 미할라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 무기같지도 않은 것으로 사람을 그렇게 두들기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예리하게 휘두르는 각도는 자신조차 놀랄 지경이었으니...
그곳에서 유헌을 내버려 두고 먼저 온것은 조금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가 이곳에
왔으니 결과적으로 좋은게 좋은거다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바라보
던 미할라는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유헌은 이곳에선 살수가 없어.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아이라....
설령 살아갈수 있다고 해도 그건 자신의 의지로서 사는 삶이 아니겠지."
"............."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거야. 그곳에 두면 행복해 질수도 있었을 텐데.. 그곳에서 그
는 아무런 장해도 없는 그저 건강한 소년이었는데 말야."
유헌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내가 이곳에선 망가져 손을 쓸수없을 정도로 이상했지만, 저 세계에선 여왕이라 불
릴만큼 유능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남의 잘못은 아주 잘보여도 자신의 결점은 열심히 찾으려하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가 어려운 법이니.
씁쓸하게 웃는 미할라의 모습에 소년의 얼굴이 이그러 진다.
"난 말야."
"............"
"당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옆얼굴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본 미할라는 입가에 조용히 미
소를 띄었다. 한번도 제대로 안아준 적이 없는 아이가 자신을 마냥 믿고 따라주는
것이 고맙기만 할뿐이다.
하지만..... 자신은 곧 그와 유헌에게 아주 힘든일을 시킬지도 모르겠지.
수많은 인공장치에 몸을 맡기고 가느다란 숨을 내뱉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던 미
할라는 안색을 어둡게 굳혔다.
탕! ! !
"..........?"
선잠에 설핏 들었던 가헌은 귓가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엎드려있
던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밝게 발혀진 방안의 모습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비비던 손을 치우고 가늘게 뜨며
병실에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채로 하나같이 딱딱한 인상들의 사내들의 가운데 있는 안경낀
차가운 인상의 30대 중반의 남자를 발견한 가헌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의 비서로 그의 오른팔과 같은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부친이 변심하며 유헌의 상태가 걱정스러워 보냈다고 볼수가 없는 것은 병문안에
굳이 이런 사람들을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무언가를 느낀것인지 딱딱하게 굳은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헌에게 고개를 작게
숙여보인 비서는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헌님. 둘째 도련님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어디로?"
끼-익.
앉아있던 자리에서 물러나 유헌의 몸위에 양손을 올리는 가헌의 모습에 비서는 미
간을 찌뿌렸다.
저 가헌이 유헌에게 집착하며 그답지 않게 군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을 땐 믿지
않았으나 막상 직접 목격하게 되니 인정할수 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인정과 자신이
해야 할일은 별개로, 다시금 입을 연 그는 유헌을 데려 가겠노라고 입을 열었다.
그런 자신에게 더더욱 서늘한 눈빛을 보내는 가헌의 모습에 비서는 잠시 숨을 들이
켰지만, 이쪽은 각종 무술의 유단자들을 대동하고 왔다.
가헌 그가 아무리 실력이 좋다지만 이만한 사람들을 이길수는 없을 것이다.
"부친께서 유헌님을 입원조치하라고 하셨습니다."
".........뭐?"
"요즘 둘째 도련님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뗀 그는 뒤에 자리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누워있는 유헌에게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한 가헌이 침
대를 뛰어 넘어 사내들을 제지했지만, 특기인 검도를 사용할수도 없는 상황에 그는
이내 사내들에게 한팔씩을 내준 채 비서의 품으로 들어가는 유헌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 볼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
"어차피 이 병원내에 있는 곳으로 옮겨지실 겁니다."
눈가를 가늘게 휘며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이를 간 가헌은 잡힌 팔을 빼내려 했으
나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더 강하게 잡으며 놓지 않으려는 반응에 그는 안색을 달
리 할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험은 중학교때 이미 격어봤다.
