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 그 요크발의 조카 말인가?"
"그렇습니다. 적룡의 천거가 있었다고 합니다."
"헤-에. 지금의 황제는 어찌되는 거지?"
"글쎄.. 그것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합니다.
그리고 ...........황제는 지금 동의 뮤트롱에 있다고 합니다."
서류를 흩어보고 있던 툴가를 시선을 들었다.
요새 몇일 밤을 세서 일에만 매달렸더니 영 머리속이 엉망이다.
그런 상태에서 보고를 들으려니 죽을 맛이지만, 지금 그 말들을 도저히 흘려 들을
만한 것들이 아니다.
"뮤트롱 왕가의 결혼식에 참가하셨다가, 그곳의 모반을 알아채시곤 단숨에 제압하
셨다 합니다."
"모반이라.....그래, 황제는 그것 때문에 동에 머무르고 계시는 거고?"
"예. 중앙으로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없었습니다."
"............흠."
의자에 몸을 기댄 툴가는 펜끝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는 시선을 내려 허리를
숙인채인 남자를 불렀다.
"그래, 그래서 요크발 대공은 뭐하고 있더던가."
"그..그게, 황제와 함께 동에 계시다고-"
"엥? 뭔가 이상하잖아, 그거-"
"게다가 사이키님이라던가 카일님도 동에 계시답니다.
또 중앙의 적룡께서도 그들과 함께 동에 있다 갑자기 돔님을 데리고 오셨다고.."
".........찬탈인가-"
"투..툴가님! ! 말을 가려서 하심이! !"
툴가의 과격한 말에 기겁을 하던 사내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안색을 굳히며 옅듣는
자가 없나 주변을 살펴본다.
"아니지. 용이 왕을 다시 세웠으니.. 이건, 배신인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툴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황제가 바뀐다는 것은 처세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떨까나.
전의 황제는 상당히 관대해서 무엇을 하던 지나치지만 않으면 신경을 쓰지 않았지
만, 이번에 즉위하는 자는 어떨까. 아니, 정말로 즉위할수나 있을까.
동에 황제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
그럼에도 적룡이 일방적으로 돔이라는 소년은 천거했다는 것은 둘사이에 분란이
일어난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좀더 요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 줄을 잘 타야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올 텐데 말이다.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까나."
요크발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 돔이라는 신황제의 편이 된다는 것인가.
그닥 그와 사이가 좋지않으니 같은 편을 먹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이자크 황제의 손을 들어주자니 중앙의 수호자인 적룡의 존재가 걸린다.
어쩔까- 어떻게 할까나.
엄청난 고민을 하며 정신없이 방을 왔다갔다하는 툴가의 모습에 침을 삼킨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좀더 묘한 정보가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뭐야? 뭐가 또 남은건가- 있는대로 말해봐."
"저기.. 그... 그게.."
" ? "
말을 더듬는 사내의 모습에 툴가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전같이 버벅거리기는 하나 그 느낌이 틀리다.
말해야 할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한동안 고민하던 사내는 자신을 바라
보는 툴가의 모습에 눈 딱감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도 알게될 일 숨겼다가 나중
에 큰일을 당하느니 확실치 않아도 일단 말해두는 것이 좋다.
"동에 중앙의 황제가 있는 곳에 칸크빌레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
"요새들어 퍼지는 소문입니다. 중앙국의 37대 황제였던 칸크빌레가 살아있다고.
실제로 본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봐."
"예..에에."
갑자기 굳은 툴가의 모습에 놀란 사내는 허리를 숙이며 침을 삼켰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주인의 분위기가 단숨에 변한 것을 느낀 것이다.
입꼬리를 올린 툴가는 당장에 동에 있는 자들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한다.
"연락을 취하는 겁니까?"
"그래, 정말로- 정말로 그 칸크빌레 황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란 말이
다. 아, 그리고 이자크 황제의 초상화도 하나 구해둬."
"아, 예?....시..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반문하려던 사내는 날카로운 툴가의 시선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방에서 나가는 사내의 모습에 한숨을 쉰 툴가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칸크빌레가 그 무적의 황제가 살아있다는 건가-
무턱대고 도는 소문을 믿어 설레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런 정도의 인물의
생사를 가지고 소문이 돈다는 것은 그만한 확증이 있기 때문이리라.
칸크빌레를 생각하는 한편 이자크의 초상화를 걸어둘 생각을 한 툴가는 미소를 지
었다. 지하에 설치된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고상한 취미에 드디어 그의 얼굴도 걸
리게 되는 것이다.
35대 황제인 카르키엘과, 36대인 칸크빌레, 37대인 이자키엘이 나란히 걸려있으면
굉장히 보기 좋으리라.
그 돔이라는 소년도 먼 발치에서 봤는데 칸과 상당히 닮은 용모였다.
좋군. 그의 초상화도 걸리면 취향의 그림이 4개나 되는 것이다.
흥분을 주체할수 없는 툴가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왕께선 안에 계시느냐."
"샤르비나님."
"안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왕의 총비인 샤르비나의 등장에 놀란 시녀는 급하게 허리를 숙이다 그녀의 서슬퍼
런 음성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렇게 감정을 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였는데 오늘의 모습은 좀 이상했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녀는 샤르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찡그려지자
당황을 하며 왕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숨을 죽였다.
"안에는 왕비마마도 계시는데..."
웅얼거린 시녀는 벌써 벌어진 일이니 자신이 어찌할수 없는 문제라 생각하며 한숨
을 쉬고 문을 닫았다.
제발, 아무일도 생기지 않으면 좋으려만...
급하게 방으로 들어선 샤르비나는 왕과 함께 안아있는 여인의 모습에 안색을 굳히
며 허리를 숙였다.
"두분이 계신 자리에 함부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이런- 일어나라. 아이를 가진 그대가 몸을 숙이다니. 어서 일어나."
다급하게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왕은 샤르비나의 팔을 잡아 옆자리에 앉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분한 듯 왕비가 이를 갈았지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왕비인 그녀보다 샤르비나의 세력이 더 높다 할만큼 그녀에 대한 왕의 총애
는 각별했던 것이다.
왕비의 존재가 걸려 입을 다물고 무릎에 올린 손가락만을 꼼지락거리는 샤르비나
의 모습에 눈치빠른 왕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연다.
"오늘은 왕비와 좋은 시간을 가졌소.
내 다음에 찾아갈터이니 이만 돌아가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요. 그럼, 있다 점심시간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왕비의 모습에 샤르비나는 그제서야 얼굴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귀여운지 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어깨를 안는다.
"뭘 그렇게 긴강하는 거냐-
이 성에선 나말고 그 누구도 너에게 해를 가할 자는 없다."
".......폐하.."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거리며 왕의 품에 안긴 샤르비나는 쉴새없이 눈을 굴렸다.
오늘 아침 샤한으로부터 중앙의 일에 대해 들었다.
