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샤한, 건강하렴."
생각외로 어려운 일을 거치며 마을에 당도한 일행들은 도착하자 마자 샤르비나 일
행과 헤어져야 했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총비를 찾기위해 그쪽왕이 직접 나
설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좋은 일이기도 하다며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
샤한은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여자로써의 행복도 버리고 그런 늙은이로 살아가는 누이의 모습이 안됐다.
그녀처럼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라면 그 누구와도 행복하게 살수있었을 텐데 말이
다. 동생의 어두워진 낯빛에 흐린 미소를 지은 샤르비나는 샤한의 볼에 입을 맞추
었다.
"언제나 너와 칸크빌레님,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안부를 기도하마.
.......부디 건강하렴."
"누님도..건강해야해. 아이가 나오면 꼭 보러 갈테니."
"그래, 다음에 보자."
잡고있던 샤한의 손을 땐 샤브리나는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마차
에 올랐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이 자리엔 없지만, 칸에게도 작별인사를 하며 창의 커튼을 내렸다.
그녀가 완전히 마차에 오르자 그것을 확인한 기사는 노웬에게 인사를 건내며 마차
를 움직였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마차에 한손을 댄 샤한은 그 안에 있는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점 빨라지는 마차와 걸음을 멈추다 이내 움직임을 멈추
고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런 샤한의 모습에 라프헨이 다가가려 했지만, 곁에 있던 라헨이 고개를 젖는다.
그런 그의 행동에 입술을 작게 깨문 라프헨은 어둡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라헨
의 손길에 의지해서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인 여관보다 집을 빌리는게 낳을거라는 노웬의 말에 이런 평범한 저택에 일
단 머무르기로 한거다.
".......가버리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창가에 앉아 샤르비나 일행이 멀어지는 것을 본 유헌은 착찹한
심정을 느꼈다. 그것은 칸도 마찬가지로 그는 이곳에 도착한 부터 그녀를 보지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지만, 다른 일행들이 그런 그의 행동을 묵인하는 자
세를 함으로써 유헌도 별다른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그녀를 태운 마차가 보이질 않자 한동안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유헌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스의 모습에 이내 다시 앉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떠났지요?"
"아아- 일단은...."
"칸이 배웅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글쎄요. 얼굴을 안보는 것이 좀더 좋을 지도..."
에스의 말에 유헌은 놀라 눈을 동그렇게 떴다.
그녀가 떠나는데 얼굴을 안보는 게 좋았다는 말은 상당히 의외인 것이다.
그런 유헌의 얼굴을 바라본 에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샤르비나의 위치는 생각보다 위태롭죠. 신분이 낮은 첩비는 적들이 많은 법이라 다
른 이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이번에 그녀를 데려온 기사들이 칸님의 모습을 보았으니...."
"나름대로 잘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말이 안되긴 했지만, 그들은 칸을 닮은 인간을 보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믿을 거
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그래서 자신도 안심을 하고 있었
던 거다.
칸의 모습이 들어났지만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라는-
"유헌군. 칸님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고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죠.
그런 그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안전은 크게 위태로워 집니다.
그녀의 기사들이 그것을 알고도 주변인들에게 말할꺼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서."
".....그래서 칸은...."
"만약에 자신때문에 그녀에게 위험이 생기면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을 테죠.
그래서 일부러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은 걸지도-"
심각한 표정의 에스를 바라보던 유헌은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칸이 들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쉰 유헌은 걸음소리
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끼익거리는 낡은 침대의 소리와 자신쪽으로 쏠리는 칸의 몸에 손을 올린 유헌은 얼
굴을 시트에 묻고있는 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히 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댄 유헌은 조금씩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그의 호흡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미안. 마을에 도착하면 자세한 대화를 하기로 했는데..."
"아니요-"
루드빌이라는 적룡의 브레스를 손으로 잡았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무
겁고 중요한 이야기였던지 그곳에 있던 다른 자들이 모두 이곳에선 말을 말자고 의
견을 모았다. 그래서 마을에 돌아 오는 이틀동안 마차안을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는
유헌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걸려서 이곳에 도착했는데, 칸이 이렇게 기운이 없어하니 대화고 뭐
고 무언가를 할수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런 그의 어두운 마음이 전이되었는지 유헌도 말이고 뭐고 지금은 그냥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그냥 ....지금은 쉬도록 하죠."
"...........응."
".......지금은 그냥.."
중얼거린 유헌은 칸이 만들어준 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의 팔에 머리를 베고 허리에 감기는 손길을 느낀 유헌은 안도감의 만족의 숨을 내
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 자신의 눈꺼풀위에 닿는 칸의 입술을 느끼며 미소를 지어보인 유헌은 이내 멀
어지는 의식을 끈을 놓았다.
"............유헌."
새근거리며 금새 잠이 든 유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샤르비나의 일도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이러는 것은 유헌의 일때문인 부분이 더 강
했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품에 안긴 소년의 일밖에
생각할수가 없다.