달라진 것이라곤 자신들이 좀더 나이를 먹은 것과 그때와 달리 자신이 유헌이 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발버둥을 치며 사내들에게서 벗어나려는 가헌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던 비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접 눈으로 봐도 믿기지가 않는군요. 두분이 이렇게나 우애가 좋을실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조롱조로 한말에 바로 쏫아지는 서늘한 눈빛에 속으로 혀를 찬 그는 애써 아무렇지
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친께선 유헌님으로 인해 가헌님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둘째 도련
님을 생각하신다면.... 저로썬 전처럼 행동하실 것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눈빛으로 저와 유헌님을 배웅해 주실길-"
가헌에게 허리를 숙이고 말을 마친 비서는 이내 몸을 돌리고 병실에서 나왔다.
비서의 말에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리던 가헌은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숙였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도 알고있는 것이다.
변화된 유헌으로 인해 자신이 이상하게 된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수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기에 앞서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
눈가에 힘을 준 가헌은 나직히 이를 갈았다.
"......믿을수가 없네."
그 남자 또다시 자신을 이런곳에 집어 넣을 생각을 하다니..
역시나 사람같지도 않은 인간.
20평 남짓한 방에 있는 침대위에 앉아 멍하니 있던 유헌은 안에 놓여져 있는 티비
나 오디오, 게임팩 등등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명백히 신경을 써줬다는 듯이 자리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자니 자신이 정신병동이
아닌 그냥 평범한 병실에 앉아있는 느낌을 드는 것이다.
머리를 뒤로 눕히고 철책이 쳐져있는 창에 시선을 준 유헌은 문듯 울고 싶다는 생
각이 들었다. 콧끝이 찡해지는 느낌과 현재 자신이 쳐해진 기가막힌 상황에 웃고
울고 춤추고 싶은 느낌이 든다.
사람이 이러다 미치는 거구나라는 생각에 또 다시 웃음을 지은 가헌은 몸을 침대위
로 눕히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무감하게 바라 보았다.
이번엔 여기서 몇달이나 쳐박혀 있어야 하는 걸까....
탁.
"봐두는게 좋아."
유헌이 저렇게 된것은 그의 일을 아버지에게 알려준 의사에게도 탓이 있다고 생각
한 가헌은 눈앞의 남자에게 부친에게 말을 달리해서, 유헌을 풀어 달라고 따지려
했다.
날카롭고 타당한 근거를 대며 인정사정없이 자신을 비난하고 따지는 가헌의 모습
을 피곤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의사는 미간을 누르며 결국 그것을 꺼내고 말았다.
개인정보의 유출은 아주 극비인데 말야.
뭐, 그동안 유헌의 부친에게 꼬박꼬박 보고같은 것을 해왔으니 새삼스레 양심의 가
책을 받을 필요도 없고 말야.
"이게 뭐죠?"
"유헌의 삼당결과 기록서. 꽤나 흥미로울 걸. 일단, 너에게는."
이 남자가 무슨 꿍궁이를 벌이는 것일까하고 미심쩍인 눈빛을 보내던 가헌은 그의
무언의 재촉에 결국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올려진 파일을 집어 들었다.
서서 몇장 읽어 내려가던 가헌은 이내 안색을 달리하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 보았
다. 가헌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친 그는 다음도 읽어보라는 듯이 눈빛을 보내며,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의자를 가르켰다.
앉아서 편한게 보라는 것이다.
끼-익.
남자의 얼굴에 파일을 집어 던지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들었지만, 안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의자를 끌고 앉은 가헌은 다시 시선을 내려 파일 안의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가헌이 내용을 읽는 동안 새 파일을 꺼내 유헌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며, 의
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유헌의 케이스가 유독 특별하긴 하지만, 흔히 있는 법이지.
자네같은 집안의 경우엔 말야."
"..............."