지금껏 그녀가 맡은 일이 있기에 걱정이 되서 연락을 했다던 샤한은 그러나 아무것
도 모르는 듯한 누이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을 띄었다.
눈치빠른 그녀가 그것을 가만히 뒀을리가 없고, 끈질기게 물어 중앙에 돔이 새로운
황제으로 천거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만한 일인데, 어찌해서 왕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던 걸까.
어제 저녁에 자신의 얼굴을 보러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찾아오지 않았던가-
지금까진 자신이 중앙의 사람인 것을 알기에 사소한 일이라도 알려 주었거늘.
"폐하.. 저기 물어볼 말이."
"샤르비나."
"...........예?"
"난 너를 무척이나 아낀다."
난대없는 왕의 말에 샤르비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중년층에 다다르는 황제는 아직 젊은이의 모습을 유지한 채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
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생긴것과 달리 그가 얼마나 잔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지를 잘 알기에 그닥 마음을 깊이 주지 않았는데, 지금의 모습은 뭔가 다르다.
알수없는 불안함에 샤르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과도한 일은 하지도, 그리고 생각하지도 말아라."
"무..무슨 말씀을...?"
억지 미소를 짓는 총비의 모습에 왕을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집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향을 뿌렸는지 향기로운 내음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샤르비나가 예쁘게 꾸미고 사랑스런 미소를 지
으며 젊을 적의 50대 중반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와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자신은-
"예쁜 머리로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 거냐. 샤르비나-"
"...........왕..."
"지금부터 뱃속의 아이에 대해 각별히 신경쓰고 다른 잡다한 일에 대해선 신경을
끄거라. 그것이 너와 친구들을 위하는 길이니라."
부드러운 그 미소에서 무시할수 없는 경고를 읽은 샤르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왕은 모르고 있었던게 아니라 모른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여살이 될때까지 치세를 한 왕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을, 눈앞의 존재가
바로 그 왕들 중 하나라는 것을 관가하고 있었다.
굳은 자신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는 왕의 모습에 샤르비나는 앞으로
샤한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때 도움을 주지 못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누님에게 여락을 좀.....
이런 일을 알고 있을것 같아 의논좀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모르고 있더라고."
"다 불었겠군."
'이런 시스콤아-'라는 듯한 라헨이 눈초리에 얼굴을 붉힌 샤한은 입을 열려고 했지
만 그의 말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기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그래도 가만히 당할수만은 없어 뭔가 말하려던 샤한은 지친듯한 라헨의 얼굴에 입
을 다물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에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온힘을 쓴 라프헨
이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라헨의 푸석푸석한 얼굴을 보니 분명 밤을 센것이 분명하기에 입을 열려던 샤한은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라프헨의 모습에 눈을 동그렇게 떴다.
"샤한님, 일어나셨군요.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시는 거죠?"
"........라프헨 이젠 괜찮은 거야?"
라헨은 이런 모습인데반해 라프헨은 볼살이 통통하니 너무 기분이 좋아 보인다.
분명.. 어제는 정신도 차리지 못해 라헨에게 거진 매달려 있었는데..
묘한 시선을 보내던 샤한은 라헨에게 고개를 숙였다.
"...밤세서..한거냐?"
"어쩔수 없잖아- 라프헨의 몸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고."
".........아- 그래."
부끄러운지 괜히 얼굴을 찡그리는 라헨의 얼굴에서 떨어진 샤한은 시선이 마주치
자 미소를 짓는 라프헨에게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나 자신이나 미소에 힘이 없다. 아마도 앞으로의 문제 때문이겠지.
어제 젤에게서 중앙국의 신왕의 탄생에 대해 들었다.
이것저것 말들이 많을 것이 분명하나 저 적룡의 천거가 있었으니 감히 반대할 자들
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황제인 이자크도 이쪽에 있으니- 그나마 말릴수 있는 그 사람은 정신을 못
차린 상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은 사람의 기운을 빠지게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이쪽을 주시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저들에게도 중앙의 소문이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물러나지 않고 머무르는 이유는 왜일까- 분명 중앙에서 소환 연락
이 왔을 터인데.
"일단 카일이 성 아무대나 들어가서 쉬라곤 했지만, 물러나는 자들의 수는 극히 적
더군요."
"에스, 몸 상태는 괜찮은 건가?"
"깊이 베이긴 했지만, 가만히 있어서 의외로 치유는 빠랐어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것인지 미소지은 에스는 마찬가지로 창밑을 바라 보았다.
"황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되고 중앙에 난대없이 신왕이 등극했다는 데도 저렇
게 물러나지 않는 것은, 분명 그때문이지요."
"...........칸님인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모시고 있는 황제의 실종보다, 고국의 신왕의 등극보다, 칸크빌레가 진짜인지를 확
인하고 다시한번 보고 깊은 거겠지.
그러나 저들의 바램을 아는지 모르는지 칸은 방안에 틀어박힌 채다.
왠지 모른 안타까운 심정에 에스는 한숨을 쉬었다.
끼-익.
"이런 곳에 있었나- 몸이 다 낳지 않았으니 침실에 있는 편이 좋아."
"카일.."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와 에스의 모습을 발견한 카일은 안도 반 염려 반인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손목을 잡는다. 근래에 들어 왠지 카일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피할수
없게된 에스는 그에게 끌려 라헨의 맞은 편 의자에 앉게 되었다.
어디서 준비한건지 모포를 들어 목까지 덮어준 카일은 라프헨이 들고있던 찻잔을
하나 들어 에스의 앞에 놓아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라헨이 한쪽 눈썹을 올렸지만, 라프헨이 차를 건내며 미소를 짓
자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에스님의 몸 상태는 어떠세요?"
"덕분에 굉장히 좋습니다. 여러모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에스의 모습에 손을 저은 라프헨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고 답한다. 그러나 힘을 사용할때마다 그의 몸에 어떤 영향이 끼치는 가를 잘 알고
있는 에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걱정스러움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에스에게 라프헨이 내논 과자를 던지 라헨이
입을 연다.
"어느쪽이든 라프헨이 원해서 하는 일이니- 그런 표정은 실례다."
".....죄송합니다."
라헨의 모습이나 그에게 사과하는 에스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리던 카일이지만, 그
들의 도움이 아니였으면 에스가 살수 없었을 지도 모르기에 가만히 시선을 돌린다.
달그락-
"칸님은 어디에 계시죠?"
".....그는 방에 있지만,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방에만 있어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라프헨에게 대답한 에
스는 마지막에 '아마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에스의 얼굴에 라프헨도 마찬가지로 입술을 깨문다.
어찌 된건지는 모르지만, 돔이 중앙의 신왕이 되었다는 것은 들었다.
그것 때문인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던 라프헨은 라헨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밖에 기사들은 어떻게 할건가."
"글쎄, 내가 말해도 물러가지 않더군. 황제가 나선다면 모를까, 칸크빌레의 모습을
한번더 확인하지 않는 이상 자리를 뜨진 않을 거다."
쓴 웃음섞인 카일이 말에 에스는 역시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기사들까지 개입되어 말썽이다.