눈을 감은 칸은 신음을 흘리며 유헌의 몸을 자신쪽으로 강하게 끌어 안았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손으로 잡았다...인가.
"생각보다 엄청-심각한 일이지."
"..........어려워."
머리를 집으며 눈살을 찌뿌리는 유크렌의 모습에 상황의 심각함에 앞서 뭔가 경이
로운 느낌이 든다. 저런 머리가 나쁜 드래곤도 유헌의 일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크렌의 모습에 손을 들의 녹색의 머리카락을 토닥이던 융텐은 그 둘이 있을
방쪽에 시선을 주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손으로 넣었다는 것은- 그것조차도 이용할수 있다는 거지."
"...........그런거.. 절대 불가능해야만 하는 거야."
"불가능 한일이 정말로 생겼다고- 뭐 루드빌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지만, 하지만 말이지. 그 오만 덩어리 녀석이 순순히 불리도 없고.."
"유헌이 거짓말을 할리가 없으니 이 일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생각해야해."
유크렌답지 않은 확신에 찬 어조에 융탠은 다소 놀랍다는 듯이 눈을 떴다.
"........믿는 건가 그 인간을."
"거짓말을 할 인간은 아니잖나."
턱에 손을 받치고 중얼거리는 유크렌의 모습에 융텐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소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방안을 돌아다니던 융텐은 슬슬 다리가 아파오자 유
크렌의 옆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드레곤의 브레스는 막을 방법이 없다.
있다면 상대가 날린 브레스를 막을 만큼의 마력을 지닌 연령이 높은 고위 드래곤이
거나 움직임이 빠른 녀석들 뿐이다. 아니면 몇번을 맞아도 끄덕없을 체력을 지닌 녀
석이던가- 하지만 유헌은 그런종이 아닌 일개 인간이다.
그런 녀석이 다른 세계에 넘어와 이질적인 능력이 생겨 엄청나게 어이없는 일들을
짠-하고 벌려버린 것이다.
"그 짠-하고 벌린일은 어떻게 수습할거냔 말이다."
"다른 원로 드래곤들이 이 사실이 알면....."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의 대표 특징이자 무기랄수 있는 브레스를 막는 녀석이 있다
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안색이 파래진 유크렌의 얼굴을 바라보며 융텐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녀석은.. 드래곤들의 공적이 된다고."
"루드빌이 단순한 녀석이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는 않는게 다행이긴 하지
만...."
"유헌의 존재는 너무 위험해. 언제 그들의 귀에 들어갈지 알수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된다면...."
"............"
융텐의 말에 점점 사색이 된 유크렌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자신들은 이 인간들이 끌어들여 이 무리에 있게 되엇지만, 같이 다니면서 알수없는,
그러니깐 인간들 사이에서 정이라고 불리는 감정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자신들의 일족들이 들이 닥친다.
"..........말도 안돼."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인간들의 싸움이 아니다.
드래곤에 의한 인간들의 학살이 되는 거다.
".........절대로 있어선 안된다고..."
"..............."
"이봐, 이 변룡아- 뭐라고 말좀 해봐! !"
말없이 팔장을 낀채인 융텐의 머리를 냅다 후려친 유크렌은 이를 갈았다.
잔뜩 걱정하는 자신과 달리 여유있는 듯한 소년의 모습에 꽤나 꼴보기 싫었던 것이
다.
유크렌에게 의외의 한방을 맞은 융텐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자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아니 분명 그럴터인데- 어느새 어른의 모습으
로 변한건가? 아니, 그것은 자신이 원하기 이전엔 변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 융텐의 모습에 유크렌은 이를 갈았다.
"정-말-로 내가 네놈을 못 알아볼리가 없잖냐. 이 빌어먹을 용이-! !"
"............알고 있었어?"
"...................후.후.후."
정말로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는 융텐의 모습에 주먹을 쥔 유크렌은
다시한번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경쾌한 타격음이 들리고 충격이 느껴지자 반사
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융텐은 유크렌을 피해 탁자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뭐야?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 한거야?! !
부..분명 내 모습은 네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
"그 스타일에 꼬여서- 네놈에게 동정을 빼앗긴 걸 잊을 것 같아! !"
의자를 들어 융텐에게 집어던진 유크렌은 분한 듯 씩씩거리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
다.
"아이가 있으니 어쩔수가 없잖냐- 네놈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수밖에! !
갑자기 네놈하게 친하게 희희낙락하는게 싫어서 그 쇼를 벌였건만 네놈이 아까부
터 내 속을 뒤집어 놓잖아----! ! ! !"
"......유..우크렌.. 치..침착..."
"아이만 없었으면.. 아이만 없었으면.. 네..네놈 따윈.. 네-놈-따-윈-"
절대로 용서 못한다고-! ! !
더이상 융텐의 모습을 보며 바보같이 실실거릴수도 그런 모습 덕분에 다른 인간들
에게 무뇌적인 드래곤이라 평가받는 것도 질린다.
