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33)

10.

단 한번도 스스로를 위한 요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내 보아도 늘 누군가를 위해 주방에 서서 밥을 짓고 식탁을 차렸다. 항상 약에 쩔어 살던 피곤한  아버지를 위해 쉽게쉽게 먹을 수 있는 죽을 끓였고 공부 잘 하던 두꺼운 뿔테 안경의 형을 위해 눈의 피로에 좋다는 영양식을 만들고. 이채는 그렇게 단 한번도 스스로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고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불 위에서 뭉근히 끓고 있는 냄비 안의 국 또한 자신을 위한 요리가 아니다. 이채는 냄비 뚜껑을 열고 송송 썰어놓은 쪽파를 넣었다. 다시 뚜껑을 닫는데 벌써 십분 째 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중오가 말을 걸어 왔다.

“정말로 어디 계신지 몰라?”

삼분 간격으로 세 번째 듣는 질문에 이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선을 보러 간 도정주 사장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여자를 혼자 두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여자 쪽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도정주 의 무례함을 대 놓고 탓 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불쾌감을 느낀다는 한 통의 전화를 도화정에 넣었다. 그러나 도 노인은 그저 웃으며 도정주 사장이 사업에만 몰두 한 나머지 아직 여자 다루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며 농을 쳤다. 하지만 서른의 남자가 여자를 모른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믿음을 줄 수 없었고, 도 노인도 그다지 믿게 할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혼자만 애가 타는 중오가 직분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새 또 삼분이 지났나 보다.

“정말로 어디 계신지 모른단 말야? 사장님 행선지는 늘 알아놓으라고 했잖아.”

갈길 없는 짜증을 이채에게 부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중오는 며느리 잡는 시어머니처럼 주방에 서서 마치 감시라도 하듯이 삼분마다 이채를 볶아 댔고, 그럴 때 마다 이채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채의 작은 바람이 완전히 이루어 진 것은 중오가 같은 질문을 다섯 번 더 묻고 난 뒤에 이루어 졌다. 오후 내내 소식이 없던 그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어디 계셨던 거예요? 저한텐 전화라도 주셨어야죠!”

신경질 적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는 중오가 수트를 받아드는 이채를 슬쩍 밀치며 도정주의 뒤를 따랐다. 넥타이를 푸는 그가 잠시 휘청하는 이채의 팔뚝을 잡아 바로 해 주자 이채가 짧게 목례한다. 그러나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중오는 그 일련의 상황을 보지 못했다. 훗날, 그러고 보니 그때 분위기가 이상 했어 라는 점쟁이나 예언가 들이나 할 법한 추측성 발언을 하게 되는 중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흥분에 이성이 마비되기 직전인 비서일 뿐이다.

중오가 말 했다.

“신수빈 양과 다시 날짜를 잡겠습니다.”

“두 번 만날 정도의 여자가 아니야.”

“하지만 ‘삼미’ 는 두 번 만날 가치가 있다 구요.”

중오는 방으로 들어가는 도정주의 뒤를 따르며 그녀와의 만남을 요구했으나, 그 요구는 가볍게 묵살됐다. 그러나 그의 비서로써 한 가닥 책임을 느낀 것인지 중오는 끈질겼다. 그나마 오랜 시간을 봐왔다는 이유로 자신에겐 조금 너그러운 사장이란 것을 알기에, 중오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는 그의 뒤에 서서 끊임없이 말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묵살 당했다.

 알몸이 되어 가는 도정주가 맞은편의 거울안에 있는 중오에게, 그 너머에 가만히 서 있는 이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말 했다.

“같이 씻을까?”

“예?”

“둘 다 나랑 같이 씻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닌가?”

바지 버클을 풀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중오와 이채는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그제야 도정주 사장이 한 말을 파악했다. 한 사람은 헛기침을 하며, 그리고 문 가까이 서 있는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방을 나갔다. 도정주는 거울을 통해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방 안쪽으로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이어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시원스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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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중오는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나올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년이 넘게 그를 보좌해 오면서 그의 벗은 몸쯤이야 무수히 봐 왔다. 어디에 상처가 있고, 어디에 문신이 있으며 어디에 점이 있는 것 까지 중오는 다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몸담고 있는 세계가 세계인지라 초기에는 상처가 끊일 날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병원신세 질 일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가 상처를 치료하거나 봉합하는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봐왔던 자신으로써는 그의 알몸 같은 건 전혀 얼굴을 붉힐 일 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보통 사람들 보다 몸이 좋고 등에 좀 다른 걸 그려 넣고 다닐 뿐인 남자. 평소엔 그 벗은 몸을 보며 그 이외의 별 다른 걸 생각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조금 전엔 왜 저 가정부와 함께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방을 나와야 했을까? 중오는 그 물음의 해답이 도정주 사장의 말에 있다고 생각했다.

“저기 말야...”

과일을 깎고 있는 이채에게 슬쩍 다가간 중오는 혹시라도 거실에 있는 그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사장님한테...밥해주고 빨래해 주는 일 말고 다른 거 해준 적...없지?”