"상위 2%에 드는 사람들은 안지닌 것을 얻고 싶어도 지닌 것을 내놓지는 않은 법이
라서 말야. 암묵적으로 근친혼이 있기도 하지. 실제로 자네 증조부때는 호적이 달
랐지만 두분은 친남매였고, 자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8촌이내의 사촌관계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유헌의 상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해서 꺼내는 말이야. 그가 일방적으로 망가진
것만은 아니라는 거지."
의사의 말에 파일안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 가헌은 미간을 찌뿌렸다.
그런 가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는 입술을 열었다.
"유헌은 태어날 태부터 유전병을 지니고 태어났어."
".............."
"그 파일안의 증세들은 꼭 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네 이해를 돕기위해 하는
말이니...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아."
심각하게 굳은 가헌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은 준비가 되어 있
다는 것을 파악하곤 책상 위에 널려져 있던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상을 차리긴 했지만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는 가헌에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무척이나 명석하고 이해가 빠르다는 것에 신경이 미치자, 기
교고 뭐고 우선 시간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원래부터가 이상했던 것은 아니였어. 하지만 유독 예민하고, 신경이 약한 아이였
기에 억압하는 부친과, 무감한 모친, 그리고 자신을 바라봐 주지않은 반신인 쌍둥
이 형에게서 많은 상처를 입은거지."
"............"
"그전에 유헌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 네 아버지가 무턱대고 한창 위험하던 때의
유헌을 정신병원에 한달동안 입원하게 할때부터 일은 틀어진 거야.
그때부터 그 아이는 포기라는 것을 인식하거지. 그 작은 머리속에- 말야."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점 굳어지는 가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는 목을 죄
고 있던 넥타이를 비스듬히 풀었다.
"유헌은 자신을 몰아가기만 하는 곳에서 너라는 탈출구를 원했어. 하지만 넌 유헌
의 마음을 몰랐지. 그건 네가 원체 무심한 성격탓이니 그걸 가지로 뭐라 할생각은
없어. 단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도 유헌을 저렇게 내몬 원인중 하나라는 것
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탈출구가 열리지 않는데 갑자기 네 약혼녀라는 사람이 나
타난 거야. 마침 지금은 본가에 내려가 있어서 유헌이 하고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
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까지 있었으면 사태는 최악이었을 거다.
그만큼 유헌이가 위험하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 파일에도 있는 내용이니 읽어서 알
고 있겠지. 유헌은 대략 두달전, 너하고 검도경기가 있던 그 시기에 여기쪽의 문제
가 아주 두들어 졌어."
머리를 툭 치며 말하는 의사의 모습에 가헌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그의 말대로 파일로 읽긴 했지만, 말 그대로 읽은 것 뿐으로 완전히 그 내용에 대해
이해하라는 것은 무리다.
"시합을 중심으로 이주전부터 유헌은 자신의 너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이때 이상한 점 눈치채지 못했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었다.
시합 전에 말을 걸어도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 아무런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대수롭지않게 넘어갔었는데... 설마하니 그가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가족인데다, 동생, 그리고 자신의 쌍둥이인 유헌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나 몰랐을
정도로 자신의 무심했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치자 가헌은 뜨거운 것이 가슴
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를 해본들 소용없는 것이다.
"여튼, 그는 그렇게 시합을 하다 네 눈을 다치게 만들었고, 자신을 가헌이라고 생각
하긴 하지만 완전히 자신의 존재를 버린것이 아니기에, 형인 너. 동경하던 존재를
상처 입혔다는 것은 심층 내부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겠지.
그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유헌은 한강에 빠진거고-
그때이후 정신을 차리고 나선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거다."
"....상태가 안 좋아 진걸까요?"
전처럼 어둡던 분위기를 탈피하고 많이 밝아진 그에게 수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부친과의 불화가 생기고 학업능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모친이나 자신과의
사이는 좋아졌고 본인 스스로도 뭔가에 열의를 지니고 이것저것 알아보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헌의 눈을 마주 보면서 의사는 몸을 뒤로 뺐다.
"그럼 좋아 진거라고 생각하나?"
"저로써는..."
