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인터벌(2) =========================================================================
"사실, 제 밑에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가 한 명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를 떠나보내게 되면, 제가 너무 힘들어져서 왠만하면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하하하, 제 욕심 때문에 그 사람의 장래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오!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구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적당한 인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선택은 그의 몫입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나도 억지로 데려가서 일을 시킬 생각은 없다. 그래도, 한 도시의 시장이 되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거절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최대한 어디의 있는 도시인지는 마지막까지 비밀로 해 두어야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님. 그 사람을 데려오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조금 왜소한 사내와 함께 돌아왔다.
"이 사람이 제가 말씀드린 사람입니다."
시장이 소개해준 그 사내는, 약간 낡은 복장에 아무런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아 검소하달까, 소탈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진한 눈썹에 날카로운 눈빛과 굳게 닫은 입과 다부져 보이는 턱이 남자답고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심어주었다.
"칸입니다."
"제럴드라고 합니다. 시장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어때요?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전에 몇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제럴드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첫 번째로 제가 부임하게 될 영지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질문은 가장 나중에 나왔으면 싶었는데, 이걸 먼저 물어보나?
"프레슬런트 지방입니다. 그곳 전체를 맡게 되었지요."
지방 전체, 그리니까 우리나라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기도 일대를 몽땅 영지로 받은 게 되겠지만, 사실 왕국 전체로 보았을 때 완전히 변경지역이고, 또 굉장히 낙후되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런 곳의 시장을 맡게 되는 걸 기꺼워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제럴드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칸님께서는 제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실 계획이십니까?"
나는 제럴드의 옆에 앉아있는 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제럴드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적어도 옆에 앉아 계시는 시장님이 갖고 계신 권한만큼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요."
내 말에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던젼으로 가 있을 때는 제럴드가 영지의 모든 권한을 갖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만큼 길드장을 주인으로 하는 도시의 시장은 그 권한 만큼이나 책임도 막중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시장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검증된 인물인 이 도시의 시장에게서 추천받으려 했던 것이고.
"그럼, 세 번째 질문입니다. 제가 시장 업무를 보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의 지원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럴드의 질문에 나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일단, 세금으로 걷은 재화는 모두 이용하셔도 됩니다. 저에게 따로 세금을 전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제럴드는 물론 옆에 앉아있던 시장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나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해도, 워낙에 낙후된 지역이라 들었으니, 세금을 걷는다고 해도 그렇게 큰 금액은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추가로 자금을 지원하겠습니다."
어차피 이곳 세상의 재산은 내게는 그다지 필요 없는 것들이다. 이제는 마이너스 포인트를 써서 얻어야 할 것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슬슬 우리 세상의 화폐로 전환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이곳 세상에서 얻는 돈은 몽땅 영지발전에 사용한다고 해도, 내게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영지가 발전하면 언젠가는 그곳의 주인인 내게도 돌아오는 것이 상당히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투자를 할 때였다.
"질문에 대한 대답, 잘 들었습니다. 성의껏 답변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제럴드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준 뒤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제럴드 씨에게 몇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뭐, 대단한걸 물어보려는 건 아니다. 실제로 도시를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는 시장이 추천한 인물인데, 설마 나보다 못할까? 그래도 내게 주어진 영지를 맡길 인물인데 기본적인 건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생각이었다.
"프레슬런트 지방은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쪽과 남쪽은 산맥으로 가로막혀있고, 동쪽은 사막지대와 그걸 넘어가면 바다와 인접해 있지요. 실제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된 지역입니다.
당신이 영지를 맡게 된다면, 도시의 발전을 우선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프레슬런트 지방 전체의 발전을 생각하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제럴드는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을 해왔다.
"도시 발전을 우선하겠습니다. 그 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도시가 확실하게 안정된 상황에서 생각해도 늦지는 않다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다른 의견을 말했다고 해도, 그 내용에 무리가 없다면 인정해줄 생각이었는데, 제럴드의 대답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도시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성장을 우선시할 겁니까, 아니면 주민들의 행복을 우선으로 할 겁니까?"
이 질문에도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대답을 하는 제럴드였다. 평상시에 자신이 도시를 맞게 되면 이러 이러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왔던 모양이다.
"성장을 우선하겠습니다. 단지, 주민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주민들의 복지를 챙기기보다는, 도시의 자생력을 먼저 키우겠다는 말입니다."
성장 후 복지라는 게 말뿐인 나라에서 자라난 입장에서는 별로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무리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나중에 내가 조금 챙기면 되겠지.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하였다.
