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중오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한 현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보리라 하는 투철한 의식으로 자신을 무장하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파일을 넘기며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사는 자신의 정신 건강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듯 하고, 그래서 중오는 더 애가 탔다.
그는 정유와 있었던 복숭아나무 아래서의 대화를 생각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사장님...파일에 문제라도 있나요?”
파일의 노란색 커버를 덮는 사장을 응시 하며 떨리려는 목소리를 애써 낮추었다.
그러자 도정주가 조금 고개를 젓는다.
“깔끔해. 필요이상으로.”
“그건 그러니까...문...제가...있다는 말씀이세요?”
중오는 문제라는 단어에서 조금 뜸을 들이며 사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정주는 고개를 끄덕여 의사를 나타낼 뿐, 중오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조금 답답한 듯 자신의 사장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도정주가 조금 더 빨랐다.
“여자 솜씨로군. 누구지?”
“그......”
중오는 선 자리에서 주춤 할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응시하는 사장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지도 못 한 채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는 얼마 전 손 수 파일을 작성해서 건네주며 자신이 이채를 추천했다는 것도 파일을 작성 했다는 것도 오빠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던 정유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이고이 생각하는 정유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기에 혹시라도 진실이 세어 나올까 슬쩍 주먹을 쥐었다. 내적 갈등이 심한 자신의 얼굴을 아직도 무표정 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장에게 중오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제가 준 신상을 최 대리가 작성했거든요. 원래 최대리가 꼼꼼하잖아요. 좀 있으면 시집 갈 여자라 그런지 글씨도 깔끔하고 내용 정리 하는 것도 명료하고요.”
중오는 스스로가 말 하면서도 시집갈 여자와 글씨가 깔끔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안은 채 열심히 둘러댔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상사는 비서의 그런 두서없는 변명을 깔끔히 집어냈다. 곧 시집갈 최 대리보다도 더 깔끔하게.
“감싸 주려는 거군.”
“예?”
“최 대리는 확실히 아닐 거고...감싸는 걸 보니 네가 아는 여자겠지. 그것도 꽤 좋아하는.”
“......”
십년간 사장을 보좌 해 온 비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긴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이 그를 잘 아는 것만큼 이나 그도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걸 잊고 말았다.
중오는 준비하지 못한 거짓말이 얼마나 엉성한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체념의 빚을 내 비치며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는 못난 놈입니다’ 라는 소리 없는 용서를 정유에게 빌며 드디어 진실을 말 하려는 순간,
“내가 알았다는 걸 정유한테 말 하지 마.”
안경너머로 토끼 눈을 한 중오는 십년을 모셨지만 아직도 도씨 남매는 이해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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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아야 할(?) 집주인이 없을 시엔 할일을 끝 마쳤다면 외출해도 좋다는 허락을 미리 중오에게 받았던 이채는, 조금 이른 저녁시간에 양손 가득 장을 봐서 일터로 돌아왔다. 무거운 반찬거리 때문에 추욱 늘어진 비닐봉지를 추스르며 현관문에 카드 키를 갖다 대려는데 커다란 손이 뻗어 와서 카드를 낚아 채 간다.
띠리릭-
락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돌보아야 할(?) 집주인이 무표정 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이채는 감사의 의미로 살짝 목례를 하며 그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도정주가 별 말 없이 이채의 비닐봉지 하나를 가져가며 현관문을 연다.
센서등이 켜지고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가는 도정주의 뒤를 따르며 이채는 집안의 조명을 하나씩 켰다. 어두운 거실과 주방이 환해지며 오후 내내 비어있는 집안에 드디어 사람이 들었음을 밖의 세상에 알렸다. 이채는 식탁위에 잘 놓여있는 비닐 옆에 자신의 비닐봉지를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장을 봐 온 찬거리를 하나 둘 씩 꺼내는데 욕실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채는 찬거리 꺼내는 작업을 중지하곤 자신의 방에다 잘 정리해 놓은 가운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 욕실 문 앞에다 놓았다.
“가운 두고 갈 께요.”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는 사이로 조금 크게 외쳤더니 안에서 샤워기를 한 번 잠갔다가 다시 튼다. 이채는 그것을 알았다는 대답으로 알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껍질이 벗겨진 손으로 음식을 만들 생각을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에게 직접 만들어 먹으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다시 찬거리를 정리 해 나갔다. 사가지고 온 야채를 물에 씻는데 손바닥의 상처가 따갑다. 이채는 가난과 친해지고 나서 두 번 째 로 슬펐다.
