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 푸른 짐승 1. (2/33)

등 푸른 짐승 1.

집안이 안정되고 사업이 날로 번창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있는 집 자손들 끼리 혼약을 하는 일은 더 이상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 케케묵은 풍조였지만, 

좋게 말 해 금융업에다 사회질서 확립이요 부국을 위한 

무역업이지 진실은 사채업자에 조직폭력배 대장이고 밀매업자인 

‘도화 무역’ 의 도정주 사장이 신부 감을 찾는 다는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좁게는 반도, 넓게는 섬나라와 대륙의 비슷한 업종 사람들 까지도 

긴장케 만드는 이 화젯거리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각국의 스파이들은 발에 땀 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물론 땀이 흘렀다는 흔적은 남기지 않고 말이다.

“장우 라 했나?”

“예...길 장 자에 날 우 자를 씁니다.”

“길게 나는 장남이라...자네가 어렸을 때 종종 아버님 손을 잡고 나를 찾아오곤 했었지.

 물론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그래, 춘부장께선 안녕하신가?”

“예. 어르신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탈 히 잘 계십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애써 무시한 장우는 혹여나 이 늙은 구렁이가 지루해 할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대답해야 했다.

 “요즘은 통 나들이도 삼가고 집안에서 두문불출 하신 다 길래 편찮으시나 했지...잘 계신다니 다행일세.”

도기 노인은 넓은 이마와 머리의 경계를 짓고 있는 

백발을 쓸어 넘기며 허허 하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으로만 봐서는 조금 풍채가 좋을 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마주칠 수 있는, 

동네 회관에서 내기 바둑을 두거나 수확한 돈으로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사 주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보통의 평범한 할아버지 다.

하지만 장우는 그런 편안한 모습에 절대로 속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 도화정에 오기 전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노인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독하기가 수전노 보다 더 하고 잔인하기가 저승사자 못지않다’ 

퍽이나 그 아버지 세대 다운 비유고 표현이라 장우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만 진지한 아버지의 얼굴을 앞에 대고 실소 하고 말았었다.

 ‘이놈아. 도화정에 가서 방금 웃었던 일을 후회 하고 싶은 게냐?

 그렇게 긴장감이 없어서야 그 늙은 구렁이한테 오장육부까지 다 까발려 지고 말거다!’

장우는 태어나서 그렇게나 진지하고 엄숙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실소한 일을 정중히 사죄하고 다시 단정히 정좌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경청 했다.

‘잊지 말거라. 너는 협상을 위해 가는 것이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네가 그동안 아무리 막 살고 막 굴렀다 해도 너는 우리집안의 장남이야. 너를 버릴 리가 없지 않느냐.’

그 말이 맞았다. 죽으러 갈 놈이 필요했다면 아버지는 둘째나 셋째를 보냈을 것이다.

아무리 의사가 될 놈이고 검사가 될 놈이라도 장남은 탱자탱자 놀기만 한 자신인 것이다.

‘일단 네가 그 집에 가서 만나지 말아야 할 인물이 한명 있다.

 만일 도정주 사장이 그 집에 있었다면 당연 그가 일 순위였겠지만

 다행히도 그는 도화정에 살지 않는다는구나.

 그러니 네가 만나지 말아야 할 인물이 하나 줄어든 셈이지...... 도정유.

 네가 만나지 말아야 할 인물은 도 사장의 동생인 도정유다. 그녀는 안돼.

 도 노인도 물론 버겁지만, 그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어째서요, 아버지? 겨우 스물 예닐곱 의 여자 아닙니까.’

‘정확히 스물 일곱이다. 속으로나 밖으로나 매력적일 나이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무슨 말씀 입니까?’

‘됐다. 이유 까진 알거 없고, 너는 그녀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도 노인을 만나거든 절대로 먼저 운을 때지 말거라. 명심해야한다.

 네가 우위를 점 하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초조함이나 궁금증을 유발 시켜 놓고 와야 하지 않겠느냐.’

만나지 말고 먼저 운을 때지 마라.

그의 아버지가 지시한 것은 고작 두 가지 뿐 이였지만 장우는 지금 

그 중 한 가지를 어길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어조를 숨기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야 간신히 입을 땠다.

“어르신께서는 저희 아버님 보다 도 연배가 높으신데 오히려 훨씬 정정 하십니다...

 사실 어려서 일이 조금 생각이 납니다. 아버님 손을 잡고 복숭아나무가 유달리

 많은 집에 다니러 갔던 것을 가끔 꿈으로도 확인했습니다.”

“허허. 하긴 이 집에 복숭 나무가 많긴 하지. 선대께서 워낙 좋아하셨거든.

 오죽하면 집을 지으시고 ‘도화정(桃花亭)’ 이란 현판을 내 거셨겠나.”

“맞습니다. 도화정...여름이면 복숭아 꽃이 참 탐스럽게도 피어있던 기억이 납니다.

 이상하게 그 꽃만은 절대 잊혀지질 않더니...오늘 또 이렇게 ‘도화’를 보게 될 운명 이였나 봅니다.”

“허허허.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자네 말 재주가 좋구만.”

“아닙니다. 진심으로 ‘도화’ 에 감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됐네. ‘도화’ 가 아름다운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자네가 원한다면 진짜 ‘도화’를 보게 해 줄 수도 있네만...어떤가? 구미가 당기는가?”

 “예?”

장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복숭아 꽃을 운명과 결부지어 찬탄함으로써 

도 노인을 기분 좋게 만들 계획이었고 거기 까지는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주 목적인 협상 건에 대해 슬쩍 말을 던져 볼 참 이였는데... 

진짜 ‘도화’ 라니? 뭔 소리지?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났......에?

“드세요. 작년에 직접 딴 천도 랍니다.”

선녀인가. 천사인가.

양귀비가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녹수도 희빈도 이 보다 더 고와서 왕을 함락 시켰을까.

“인사 하거라. 장 사장이 애지중지 하는 장남, 장우 군이다.”

도 노인의 소개로 쟁반을 내려두고는 생긋이 웃음 짓는 선녀가 입을 때었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고른 치열이 들어나며 다소곳하게 손을 내민다.

“도정유 예요. 장 아저씨라면 가끔 저희 화랑에도 들려주셨는데.

 요즘은 통 들리질 않으셔서 그렇잖아도 안부가 궁금했어요...음...제 손이 지저 분 한 가요?”

그러면서 살짝 자신의 오른손을 들여 다 보는 도정유.

장우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선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는데 

아버지가 어째서 그녀를 만나지 말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도정유. 탐스럽고 아름다운 복숭아 꽃 에 둘러싸여 자란 그녀는 

진정으로 꽃 중의 꽃 이였고 그 미색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결국 장우는 그날의 목적을 달성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진짜 ‘도화’ 의 생긋이 웃는 얼굴만을 머릿속에 가득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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