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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비샤, 루시아렌
[드래곤 둥지의 수호자들]
Start.
루시아렌이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로, 달콤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인다.
"뭐가 미안한데?"
남자라는 종족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 등장해버렸다.
그렇게 속삭이고는 다시금 입술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대답해올지 궁금하다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다.
"뭐가 미안하냐면..."
굉장히 난해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서 그녀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어 놓으려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그녀에게서 돌아올 말은.
'또?'
'그게 다야?'
'미안한게 그것밖에 없어?'
'정말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등등, 결국에는 '어디 한번 잣돼 봐라' 라는 뜻을 지닌 여러 가지의 문장들로 바뀌어 계속 같은 패턴으로 나를 공격해올 것이 뻔하다.
심연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멘탈을 간신히 부여 잡고, 그나마 그녀가 만족할만한 최선의 대답이 무엇인지를 궁리한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여자가 아닌 남자였기에, 내 입장에서 만족스럽겠다 싶은 대답만을 추려낼 뿐. 그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뭐, 최선을 다해서 대답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녀의 사파이어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다리가 덜덜 떨려온다는 것은 비밀.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릎을 꿇고 있기에 다리가 아파서 그런 것이다. 진짜로.
"연인인 비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카린과 연애를 하고, 잠자리까지 같이 하고, 그외에도 비샤와 너를 생각하지 않았어. 모두가 다 내 잘못이야, 정말로 미안해. 비샤, 루시아."
"......"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드-비샤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루시아렌은 내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침묵에 걸린 부담이 점점 커져갈 즈음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입을 열어왔다.
"여전히 솔직하구나, 레이."
"......?"
같은 패턴으로 갈굼을 당하거나 맞고 데드 엔딩을 보게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루시아렌은 그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슥-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다. 이대로 내려쳐지는 귀싸닥션을 맞고 나는 죽음의 여신과 마주하게 되겠지. 하여튼 레이어드의 과거를 너무 얕본 내 잘못이니,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슥- 스윽- 스윽-
"...루시아?"
"......"
데드 엔딩을 각오한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녀의 반응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루시아가 들어올린 손은 그대로 뺨을 내려치는 것이 아닌,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쓸어 내리고 있다.
슥- 스윽- 스윽-
루시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결을 정돈하듯 천천히 쓸어 내려질 때마다 왠지 모르게 포근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다가온다. 예상 외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녀의 이름을 자그맣게 불러 보지만, 그녀는 말없이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내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다.
사파이어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 같은 것은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아니,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슬픈 것일까,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도통 알 수 없는 눈빛이다.
"레이... 너는 언제나 그래 왔었지."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꺼내는 루시아렌. 그런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에 쿠가 파로스카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 모습이 옆으로 보이고, 그녀가 무어라 말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 파로스카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쿠와 함께 자리를 피한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그 둘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내 두 눈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 루시아렌이 맞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상대가 누구던 간에 나를 찬양하고, 나를 동경하고, 원한다 말했었지만. 어릴 적부터 너는 항상 그랬어, 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알것 같기도 한데, 어릴 적의 레이어드는 내가 아니었기에 그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줄 뿐이다. 내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레이, 어릴 적 그때 기억 나니? 너와 내가 만났었던 그날 말야."
"......"
고개를 끄덕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드러운 손길로 내게 속삭이듯 이야기를 전해온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더 좋았었는지도 몰라..."
"루시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지는 알겠어. 그렇지만... 지금 여기엔 너 혼자만 있는 게 아니야."
"......"
루시아렌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조그맣게 흔들린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드-비샤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비샤, 미안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나는, 네가 아닌 카리네푸라를 사랑하고 있어."
"......"
굳어진 표정 위로 연보라빛의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킨다.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가가 어떤 감정을 겪고 있는 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자, 귓가에 루시아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봉인을 깨고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네가 무사한 지 확인하는 일이었어. 그리고 네가 언제 무슨 일을 하든 지 알 수 있었지만, 드-비샤에게는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네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말이야."
"......"
그녀가 뭐라하든 일단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드-비샤의 심리였다. 과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녀와 나는 어디까지나 연인의 관계로, 내가 그녀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고, 나 또한 그녀가 배신감을 느끼고 떠나갈 시 잡을만한 권리 같은 것도 없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는 것은, 내가 드래곤들 중에서 최약의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분노로 점철된 쇠방망이가 내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리고 루시아렌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다.
"잠깐...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
"...이동."
샤아아아-
그 말과 동시에 드-비샤는 이동 마법으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루시아렌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했는데 따라가지 않는 걸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자, 루시아렌은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너도 알다시피 드-비샤는 조금 답답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해. 나를 도와주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분명 돌아올 거야. 그러니 따라가지 않아도 돼."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대답해내는 것에 소름이 돋아오는 팔을 슬슬 문지르고는, 그녀의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루시아, 너는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레이."
"......?"
약간의 불안함이 엄습해들어왔다. 루시아는 지금,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저 미소를 본적이 있다.
"레이, 내가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루시아."
불안감이 점점 더 강해져간다. 지금 내가 짐작하고 있는 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맘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려 노력한다.
"레이, 나는 네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무엇을 하건 간에 신경 쓰지 않아. 그저, 그저 네게 다가가는 날 밀어내지만 않으면 난 그걸로 만족해."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설마 엑시투스님께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분의 계시를 받고온 사도와 마찬가지인 존재. 그분께서 나를 방해하려는 마음으로 정신 간섭에 들어갔을 리도 없고, 여신님께서도 분명히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셨다. 루시아렌이 성룡이 되는 시점에서부터 정신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루시아렌은 대체...?