편해지기는 커녕 점점 꼬이는 일에 에스는 입술을 깨무려 미간을 문질렀다.
똑똑-
"칸님, 노웬입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댄체인 유헌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사내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노웬에게 뭐라 답
할수가 없다.
방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몇번 더 두들여 보인 노웬은 그러나 이내 손을
내리고 문에 손가락을 댔다.
"일단 물러 나겠습니다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점심전에 나와 주십시오."
한숨섞인 노웬의 말에 칸의 어깨가 굳는 것이 느껴진다.
문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린 칸은 유헌의 무릎에 머리
를 기댄채 그를 올려다 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빛의 시선에 유헌은 부드럽게 웃으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냥..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특히나 요즘은 더 그래."
"뭐가 뭔지 모르겠어도 당신이 이 집단을 지지해야 하니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돼
요."
".......알고 있어. 그러니 더 힘들다고-"
그러니 위로해줘라는 듯이 볼을 비비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눈을 가늘게 뜨며 칸을 바라보던 유헌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평소에는 묶어서 모르지만, 이렇게 풀고 흩어져 있는 그의 머리카락은 상당히 아름
답다. 관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닌데 언제나 윤이 나고 정리가 잘 되어있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몰리고 빛이 나는 사람이다.
만약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시대를 풍미한 탤런트나 유명한 사람이 되
었을 거다.
이쪽 세계에서는 황제였으니 그보다 더 대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칸은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고 묻는다.
"무슨 표정을 지었나요?"
"그냥.. 왠지 모르게 굉장히 슬퍼보여.....
..........돔이나 이자크 때문에 그런거야?"
".....글쎄요. 왜 그럴까요?"
말을 피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것이 평소의 유헌같지가 않다.
알게 모르게 돔과 사이가 좋아 졌는지 저번에는 그에게 따뜻한 말을 해달라고 했었
지. 그런 그가 중앙의 황제가 되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걸까, 아니면 자신이 이자
크를 대하던 행동 때문에 이러는 걸까.
후자에 대해선 찔리는 것이 많았기에 불안하게 눈동자를 흐리던 칸은 가만히 유헌
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오랜만에 보게되는 혈연이었으니깐.
10여년전 중앙성을 빠져 나올때부터 눈에서 잊혀지지 않던 동생이니깐.
다른 자들이 그에게 복수를 다짐해도 정작 자신을 조용히 자리를 피했으니깐.
칸의 눈을 바라보던 유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자크가 좋나요?"
".....유헌이 더 좋아."
부모 중 누가 좋은거니-라고 물었을때 묻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리는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을 난다.
다른 의미론 자신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이자크를 좋아하는 것 또한 알고 있지.
한결같은 눈빛을 날 바라보는 이 사람이 바로 칸이다.
그것을 이자크나 노웬이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인정해야 한다.
내 품에 안겨있는 사름은 칸크빌레가 아닌 칸이야.
그것을 자신부터 알아야 한다.
"칸 조금만 더 이렇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해요."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될까?"
"머리가 아픈것은 알지만,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말 안해도 잘 알고있죠?"
".........알았어."
못내 웅얼거리는 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유헌은 그에게 이자크에 대한 것은 말
하지 않기로 한다. 그가 적룡의 피를 받았다는 것도, 그와 연결이 되어 일방적인 감
정의 교류를 받고 있다는 것- 모두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혼자서만 알고 있을뿐-
"..........반드시 해결할 테니깐."
"응?"
"아니요,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 같군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유헌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그 용이 무슨 짓을 벌이든 간에 이자크나 돔에게 무슨 해를 가한다 하더
라도 자신이 그것을 막을 것이다.
서서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익숙해지고 있는 유헌은 눈을 감고 가슴 한편을 건드리
는 미묘한 감각을 느꼈다.
연결되어야 할 곳이 막힌듯 조금의 답답함마저 느껴지는 이것은 그 용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겠지. 기사의 맹약을 맺은 이상 아무리 적룡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역
에서 벗어 날수가 없다.
관계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맹약엔 우열이 없다.
단지 강한자가 종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루드빌 너는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슨 짓을 하든지 너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은 없을 뿐더러, 칸을 슬프게 하는 짓은
절대로 못할거다.
아마도.. 반드시.
".........유헌. 피곤하면 다른 곳에 누을까?"
"아니요. 그대로 있어요. 그게 좋아요."
"........응."
초연한 표정을 짓는,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가 버릴듯한 유헌의 모습에 불안을 느끼
고 말을 건 칸은 눈을 가늘게 휘는 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모르지만, 유헌이 지금이라도 당장 다른 곳에 가 버릴것 같은 불안은 칸은 아
이처럼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우스워-]
"....예..?? 무..무슨 걸리는 일이라도....."
중앙국의 황제들이 앉는 왕좌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루드빌은 벌벌떠는 대신을 내
려다 보았다. 얼굴을 위로 들린채 몇가닥의 머리카락이 얼굴위로 흘러 내린 눈만을
움직여 시선을 던지는 적발 미인의 모습에 대신을 숨을 삼켰다.
전에는 오만함과 당당함, 번접할수 없는 기운을 뿌렸는데 지금은 틀리다.
저게 바로 용이라는 존재인가-라고 느껴 질정도의 압도적인 공포에 대신은 아까
입을 연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벌벌떠는 인간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빌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동에서의 연락은 여전히 오지 않는가-]
"그..그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럴테지......버러지 같은 것들]
"저..저기.... 요..용이시여..그리고..다..다른 나라에..선..."
입을 열자마자 시선을 내리는 붉은 눈동자에 대신은 자신의 심장또한 밑으로 내려
가는 것을 느낀다.
어제 오후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룡이 왕이 바꾸겠다는 말을 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라 넘어갈 일인데, 난대없이 왕을 바꾸겠다니- 아연한 표정
을 짓던 신관들과 각종 지위의 귀족들은 반발하던 한 귀족이 눈앞에서 반으로 갈라
지는 모습에 재빠른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녀의 말대로 적룡의 천거에 따라 돔이라는 자가 황제로 세운다는 전갈을 각지로
보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왕을 새우는 데에는 적어도 한달의 기간이 걸린다.
역사상 가장 빠른 즉위를 했다던 칸크빌레 폐황제도 반나절은 걸렸는데, 이번 경우
는 단 한시간만에 이루어 졌다. 신전에 세워져 있던 이자키엘 황제의 연호가 사라
지고 돔이라는 연호가 새로이 만들어 졌다.
이런 전갈을 받은 다른 나라들은 어이가 없겠지만, 그것을 한 자신들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감히 용의 명을 거역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중앙국의 수호용이라 불리우는 루드빌라겔의 명이라면-
급한대로 전갈을 보내고 연락을 하고 신왕의 즉위식을 준비하는 동안 보낸 전갈에
대한 답을 기다렸거늘, 한통도 오지 않았다.