은근히 물어오는 그 질문을 해석하지 못한 이채는 잠시 과도를 쥔 그 상태로 생각했다. 자신은 가정부고 가정부의 주 일거리는 밥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다. 물론 상황과 경우에 따라 다른 일도 하는 유연함을 보이겠지만, 이 집에서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이채는 계속해서 거실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오를 보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비서가 말한 ‘다른 거’ 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다시 과도를 놀리며 이채가 말했다.

“제가 해드려야 할 정도로 사장님은 궁하신가요?”

“응?”

“한 비서님. 전 바보가 아니 예요.”

딸칵, 과도를 싱크대에 내려두고 중오쪽으로 돌아선 이채는 조금 화가 났다는 얼굴을 했다. 자신의 입장 상 불쾌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줄 방법이 없는 것이 서글펐지만, 그래도 이채는 조금이나마 이 불쾌감이 전해지길 바라며 중오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좀 과했단 생각과 다행이라는 안도감 속에서 중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채씨.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 였어. 난 그냥 사장님이 같이 씻겠냐고 하시 길래...원래 그런 농담 안하시는 분이 갑자기 그러시니까...”

“저랑 무슨 일이 있어야만 갑자기 그러시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중오는 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화난 것 같으면서도 담담한 이채의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이채는 중오가 하는 냥을 쳐다보다가 반듯하게 깎아놓은 과일접시를 들고 주방을 나갔다. 중오는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이채에게서 횡 하는 바람소리라도 나는 듯 한 착각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도정주 사장의 그 갑작스런 농담 때문에 자신이 너무 오버했나 보다. 중오는 나중에 꼭 사과해야 겠다 다짐하며 거실로 나갔다.

 이채가 과일접시와 포크 두개를 내려놓고 돌아서려는데 도정주가 이채의 팔을 붙든다. 그리고 손에 뭔가를 쥐어주는데, 중오는 재빨리 이채의 뒤로 다가가 등 너머로 힐끔 훔쳐보았다. 도정주의 손에서 이채에게로 넘어간 그것은 밴드가 담긴 네모난 통 이다.

중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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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이 껄끄러움은 뭘까? 도대체 뭘까? 뭘까? 뭐란 말인가?

중오는 쥐어뜯기 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곧 느껴지는 머리의 통증에 얼른 손을 거두었다. 중오는 어쩐지 자신이 한심하다 생각하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도정주 사장이 가정부에게 준 것은 분명 밴드였다. 가정부는 받아든 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고 도정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중오는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그 일이 밥 먹고 물 안 마신 것 마냥 껄끄러웠다. 그는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채라는 가정부는 자신이 뽑았지만 근무처가 틀린 만큼 잘 볼 수 없다. 그는 정유가 추천한 사람이고 정유는 그를 데려온 것이 자신이란 것을 함구하라 했다. 그리고 도정주 사장은 어떤가? 그는 이채를 데려온 것이 정유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녀에게 내색하지 말라고 일렀고, 중오는 현재 그 말을 잘 따르고 있다. 결국 자신은 이중 스파이가 되어 있는 셈인데, 이미 하나는 들통 났으니 나머지 하나라도 잘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쩐 일인지 그 가정부가 괜 시리 껄끄럽다.

중오는 머리를 더 굴려보기로 했다.

 도정주 사장도 정유도 이채라는 가정부의 일을 비밀로 하라고 말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 별것 없는 가정부가 비밀로 해야 할 만큼의 인물인가?

중오의 머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가정부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단지 정유가 데려왔을 뿐, 그녀가 자신의 오빠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을 뿐, 그리고 그 오빠인 도정주 사장이 또 그녀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고......

결국 다시 돌아온 생각의 원점에 중오는 또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말았다.

그리고 그 복잡한 머리를 다른 곳에 집중하겠노라 결심하는데 한통의 전화가 왔다.

두 번째 맞선 날짜가 잡힌 것이다.

 이채는 네모난 밴드 곽에서 살색의 밴드 뭉치를 꺼냈다. 상처가 난 손바닥에 두개를 붙이고 나머지는 다시 집어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와서 늘 그렇듯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진동시킬 때 쯤 수트를 깔끔히 차려입은 그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이채가 말했다.

“급히 나가셔야 하나요? 저를 부르시지 그랬어요.”

옷을 입는 시중까지 드는 이채였기에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그의 차림을 보니 어쩐지 자신의 일을 뺏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옷 이야 그 혼자서도 입고 벗고 다 할 수 있지만, 이채는 자기 일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그에게 넘기기 싫었다. 그것은 가정부로써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일수도 있고, 이채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마음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생각한 이채는 그냥 그를 바라 볼 뿐이다. 이채가 건네는 물 컵을 받아들며 그가 말 했다.

“오후에 손님이 온다. 준비해 둬.”

“중요한 손님인가요?”

“몇 달 만에 보는 동생도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지.”

이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을 거르고 나가는 그가 마음에 거슬렸지만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억지로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녀오세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채의 배웅을 받으며 도정주는 집을 나섰다. 차에 오르는데 나오기 전에 본 이채의 하얀 손바닥이 떠올랐다. 단정한 성격만큼이나 가지런히 붙여져 있던 두개의 밴드. 그는 기분이 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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