이를 부득부득간 유크렌은 배속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생명을 느끼며 화를 가라앉
히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드래곤이 아이를 갖는 다는 것은 일정한 에너지를 모친의 배속에 주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모친의 배속에 둥지를 말들고 부친이 되는 용이 조금씩 안정된 기를 넣
어야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정신이 제대로 잡힌 용의 알을 만들수가 있는 것이
다.
"네놈의 종을 따르지만- 성격은 절대로 정상으로- 만들려고 그렇게나 노력을 했건
만 말이다-! ! 네놈은 그걸 알아주지도 않잖냐-! !"
"으갹-!! 미안해, 유크렌! ! !"
쿠당탕탕-! ! !
".....뭔가 요란하군요."
"드래곤이니깐, 생각없이 팔팔해도 괜찮잖아."
'워낙에 대단들 하신 종족이니...'라며 빈정거리는 라헨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라프
헨은 들고있던 음식의 그의 앞에 내려 놓았다.
마을에 도착하긴 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샤르비나를 위해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일행들 모두가 공복인 상태다.
그다지 입맛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뭔가를
먹어두는 것이 좋을 거다.
"앞으로 어디를 가는게 좋을 까요?"
"일단 조직이 있는 중심에 가는 게 좋겠지. 녀석들 칸님이 성장한 모습을 보면 놀라
자빠질걸~"
애써 밝은 모습으로 기세좋게 스프를 목으로 넘기는 샤한의 모습에 곁에 있던 에스
는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있던 지도를 내려 놓았다.
"계획을 세워봤자 갈곳은 없잖습니까. 나머니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죠."
노웬의 담담한 말에 곁에 있던 라헨이 포크를 내려 놓으며 기세좋게 외친다.
"좋아-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볼수가 있겠군."
동에는 적들도 많지만 그에 만만찮게 칸크빌레의 복귀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자연히 자신들의 아지트는 동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중요한 일이
있어 한동안 떠나있다 몇달만에 돌아가게 되었다.
떨어져 있던 기간도 기간이지만, 녀석들 내심 칸님의 성장을 학수고대 했으니, 변
한 그의 모습을 보면 분명 엄청나게 놀라겠지. 그리고 기뻐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이 해왔던 일에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된 것이니깐.
"갑자기 입맛이 도는군요. 일단은 남아있는 자들 생각을 하도록 할까요."
"에스님, 이거 좀더 드시겠어요?"
"아. 고마워. ........음? 그런데 젤양이 보이질 않네요."
"칸님과 유헌군도 안 보여요."
에스의 앞에 스프를 던 라프헨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은 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던데."
"...아아-"
샤한의 말에 에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여러가지로 힘든 일이 있었을 테니 먹을 것보다 지금은 잠이 더 중요하겠지.
특히나 떨어진 두사람이니 그만큼 서로에 대한 체온을 느껴야-한다는 건가?
입술끝을 비스듬히 올려보인 그는 이내 기분좋게 웃어보이며 라프헨이 덜어준 스
프에 숟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젤의 모습에 손을
들어올리려던 에스는 손에 들린 숟가락의 존재에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 에스를 지나친 젤은 딱딱한 안색으로 노웬에게 다가갔다.
"노웬님."
"아, 젤. 동에 있는 일행들과의 연락은 잘 되었습니까?"
".................침착하게 잘 들어 주십시오."
" ?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더 침착해야 겠군요."
입안에 음식이 있어 손으로 가리고 웅얼거린 노웬은 근처에 있던 물잔을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젤은 두근거리는 심장에 손을 올려 놓으며 호흡을 가다
듬었다. 이번일은 자신조차도 도저히, 도저히 침착할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입술을 혀로 축인 젤은 어느새 자신에게 몰린 일행들의 시선을 느끼며 눈을 감았
다.
"아지트인 폴유간쪽이..... 당했습니다."
챙캉.
".......뭐?"
노웬은 잔이 떨어져 바지단이 젖었는데도 젤의 얼굴을 망연히 올려다 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젤은 자신의 팔을 강하게 잡는 손길을 느끼며 침을 삼
켰다. 감고 있어 바로앞도 보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차라리 이쪽이 더 안심이 된다.
차라리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런 생각도 안했으면.
"황제군이 쳐들어와 어제 저녁에..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별 말을...."
어깨에 달린 망토를 끌어내린 이자크는 머리에 쓰고 있던 검청의 가발의 벗어냈다.
들어난 흰머리를 바로잡은 그는 피곤하다는 듯이 목을 두들이며 루드빌이 내민 의
자에 앉았다.
예상대로 계획한 일이지만,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꽤나 체력의 소모가 많이 오
는 모양이다. 게다가 이런 성인의 몸엔 꽤나 많은 신경을 써야 하니깐...
펴진 주먹을 내려다 보며 피곤한 표정을 짓는 이자크의 모습에 테이블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루드빌이 옆에 차를 타 내준다.
"과연, 황제. 직접나서니 금방 해결되잖아."