"유헌이 요 두달동안 벌인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좋아.
다친이들의 수도 문제지만, 그들의 몸에 난 상처는 어떻게 생각할거지?"
"전... 유헌은...."
눈을 불안하게 굴리며 입을 달싹거리는 가헌의 모습에 의사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
지 않았다.
갑자기 사이가 좋아 진것은 좋지만, 원래의 냉정한 통찰력은 어디로 간거냐.
이렇게 구니 그 부친이 또다시 그런 최악의 선택을 하는게 아니냐고 의사는 말하고
싶었지만, 더이상 벌집을 건드려 곤혹스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
뒤로 물린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가헌의 눈동자를 직시한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전문가의 소견으론 유헌군의 상태는 그 어느때보다 지금이 가장 위험해."
제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한 그 말과 억양에 가헌은 입을 꾹 다물고 들고있던 챠트
를 책상위에 올려 놓았다. 이 남자와의 대화에서 해결방안을 찾을수 없다고 판단한
가헌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아버지에게로 가 직접 따지는 것이 상황을 해결하기에 더 빠를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을 불러 일으킬수도 있지만, 방법이 없잖은가.
유헌의 잠든 얼굴을 떠올리며 가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퓽퓽.
피-융.
미사일을 피해 여기저기 날라다니는 비행기에 시선을 주던 유헌은 이내 질려버려
서 잡고있던 조종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나는 그것을 아무 감흥없이 내려다 보던 그는 느릿하게 걸
음을 옮겨 침대위로 올라갔다.
끼-익.
단지 하루만 있었을 뿐인데 일년을 지낸것만 같다.
하루 24시간동안 잠을 자지 않아 붉어진 눈가가 쓰라림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유헌
은 눈을 부릎뜬 채 나가는 입구를 노려 볼 뿐이다.
들리는 시계소리에 맞춰 혀를 굴러 똑딱똑딱하는 소리를 만들어 내던 그는 이내 입
을 일자로 다물며 몸을 돌려 벽을 바라 보았다.
..............이번에는 도대체 몇일이나 있게 될 것인가.
그동안의 벌인 일들을 따져보면 한 일년동안 쳐박혀 있다가 지명도 모르는 촌구석
으로 내쫒길지도 모른다.
이런식으로 비참하게 쫒겨나는 것이다.
어릴적엔 어째서 부친이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알수없었지만, 지금은
알것같다.
아마도 두려워서 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성공한 사람으로 뻐길수 있어도, 그네들이 잘못을 했다
는 것을 보여주 듯이 이상한 둘째가 집안에 버티고 있으니..
처음에 잘하려 해도 자꾸면 신경에 걸리는 자신이 무척이나 맘에 들지 않았을 거
다. 그는 최고가 아니면 안되는 남에게 약점을 보일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면 분명 웃음거리가 될 자신을 지금까지 둔것이 오
히려 이상한 일일테지.
볼때마 치우고 싶었던 것을 이제서야 치우게 되었으니 지금쯤 얼마나 신나할까.
쿡쿡대며 웃던 유헌은 눈가에 느껴지는 축축함에 손을 뻗어 얼굴을 눌렀다.
이런 일에 상처를 받을만큼 약하지 않지만..
약해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수가 없다.
"돌아가고 싶어...."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은 자신을 필요로하고 또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다시한번 돌아가고 싶어.
달칵.
" ? ! "
중얼거리던 유헌은 문을 여는 소리에 안색을 달리하고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업보이는 것은 사양이다.
예리한 눈을 빛내며 문을 열리는 것을 바라보던 유헌은 과거에 자신에게 이상한 주
사를 맞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인간들이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코뼈 하나는 나가게 만들어 줄테다.
"여-어."
"..........."
"네 이름 유헌이지? 꽤나 유명하더라."
전에도 분명 이런 상황이 있었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인 정현은 문
에 붙어서 얼굴만 빼곰히 내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손을 들어 경례하는 포
즈를 취해 보였다.
