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인터벌(2) =========================================================================
왕국과의 교섭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기 때문에, 그동안 나는 다른 할 일을 찾아보아야 했다. 현실 세계에 다녀와도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할 일이 별로 없던 것이다.
며칠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서 아리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벨의 끈질긴 방해로 그 계획이 무산되어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야 했다.
이곳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검을 휘두르는 일 뿐이라서, 렐리 길드의 세리스에게 연무장 사용을 허가받아서, 한동안 검술연습을 시작했다.
기초 검술연습을 조금 하다 보니 지루해졌다. 내가 그렇게 수련을 좋아하는 성격도 못되거니와 이 신체는 너무나 탁월해서 노력보다 얻는 것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수련도 오래가지 못했고, 점점 지루해 지려는 찰나에 렐리가 연무장에 들어섰다.
"여어, 열심히 수련에 힘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군.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야."
"하하하…. 솔직히 조금 그런 생각을 하던 참입니다. 얼굴에 드러났나요?"
"온몸에서 지루하다는 아우라가 내뿜어지고 있잖아. 전에도 느낀 거지만, 전혀 무인에 어울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나도 조금 느슨한 성격으로 유명한데, 나 같은 건 당신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것 같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한 거 아니야."
렐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마침 잘됐다. 탐욕의 던젼에서 익혔던 기세를 파악하는 법을 활용한 검술을 실험해 볼 좋은 상대가 등장한 거니까 말이다.
나는 렐리에게 대결을 부탁해 보았다.
"대련? 전에 대련을 해본 지 고작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뭔가 발전이라도 있었던 건가?"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군요. 안 되겠습니까?"
"뭐, 좋아.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
렐리는 흔쾌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거 정말 고맙네. 나중에 선물이라도 하나 사다 줘야겠다.
나와 렐리는 연무장의 중앙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그리고 서로의 검을 뽑아 들었다.
렐리의 세검은 전에 확인해 본 적이 있지만, 빠르고 날카로움에서는 오히려 하이레딘보다 앞선다는 느낌이었다. 오러의 총량에서 하이레딘의 비해서 렐리가 한참을 뒤지기는 하지만, 검술 실력만 놓고 보면 절대 하이레딘의 밑이 아닌 것이 렐리다.
나도 6 랭크로 올라섰기 때문에, 렐리에게 뒤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오러를 배제한 검술의 대결이기 때문에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럼, 당신 먼저 들어와 봐."
"네."
오러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치열하게 검격을 주고받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빨라진 거야?"
렐리가 나의 검을 휘두르는 속도에 놀라 하며 말했다. 전과 비교하면 두 배 더 빨라졌으니 놀랄 만도 할 거다.
나는 별말 없이 계속 검을 휘둘렀다. 나는 자랑을 하고 싶어서 대결을 신청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 실력을 렐리를 상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것 뿐이니까 말이다.
렐리와의 대결의 양상은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렐리의 세검을 따라가기 벅찼던 저번과 달리, 속도 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세검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느껴져 왔다. 눈으로만 세검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몇 번 그 움직임을 놓치는 바람의 방패로 힘겹게 방어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전에 비하면 훨씬 발전한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결에서 나는 우위를 확실하게 점하고 있었다. 움직임을 읽는 것은 아직 미숙하더라도 공격속도는 비슷하고, 힘은 내 쪽이 훨씬 높다 보니까, 검을 마주치게 되면 렐리는 상당히 힘겨워했고, 그럴 때마다 틈이 조금씩 드러났다.
아마도 실전이었다면, 오러의 차이로 인해서 내가 압도적으로 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검술의 숙련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렐리의 세검이 내 미간 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기세는 그쪽을 향하지 않고 내 고간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나는 식겁해서 검을 내려서 고간쪽을 방어했는데, 그때 렐리의 세검이 빠르게 움직여서 내 미간을 노린체 멈추어 섰다.
뭐지!? 분명 기세가 고간을 향해 있었는데?
"확실히 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 같군. 그렇지만 그것 때문의 이런 단순한 페이크의 걸려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그렇군. 검의 기세를 읽게 된 것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게 된 것 같다. 적어도 몬스터는 이런 식으로 페이크를 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졌습니다. 제가 너무 자만하고 있었군요."
나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대결 내내, 내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가서 한순간에 역전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여전히 도깨비 같은 실력이군. 실력 자체는 전과는 완전 딴사람이 된 것처럼 좋아졌는데, 이런 기초적인 부분은 아직도 부실하니 말이야."
렐리가 잠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그 부분도 고쳐서 나타나겠지? 그것도 빨리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볼 생각입니다."
"정말 머지않아서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군. 세리스가 남자 보는 눈이 확실한 거였어. 그렇지, 라냐?"
렐리가 연무장 입구 쪽에 숨어서 우리의 대결을 훔쳐보던 세리스의 사매인 주황색의 단발머리의 소녀 라냐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고, 라냐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렐리에게 다가왔다.
"몰래 대결을 훔쳐봐서 죄송해요. 이리아 언니의 전언을 전해드리려고 사부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나한테 사죄할 일이 아니지."
