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유는 살풋 찡그린 이마를 바로 했다. 두 달 만에 방문하는 큰 오빠의 집은 변함없이 깨끗했고, 자신이 배치한 가구며 소품들 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느 물소 가족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검은색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커피 잔을 내려놓는 이채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정유가 조금 퉁명스럽게 말 했다.
“할 만 하니?”
“응. 덕분에.”
진한 원두 향이 그대로 풍겨오는 커피 잔이 자신의 턱 밑으로 밀어지는 것을 보며 정유는 다시 한번 이마를 찡그렸다. 이마 위로 주름이 지는 걸 스스로 느끼며 정유가 말 했다.
“왜 모든 게 그대로야?”
“아직은 바뀔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난 지금 네 얘길 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거실의 풍경을 둘러봤다.
인테리어는 꽝일게 분명한 자신의 오빠를 대신해서 집을 고르고 꾸몄던 정유는 그것이 벌써 육년 전 일임을 떠 올렸다. 도정주. 집안의 장남이고 늘 바쁘며 늘 표정이 없고 늘 무심하며 자주 잔혹하다. 정유는 이십 오년간 보아 온 자신의 큰 오빠에 대한 평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약간은 신경질 적인 얼굴을 했다.
“이제 가정부는 너야. 그게 무슨 뜻 인줄 알아?”
당연하지만, 이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집에 들어온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과 정유에게 빚을 졌다는 두 가지만을 기억하고 사니까.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이채는 진한 향만큼 이나 쓴 커피가 뇌 로 전달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정유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연다.
“오빠는 가정부가 해 주는 밥을 먹을 테고, 가정부가 다려주는 옷을 입겠지. 또 가정부가 치워 놓은 방에서 잠 들 테고 가정부가 닦아놓은 쇼파에 앉아 신문을 볼 거야.”
이채는 그녀가 벌써 다섯 번이나 언급한 ‘가정부’ 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자신이 가정부가 맞기에 딱히 뭐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정유를 대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정유는 그 물음에 한동안 이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꽤나 복잡한 심경들이 차례로 지나갔지만 그녀는 아직은 다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은 다 내가 꾸몄어. 그리고 난 육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 집이, 삼십년 동안 한결같은 도정주가 싫어.”
“......"
"이채야. 당장은 인테리어부터 바꾸렴. 어차피 오빠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렇죠, 오빠?”
이채는 갑자기 부드러워진 그녀의 말투에 갸웃하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도정주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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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주는 다 타들어 가는 마지막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니코틴 냄새가 지독한 연기들이 구석진 골목 하늘위로 보이는 색색의 네온간판 사이로 춤을 춘다. 그는 열 걸음 쯤 떨어진 거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배경삼아 두 번째 담배를 빼 물었다. 치익. 언제나 수족처럼 따르는 비서가 이번엔 때를 잘 맞추어 불을 건넨다. 도정주는 한쪽 눈썹을 힐끗 들어올려 비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충성스런 비서가 조금 몸을 숙여 그가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짤깍, 라이터의 금색 뚜껑을 닫으며 중오가 말 했다.
“금요일. 신라 호텔에서 첫 번째 선입니다.”
때 묻은 사과 상자를 엎어놓고 앉아있던 도정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머리가 반쯤 깨진 채 널 부러져 있는 저 쪽의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조금 후, 검은 정장의 자켓을 벗어 던지고 손엔 각목을 든 두 사람이 피와 뇌수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는 바닥의 남자 곁에 꼬질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갖다놓는다. 휘발유다. 도정주는 그 두 사람 중 각목을 내 던지는 남자의 ‘준비 됐다’ 는 눈빛에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한걸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의 구둣발이 다가가더니 휘발유 통을 슬쩍 밀친다. 그리곤 물고 있던 담배를 왼 손으로 옮겼다.
툭. 무감정한 얼굴로, 무심한 손길로 담배를 던지고 돌아선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더 이상 비명이 없는 바닥의 남자가 불길 속에서 타 들어갔다.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 사장의 뒤를 중오가 조용한 걸음으로 따랐다. 지금 타고 있는 것이 등 뒤의 시체인지 눈앞의 사장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중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대기된 차에 오르는 것을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스르륵,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세단 안에서 도정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정주는 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맨션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을 누르자 몸이 부유하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맑은 소리가 울리며 집 앞에 당도했다.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습관대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원스럽게 뚫려 있는 거실의 쇼파에서 정유가 자신을 향해 생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차피 오빠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렇죠, 오빠?”
그는 여동생에게 시선을 둘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채가 일어서서 다가오는 것을 보며 수트를 벗어 건넸다.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그가 말 했다.
“언제 온 거냐?”
“조금 전에요. 이채가 원두를 내려 줘서 함께 마시고 있는 중이였어요.”