"왕국 법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집행해야 하는 건 도시를 맡게 될 당신입니다. 법을 집행할 때 기준은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무조건 왕국 법이 정한 것을 엄격하게 따를 것입니다. 법이 엄해도 그 시행이 공정하다면 불만을 갖는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나라면 조금 사정을 보아가면서 처벌을 내릴 텐데. 생활형 범죄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여기는 현대와는 다른 곳 이니까, 그런 것들을 제대로 파악해낼 방법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
뭐, 집행을 공정하게 하겠다면 불만은 없다. 나중에 암행어사 놀이를 하면서 확인해 보면 될 일 이니까.
"대답 잘 들었습니다. 제가 드릴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족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말 몇 마디 나눠서 그 사람을 파악할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단지, 실제로 도시를 잘 다스리고 있는 시장의 추천을 믿을 뿐이다.
대답이 정말로 엉터리였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 테지만,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제럴드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능구렁이처럼 속이 검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제럴드 씨. 당신은 제게 내려진 프레스런트 지방 전체에 대한 대리 통치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놀랄 정도로 시원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태도의 원인이 궁금해져서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보이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 프레스런트 지방은 전부터 관심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지만, 발전 가능성도 많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요?"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절대 쉽지는 않을 일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귀족 파에서 내게 그런 영지를 허락해줄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말을 하는 제럴드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비치고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금전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다만 인력 부족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이 나라에 기반이라는 것이 전혀 없거든요."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프레슬런트지방에도 사람을 살고 있으니, 그 들 중에서 쓸만한 사람들을 찾아보아야겠지요.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제 모든 걸 걸어보기에 충분한 무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든든한 말이었다. 모든 걸 걸어보겠다니. 시장이 참 좋은 사람을 추천해 준 것 같다. 나는 제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제럴드 씨."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영주 님."
제럴드와의 관계는 일단, 계약관계이지 그가 나의 가신이 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제럴드는 내게 영주 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몸을 낮추었다.
"제럴드 씨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영지를 향해서 출발할 것입니다. 다른 건 다 제가 준비할 테니, 제럴드 씨는 자신의 신변만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혹시 가정을 이루셨나요?"
내 질문에 제럴드는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다부진 모습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었다.
"인연이 없어서, 아직 가정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모두 따로 떨어져 살고 있지요. 저는 제 몸 하나만 챙기면 준비는 끝입니다."
20대 후반이면, 이곳에서는 노총각 중의 노총각이었다. 그래서 아직 장가를 못 간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중에 도시를 잘 운영해 준다면, 내가 나서서 중매해 주어야겠다.
렐리길드의 이리아 정도면 반려로써 충분한 것 같은데, 그녀가 제럴드와 만약에 맺어지게 된다면, 이리아라는 훌륭한 수완을 가진 사람을 영지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일일 테니까.
나는 시장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시장과 남아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는 제럴드에게 내가 머무는 여관을 알려주고 준비가 끝나면 찾아오라고 전했다. 며칠은 걸리겠지.
나는 제럴드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렐리시티의 축제를 구경하면서 지냈다. 물론 아리와 함께.
바로 그 다음 날 제럴드가 준비를 끝내고 나를 찾아왔다. 너무나 빠른 준비에 놀라서 물어보니, 제럴드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몸만 달랑 온 겁니다. 그쪽에 제가 살 곳이 정해지면 짐은 이곳에 있는 지인이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굉장히 다부지고, 단호한 인상이었는데,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 때는 순진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제럴드의 빠른 준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2, 3일 걸릴 거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 본부를 설치하고 세력을 만들고 잇던, 전 중소길드 연합의 루크의 도움을 받아서 그날 여행 마차를 구할 수 있었다.
세리스를 비롯한 렐리길드의 인원들에게 작별인사를 건 내고, 다음날 바로 렐리 시티를 떠났다.
마차를 구할 때 함께 고용한 마부가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벨은 나와 함께 마차 안에 올라탔다. 그것까지는 좋지만, 비어있는 제럴드의 옆자리를 놔두고 왜 굳이 내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리와 내가 앉아있어서 자리가 좁은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리를 놔두고 제럴드의 옆자리로 옮겨갔고, 벨은 뺨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불만이 있는 건 나라고! 아리와 오손도손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그렇게 나와 벨의 불만을 가득 싣고, 마차는 프레스런트 지방을 향해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