식사를 하는 그는 손놀림이 반듯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별로 없었고 밥과 반찬을 씹는 것도 경망스럽지 않고.
특히나 생선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솜씨가 가장 깔끔했는데, 이채는 그 의 그런 젓가락질에 은근히 감탄 까지 해 버렸다. 반면, 도정주는 이채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의 식욕 까지 뚝 떨어지게 만들 정도로 맛없이 먹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그 에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나 의욕 없는 식사는 도정주로 써도 처음 보는 광경 이였다.
“입맛이 없나?”
“...솔직히 말 한다면, 네. 없어요.”
힘없는 그 대답이 진실처럼 느껴졌지만, 도정주는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그로써는 드문 관심이다.
“나갔던 일 때문인가?”
“......”
이채는 뭐라고 대답 할까 고민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정주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식사에 열중했고 이채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식사를 마쳤을 때도 이채는 밥그릇의 반공기도 비우지 못했다.
도정주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채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채가 따라 일어서며 그의 팔을 붙든다.
“저...할 말이 있는데요.”
망설이는 듯 한 얼굴임에도 눈빛만은 확고하다.
도정주는 이채의 그 요청에 다시 의자에 앉으며 과연 이 가정부가 무슨 말을 할까 하는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내색 하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풀어놔 보라는 듯 한 도정주의 시선에 이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지만...아니기도 해요.”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도정주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 사이 벌써 뒷조사를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열 살 때 제 어머니가 돌아 가셨어요. 폐렴을 심하게 앓으셨는데, 결국은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셨죠. 그리고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오셨어요...아버진...젊었을 때 제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래서 자식도 아닌 저를 거두어 주신 거구요. 아. 그렇지만 사장님께서 죽이신 건 아버지의 친 아들이 맞으니 속았다고 생각 하 실 필욘 없으실 거예요.”
자신이 친 아들이 아니라는 소리에 혹시라도 그가 아버지에 관한 일을 원점으로 돌릴까봐 얼른 해명했다. 이채는 밥이 반 정도 남아있는 밥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과연 내 말을 듣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 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유가 왜 널 내게 보냈지?”
이채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이 집으로 들어가는 목적이 복수가 아닌 다음에야 미리 신분을 밝히는 게 현명할거라고 했던 것은 정유였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배후에 정유가 있다는 걸 그가 알아선 안 된다. 이채는 당황을 수습하려 애 썼다.
“멍청한 질문이지만, 벌써 제 조사를 하셨나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럼?”
“정유가 작성한 파일을 봤다. 내 비서가 속을 만큼 그럴 듯 하게 써 있더군.”
이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완전히 속일 수 없다는 건 진즉부터 알았지만, 고심해서 준비한 자신의 신상 파일이 정유의 솜씨라는 것 까지 알아낼 줄은 몰랐다. 그에게 파일을 작성한 배후의 인물이 정유라는 걸 거의 알려주다시피 한 사람이 중오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이채는 중오가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정유에게 사과 했다. 이채가 말 했다.
“정유는 중학교 때 알았어요.”
“같은 학교 였나?”
“아뇨. 단체 미팅 에 나온 여자애들 중 하나였죠... 그 얘들 중 제일 예뻤어요.”
“그리고 너도 단체 미팅 에 나온 남자애들 중 하나였고. 맞나?”
이채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 했다.
표정 변화가 없는 도정주가 말 했다.
“그래서, 정유가 너를 내게 보낸 이유가 그 철없던 만남의 연장 때문이란 건가?”
잘 대답하던 이채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스스로도 정유가 왜 자신을 도와 준 것인지 모른다. 도정주 사장의 말처럼 철없던 시절의 유치한 미팅으로 시작된 인연이었고, 그 후에 그녀와 사귀었다거나 특별히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날 하루뿐 이였던 남자친구, 여자친구.
‘나보다 예쁜 남자는 처음이거든.’
당시 자신을 파트너로 지목 한 그녀의 이유였다.
시간을 끌며 숨을 고른 이채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도정주 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채는 그가 될 수 있으면 자신이 겸손한 얼굴을 하고 있다 생각하게끔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처연한 표정을 지으려 하는 이채의 노력은 그의 잔인성을 더 고무시킬 뿐, 별 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도정주가 말 했다.
“정유를 불러라.”
“네?”
“내일 집으로 오라고 해. 너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으니 직접 물어볼 수밖에. 나머지 얘기는 정유가 있는 데서 듣지.”
이채는 아까보다 더 눈을 크게 뜬 채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본연의 목적을 꺼내놓지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