축하나, 하다 못해 이런 황당한 일에 대해 묻는 것조차도 오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용에게 아무런 보고를 할수 없게 된 대신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다..다른...나라에서......"
[초대따위- 사람들따위 없어도 된다. 돔의 즉위는 내가 인정하니 그의 머리엔 황
관을 쒸우기만 하면 돼]
"....하..하지만... 저..전통이..."
[나 적룡 루드빌라겔이 하는 것이 지금부터 중앙국의 전통이다]
"예..!! 아..알겠습니다! !"
새파랗게 질린 대신은 나가라는 지시가 있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빠져
나왔다. 볼품없는 모습으로 사라지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드빌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린다.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이 자리는 이자키엘 그 아이의 것이다.
카르키엘의 그리고 칸크빌레의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말만 잘들으면 그렇게 비참하게 물러나지 않아도 괴
로운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고 편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것을 차내 버리다니.
도대체 그 아이들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입술을 깨문 루드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필요없어]
그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연연하니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차라리 말을 안 들을 때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거나 그냥 버리는 거였는데 말이다.
이를 악문 루드발은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다 이내 공간이동을 해 이자키엘이 사용
했던 방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문을 열고 안의 침실을 살피던 그녀는 구석의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인
간을 발견하곤 눈에 띄게 화색이 되어 그의 발치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너는 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대륙 전체를 그 손안에 주겠어]
달콤하게 속삭인 루드빌을 무릎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 보았다.
적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조각같이 매끈러운 얼굴.
전에 아이들과 같은 것이지만 틀리다. 전혀 틀리다.
이 아이는 나에게 반항도 않하고 말대꾸도 않한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한결같은 눈으로 바라봐 줄것이다.
입가를 올린 적룡은 손을 들어 동공이 풀린 돔의 얼굴에 대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래, 이렇게만 있다면 모든 것을 주겠어]
그래 모든 것을.
너에게 줄것이다.
[그러니 말만 잘 들으렴. 오로지 나의 뜻대로]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하겠어.
그 증거로 우선 앞을 막는 걸치적 거리는 것들을 치워줄까.
그래, 우선 나의 힘을 속박하는 그 기분나쁜 인간을 죽여버리는게 좋겠구나.
인간인 주제인 용인 자신에게 일방적인 용에 기사의 맹약을 맺은, 거기다 브레스를
막은 그 건방진 인간.
눈앞을 아른거리는 흑발을 지닌 유헌의 모습에 루드빌을 나직히 이를 갈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넘친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지 않아.
그 적룡에게 직접 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라고 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어."
"어떤 의미로 말인가요."
"네가 그 적룡을 죽인다면, 아 인간도 함께 죽을거라는 의미다.
이 옆에 있는 빨간머리도 말야. 그리고 그 돔이라는 아이에게도 뭔짓을 했을지 모
르지만, 일단 위험부담의 선상에 놓은 인간은 3명이군."
"..정말이지.."
질린다는 듯이 이를 가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융텐은 기지개를 펴며 뒤로 물러
났다. 이런 저런 일을 시도해 적룡과 이자크 사이에 놓여진 용의 피를 끌어내려 했
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난 녀석들이기에 유대가 유독 강하다.
이러다간 정말로 손놓고 멀쩡한 인간들을 다수로 죽이게 만들었다.
이 인간들은 인간계에서도 꽤나 신분이 높은 녀석들일텐데.. 이번일로 여러가지 일
들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고민이다.
"요크발은 그저 적룡과 이어진 상태인가요?"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인간으로 그 용의 쇼크를 함께 느끼는 거지. 이 인간의 경우는
피가 좀 멀어져서 이자크완 다르게 육체적은 통증만을 느끼는 상태다."
".........그 용은 역시 미친거군요."
"처음 유희를 끝내지 않고 인간계에 남는다는 이유로, 나와 모친을 버린 것만으로
도 그는 광룡으로 불리기에 손색치 않아."
세상 어느 드래곤이 헤층링을 버리고 환상으로 치부하는 인간과의 생활에 집착한
다는 말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젖는 융텐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허리를 숙여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이자크와 그 옆에 누워있는 요크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도 흑룡의 덕인지 안색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그 용의 기사가 되지 않았나. 루드빌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거냐?"
"느껴지지만.. 엄청나게 반발해서 적룡을 느끼려 할때마다 거부감이 드네요."
"헤에- 그거 잘됐군. 기사인 너를 밀어내느라 그 용은 현제 필사적일 거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인간들의 공격에 대해선 좀 방심상태일수도 있다는 거군."
"......무슨 소린지."
"실든 좋은 일단 맹약을 맺은 상대를 느낄 정도로 밀어내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알
아? 어렵다고 그런거- 그 정도로 해댈려면 어지간한 힘을 쏫지 않고선 힘들지."
"저를 피하는데 신경이 쏠려 다른 것에 미쳐 대처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그런거다."
융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침대에 걸터앉은채 손가락으로 턱을 두들였다.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누르는 이 감정은 그 용의 것이리라.
나를 건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느낌마저 날 정도로 밀어 내려면 도대
체 얼만큼의 힘을 쏫아 붇고 있다는 말일까.
하긴 인간에게 억지로 맹약을 맺게 되었으니 그 성미로 잘도 참겠다.
피식하고 웃은 유헌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어 난거야?"
"아직이요. 밑에 회의는 다 끝났나요?"
"끝나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수가 생기질 않아서 말이지.. 고민이다."
"진지하군요. 칸."
웃는 얼굴인 유헌에게 시선을 주던 칸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런 일에도 진지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라며 웅얼거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고개를 돌려 이자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 유헌의 시선에 따라 이자크의 얼굴을 바라보는 칸의 표정은 복잡하기 이를데
가 없다.
씁쓸함과 약간의 그리움, 그리고 연민.
여러가지 감정이 얼굴에 들어나는 것을 읽은 융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왔
다. 용은 자신이 인간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다는 것은 상당히 웃기는 일이지만,
있어봤자 도움이 안될거라면 차라리 밖에 있는 편이 나았다.
닫힌 문 반대 쪽에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무는 융텐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젤은
이내 몸을 돌려 올라왔던 방향으로 되집어 내려간다.
"젤? 칸님과 같이 오시는게 아닌가요?"
"유헌님과 함께 있으시길래 그냥 왔습니다."
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스는 얼굴을 돌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를 바라 보
았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들보단 그가 있으면 좀더 창의적인 돌파구가 있을것 같아
아무것도 안하더라도 얌전히 있어 달라고 할 셈이었는데, 유헌과 함께 있다면 그냥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젤이 올라간 방향은 융텐의 방이 있던 곳.
칸은 유헌외에도 이자크와 요크발을 보러 갔을지도 모르기에 더 세심한 주위가 필
요하다. 아직 내부엔 중앙의 황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도 있을 뿐
더러, 알고 있어도 싫어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아."
"읽을건가?"
집으려는 서류를 먼저 잡았던 카일은 종이를 흔들며 묻는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에스는 내민 종이를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한다.