"...........글쎄."
심드렁하니 대답한 이자크는 그녀가 타준 차에 입을 대고 미간을 찌뿌렸다.
이 용은 차란건 물에 약초를 넣는 것으로만 생각하는건지 맛이 최악이다.
입안에 남은 껄끄러움을 사라지게 하기위해 입안에 물을 넣고 헹구던 그는 문을 열
고 들어오는 적발에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폐하-"
"요크발, 몸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군."
"신경써주신 덕분에....."
의자에 앉아있는 이자크와 루드빌에게 시선을 주던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황제
에게 다가갔다. 몸에 많은 무리가 있어 칸크빌레 일행과 접촉후 하루동안 휴식시간
을 지녔을 뿐인데, 다른자의 입에서 황제가 직접 나섰다는 소리를 들었다.
50여명의 기사들을 척결하는 문제도 있어 한참 정신이 없던 차였는데, 그런것을
전부 물리치고 무작정 달려온 요크발은 군장을 한채이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있는 황제의 모습에 움찔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말을 건낸 그자는 결코 허언을 할자가 아니기에 입술을 깨문 요크
발은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칸크빌레의 요격지를.... 몰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랬나?"
가볍게 응대하나 부정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요크발은 숨을 들이켰다.
".....쉽게 하실수 없는 일인데, 어째서 저에게 말을 하지않고...! !"
더 말을 이으려던 요크발은 자신을 주시하는 황금의 눈동자에 입을 다물었다.
잔잔하게 고여있는 그 내면에 깔린것은 분명히 들어나는 불쾌함과 적의. 그 감정에
잠시 뒤로 물러나던 요크발은 약간 숙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드빌의 모습에 입
술을 깨물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폴유간의 녀석들은 경비가 삼엄해서 장소만 알려져 있지,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찾아서 몰살을...."
".........흠."
"게다가, 위험하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아니, 그보다 어떻게 그 녀석들을...."
칸크빌레의 일당이 아지트라도 할수있는 폴유간은 엄청난 경비를 자랑해서, 지금
까지 그 위치는 알아뒀지만, 정확하지는 않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선 황제의 명이 없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가만히 두었던 그곳
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몰살이라니. 장소를 어떻게 찾았는지를 떠나 이렇게 급하게
일을 벌이는 황제에게 불안함을 느낀다.
입술을 깨문채 자신을 바라보는 요크발을 올려다 보던 이자크는 테이블에 올려두
었던 가발을 자신의 머리에 썼다.
특수 마력에 걸려있어서 쒸여 지자마자 원래의 모발과 섞여 바로 검청의 색으로 변
한다.
"...........황제폐하...?"
"닮았지 않은가."
두눈을 부릎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요크발에 눈을 가늘게 휘어보인 이자크는 루드
빌이 건내는 거울속의 모습을 감상하 듯 지긋히 바라본다.
황금빛의 눈동자에 검청색의 머리카락.
거울속에 비치는 얼굴은 칸크빌레였다.
"내가 봐도 혹할 정도이니.. 그 놈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설마... 그 모습으로 가신겁니까."
"덕분에 알아서 쏫아져 나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일은 무척이나 쉬웠다."
하지만 중간에 달아난 녀석들이 몇몇있으니 몸이 낳았다면 가서 처리하는 황제의
말에 아연한 표정을 지은 요크발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런 요크발에게 시선을 주던 루드빌은 붉은 입술을 비죽히 올려 보인다.
"황제는 더 이상 애가 아니시니,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실거다."
이자크를 아이라고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띈 용의 눈빛에서 축객령을 읽은 그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황제
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온 요크발은 한동안
그곳에 서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떠났다.
지금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까부터 울렁거리는 머리를 감싸안은 요크발은 멀리서 올라오는 사이키의 모습
에 걸음을 멈추었다.
"요크발님."
"..............넌 알고 있었나."
황제가 폴유간을 몰살했다는 소식를 전해준 것도 이 남자이다.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막 돌아온 것 같은 황제가 알려주기 이전에 자신에게 정보를
주었을 리가 없다.
그런 요크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이키는 시선을 피했다.
"알고 있었지만, 비밀로 하라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곤 해도- 저도 황제께서 떠나시기 직전에 들은 겁니다.
만약에 군장을 하신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묻지 않았다면 저도 몰랐을 일입니다."
침중하게 말하는 사이키의 모습에 요크발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전에도 아무에게도 언질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던 황제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눈치
를 챌수있을 만큼의 흔적을 남기곤 했었다.
하지만 어제 밤에 있었던 폴유간에 대한 건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동에 왔으니 잔당들이 드글거리는 그곳에 한번 습격을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일을 벌이다니.
무척이나 피곤한 안색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는 요크발의 모습에 사이키는 걱정스
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칸크빌레님과 같은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나머지 일행들은 루드빌의 마력으로 대
충 만들었겠죠. 원래는 그런것에 넘어갈 자들은 아니지만, 이미 칸크빌레님의 성장
했다는 게 흘러들어간 모양이다 보니, 그로 분장한 이자크 황제의 모습에
............방심한거죠."