"내 이름은 황정현. 옥탑의 라푼젤을 구하러 왔답니다."
"....너."
"빨리 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어쩔수 없이 접촉을 할수도 있으니 전처럼 과민반응
은 말아줘. 난 아직 장가도 가야하니 몸이 성해야 한단말야."
장난스럽게 윙크를 해보인 정현은 금발을 휘날리며 유헌에게 다가와 옷가지를 꺼
내 보였다.
환자복을 입고 나가면 금방 들통이 날거라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유헌은 이
내 상황을 파악하고 눈앞의 금발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한 시선을 보냈다.
불신 100%라는 듯한 그 시선에 조금 상처를 받은 정현은 이를 들어내며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라면 당장 옷부터 입을 거야.
일단 여기서 나가야 나를 치고 도망갈수도 있을거 아냐."
그의 말이 맞았다.
금발의 의중이 뭔지는 알수 없지만, 우선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야 한다.
자신의 말을 그제서야 알아 들은듯 분주히 옷을 벗는 유헌의 모습에 만족의 미소를
띈 정현은 몸을 돌려 그가 옷을 다 갈아입기를 기다렸다.
일분도 채 안되서 옷을 갈아입은 유헌이 자신의 등을 두들이자 그의 모습을 아래위
로 흩어본 정현은 만족의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급해서 아무거나 집어 왔는데 자
신의 센스가 워낙에 탁월하니, 옷을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그런 정현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유헌은 빨리 나가자라는 말을 건냈다.
"그렇게 급하게 굴건 없어. 이미 처리했으니깐."
"처리?"
"짜-잔."
밖에 누군가 이 작은 소란을 눈치채고서 올수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따위 모른다는
것처럼 당당하니 문을 열어재끼는 정현의 모습에 안색을 굳힌 유헌은 바닥에 쓰러
져 있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설마하니 이 실없는 녀석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놀랍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에 잠시 우쭐하던 그는 머리속을 울
리는 날카로운 고음에 이마를 찡그리며 머리통을 부여 잡았다.
성질급한 여자가 늦장을 부린다고 머리속에서 소리를 질러댄 탓이다.
징징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는 자신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헌에게
어설프게 웃어보인 금발소년 정현은 슬슬 그에게 자신을 소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름은 일단 밝혔지만, 진짜 정체는 모르니깐.
"실은 미할라의 부탁으로 왔어."
"..........뭐?"
정현의 말에 유헌은 눈을 크게 떴다.
미할라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정현 그도 칸이 있던 세계에 간적이 있었던 말인가?
그 세계에 있었던 사람이 꽤나 많구나라는 것과 이상하게도 주변에서 쉽게 만날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유헌의 모습에 정현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눈앞의 소년이 뭔가를 생각하는지 잘 알수는 있지만, 사실이 아닌고로 더 이상의
엄한 상상의 나래를 피는 것을 제지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게 아냐. 난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 왔다고. 미할라나 네가 있었던 세계따위 구경
도 못했어."
지리나 명물들은 미할라에게 들어 잘 알고 있지만 말야..라며 말을 흐지부지하는
정현의 모습에 유헌은 미간을 좁혔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이 정현이라는
소년은 신기가 있어 영체인 미할라를 알아보는 것인가.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모습에 어색한 미소를 짓던 정현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멋쩍게 입을 열었다.
"미할라는 내 어머니거든."
"...........뭐?"
"어머니야. 날 나아주신 분."
가슴을 두들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유헌은 다시금 '뭐?'
라며 반문했다.
눈앞의 이 소년이 미할라의, 그러니깐 그 여왕의 아들이라고??
이쪽 세계에서의 아들, 친 아들이라는 말인가??
정현의 얼굴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헌은 이내 이해할수 없는 사실을 깨
닭곤 미간을 찌뿌렸다. 미할라는 20여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왔는데 어떻게 고
등학생인 아들이 있겠는가.