"천만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 쉬도록 하자.
아직 몸 상태가 불안하니깐."
"응..."
사락.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스는 넘겨받은 종이를 사이에 껴 두었다.
그가 자신들의 일이 도와주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는 것은 상당히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이 저렇게 천역덕스럽게 일을 도우니 딱히 뭐라 할말이 없다.
힐끔거리며 이쪽에 시선을 주는 다른 일행들의 시선을 느끼며 카일을 바라보던 에
스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자크에게 엄청난 검상을 입었지만, 라프헨 덕분에 거진 치료가 다 되었다.
좀 한가했다면 주변에서 말리는 것처럼 좀 쉬었을 테지만, 이런 상황이다 보니 도
저히 얌전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일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으려니 카일이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의 모습에 난감을 표정을 짓던 노웬이 그냥 쉬라고 했지만....
"왜 그런 시선으로 봐? 걱정하지마- 스파이 같은 짓은 안한다."
'할 생각도 없고말야.'라며 웃는 그 얼굴에 그런 의도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닌
에스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화제의 전환을 느낀 에스는 허겁지겁 입을 연다.
"중앙의 신왕에 대한 당신의 나라에 반응은 어떤가요?"
"웃기지마-라는 모습들이지."
"........에?"
어이없어 하는 에스의 얼굴에 들고있던 서류를 내린 카일은 웃어 보인다.
"용은 확실히 두려운 존재지. 하지만 몇백년 동안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그들에 대
한 인간들의 공포는 과거보다 굉장히 많이 무뎌졌다."
"..........."
"그런 존재라도 인간계의 룰을 어기고 다짜고짜 신왕을 세운다-라고 한다면 다른
왕실의 주인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겠어? 오히려 그 반대지.
내 누님도 루드빌의 일반적인 전언을 듣고 굉장히 불쾌해 하셨다더군."
"다른 나라들도 그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건가요?"
"누이같은 반응도 있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는 자들도 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이 동에 황제가 있다는 것은 뮤트롱에서 벌어진 일때문에 쫙 퍼졌거든.
게다가 이자키엘 황제의 짓이긴 했지만 뮤트롱가 만찬때 돌려진 독주에 대한 내용
을 해결한 자 또한 그 황제다.
자신들의 혈육을 지켜준 그에대해 호의를 표하는 자들은 많아."
".......그렇군요."
확실히 그의 짓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자신들의 가족을 지켜준 황제에게 고마움을
느낄 자들은 많을 것이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의 뒤로 다가오는
노웬을 발견한 카일을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중앙국의 황제의 존재도 문제지만, 그들을 용의 전언 앞에서도
주춤하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지."
"다른 이유?"
"칸크빌레의 생존에 대한 소문이 대륙에 퍼지기 시작했거든-"
놀라 눈을 치뜨는 에스의 뒤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빛의 눈동자에 카일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노웬경. 그렇게만 보지 말고 할말이 있으면 하라고."
"아? 노웬님."
자리에서 일어 나려는 에스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선 노웬은 카일에게 잠시 나오라
는 말을 전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일은 어쩔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에스는 반쯤 일어난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카일을 데려가냐고 물으면 왠지 느낌이 좀 이상하고, 그렇다고 노웬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카일이 걱정된다.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적이었던 자이기 때문이다.
미간을 찌뿌린 에스의 모습에 걱정말라는 듯이 손을 들어보인 카일은 노웬의 뒤를
따라서 나간다.
"할말은 무엇일까나-"
방을 나서서 노웬이 머무르는 방에 들어선 카일은 삐딱한 자세를 취하며 그의 얼굴
을 바라 보았다.
에스의 앞에선 한없이 선량한 척하더니 그가 자리에 없자 단숨에 태도가 변한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지만 카일이라는 사내의 성격은 예전부터 익히 아는 것이
라 지금와서 그에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싶지않다.
단지 몰려드는 피로감에 미간을 찌뿌린 노웬은 열어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밑에 자리한 기사들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안하고 그곳에 모여들 있다.
"서로에 대해 피차 잘 아는 사이니니- 서론은 줄이도록 하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완 다른 태도잖아. 나에게도 존칭을 써달라고 노웬."
"......여전히 너와의 대화는 날 지치게 하는 군."
정말로 피로한 표정을 짓는 노웬의 얼굴에 반해 카일은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입가
에 미소를 짓는다.
실은 카일과 노웬은 과거 중앙국 기사로, 둘은 동기였던 것이다.
유능한 기사단장의 밑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들은 무척이나 우수하다는 평가였
고, 내심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도 했지만, 카일이 본국으로 돌아가 직위를 받고 노
웬이 부단장이 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중앙성에 있었을 당시 꽤나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로 어찌보면 친하
다고도 할수 있었다.
묘하게 생각하는 거라든가 대화의 방향이 같았으니깐.
카일이 이자크에게 붙어 자신들에게 공격했을때, 노웬은 놀랐기도 했다.
그라면, 특이하고 요란한 것에 취향이기에 분명 칸에게 붙어 실컷 놀아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지위의 선택이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뭐, 에스를 선택한 것도 상당히 의외이긴 했지-
"이번일에 당신은 어느쪽의 손을 잡을 겁니까."
갑자기 존칭을 하는 태도나 질문에 카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서 아는 사람으로 말을 꺼내지만, 용건은 칸크빌레의 모사인 노웬이라는 자로
꺼낸 것이다.
그렇다면 카일도 그를 놀리던 자세에서 벗어나 진지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노웬의 말에 답하는 것은 카일이 아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위에 자리한 사내가
답해야 할 문제다.
"그건 좀 어려운 문제인데.. 어쩔까나."
"선택은 그쪽의 자유지만- 에스는 어느쪽이든 칸크빌레의 뒤를 따를 거라는 것만
알아 주었으면 하는군."
"아아- 정말이지 빌어먹을 태도로군. 노웬 하르스."
에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의 마음과 몸,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선 자신이 스스로가 이상하다 생각할 정도로
가진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점을 이용해서 다른 자들에게 에스가 거래의 용도가 되어 입에 올
려지는 것은 정말 질색이다.
전에 그런 경험을 익히 맛봤던 그이기에 더욱 불쾌하다.
미간을 찌뿌리는 카일의 모습에 노웬은 시선을 돌렸다. 어쩔수가 없다.
지금으로썬, 한치 앞이 어찌될지 알수없는 상황에선 카일이 지닌 것들이 절실히 필
요하다. 그가 자신에게 돌아선다면 동의 세력을 얻을수 있고, 동시에 중앙은 그가
지닌 비중을 잃게 되는 거다.
그것이 앞으로 싸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모르나, 이쪽에 이득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노웬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일은 심드렁하니 입을 연다.
"좋아."
".........."
"나는 칸크빌레 일파를 지지하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쪽을 지지한다 해도 누님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 너무 좋아하
지만은 않는게 좋아."