"...........살아남은 자들은."
"백여명 정도.... 루드빌님도 함께 가신 모양입니다.
브레스의 성능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을 하신것을 보면 분명......"
사이키의 말에 이를 간 요크발은 갑자기 언습하는 피로에 눈을 감았다.
저 용은 그렇다 치지만,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칸크빌레의 요격지인 폴유간의 몰살은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뭘까.
가슴을 누르는 이 불안한 감각은.
[용의 브레스였습니다]
[도저히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녀석들.. 칸크빌레님의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구슬 안에서 들려오던 음성이 점점 엷어지더니 치직거리며 끝난다.
테이블 가운데에 놓은 여러명의 음성을 듣던 라프헨은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에 대
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둔중한 심장이 뛰는 소리에 호흡을 고르며 주위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던 그는 하나같이 무표정으로 가운데의 구슬을 바라보는 일
행들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200여명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폴유간
에 모여있던 요직인물들은 적룡의 브레스에 희생되었습니다. 그쪽에서 폴유간만
이 있다고 착각하고 그쪽만을 공격했기에 이정도의 희생으로 끝난 겁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엄청난 경비를 자랑하는 곳이다.
돌아간다고 하나 칸이 있는 자신의 무리가 직접 들어가기까지에도 꽤나 까다로운
절차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이 이렇게나 어이없고 무참하게 몰살이라는 것을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수 없는 현실에 노웬은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구슬을 바라볼 뿐이었다.
"..............칸크빌레님.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냐는 듯이 올려다 보는 에스의 눈동자에 안색을 굳힌 젤은 입술을 열었
다.
"아무래도 이자키엘. 그자가 칸크빌레님의 모습으로 분장한 것 같습니다."
"............그런."
"칸크빌레님의 성장을 누구보다 기다리던 자들의 집합입니다.
성장한 칸님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냉정하라는 것은 무리죠."
자신들도 갑자기 나타는 그 모습에 엄청난 충격에 휩쌓였었다.
폴유간에 남아있는 자들이라면 자신들과 더하면 더했지, 덜할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복귀를 바라며 조국과 가족을 버린 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 자들을 위
해서라도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힘을 내곤 했었는데-
"완전히 개죽음이야."
의자위에 몸을 눕히고 중얼거리는 샤한의 말에 얼굴을 찡끄린 젤이 그의 모습을 바
라 보았다. 그러나 붉어진 눈가와 강하게 쥐어진 주먹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며
그의 모습을 외면할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하면 좋을까.
자신들은 앞으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란 말인가.
아주 몰살을 당한게 아니라 모으면 적어도 백의 사람들이 모이겠지만, 중추를 잃어
버린 집단이 과연 얼마만큼의 결속을 보여줄지 의문이다.
칸이 있기는 하지만, 꺽여진 사기를 지금의 그가 잘 다독일수 있을까.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저 이자크에 의해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바로 10여년전과 같은 방식으로-
"....제길."
답지않게 노웬이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있던 식당의 문이 열린다.
끼-익
"어라? 왜들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피곤한 몸을 숙면을 원했지만,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뱃속의 성화에 못이겨
식당으로 내려온 칸은 자신에게 몰리는 모두의 시선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근처의 테이블에 손을 뻗어 빵을 집어든 그는 자신의 움직임, 손길 하나하나에 시
선을 모으는 일행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엄청난 공복에 빵을 들고 우물거
릴 뿐이었다. 그런 칸의 모습에 피곤하 안색으로 한숨을 쉰 노웬은 입을 열어 유헌
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아직 위에서 자고 있어. 배가 고파서 자꾸 꼬륵거리니깐-
그거 듣고 유헌이 깰까봐 내려왔지."
"........그렇습니까. 칸님,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 ? "
무슨 말을 할거냐고 반문하려던 그는 그러나 어서 앉으라는 듯 눈으로 재촉하는 일
행들의 모습에 어색한 폼으로 다가와 노웬의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근처의 스프를 떠먹으며 무방한 상태인 칸의 모습에 노웬은 아까부터 느껴지던 두
통이 좀더 강해 졌음을 느꼈다.
미간을 주무르며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는 노웬의 얼굴이나 어두운 분위기에
뭔가 잘못된 점이 생긴건가하고 의아함에 칸은 들고있던 빵을 내려놓고 물로 입가
심을 했다. 이내 양손을 포갠채 자신을 바라보는 칸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노
웬은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 듯 이런 문제는 저 칸과 직접 의논해 봐야 하는 종류인
것이다.
"폴유간이. 당했습니다."
".............."
"당한 이유는- 여기있는 구슬의 음성과 젤이나 저의 설명을 들으시면 될겁니다."
어디 산책이나 하자는 투로 말하는 노웬의 말에 그냥 전같은 안색을 유지하던 칸
은, 그러나 점점 얼굴이 새하얗게 굳는다. 마주잡은 손등에서 핏줄이 올라오는 것
을 확인한 라프헨은 입술을 깨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진다.