웃음을 머금고 온화하게 말 하는 정유를 보며 도정주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이채가 새 옷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그는 욕실의 문을 열었다. 봄날의 열기는 은근히 사람을 후덥지근하게 한다. 도정주는 차가운 물줄기에 몸과 머리를 식혔다. 문이 살짝 열리며 이채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는 길지 않은 샤워를 끝내고 가정부가 두고 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나오자 아직도 생긋이 웃고 있는 정유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냉수가 가득 담긴 투명한 컵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도정주는 말없이 쇼파에 앉아 물 컵을 쥐었다. 손바닥으로 시원한 냉기가 전해져 와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천천히 물을 비워내자 이채의 손이 다가온다. 물 컵을 받아가는 손바닥에 상처가 나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 그가 말 했다.
“할아버진 잘 계시냐?”
“네. 요즘은 오빠 맞선 때문에 꽤 즐거워하고 계세요. 손주며느리 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물론 그들의 조부가 즐거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도 정유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남매의 평이한 인사가 계속 되었다.
“정화는 연락이 있었고?”
“예. 안 그래도 엊그제 밤에 전화가 왔었어요. 졸업 전의 여행이 마음에 들었는지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때 쓰던 걸요.”
‘그걸 말리느라 혼났어요’ 하며 정유가 작게 웃었다. 이채는 정유의 맞은편에 앉아서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도정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도씨 남매는 계속 집안 사에 대해 주고 받을 뿐 본론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채는 애 타는 속내를 들어 내 지는 않았지만 저들이 자신의 마음을 쉽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정유의 한 마디에서 들어났다.
“이채는 이 자리가 불편한가 봐요. 그렇게 긴장할거 없는데. 오빠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그러면서 또 웃음 짓는 그녀가 은근히 얄미웠지만, 이채는 커피 잔에 시선을 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 가득 듣기 좋은 정유의 웃음소리가 퍼지다가 멎을 쯤에 도정주가 말 했다.
“갖고 싶은 게 있나?”
“갖고 싶은 거야 많죠.”
“하고 싶은 것 도 많을 테고.”
“역시 오빠는 절 너무 잘 알아요.”
정유는 웃음을 멈추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도정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을 할 뿐 정유를 책 하지 않았다. 불안한 듯 만지작 대는 이채의 손가락을 흘끗 보며 도정주가 말 했다.
“뭐가 하고 싶지?”
“너무 많죠.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고 정화 오빠처럼 여행도 가고 싶고 이채처럼 일도 하고 싶고.”
살짝 몸이 굳는 이채를 무시하며 정유는 말을 이었다.
“그림을 파는 일은 더 이상 싫어요. 좀 더 생산적인 걸 하고 싶어요.”
“그림도 여행도 네가 하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아.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와라. 가정부를 들이미는 짓을 하지 않아도 네가 동생인 이상 너를 내버려두지 않아.”
그 내용으로만 봐서는 동생을 위하는 오빠의 흠 잡을 때 없는 마음 이다. 그러나 정유는 저 말이 진심임과 동시에 거짓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신은 오빠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팔려가고 말 것이다. 다시 웃음 짓는 정유가 도정주를 바라보았다.
“이채는 어떤가요? 일을 잘 하나요? 오빠가 너무 빨리 알아차려서 상황이 재미없게 됐잖아요.”
그녀는 언젠가 중오에게 물었던 얘기를 꺼내며 여동생이 오빠에게 응석을 부리듯 했다. 중오가 좀 더 잘해 주었더라면 그가 자신과 이채에 대해 알 턱이 없었을 것이고, 그럼 스스로가 이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비서는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맞선이 다 끝나기 전에 원하는 걸 찾아서 가져와. 한번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아마 서둘러야 할 거다.”
그 뜻밖의 말에 정유도 이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이채의 신상을 위조하면서 까지 가정부로 밀어 넣은 이유를 물을 것이라 짐작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빠가 저렇게 선심을 쓰는 것에 무슨 꿍꿍이가 있나 하는 의심을 했지만 곳 그가 농담으로라도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조금 경계하는 듯 한 정유가 말 했다.
“한 번 뿐 인건가요?”
“그래.”
“어떤 것이든...상관없겠죠?”
“상관없다.”
슬슬 지겨워 지는 건지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는 오빠를 보며 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 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돌아가서 가장 절실한 무엇을 찾아오면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인생이든, 여행을 떠나든,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든.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기회를 절대 놓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채와 눈이 마주쳤다.
“......”
“......”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의 이채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치기어린 시절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오랜 인연의 동맹이 깨져버렸다. 그 시절 무리 중에서 가장 예뻤던 여자는 곧 날개를 달개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만큼이나 예쁜 남자는 배후의 아군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도정주는 그녀가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생각하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가정부와 여동생의 손을 끊어 놓았으니 이제 저 가는 남자는 자신 이외엔 손 내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는 피곤이 싹 가신 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