카일의 사족에 노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인 카일이 칸크빌레 일파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라센 왕가의 여왕인 그의 누
이가 거절한다면 지금 이루어진 이것은 쓸모없어 진다.
하지만, 카일의 승락을 받았다는 것은 가능성을 반으로 올렸다는 의미.
이런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도 노력만 한다면 변하게 될 것이다.
턱을 괴고 눈을 굴리는 노웬의 모습에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사내다. 거기다 수완도 좋으니- 쓴웃음을
지은 카일은 고개를 들어 위층 어딘가에 있을 이자크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황제가 자신의 배신에 어떠한 방응을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직접 가는게 나을 것 같군요."
"응?"
유크렌에게 주기위해 손으로 만든 꽃을 접고 있던 융텐은 유헌의 말에 무슨 뜻이야
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한 유헌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
자크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칸과 같은 얼굴.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그 루드빌을 사라지게 해야
하지만, 그와 이어져 있는 이자키엘과 요크발에게 분명 몸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
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칸이나 돔이 슬퍼 하겠지.
그 외에도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하다못해 자신도 죄책감을 안게 될 것이다.
융텐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입을 열었다.
"루드빌에게 가서 직접 결말을 낼겁니다."
".....하-아. 무모한 짓을 말라고."
손을 저은 융텐은 들고 있던 아기자기한 색색깔의 종이를 내려 놓았다.
왜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것인지 알수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헌의 얼굴에, 때론
강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루드빌에게 결말을 낸다고? 어떤식으로?? 넌 지금 생사를 같이하는 그녀의 용에
기사의 맹약을 맺는 것을 알고 있는거냐. 그녀가 산채로 갈갈이 죽여도 성치않을
너와 얌전히 대화로 일을 끝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적룡의 성미로 결말을 낸다는 것은 둘중 하나가 죽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너와 루드빌은 연결되어 있으니 함께 죽는 그런 결말을 낼거라고 지금 말
하는 거냐."
"....그런 의미로 말한게 아닙니다.
그저.. 그녀에게 가서- 다른 사람들이 가봤자 죽을게 분명하니-"
"루드빌이 마력이 아닌 순수 육체의 힘으로 상대하면 너도 죽어."
이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다.
지닌 힘에대해 무엇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격려나 루드빌의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서 알려줄주 알았는데.
멍한 표정을 짓는 유헌을 바라보는 융텐의 얼굴은 복잡하기 이를데가 없다.
"너무 자신이 힘을 과신하지 않는게 좋다. 상대방의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다면 넌
그냥, 보통의 인간들보다 좀더 뛰어난 자에 불과해.
그런 능력만을 믿고 너무 날뛰는 것은 좋지않아 게다가-"
".........."
"너무 이 세계에 개입하면 좋은 꼴을 당하지 않을 거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테이블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융텐은 침대에 앉아있는 유헌의 앞으로 다가와 그
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드빌에게 인간인 네가 해를 가하게 된다면 다른 용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제가 당신들에게 위협을 된다는 말입니까."
"위협뿐이겠나. 그것보다 더 위험한 녀석이야, 넌-"
얌전히 있으라고 조금 위협을 주려던 융텐은 겁을 먹기는 커녕, 오히려 눈을 치뜨
는 유헌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잡은 손을 놓았다.
어떻게 하고 싶어도 그동안 든 정이 너무도 커져서 뭐라고 할수가 없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쉰 융텐은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해 보지
만, 도저히 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몇백년 만에 생긴 용의 기사다.
그런 존재를- 나 조차도 느끼는 너를 다른 용들이라고 모를것 같나.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면서 너를 그녀의 맹약자로 만든 것은 말야.
그 미친 적룡의 기사가 된 인간이기에 그런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특이하
긴 하지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케 하려고 그런 손이 많이 가는 일을 벌
인거다. 그런데 네가 루드빌을 어찌어찌 처지 한다고 치자-
그렇게 되고 나서도 아직도 특이 능력을 보이는 너를, 다른 용들이 가만히 둘것 같
아. 한번 루드빌의 기사가 되어 용들의 인지에 들어간 너는 죽을때까지 그들의 시
야를 벗어 날수가 없어!!
그러니 얌전히 죽어 있으라고 나는 말하는 거다!! !"
말을 함에 따라 점점 흥분한 융텐은 손을 저으며 윽박을 질렀다.
더운 듯 손부채질을 하는 융텐을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다른 것보다도 저 흑룡이
자신을 그렇게나 신경써준 건가하는 느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는 유헌에 융텐은 그가 자신의 말을 온전히 알아먹은 것이 아니라
고 판단하고 이를 갈았다.
이 녀석은 다른 때는 발군의 이해 능력을 보이더니, 중요할 때는 묘하게 핀트가 어
긋난다.
"그러니깐- 네가 들어야 할 중요한 말은-"
"여기가 어디지."
"그래, 여기가 어딘지 아는 것...! ! .............엥?"
유헌에게 삿대질을 하던 융텐은 옆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먼저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시선을 주었던 유헌은 자신을 무끄러미 바라보
는 황금빛의 눈동자에 입을 벌렸다.
얼굴에 흘러내린 백발을 뒤로 넘긴 이자크는 자신이 누워있는 장소와 옆에 함께 누
워있는 요크발의 얼굴을 바라보다 망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융텐과 유헌에게 시선
을 준다.
유헌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뿌린 그는 이내 어쩔수 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연다.
"여기가 어딘지- 나는 묻고 있다."
"......이자키엘...."
남의 이름을 친분이 있는 양 부르는 유헌의 모습에 불쾌감을 느껴지만, 가만히 있
던 이자크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이런 인물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
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기억나는 자신이 했던 행동들과 루드빌, 그리고 여러가지 사건들
을 기억해 낸다. 그래, 루드빌이 저 유헌이라는 소년가 강제적으로 기사의 맹약을
맺자 반사적으로 몸의 기가 비틀어 지는 것을 느끼고 바로 정신을 잃었었지.
그러다면, 지금에서야 깨어난 것인가.
요크발도 루드빌의 영향으로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누워있는 것일거다.
가만히 누워 두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손이나 다른 몸을 움직여 보던 이자크는 그닥
자신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곤 몸을 일으킨다.
"너..너.. 도대체 어째서 일어난 거냐-!!"
"못 일어날 건 또 뭐지."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어디 아픈곳이나 불편한 곳은."
난리를 부리는 흑발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유헌이 모습에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라는 생각이 들
자 안색을 굳힌 그는 유헌을 손을 쳐냈다.
"..........이만 일어나겠다."
"돌아가겠다는 말...이지? 그건-"
그것 외에 무슨 말을 하겠냐는 이자크의 반응에 얼굴을 굳힌 유헌은 옆의 융텐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헌이 그런 눈으로 본다 해서 그에게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칸을 닮았지만, 백발인 이 중앙국의 황제는 자신의 나라가 다른 이이게 넘어간 것
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 존재란 것이 자신을 수호해야할 적룡이고, 피를 이은 아들이라는 점은-
마치 부친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칸크빌레와 비슷하다. 쓴맛이 느껴져 얼굴을
돌린 융텐은 유헌의 어깨를 치며 원래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마치,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는 듯한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뿌린 유헌은 그러나 몸
을 일으켜 옷을 바로하는 이자크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그의 어깨를 집었다.
