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33)

5.

청색의 기와가 멋들어진 고택의 대청에서 정유는 조용히 다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격식을 완벽히 갖추어야 할 자리는 아닌지 다도의 차림은 간단했고 막 찻물을 다 우려냈다 싶을 때 쯤 자주색 비단 방석위에 두 사람이 착석했다.

“오늘은 화차(花茶) 인 게로구나.”

“말려둔 국화 향이 너무 좋아서요.”

“색 감이 참 곱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중오. 중오도 참 고와.”

그러면서 트레이드 마크인 생긋한 미소를 보여주는 정유는 할아버지와 오빠의 비서인 중오 에게 차례대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두 번 째 찻물을 위해 차분히 꽃잎을 우려내는 정유를 제외한 두 사람은 향과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자신들 만의 표현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역시나 노인 보다는 젊은 남자의 칭찬이 열렬 하다.

“언제 보아도 아가씨의 다도는 훌륭합니다.”

“지난번엔 아름답다 하더니. 중오 한 테는 늘 내가 새로운가봐.”

“당연한 말씀이죠.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가씨는 늘 새로운 분이시잖아요.”

“고마워. 근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도 돼. 중오하고 나 사이에 그런 공치사 까지 늘어놓을 필요 있나?”

“역시, 눈치도 빠르십니다.”

슬쩍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 중오는 눈웃음 지으며 찻물을 보고 있는 정유에게서 차 향을 음미하는 도 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 노인은 초록색 찻잔을 가슴께에 들고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 뱉었다. 중오가 말했다.

“어르신 예상대로 장사장의 장남이 찾아왔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먼...그래, 누굴 붙여보려 하던고?”

“‘가주 무역’ 막내 딸 인 진 청아 얘기를 삼십분이나 했습니다. 육촌 쯤 되는 친척이고, 어려서 함께 크다시피 해서 용모도 단정하고 마음씀씀이가 고운 것도 잘 안다고 합니다. 마지막엔 진 청아와 결혼 하는 남자는 복 받은 거라며 은근히 제 눈치를 봤습니다.”

“가주 무역이라...장사장이 내 놓은 패 치고는 꽤 약하구먼.”

“예.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합니다.”

“무슨 뜻 인고?”

중오는 눈을 가늘게 뜨는 노인의 시선과 마주하며 다시 한번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어 두꺼운 서류를 꺼냈다.

“십 쪽 셋째 줄부터 봐 주십시오.”

의아한 눈을 한 도 노인은 중오가 건낸 서류 뭉치를 들고 한번에 정확히 열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하얀 백지위에 깨알처럼 촘촘히 박힌 글씨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차근히 읽어 나갔다. 노인은 세 페이지 정도를 읽고는 서류 뭉치에서 중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상속자 가 이 아가씨 뿐 인 것이 확실한고?”

서류의 첫 장이 보이게끔 덮고는 다시 중오에게로 건네는 노인의 물음이 신중하다.

“태국으로 간 장남의 소식이 끊긴지 삼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둘째 딸은 수녀원에 있고 차남은 첫 돌 지난 아들과 부인을 남기고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그러니 상속 받을 자식은 실질적으로 한 명 뿐인 셈이지요.”

“운명이 기구한 아가씨네요.”

우러난 꽃잎을 건져내는 정유의 말에 중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는 도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는 틈을 타 살짝 정유에게 물었다.

“진 청아가 왜 기구한 운명이죠, 아가씨? 오히려 그 가족들이 더 기구한 팔짜 아닙니까?”

중오는 참으로 모르겠다는 듯 양 옆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정유는 중오의 그 궁금증에 쉽사리 대답 해 줄 마음이 없는 건지 건져낸 꽃잎을 한 쪽으로 치워두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얼마의 정적 후, 정유가 천천히 입을 땠다.

“있는 집안의 막내딸은 참 힘들어. 첫째 딸이나 둘째 딸만 되어도 덜 힘들 텐데, 막내는 그렇지가 않거든. 첫째나 둘째 딸은 정략결혼의 희생을 피해 갈 명분이 있어. 첫째는 첫째니까, 둘째는 막내가 있으니까...하지만 막내는 그렇지 못해. 가장 어리고 귀여움을 받기 때문에 집안에서 결정한 결혼에 대해 반대 할 발언권이 없는 거야. 그리고 막내인 것도 억울한데, 타의든 자의든 집을 떠난 형제들 때문에 이제는 그 자신이 회사의 대표가 되어야 할 위기에 쳐해 졌어. 그러니 이 얼마나 가련한 운명이야.”

담담히, 하지만 굉장한 불길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눈을 빛내는 정유의 말에 중오는 그런 건가? 하는 어정쩡한 생각을 했다. 정유가 그 불길을 완전히 감추어 버리려는 듯 눈을 감을 때 중오가 다시 질문 했다. 어정쩡한 채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가씨, 진 청아는 결국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게 되잖습니까? 그 돈 으로 하지 못했던 것도 하고 싶은 것 도 다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기구한 운명인건가요?”

정유는 왼쪽 편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가 생각의 결론을 내린 듯 찻잔을 집어 드는 걸 쳐다보았다. 그리고 중오의 말에 대답 해 주어야 하니 제가 먼저 입을 때도 될 까요 하는 물음을 눈으로 했고, 도 노인은 그것을 허락 했다. 정유가 말 했다.

“중오. 만일 정주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정화 오빠마저 행방불명이 되 버린다면, 우리 회사와 조직은 누가 상속 받을까?”

