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33)

등 푸른 짐승 2.

“그래서...그냥 갔다고?”

“예. 정유 아가씨를 보더니 얼이 빠져서는 복숭아 몇 개 집어먹고 나가더랍니다.”

“멀었군.”

“뭐, 그렇지요. 그 나이에 어르신께 뭔가를 얻어가려고 왔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지요.

 연륜 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데...장 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 탱자탱자 장남을 보냈을까요?”

신호를 받아 정지하는 세단의 거울을 통해 뒷좌석의 상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비서 한중오는 슬쩍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사장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차남이나 삼남이 왔다면 할아버님께서 베었을 거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일본도를 길들이는데 사용하셨을 지도 모르지.”

서류를 넘기며 어조의 변화 없이 말 하는 상사를 거울을 통해 보던 

중오는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성격을 아는 장 사장이라면 차남이나 삼남을 보내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장남이 아무리 탱자탱자 놀기만 좋아하는데다 별명이 ‘개장우’ 라도 

책임을 중시하는 어르신의 입장에서는 집안을 대표하는 장남이 오지 않는 것이 

마음대로 하시라는 의미로 해석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젊어서 도 노인에게 몸을 의탁 했던 장 사장은 둘째나 셋째를 보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정유 아가씨를 일부러 선보이신 거겠죠?”

“그렇겠지. 먼저 선수를 치긴 했는데 지나치게 얼빠진 놈이라 실망 하셨을 지도.”

싸인을 마지막으로 서류를 덮는 상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중오는 재빨리 다음 서류첩을 건넸다. 

그러자 만년필을 내던지려던 도정주 사장이 다시 펜을 쥐고 서류첩을 받아든다.

“......”

이건 뭐냐 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사의 의중을 읽은 중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 했다.

“새로 올 입주 가정부 입니다. 봉자 할머니는 이제 너무 늙으셨어요. 쌀 씻을 힘도 없다고 어찌나 푸념 하시던지.”

“...통장은?”

“걱정 마십시오. 내 드렸습니다. 가끔씩 사장님 뵈러 오시겠다고 고집 부리셔서 가까운 거리로 거처를 마련해 드렸어요.”

“잘했어.”

건넨 파일은 한번 열려 지지도 않고 다시 중오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예상 했던 바라 중오도 더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도정주 사장이 어려서부터 살림을 봐 주시던 할머니가 그만 두셨고 

오늘부터 새로운 입주 가정부가 온다는 사실만을 알리면 된다. 

어차피 집안에 누가 있던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남자이니 중오로써는 오늘 할 일을 끝낸 셈이다.

“집으로 모실까요?”

흘끔, 다시 한번 거울을 통해 확인한 상사의 모습이 꽤나 피곤해 보여 

중오는 질문을 하면서도 기사에게 눈짓을 했다.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사장은 중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중오는 차가 유턴한다고 왼쪽으로 쏠리는 몸의 중심을 잡으며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제 생길까봐 남자 가정부로 했습니다. 음식 솜씨도 좋고 다림질도 잘 한다니까 걱정은 하지 마세요.”

흔들림 없는 상사의 몸과 입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다.

중오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며 그가 필시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을 거라 확신 했지만, 

어차피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사소한 하나의 것이 실수(失手)가 돼 버릴 것 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말이다.

현관을 열자 센서 등이 켜지며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잘 닦여져 있는 구두를 벗고 허물을 벗듯 넥타이와 셔츠, 수트를 차례로 벗어나갔다.

어두운 거실에 조명도 켜지 않고 욕실 앞에 섰는데 집안에서 묘한 냄새가 풍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늙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차려 두고 간 음식 일 것이라 생각하며 욕실 문을 열었다.

주황색의 조명 아래로 샤워기의 가는 물줄기가 남자의 몸을 때렸다. 

새카만 머리카락으로 쭉 빠진 목덜미로, 단단한 어깨로 근육이 느껴지는 등으로. 

남자는 한 손을 들어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걷어냈다. 

그러자 그의 움직임에 따라 등 근육이 물결쳤고 여의주를 문 한 마리의 푸른 용(龍)이 비상하듯 움직였다.

씻는 작업을 마친 남자는 타월로 몸을 닦고는 대충 던져 둔 후 욕실을 나갔다.

아직까지도 캄캄한 거실이 이 집에 남자 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대변하듯 적막 했다. 

묘한 것은 오늘따라 음식냄새가 가득 하다는 것 이였는데, 

남자는 자신의 늙은 여인이 날이 날이니 만큼 평소보다 더 거하게 한상 차려놓고 갔나 하고 잠시 실소 했다.

가운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남자는 그냥 벗은 몸 그대로 주방으로 갔다.

언제나 홀로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캔의 뚜껑을 따면서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그의 발치에 길게 그림을 그리던 냉장고 불빛도 사라졌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도정주 사장님...맞으신가요?”

들려오는 앳되고 차분한 음성. 

그 속에 미세한 떨림을 캐치해 낸 남자는 적은 아니라고 판단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에 익숙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머리를 반 묶은 남자 아이다.

도정주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

.

.

.

조명도 없는 주방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두 남자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집의 주인은 알몸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객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평소의 성격대로 전혀 당황함을 보이지 않는 

도정주는 들고 있던 캔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깡통 속의 알콜을 모두 비워 냈을 때 조금 전의 앳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사장님...맞으신가요?”

소년은 아니로군.

다 비운 캔을 구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도정주는 두 번째로 

듣는 목소리에서 첫 번째와 같은 떨림과 어리광 섞인 앳됨을 발견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묘하게 풋풋하다는 것은 인정했다.

“가정부?”

구긴 캔을 식탁위에 올려두고 팔짱을 끼는데 풋풋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두 손을 깍지 끼기도 하고 자기의 팔을 

쓸어내리기도 하는 것이 어둠과 적막이 꽤나 불안한가 보다. 

도정주는 캄캄함 속에서 취하는 그 작은 움직임이 꽤 

단정하다고 생각하며 주방 한 켠의 조명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다.

팟. 조명의 소리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고 생각했다.

밝아진 주방 안에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예상대로 소년은 아니었다.

마른 몸에 가는 목과 가는 팔목.

얼굴도 피부도 깔끔하고 사슴 같아 보이는 큰 눈이 

어려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묘하게 깊은 슬픔도 함께 묻어났다.

가는 남자.

은연중에 입주 가정부의 평을 멋대로 결론내린 도정주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 새 가정부를 향해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저기...뭘 좀 걸치시는 게...아직 날이 차갑잖아요...”

눈을 내리깔며 살짝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색스럽다 생각한 것은 괜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도정주는 드리워진 숱 많은 속눈썹에서 눈을 때며 

그제야 자신이 여지 것 옷 한 장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운을 가져와.”

“네. 하얀색이면 되죠?”

“좋을 대로.”

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을 나가는 새 가정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가느다란 목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괜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좋을 대로 라...”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한번도 자기 손으로 꺼내 본 적이 없는 

가운을 입주한지 하루 도 채 되지 않은 가정부가 능숙하게 찾아냈다. 

마르고 하얀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가운을 활짝 펼쳐 자신의 등 뒤로 다가간다. 

순간 이지만 등 뒤에서 흠칫 하는 기색이 느껴져 그는 조금 궁금해 졌다. 

지금 저 어려보이는 남자가 가운을 펼쳐 들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름은?”

어깨와 등에 닿는 면의 감촉을 느끼며 허리에 끈을 둘렀다.

매듭을 지으며 등을 돌리는데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이채. 이 이채. 짝 잃은 몸뚱이를 가진 아버지의 멍청한 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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