유헌의 표정 변화에 역시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정현은 멈춰 서있는 그의 손을
잡아 끌며 어머니가 누워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날 낳은거야.
게다가 서류상으의 나이는 17세지만, 실제론 나 23이야."
"..........뭐?"
"엄청 동안이지? 미할라도 그 모습의 나이가 아마 24쯤 되었을 거야. 지금은 48세.
아줌마지."
일단 이 주제에 관환 대화를 끝 맞쳤다고 생각한 정현은 멍한 표정을 자신을 바라
보는 유헌을 손을 잡아 정신병동을 벗어났다.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실은 미할라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밝힌 것은 친척들을 제외한 타인으로 보면 유헌
이 처음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다는 친척들도 자신이 생긴 이유와 출산에 대해 말
을 하면 하나같이 미간을 찌뿌렸으니깐. ...집안의 수치라는 거다.
하지만 잡고있는 손의 주인공은 그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막연
하게나마 든다.
그라면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이해해줄수 있을 것이다.
탁.
미할라가 있는 5층으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정현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유헌은 그
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런 유헌에게 얼굴을 돌려보인 정현은 괜찮다라는 말과 동
시에 비상구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전에 자신이 혼자갔을 때는 험악한 인상을 지닌 사내들이 몇몇 서있었는데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그런 유헌의 손을 뗀 정현은 복도로 들어가 한바퀴 돌아 보였다.
"이래뵈도 그녀와 면회가 가능한 소수의 인가들중 하나라서 말야.
사람들을 물리는 것쯤은 좀 무리하면 못할것도 없다고."
"................"
"어서 와. 이것도 조금있으면 사람들이 다시 올거야. 그전에 만나야 하잖아?"
조심스럽게 자신쪽으로 걸어오는 유헌의 모습을 확인한 정현은 걸음을 돌려 미할
라, 자신의 어머니가 누워있는 병실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유헌이 자신의 옆에까지 오는 것을 기다린 그는 기대하라는 말을 하며 천천
히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소개하지. 어머니인 황미현이야."
끼-익.
음침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사이를 잔뜩 긴장한 채 바라보던 유헌은 병실안을
빽빽히 채운 기계들에 안색을 굳혔다.
가운에 투명한 장막에 쳐진 침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둘러싸여진 기계들에서
나온 수많은 호수들이 가운데 침대 밑으로 들어가 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
며 굳어있던 그는 등을 떠미는 정현의 행동에 병실안으로 한걸음 들어섰다.
"어머니. 일어나 봐요. 유헌이 데리고 왔단 말이예요."
일단 유헌을 안으로 들인 정현은 병실의 문을 닫고 잠근 다음, 침대로 걸음을 옮겼
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앞으로 걸어가는 정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밑의
전선들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은 사람이 있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유헌은 옆에
서 웃고있는 미할라의 얼굴에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힘든 일 당했지? 괜찮은거야?"
"...그야."
금새 굳어지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은 미할라는 침실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정
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 아픈빛을 띠던 정현은 어쩔수없는 일이기에 투명하게 쳐
져있던 장막을 걷기 시작했다.
차락.
차락.
양쪽으로 갈라지는 장막에 시선을 옮기는 유헌의 어깨에 여전히 턱을 기대채인 미
할라는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젊고 잘생긴 아이들한텐 이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
은게 여자들의 심리인데 저런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에 입맛이 쓰다.
고개를 저으며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미할라는 가만히 서있는 유헌의 등
을 밀어 자신의 침실앞까지 걸어가게 했다.
"상태가 저래서 인사는 못하지만- 그래도 소개할께."
"........아."
유헌은 침대에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에 손으로 입을 막고 뒤로 물러났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역시나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는 것이
다. 유헌의 어깨에서 손을 뗀 그녀는 춤추듯이 경쾌하게 걸음을 옮겨 침대위에 누
워 있는 자신의 얼굴에 고개를 숙여 윙크를 했다.
"황미현, 올해로 48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