한동안 서늘한 기운이 일행들을 감싸고 있었다.
깊은 수면상태였던 유헌은 무심코 뻗은 팔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자 눈썹을 찌뿌리
며 눈을 떴다.
분명 칸의 자고있을 터인데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
얼마 잠에 들지 않았던지 몽롱한 시야속에 칸의 부재를 확인한 유헌은 한동안 그
자세로 있다가 귀찮다는 듯이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의 결의 수를 헤어리던 유헌은 슬슬 일어나야 하는 건가하고
생각해 봤지만 게으른 몸은 더 누워있으라고 한다.
"........피곤해."
손을 들어 이마에 올린 그는 이유도 없이 몸이 나른함을 느꼈다.
열이라도 나는건가 해서 손을 들어보았지만, 이마엔 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휴-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유헌은 온몸을 감싸는 무기력과 묘한 허무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감각이 싫어 유헌은 이마에 올린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려 자세를 바로 하려
다가 배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무게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어. 일어난 거냐."
"...융텐."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까는 없었다.
배에 느껴지는 무게라던가 여기저기 반창고가 붙여진 얼굴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
을거라는 기색을 읽은 유헌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몸을 뒤로 눕혔
다.
출렁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든 유헌은 융텐을 바라 보았다.
뭔가 할말이 있으며 아무거나 해보라는 유헌의 자세에 잠시 헛웃음을 지은 융텐은
자신의 밑에 누워있는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 청년의 모습으로 이런 꼴을 연출했다면 영락없이 덮
치기 포즈인데 말이다.
잠시 쓸모없는 생각을 하던 그는 작은 손을 들어 유헌의 목을 잡아 눌렀다.
"........?"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았는데 말야."
갑자기 자신을 목을 누르는 그의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그의 체구에 맞지않게 들어간 손의 악력때문이리라-
손을 들어 융텐을 손목을 잡은 유헌은 장난치지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지만 그런
그를 내려다 보는 융텐의 검은 눈동자는 서늘하기만 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가 떠오르질 않아."
".........융텐, 장난이라면 이건 너무 심해요."
"넌... 우리 일족이나 저 일행들 양쪽에 어느쪽이든 확실한 폐야."
융텐의 말에 유헌의 웃던 얼굴이 굳는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자들은 모두 인간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
다. 그 능력이 좋든 싫든 이 대륙을 발전시키고, 인간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 유헌이 지닌 능력이 관해선 전의 인간들과 같은 성과를 보여 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전대의 인간들은 능력에 비해 다소 차가운 심장을 지니고 있어 다른 것을 제하고라
도 일단 이 대륙이나 자신의 맡은 의무에 관해 몸을 받쳐 처리해 왔지만 이 소년은
뭐란 말인가.
칸이라는 녀석에게 너무도 집착해 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이니 이처럼 서로에서 집착하는 인간들은 다른 곳에서 흔
히 볼수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 유헌이라는 녀석의 특이능력과 맞물려 뭔가 큰일을
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전에 이 인간은 죽이는 것은 어떨까.
.........죽여서 화근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융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손목을 잡는 강한 악력에 어린몸이 통증을 호소한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 어린아의 모습인 손목이 부러진다 하더라도 융텐은 유
헌의 목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녔지만 이쪽은 인간, 이쪽은 용.
알수없는 감각에 입꼬리를 올려보인 융텐은 유헌은 잡고있는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요란하게 터지는 기침에 입을 막고 연신 콜록거리는 유헌의 하얀목에
검은 손자욱이 남아있다.
살살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이도저도 안된다면 수는 하나뿐인가-"
"쿨럭, 켁.. ..흐-음."
한참을 기침을 하던 유헌은 묘한 소리를 하는 융텐을 바라 보았다.
아까는 그의 기색이 두려울 정도로 제대로 행동할수 없었지만, 그에 의해 정말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알수없는 분노가 흐른다.
적의에 찬 유헌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융텐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의 능력을 가릴만한 수를 하나 알려주지."
"............"
"그러니깐 그런 눈을 집어치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입술을 깨문채 시트위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여뜨린 유헌은 내키지 않지만 작게 고
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자
신을 걱정해주는 이곳 세계의 인물들 중 하나인 것이다.
물러난 이상 아까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있는 한편 분함감정을 억
누를 길이 없다.
그런 유헌의 위에서 몸을 구부린 융텐은 나직히 속삭였다.
"다음에 루드빌을 만나면 네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알려 주겠어."
"............에?"
"만약에 네가 내 지시대로 잘만 한다면-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주 좋은 동
료를 얻을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거대한 적이 하나 줄수도 있으니, 어느쪽이든 좋을 일이지-"
그 적룡이 난리를 피면 난 좀 피곤해 지겠지만 말야.
미심쩍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에게 걱정말라는 의미로 이를 들어내며
웃어보이던 융텐은 볼이 땡기는 감각에 신음소리를 내며 유헌의 위에서 물러났다.