"레이."
"......!"
포옥-
나를 끌어안는 그녀의 품에서 왠지 모를 포근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레이어드의 몸에 익숙한 향기인 탓일까, 내게도 이 향기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루시아, 너 설마... 다시 폭주하는 건 아니지?"
"나는 지금 정말 멀쩡해, 그리고 드-비샤가 옆에 있으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으니... 일부러 그런 말을 해서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어. 그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
이렇게되면 그녀가 카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부터가 질책이라는 둥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고, 내게 애정 표현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셈이 된다. 그녀의 치밀한 계산에 저절로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루시아, 네가 내게 이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카린을 향한 내 마음이 바뀌지는..."
"알아, 진부한 소리 좀 하지 마. 너는 어떻게 된 게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재미없는 소리만 하는 거야?"
"...아니, 루시아..."
"조금만, 조금만 더 개방적이 될 수는 없어? 너는 너무 꽉 막혔어, 레이. 가끔 보면 할아버지 같은 소리만 한다고."
"......"
할아버지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꽉 막혔다라... 애초에 드래곤들의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룰이 일부일처일진데, 루시아렌은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니, 그건 아니겠지. 일부다처라든가 그런 건...
"레이, 나는 네가 드-비샤와 결혼을 하든, 카린 언니와 결혼을 하든 상관하지 않아. 내게도 네 사랑을 조금만 나누어줘."
"...너, 루시아가 맞기는 한 거지? 방금까지의 행동과는 전혀 다르잖아."
그렇게 말하자 루시아렌이 나를 끌어안은 팔의 힘을 조금 덜어내며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드-비샤가 이 자리에 있어서 연기한 거라고요. 이 바보 용님아. 나는 드-비샤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녀의 심기에 거스를 만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 연기라고는 해도, 나는 그녀의 편이 되어야만 해."
"...루시아... 나는 정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르곘어. 아무리... 아무리 오래 전부터 이런 감정을 내게 품어왔다고는 해도... 아니, 애초에 레이어드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뭐야?"
"......?"
루시아렌의 사파이어빛 눈동자에 짙은 의혹이 서려온다. 그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금의 어법은 레이어드를 마치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말했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루시아렌이 내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어볼만한 점은 레이어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맹목적이고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기를 바라는 것일뿐.
"레이...?"
"......"
"...방금... 조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녀의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른 침이 절로 목뒤로 넘어간다. 타는 듯한 갈증을 애써 참아내고 최대한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본다.
"레이... 정말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의혹을 느끼기는 했어도, 그게 레이어드를 3인칭으로 지칭한 내 말투에 의아함을 가진 건 아닌 듯했다.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점이 하나 더 있다면 루시아렌이 레이어드를 좋아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레이, 그렇잖아...? 너는... 내가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어."
"...루시아, 너... 지금 좀 이상해."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이곳 언더 에스트에 오기 전 엑시투스님께 들었던 말과 루시아렌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현재 정신이 멀쩡해야 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행동해왔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루시아의 눈동자 안에는 약간의 광기가 생겨나고 있었고, 그녀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나로서는 당장에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시한 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에 등 뒤로 식은 땀을 줄줄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 너... 지금 확실히 제정신인 거지?"
"...물론, 나는 멀쩡해."
그렇게 대답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씌워진 광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음산한 미소. 분명 예전에 본적이 있는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루시아렌.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더 위험해 보였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 가지 가정.
그것은 루시아렌이 정말 멀쩡한 상태이더라도,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봉인형에 처해졌던 충격으로 인해 없던 광기가 실재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가정이었다.
이러한 가정은 꽤 신빙성이 있어보였고... 거기까지 떠올리던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렌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림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레이?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뭐냐면..."
"......?"
텁-
거기까지 말하고 루시아렌은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쥐었다.
"...루시아?"
"모르겠다면... 지금 알려줄게."
그 말과 함께 루시아렌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나간 것처럼 거세게 쥐어 뜯기 시작했다.
"루시아! 그만! 뭐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루시아렌을 제지하니,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해줘, 내가 네게 반하게 만들었던 그 말을..."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루시아렌은 가시를 품은 푸른 장미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드래곤은 제정신이라는 사실에 더욱 심한 공포감이 몰려들었다.
-Guardians of Dragon Nest-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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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 한 방이 제게 큰 힘이 됩니다.
m(. .)m 큰 절)
추천 수 집계는 이전과 동일하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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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멘 -*
天空意行劍 뫼비우스의띠 등장
= 돌고돌고돌고~
루블리츠 여자란 그렇지
= 저 말이 제일 무서어욤 ㄷㄷ!
오룔리 레이어드가 죽고 끝나는건 아니갯죠.
= 아니에욬ㅋㅋ
이호성성님 아아... 좋은 배다....
= ㅇㅅㅇ!!
슬픈반복 말해봐! 뭐가 미안한데? 왜 말 못해..
= 그야말로 슬픈 반복...!
노스아스터 레이어드는 어떻게 말해야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 ㅇㅅㅇ!!
향향공주 뭐가 미안한데?==>전부!===>전부 뭐?===>바람핀거!===>바람핀게 왜?===>미안해!===>뮈가 미안한데? (무한 반복)
= 제일 무서운 말이져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