이곳이라면 모르지만, 일단 방밖으로 한발만 디디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여 엄청
난 소란이 벌어질 거다.
무엇보다 이 남자의 분위기는 도저히 칸과 닮지 않았으니 그가 머리를 역색한 거라
고 변명할수도 없다.
"무슨 짓이냐-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줬다면 뭔가 착각을 하는..."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다고, 하지만 막 정신을 차린 당신에 아무것도 모른채 날
뛰는 건 이쪽에 엄청난 피해가 오니 어쩔수 없잖아."
"............."
"황제면 황제답게, 상황을 잘 살피라고-
당신이 무사한 모습으로 이곳에 있다는 건 도와준 것도 뭣도 아닌 단지 인질로 대
하기 위함 일수도 있으니 제발, 부탁이니깐 그 망할 콕대 좀 낮춰달라고 부탁하고 싶군."
지금은 너무다 상황이 복잡하다.
안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이자크 때문에 일이 두배로 늘어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성질 같아선 좀더 뭐라고 퍼붓고 싶지만, 칸의 동생이기도 하고 원치않게 그의 과
거를 보아 버렸으니 차마 심하게 못하겠다.
이를 갈며 씨근거리는 유헌을 빤히 바라보던 이자크는 자신의 어깨에서 손을 떼내
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이그러지는 유헌을 바라보며 금빛 눈동자를 지닌 미형의 사
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할건지 잘 듣고 있을테니, 손을 놓아달란 말이다.
너무 힘을 주니 아프다고."
"..............하-"
왕족이란 이런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잘도 고자세를 유지하는 구나 싶었다.
전에 자신을 죽이려 살벌하게 검을 휘드러던 모습관 사뭇 다르다.
단지 입을 다물고 얌전히 앉아있는 이자크의 모습에 융텐을 바라보던 유헌은 어느
새 꽃접기에 심취해 정신을 빼앗긴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저자는 꼭 필요할때 쓸모가 없어진다. 유헌의 한숨쉬는 소리를 들으며 옆에 누운
요크발 그리고 융텐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열심히 머리를 놀렸다.
저 융텐이라는 자에게 루드빌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자신과 같은 일족일수
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의 행동과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고압감과 강한
파장에 그가 루드빌에게 듣던 융텐이라고 알아챘다.
소리만 들었지 정말로 본적은 없었는지라 식견으로만 그의 정체를 알아보아 알아
채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다는 표정을 짓는 유헌과 저
흑룡은 친분이 깊은 듯 하니 될수있으면 얌전히 있는 것이 좋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뿐만 아니라 요크발도 함께이니..
"당신이 정신을 차리기까지.. 정확히 하루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요. 그것을 말해주려고 했지만, 그런
고자세를 보이니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군요."
"내 모습이 불쾌하다 그건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네가 원하는 자세를 취하고 픈 마음은 없다."
같은 형제라도 이리 틀리다.
이를 간 유헌은 그러나 이내 평정을 찾으려 숨을 몰아 쉬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취해도 자신이 하는 말을 듣는 다면 변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의 모습이 꽤나 기대된다는 좋지않은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과연 말해도 좋
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그에게 가장 미움을 많이 받는 자신
이 말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결국, 피할수 없는 문제이기에 숨을 들이킨 유헌은 단숨에 말을 내뱉었다.
"루드빌이 돔을 납치해 중앙국의 신왕으로 천거했습니다."
".......................뭐?"
처음 유헌이 루드빌의 이름을 말할 때 그건 뭐냐는 듯이 찡그러지던 그의 얼굴에
말을 끝내자 단박에 변한다.
사색이 되어 이쪽을 바라보는 이자크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 유헌은 다시 입을 열
었다.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상당히 싫은 느낌이다.
"당신이 정신을 잃은 지는 단 하루지만, 그동안 그녀는 돔을 중앙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기타 자잘한 순서들은 용의 특권으로 무시했고 말이죠. 들은 바에
따르면 신전에 있던 당신의 연호대신 돔의 연호가 새로이 올려진 모양입니다."
"잠깐, 기다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미 대륙 각지의 왕가나 신전에 돔을 중앙으로 신왕으로 천거한다는 전송을 도착
해 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거지."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난 이런 최악의 거짓말따위 하지 않아."
단호하게 말하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얼굴을 찌뿌리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당장에 방에서 나갈 듯한 그의 기세에 안색을 굳힌 유헌은 앞을 가로막으
며 손을 펼쳤다.
절대로 나갈수 없다는 유헌의 기세에 이를 악문 이자크는 나직히 말했다.
"너의 말은 못믿어. 내가 직접 알아볼 것이다."
"두번 말하게 하지만, 나도 할말 안할 말은 가려서 할줄 알아."
"흥- 나를 고립하게 만들어 순순하게 만들려는 술수일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그런 번잡한 짓을 안해도 당신은 이곳을 빠져 나갈수 없어.
순순해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텐데, 뭐하러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겠어."
"모르지. 너같은 이계인들의 성격은 유난히 특이하지 않던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은근히 말하는 모습에 유헌은 순간 울컥했지만, 간신히 참았
다.
도대체가 이렇게나 꼬이다니, 칸과 닮은 얼굴이지만 참는 것도 한계다.
당장에 이자크의 머리를 열어 정신을 개조하고 싶은 생각을 하던 유헌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치켜뜬다.
"유헌이 하는 말은 사실이니 얌전히 있는 것이 좋아."
융텐의 말은 효과가 있는 것인지 대번에 이자크의 안색을 바뀐다.
그 엄청난 태도 변화에 울컥하던 유헌은 그러나 이 남자에게 언성을 높여봤자 좋은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숨을 가다듬었다.
이 성에서 이자크의 편은 누워있는 요크발과 밖에 있는 기사들, 그리고 몇몇 친분
이 있는 귀족들일 거다.
그러나 귀족들은 중앙성의 갑작스런 행동에 언제 자세를 바꿀지 알수없는 노릇이
고, 기사들은 칸크빌레의 등장에 놀라 저렇게 버벅거리며 밖을 서성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힘이 되어줘야 할 요크발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상태.
그런 이자크가 혼자서 이곳을 돌아다니게 할수는 없다.
그는 물론이거니와 이쪽 둘다에게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거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상황은 그쪽이나 이쪽이나 둘다 위험한 상태입니다."
"............"
"얌전히 이곳에 있는 곳이 좋아요.
그 미친 적룡이 언제 태도를 돌변해 당신을 공격할지 알수없는-"
"네놈이 처음부터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자크의 말에 유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유헌에게 시선을 준 이자크는 끊듯이 하나씩 말을 내뱉는다.