분노한 유크렌은 정말이지 두려워서 화가 풀릴 때까진 다른 곳에 있어야 할것 같
다.
그에게 맞은 볼을 쓰다듬은 융텐은 뭔가 분한 느낌에 볼을 부풀어 올렸다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이를 들어내며 무척이나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보초를 서고 있던 사내들은 멀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접근하는 무리에 처음엔 경
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중 만원경을 들고있던 사내가 갑자기 칸크빌레의 이름
을 중얼거렸고, 그것이 시작이였다.
여러대의 마차 제일 앞에 앉아 자신들에게 손을 들어보이는 자는 분명 칸크빌레였
던 것이다.
검청의 머리카락과 중앙국 왕족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
엄청난 환호가 내부를 뒤덮었고 흥분한 사내들은 생각을 할 여지도 없이 비밀 문을
개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붉은 빛이 자신들에게 쏘아 졌다.
"마도사들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
다."
구슬을 든채로 그것만은 주시하는 칸의 모습에 역시나 표정이 굳은 노웬이 중얼거
린다. 뭐라고 말을 한다면 낳을 것이나 칸은 입술을 꾹 다문채 손안에 들린 구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칸크빌레의 성장은 젤을 통해 이미 알려 주었으니,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높았을
것인가. 시기나 마력에 이상함이 느껴지는 데도 칸크빌레의 모습에 망설임없이 문
을 열어준 것을 보아 당시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샤한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폴유간은 이미 중앙의 녀석들이 깔렸을 테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우리들은...'이라고 중얼거리는 라프헨의 모습에 라헨이 한숨을 쉬며 작은 몸을 끌
어 당긴다. 말없이 칸은 주시하던 노웬과 젤은 이런 순간이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미쳐 상각지도 생각할수도 없었다.
이번엔 정말로 저 이자키엘 황제가 자신들을 깨끗히 없앨 심산인 것이다.
작정하고 그들이 달려들어 오는데, 자신들은 미쳐 손쓸수도 없었다.
이번 일로 중앙에서 일부로 자신들을 봐주고 있었음이 명백해 짐을 알고나니 입맛
이 쓸수밖에 없다.
"나머지 일행들은 제2의 장소로 옮겨 갔겠지."
"하지만 그곳도 녀석들이 오지 않으라는 법이 없죠. 게다가 물자나 무기같은 것들
은 전부 폴유간에 있었습니다.
이번일로 동료들은 물론이고 우리들이 행동할 기반까지도 몽땅 잃은 격입니다."
라헨의 말을 받은 에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암담한 현실에 고개를 저으며 손에 얼굴
을 묻었다.
점점 악화일로 걸어가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알수가 없다.
어지간히 충격을 먹었는지 멍하니 손안의 구슬을 바라보는 칸의 모습에 가슴 한켠
이 쓰리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나직히 깨문 에스는 문이 다시 열리자 유헌이 들어
오는 건가해서 얼굴을 들어 보았다.
유크렌이나 융텐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슬쩍 흘려서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그러나 자신이 예상했던 자들이 아닌 청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형의 남자가 들어오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잠시 경직되어 있던 라헨은 벼락같이 달
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고 젤은 묵묵히 손을 내밀어 여차하면 마력을 발동시킬 자
세를 취한다.
그런 일행들의 행동에 손을 들어보인 카일은 유우자적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런, 분위기가 꽤나 안좋아 보이네."
"네놈 알고 있었던 거냐."
으르릉거리는 라헨의 얼굴을 보고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려던 그는 그러나 자신을
죽일듯이 눈을 빛내는 젤을 발견하곤 참으라는 듯이 손을 올려 보인다.
몰래 방안을 빠져나와 이들의 대화를 옅들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이들은 그것에 대해 이런 행동을 취해 보이는 것은 아니니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요는 황제가 폴유간을 기습할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냐는 건데-
그것에 대해선 이들이 믿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은 모르기에 해줄 말이 없다.
에스의 그렁그렁한 저 눈동자를 보면 아는 것을 다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잔뜩이지
만, 모르는 것에 대해 만들어 낼수도 없는 노릇이니.
카일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라헨의 눈동자에 시선을 주며 똑똑히 말했다.
"설령 황제가 그런 짓을 한다고 알았어도 너희들이 막을수 있었을 것 같아.
물론 폴유간에 녀석들에게 주위하라고 할수는 있지만, 루드빌이 함께 간 이상 그녀
가 브레스를 날리면 어차피 결과는 같아."
"..이놈."
"게다가 난 모르고 있었다고- 그건 요크발도 마찬가지 일껄."
점점 목을 죄는 손길을 느끼며 눈살을 찌뿌린 카일은 입을 열었다.
"황제는 일을 할때 우리들에게 일일이 보고하진 않는다는 거다.
그는 적룡과만 정보를 공유하니 말야."
그의 말은 옮다.