“그야 물론 아가씨지요.”

 “맞아. 마지막 도씨 핏줄인 내가 대표가 되겠지. 그럼 내가 그 것들을 상속 받고 많은 돈이 생겼다고 좋아할까? 오빠 둘을 잃은 대가로 받는 보험금 같은 그런 회사가 내 손에 떨어졌다고...내가 기뻐해야 할까?”

“......”

“나도 막내야. 귀여움 받고 자란. 해서 어쩐지 그녀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아 한 말이니 괘념치 마.”

부리는 사람이 가져오는 양갱 접시를 내려놓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는 정유였지만, 중오도 도 노인도 그녀가 하는 말의 속내를 짐작했다. 그나마 능력 좋은 가문과 오빠를 둔 덕에 정략결혼의 희생물로 전락 하지 않았을 뿐, 이름 높은 집안에서 딸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 일인지 정유는 말 하고 싶었던 것일 거다. 그리고 중오는 정유의 그런 애환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 해도 그녀가 정략결혼의 피해자나 오빠 둘을 잃은 상속녀가 되게는 하지 않겠다고 철저한 다짐(?)을 했다.

“아가씨 말이 맞네요. 그녀는 기구한 운명입니다.”

중오가 부르는 호칭이 진 청아에서 ‘그녀’ 로 자연스레 바뀌어 있었다.

정유는 그런 중오에게 가만히 미소 지으며 잔이 빈 도 노인의 잔에 두 번째 찻물을 따라주었다. 노인은 반듯하고 예쁜 손녀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말이 향하는 곳은 중오였다.

“세 번째는 이 아가씨로 할 것이니 날짜를 잡으라 일러 두 거라.”

“예. 한 달을 넘기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중오는 자신의 상사가 여복이 터지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도화정에 다른 손님이 찾아와 짧은 다도 시간과 안녕 하려 하는데, 정유가 그를 살짝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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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화가 흐드러지게 핀 나무 밑에 서 있는 정유는 참으로 고왔다.

중오는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 행동에는 이렇게 차를 따르는 데에도 함축적인 의미가 있지요.’

차를 따르며 노래하듯 말 하던 여장 남자의 그 대사처럼, 정유 또한 저렇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 짓 하나에도 무언가 내제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늘색 원피스자락이 나풀거리는 것을 손으로 바로하며 정유가 말했다.

“내가 소개 한 가정부는 어때?”

“글쎄요. 사장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걸 보면, 별 문제 없는 것 아닐까요?”

“아니. 아마 별 문제가 있을 거야. 단지 오빠가 중오에게 말 하지 않았을 뿐이지.”

옅게 눈웃음 짓는 정유의 말에 중오는 슬며시 심통이 났다.

도정주 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가정부는 그녀가 소개 해 준 사람 이였는데, 새 가정부를 찾아야 한다는 말에 적임자가 있다며 일주일만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오일쯤 후에 그 이채라는 남자를 데려왔었다. 처음 중오가 이채를 보고 너무 말라서 힘이나 쓰겠냐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정유는 살림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며 이채를 적극 추천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중오는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꽃나무 밑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 여신 같은 미모의 정유가 말했다.

“그런데 할 말 이란 건 뭐야?”

 “네? 할 말은 아가씨가 있는 것 아닌가요?”

중오는 심통을 가라앉히고는 갸웃했다.

정유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이 남자가 건망증이라도 있는 건가하며 웃었다.

“할 말 있어서 나를 비행기 태웠잖아. 기억 안나?”

“제가 언제 비행기를 태...웠다...고...”

“기억나지?”

슬며시 말을 끄는 중오의 모습에 정유는 어서 풀어 놓으라고 재촉 했다.

마치 선물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이다.

“에, 그러니까 별 일은 아니고요. 어제 찾아온 장 사장의 장남 때문에요. 아가씨랑 데이트 한번 주선 해 달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굴길 래 일단 아가씨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얘기했거든요. 너무 끈질겨서 그렇게 둘러 댈......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별 일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실망 한 표정 지으실 것 까진 없잖습니까.”

도대체 어떤 얘기를 기대 한 건지 정유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리기 까지 했다.

“정말로 그게 다야?”

“다죠 그럼.”

“...그럴 리가 없는데...”

“참 나. 원하시는 얘기가 뭔데요? 알아봐 드려요?”

중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정유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를 바라는 건진 몰라도 평소 정유의 스타일은 확실히 물어보거나 아님 알아오라고 이야길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단정하고 곱고 친절한 여성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판단과 날카로운 직관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어딘지 조금 평소와 달랐다.

“정말로...오빠가 아무 말 도 안해?”

혼잣말에서 벗어난 그녀가 자신의 눈 보다 조금 높은 곳의 중오를 보았다.

그 얼굴이 어쩐지 곤란하다는 표정이어서 중오는 내심 놀랐다.

“무슨 일 이 신진 몰라도, 사장님께 물어봐 드릴까요?”

“뭘? 가정부가 어떠냐고?”

“예.”

“......”

담백한 중오의 대답에 정유는 생각을 바꿨다.

새 가정부가 일을 잘 하는지, 깔끔한지, 집에 두고 쓸 만은 한지 물어 보지 못 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족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어 보아야 할 문제다. 문득 정유는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 중오는 그 고운 웃음에서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무언가를 느꼈는데 그의 예감은 대체 적으로 적중하는 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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