렐리가 나를 바라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라냐가 나를 바라보면서 안절부절못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내게 사과해왔다.
"죄송합니다. 허락 없이 함부로 대결을 지켜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것도, 내가 모르는 어떤 예절 같은 건가? 대결을 훔쳐보면 안 된다는?
나는 렐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라냐의 처분은 내게 맡긴다는 듯이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예절 같은걸 잘 모르는 내가 라냐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는 일이지.
"괜찮습니다.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라냐도 신경 쓰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라냐가 고개를 숙여서 다시 한 번 내게 감사를 전해왔다.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비록 대결에서 지기는 했지만, 내 실력도 확인할 수 있었고, 내 새로운 약점도 발견했다. 일단, 이 약점을 없앨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아리와 벨, 가끔은 세리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도시의 축제를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가끔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러보기는 했지만, 역시 실전이 아니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이후로 혼자서 검을 휘두르는 일은 관뒀다. 역시나 수련은 내 체질이 아니라니까.
축제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사람들이 많은 것도 있지만, 여기저기 꾸며놓기도 잘했고, 거리에 임시로 설치된 가게들도 많이 있었다.
대부분이 처음 접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새롭고 신선한 기분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리라고하는 연인이 옆에 있으니까 굉장히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옆에 있던 벨과 세리스는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모처럼의 축제인데 즐겁게 웃음 짓는 경우보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에는 아리와 벨이 함께 세리스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지금은 놀랍게도 벨과 세리스가 가끔 쑥덕거리면서 아리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나제동맹 결렬 후의 여제동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나름 즐거운 축제를 아리와 함께 만끽하고 있을 무렵, 왕궁에서 던젼에 관한 협상을 위한 사자가 도착했고, 그 사자는 협상 후 왕도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만나서 내게 내려진 영지에 관한 사항들을 떠넘기고는 도망치듯 떠나갔다.
"프레스란트 지방?"
왕국에서 내게 넘긴 영지는 왕국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그 일대를 통틀어서 프레스란트 지방이라고 부른다고, 이리아는 설명해 주었다.
"네. 이번에 칸에게 내려진 영지는, 그 넓이는 이곳 렐리 시티보다 5배는 더 넓은 지역이지만, 그 대부분이 산지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험한 곳입니다.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고요. 왕도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열악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사자로 온 남작이라는 작자가 도망치듯 떠나버린 거였구나. 저번에는 공주가 직접 와서 내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었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완전히 대우가 달랐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이리아가 설명을 해 주었다.
"왕국의 세력대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왕가를 중심으로 한 국왕 파와 전통 귀족 가문들로 이루어진 귀족 파가 대립을 하는 상황이지요.
저희 같은 길드세력들은 주로 왕가와 협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귀족 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이랍니다. 그러다 보니, 길드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칸님의 영지가 귀족 파의 영향으로 그런 변경지대로 정해지게 된 것 같아요."
여기도 파벌싸움이 존재하는 것이구나. 솔직히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게 되니까 조금 열 받는데?
-어차피 영지 일은 신경 쓸 생각도 없었으면서, 열 받을 필요가 어디있냥. 네 역할은 던젼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일이지, 정치가 아니다냥. 이상한데 신경 쓰지 마라냥.
"그래도 바보같이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냥. 어디까지나 던젼 공략이 주가 돼야 되는걸 잊지 마라냥. 던젼만 확실하게 공략해 준다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말리지는 안겠다 냥.
"별로 정치를 할 생각은 없어. 단지 당한 만큼 돌려줄 생각이 있을 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 거지?
내가 비록 영지경영에 관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영지로 되어있는 곳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지. 믿을만한 사람을 시장으로 임명해서 나 대신 다스리게 하려고 나는 이리아에게 부탁을 해서, 렐리 시티의 시장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렐리시티는 부외 자인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잘 다스려지고 있는 도시였고, 그 도시를 경영하는 것은 렐리가 아니라, 이곳의 시장인 안드레이라고 하는 렐리의 전 남편이었다.
그는 현대인인 내 눈으로 보았을 때도 흠잡을 곳 없이 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내 영지의 시장으로 임명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잘 운영하는 남의 도시의 시장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그의 인맥을 의지하기 위해서 만남을 주선 받은 것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백작님. 시장인 안드레이입니다."
"칸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저를 뵙자고 하신 건가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예절 같은 격식을 차릴 필요 없어서 좋긴 하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새로운 영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맡길만한 믿음직한 사람을 찾고 있지요."
"그래서요?"
"저는 시장님이 저의 영지를 맡아주셨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이가 허허 웃으면서,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를 인정해주시는 건 기쁘지만, 저는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일단 한번 떠봤는데, 역시나 안되는구나. 그럼 진짜 목적을 이야기해야겠다.
"정말, 안타깝군요. 그렇지만 시장님만큼 훌륭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혹시나 시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저의 영지의 시장으로 추천해 주실만 한 인물이 혹시 없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안드레이가 턱을 손으로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다가 약한 한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안드레이가 확신의 찬 눈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