카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웨은 라헨에게 그를 놓아주라고 말한다.
잠시 울컥한 표정을 짓던 그는 그러나 이내 이를 갈며 카일의 놓아 주었다.
잡힌 목부분 옷의 주름을 바로한 카일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에게 손을 흔
들어 주었다. 이만하면 싫다는 듯이 미간을 찌뿌리고 얼굴을 돌릴만도 하나 그는
빤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것에 머쓱함을 느낀 그는 옆의 테이블로 다가가 살짝 걸터 앉는다.
"........나머지 녀석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일단 알아둬."
"칸크빌레님."
가만히 있던 칸이 입을 열자 그쪽으로 시선을 몰린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한 그는 들고 있던 구슬을 놓았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멍멍한 상태이지만, 중심이 되어야 할 자신이
마냥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 마을에 한정없이 지낼수도 없는 노릇이고 폴유간에도 돌아갈수 없는 상황이라
면 다른 장소와 더불어 살아남은 녀석들에게 어딘가로 모이리고 통보해 주어야 하
는 것이다.
턱에 손을 받친채 바라보는 칸의 얼굴에 시선을 주던 노웬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백여명이 남았다고 하나 그들이 실제적으로 전력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할수 없
으니 인력을 보충함에 있어 신중함을 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그들을 떠돌게 할수 없으니 어딘가에 가 있으라고 지시해 두긴 해야
한다. 하지만 제 2의 장소도 제 3의 장소도 확신컨데 중앙의 녀석들이 진을 쳐놓고
있을 거다.
툭.
손가락에 걸리는 구슬을 쳐낸 노웬은 어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일행들이 무사히 들어가 자리를 잡을수 있을 만한
곳은- 자신들이 어디 왕국에 들어갈수도 없을 노릇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노웬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에스는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무것도 생각안하고 쉬고만 싶다.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던 그는 그냥 다른 왕성에 들어가면 안될까하고 생각해 본다.
샤르비나에게 부탁을 해볼까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더이상
그녀에게 기댄다는 것은 그녀를 죽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빠드린다는 말밖에 되
진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자신들이 안전하게 머무를수 있는-
"뮤트롱가는 어때."
".........에?"
"어떨까하고 묻는데 말이지. 몇일후에 그곳의 공주의 결혼식이 있다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카일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느끼며 뒷말
을 이었다.
"나같은 사람이 성에 입성하려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해서 말야.
그 수가 백이든 이백이든 그쪽은 참석하는 것에 의의를 두니 그다지 제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지만..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
뮤트롱은 샤르비나가 있는 테라크와 카일의 본적인 그라센가와 더불어 동등한 세
력을 지닌 동의 제 3세력중 하나이다.
서로에 대해 견제하기는 하지만 일단 외교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어 각
나라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각 왕국의 왕족들이 초대되는 일들은 흔했다.
이번에 저 뮤트롱의 공주가 혼인을 한다면 그라센의 후작인 카일이 참석한다 해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왕의 동생이자 후작의 지위. 미혼인데다 미남인 카일은 외교적인 문제로
공식적인 자리에 등장할때마다 다른 가문과의 혼인문제로 꽤나 골치를 썩인다 들
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되도록이면 피한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그가 뮤트롱에 참석한다는 것은 일단 그 왕실의 초대명단이 오를 것이니 황
제의 귀에 들어갈수도 있다. 위험부담이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행패를 부릴거라곤
생각치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법들 보다도 가장 안전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도망가기 위한 수술로 보일수도 있지만, 너무 번거롭다.
그런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
눈을 빛낸 노웬은 카일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시리도록 서늘한 은빛의 눈동자를 바라본 카일은 입가를 비틀었다.
빈틈이 없는 곳이 맘에 들긴 했지만, 남의 호의는 기분좋게 받아들여야 권한 쪽도
기분좋기 마련이다.
"그다지 당신들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니 그런 표정 짓을 것 없어.
게다가 칸크빌레님. 당신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등을 돌리고 있던 칸은 카일의 음성에 몸을 돌려 그를 바라 보았다.
여전히 번질번질한 면상을 지닌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눈을 찡그려 보인다. 그 태연한 모습에 시선을 주던 칸은 맞은 편에 앉은 에스를 바
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에스에게 뭔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일행들을 생각해 볼때 카일의 말이
가장 끌린다.
저 유크렌이나 융텐이라는 용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지만, 융텐은 이미 북의 수호자
이다. 북의 용이 자신들의 일에 개입하면 그것은 북이라는 나라가 중앙에 반감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는 문제이니 잠시 보류를 한다면 남은 용은 유크렌뿐-
그 용이 적룡 루드빌을 상대로 이긴다고 생각치 않는데다, 녀석에게 뭔가를 맡긴다
는 것 자체를 할수가 없다.
입술을 깨문 칸은 노웬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카일의 말을 받아들이라는 그 의미에 노웬은 한숨을 쉬었다.
인질로 잡은 인물에게 되려 도움을 받게 될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