"그녀를 그렇게까지 구석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그런 돌발 행동따위 하지 않아."
"....그건 그녀가 원래부터 이상했던..."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냐, 네놈은- 네 녀석이 나타나고 나서 되는 일이 없어.
모든 게 뒤죽박죽 애써 짜낸 계획들은 틀어지고 어긋나기만 할뿐, 원하는 대로 되
는게 하나도 없잖은가!! !"
분을 못 이기고 그답지 않게 버럭 소리친 이자크는 입을 여는 유헌의 어깨를 강하
게 밀어냈다.
체격의 차이가 있으니 버티지 못하고 몇걸음 뒤로 물러나던 유헌은 그러나 이런 분
위기에 휩쓸려 이자크의 행동대로 하게 둘수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길을 막는 유헌의 모습에 이를 간 이자크는 옆구리에 대어진 검을 찾았지
만, 역시나 다른 곳에 빼 두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제길-! 당장에 눈앞에서 비켜라! 난 중앙국으로 돌아 가겠다!! !"
"돌아가지 못해."
".............."
근 십여년 동안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런 이자크에게 유헌의 행동은 참을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게 했다.
분을 못이겨 팔을 휘저으며 중앙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이자크는 자신의 말을 받
는 음성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유헌도 마찬가지로 어느새 방안에 들어온 건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칸의 얼굴에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유헌의 모습에 표정이 잠시 흔들린 칸은 그러나 이내
원래의 안색을 찾으며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이자크에게 시선을 주었다.
똑같은 체구에 똑같은 얼굴, 머리카락만 틀린 두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묘한
광경인지라 융텐은 접기를 멈추고 그들을 바라 보았다.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한다."
"....칸크빌레....."
불안한 음정으로 나오는 자신의 음성이 맘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찌뿌린 이자크는
다시 칸을 바라 보았다.
차가운 느낌 밑에 가려진 복잡한 감정을 읽은 칸의 얼굴로 뭐라 할수없는 착참함이
감돈다. 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이자크가 맘대로 행동을 할수있게 하는 빌미
을 줄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애써 차거운 낯을 유지한 그는 노웬 특유의 서늘한 음
성을 내기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중앙의 황제인 이자키엘의 신병은 이쪽에서 맡기로 했으니, 인질인 그대는
얌전히 있는게 좋을 거다."
과거엔 일상적으로 사용한 톤이건만 지금에 와서 어렵게만 느껴지는게 이상하다.
그런 마음과 다르게 칸의 얼굴은 그의 의도대로 무척이나 훌륭하게 차가운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자크의 얼굴이 서서히 굳는다.
"나가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융텐?"
"이 방은 이 흑룡을 위해 준비된 방. 매번 너희들이 찾아와서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
다고, 저 요크발이라는 녀석은 이쪽에서 맡아 줄테니 나머지 몸들은 다 나가줘.
칸, 너도 마찬가지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눈을 가늘게 휘는 융텐의 모습에 이를 악문 그는 고개
를 끄덕이며, 멍하니 서있는 유헌과 이자크의 손을 잡으며 방을 나섰다.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이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지금도 없겠지.
게다가 용의 방이 위치한 이쪽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위로 올라가는 칸의 모습에 당황한 유헌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잡혀 끌려가는 이자크를 바라 보았다.
"..........."
칸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굉장히 이질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져
있다. 그 얼굴에 차마 뭐라고 말할수 없었던 유헌은 나선형의 좁은 계단마저 오르
고 나서 들어나는 낡은 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의 실랑이 후 문을 연 칸은 두사람과 같이 안으로 들어간다.
이자크와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갈만한 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다 머리속을 스치는 이 방의 존재에 무턱대고 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입을 열수가 없다.
그냥 전처럼의 무표정한 얼굴을 짓는 유헌이나 고개를 돌리고 바닥을 내려다 보는
창백한 안색의 이자크나, 둘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칸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것인지 한동안 바닥을 내려다 보던 이자크가 입을 연다.
"어째서 이런곳에 데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가보겠어."
"....어디를 가나는 거냐. 융텐이나 유헌의 말을 못 믿는 거야?"
"믿지 않는다 해도...."
조용히 중얼거린 이자크는 시선을 들어 칸을 올려다 보았다.
그 눈동자에 서려있는 반발심과 적의에 숨을 들이킨 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몸을 긴장 시킨다.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이자크, 그런 생각으로 밖에 나갔다간 정말로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적룡이 전같이 당신을 보호해 주리라는 장담이 없다는-"
"적어도 그녀는 날 괴롭게 한적은 없지."
".............."
"날- 고통스럽게 한 적은 없어. 누구처럼-"
번들거리는 황금빛의 눈동자에 칸은 침을 삼켰다.
자신이나 유헌이 무슨 말을 해도 이자크는 이곳을 빠져 나갈것이다.
아니, 말이 무슨 소용인가 그는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 그 적룡에게로 돌아갈 것이
다. 그런 것, 절대로 인정할수 없다며 입술을 깨문 칸은 이자크의 손목을 잡아 근처
의 의자에 억지로 앉힌다.
"무슨 짓이냐-"
"여기에 있어."
낮은 칸의 음성에 이자크의 눈을 동그랗게 뜨인다.
"이곳에 있어. 아무대도 가지마-
그냥 이곳에서 일이 처리될때까지 얌전히 있으라는 거다."
"칸, 잠깐..! 카...! !"
할말을 마친 칸은 유헌이 뭐라고 말해도 그의 팔을 잡으며 억지로 방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와 이내 문이 잠기는 소리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자
크는 멍하니 그들의 잔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자리에 앉아있던 이자크는 방안의 모습에 턱을 경직시킨다.
멀리 비춰지는 햇빛을 의지하며 주변을 둘러봄에 따라 그 얼굴 표정이 더 안 좋아
진다.
탁탁탁.
"칸, 저런곳에 이자크를 두다니 옳지 않아요!"
"어쩔수가 없잖아. 이대로 사라져 버릴텐데..!!"
"하지만, 저런 곳은.. 저곳은..."
웅얼거리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는 칸의 표정또한 좋지 않다.
하지만 수가 없다.
이자크를 그대로 둘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도 어쩔수가 없어. 중앙으로 돌아간다면 그 루드빌이 이자크를 가만히 두지 않
을꺼야. 녀석은 용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잖아. 난, 난 말이지..."
"칸."
"처음에는 신경도 안썼어.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아무도 없는 중에 하나뿐인 혈육이란 말야!!"
".............."
"....너에게 부탁할께. 이러면 안된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수가 없어. 유헌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그외엔 믿고 싶지도 않다고. 난 말이지..
지금 내가 왜 이러는 지도 잘 모르겠단 말야."
변한 자신에게 집착하는 가헌 같았다.
칸의 경우에는 그저 동생에 대한 걱정의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칸을 바라보는 자신은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어깨에 올려진 손과 불안하게 떨리는 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유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지금 자신이 할수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속을 쓰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