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33)

9.

“내려주세요. 여기서부턴 걸어 갈 테니.”

긴 돌담이 시작되는 곳에서 정유는 내렸다. 조용히 차의 문을 닫고 기사를 돌려보낸 뒤 인위적으로 깨끗이 깔려진 흙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오른편으로 은색의 세단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살짝 비켜섰다. 돌담의 맞은편에 주욱 늘어선 버드나무가 초록의 기다란 가지를 춘풍에 내 맞기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가장 원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하고 픈 것은 무엇일까.

 꽃과 나무, 벌레나 새를 주로 그렸던 어머니는 이름 높은 동양화가였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주로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녀는 자연스레 그림을 접했고 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부터 붓을 들지 않았다. 마흔 아홉의 곱던 어머니.

일찍 생을 마쳤다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마흔의 끝을 살았다면 꽤나 강단 있고 강한 여인이란 뜻이기도 하다.

 정유는 복잡하지만 묘하게 들뜬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진정시키며 돌담에 기대었다.

거칠지만 차가운 돌의 감촉이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느껴졌다. 그녀는 여행과 일 중 자신이 어느 것에 더 치중을 두 는 지 가늠해 보았다. 여행. 이 지긋지긋한 땅을 벗어 날 수는 있지만 동시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른다. 일. 더 이상 그림과 관계된 일은 하고 싶지 않고 자신의 ‘한 번’ 과 맞바꿀 만큼 하고 싶은 일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돌담에 기댄 등을 바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조용한 걸음을 옮기는데 당혹스러워 하던 이채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문득 그녀는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 이채를 오빠의 집으로 보낼 때 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은 오빠가 꺼낸 생각지도 못한 선심에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다.

 “...배신이야. 내가 배신한거야...”

그녀는 하얗게 질려가던 이채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쁜 만큼 마음에 들었던 그 얼굴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더 심해지려는 토기를 억누르려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체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데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차와 박아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헤드라잇의 불빛이 꺼지며 차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유씨 맞죠?”

시원스럽게 웃어 보이는 남자는 얼마 전 도화정으로 찾아왔던 그 남자였다. 이름이...

“장우 입니다. 왜 여기 서 계신 겁니까?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그러면서 다가오더니 자신을 부축하는 통에 정유는 거절 할 수 없었다. 계속 밀려올라오는 토기 때문이라도 차에 타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이 상태로 집 까지 걸어갈 자신도 없었다. 정유는 급하게 차의 앞문을 열어 권하는 장우의 뜻에 따라 승차했다. 탁,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며 그녀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정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장우의 차가 조금 전 본 세단의 색과 똑같은 은색이란 생각을 하며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도화정엔 새 안주인이 필요했고, 그래서 도 노인은 설령 자신의 장손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이번 맞선을 강행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계획에 따라 각지에서 ‘신부’ 후보가 속속히 올라왔다. 반백의 노인이 결정한 첫 번째 여자는 ‘주식회사 삼미’의 신 수빈. 결혼이 결정 된 것이 아님에도 잔칫집 분위기인 ‘삼미’에겐 애석한 일이지만 도정주 사장은 그녀를 신 아무개 정도로 밖에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도 신 수빈은 개의치 않았다. 이름을 몰라도 도화정의 안 자리를 차고앉을 수 있다면 ‘힘’ 과 ‘돈’ 은 저절로 생긴다. 그녀는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럼 정주씨는 금융업 일만 하고 계신건가요?”

첫 번째는 이런 타입이군.

도정주는 그의 버릇대로 팔짱을 낀 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여자들의 콧소리는 지독히도 개성이 없었다. 그는 여자 보다는 조금 낮고 허스키 하며 보통의 남자보다는 살짝 높은 목소리의 누군가를 떠 올렸다. 귀 밑에서 찰랑이는 머리를 항상 반으로 묶고 다니는 남자. 그는 발칙하지만 그다지 자신감이 없는 자신의 가정부를 떠 올렸다.

‘...주무실 건가요?’

정유가 돌아가고 나서 이채는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더니 도정주를 보며 잘 거면 빨리 가서 자라, 나도 좀 쉬게 라는 뜻이 깊이 내포된 어조로 말 했고, 도정주는 아직 자지 는다며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채는 수긍도 실망도 아닌 그저 덤덤한 얼굴로 다시 쇼파에 앉았다. 주인이 아직 안자겠다는데 가정부 주제에 벌써 잘 수는 없다는 건지, 이채는 그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 까지 묵묵히 앉아 있을 태세 였다. 그리고 도정주는 그런 이채가 재미있었다. 매우.

‘어제 하던 얘기가 있었지?’

‘이젠 없어요.’

‘어째서?’

‘사장님도 아시다 시피 정유가 제 편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이채는 자신도 정유도 탓하지 않고 그저 사실만을 말 하듯 담담히 얘기했다. 그러나 도정주는 저 가정부가 지금 깨어진 동맹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하는 지 알 수 있었는데, 사슴같이 커다란 그 눈에서 짙은 슬픔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씨? 정주씨?”

상념을 방해하는 높은 목소리에 도정주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온 몸으로 자신을 무례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한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그러시죠?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당황하는 건지 부끄러워하는 건지, 아니면 당황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건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신 아무개란 여자는 주섬주섬 콤팩트를 꺼내 들었고 뚜껑을 열더니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 티끌 하나도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콤팩트의 뚜껑을 닫았을 때는 이미 눈앞에 있어야 할 남자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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