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33)

 11.

화랑의 문들 닫고 나오는 정유를 계속해서 따라오는 차 한대가 있었다. 정유는 백화점으로 갈까 하다가 일부러 구둣가게와 시계방, 서점을 차례로 순례했다. 그리고 그 은색의 세단은 일부러 보이기라도 하듯이 그녀가 들어가는 건물 앞에다 떡 주차를 해 놨다. 자신의 관심사와 전혀 상관없는 ‘연애 학’ 이론서 두 권을 대충 집어 들어 계산하고 나오는데 드디어 은색의 세단에서 사람이 튀어 나왔다. 예상대로 장우였다.

“안녕하세요, 정유씨. 또 뵙네요. 벌써 세 번째죠?”

장우는 마치 우연이라는 듯 서글 하게 웃으며 정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팔에 걸려있는 쇼핑백을 들어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정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전혀 실망의 기색이 없는 장우가 말 했다.

“세 번 이나 만났으니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해도 되겠죠?”

그는 마치 언제나 그렇게 웃는 냥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호감을 품을 만한 미소였지만, 불행히도 정유는 그의 소문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그 명망이 높은 장현기 사장의 유일한 골칫거리. 자기 발전 보다는 파티에 가는 걸 좋아하고, 회사 일 보다 늘 놀 생각이 먼저고, 장우라는 외자 이름 대신 ‘개장우’ 라는 세 글자로 더 자주 불리는 남자.

 정유는 장우의 프로필을 대충 머릿속에 늘어놓으며 그를 지나쳐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장우가 또 뒤를 따라왔다.

 “전 장우씨와 식사 할 마음이 없어요.”

자동차의 문을 열어 쇼핑백을 집어넣은 정유가 뒤를 돌아봤다. 생긋이 웃으며 거절의 말을 들려주자 장우는 그제야 조금 낙담한 얼굴을 했지만, 절대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칠 전 팔기가 무엇인지 보여줄 태세로 장우가 말 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묻지 마세요.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정유는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말 했고, 장우는 조금 굳은 듯 당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이내 원래의 유들 함을 회복했다. 그는 어느새 차에 타 시동을 걸려는 정유의 옆자리로 빠르게 탑승했다. 그리고 그녀가 황당해하던 말던 절대 풀지 않겠다는 의지로 안전벨트를 매고 씨익 웃었다.

“한 블록만 더 가면 제가 잘 가는 한식당이 있습니다. 어서 가죠.”

정유는 황당이 지나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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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를 태우는 남자는 자신이 축적한 부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김 영현 회장은 시가만큼은 순수하게 즐겼다. 허나 와인을 마시듯 입안가득 연기를 물었다가 다시 내뱉는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마치 궐련초나 태우듯 독한 연기를 속기하는 풍조가 남발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굴지의 제약회사를 세운 김 회장은 시가와 시가를 태우는 행위를 사랑했고,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남자가 꽤 흡족했다.

 커터로 앞머리를 잘라내어 불을 붙인 남자가 천천히 한 모금을 빨았다. 잠시 코와 혀로 맛을 음미하는 듯 하더니 이내 훅 내뱉는 연기가 허공에 자욱하다. 맛이 깊은 시가는 연기의 향 만 으로도 곁에 있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더니. 김 회장은 허공에 그려지는 연기에서 시선을 내려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가의 맛을 다 음미한 도정주가 말 했다.

 “하바나 산 이군요.”

“역시 맛을 알아보는군. 진짜배기지. 카스트로도 이걸 태우고 혁명에 성공했다네.”

도정주는 고동 빛깔의 시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자연스럽게 빨아들여 한 모금을 더 태우고 묵직해 보이는 재떨이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가느다란 연기가 치솟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침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김 회장이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딴다. 잔 하나를 도정주에게 밀어주며 늙은 회장이 말 했다.

“시가와 잘 어울릴 걸세. 비싼 값을 하는 술이거든.”

그는 가볍게 쥔 잔속의 붉은 액체를 보며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카스트로의 시가와 비싼 값을 한다는 와인. 그러나 그 굉장한 조합은 이 늙은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데, 어떤가?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게.”

김 회장은 하바나의 로고가 선명히 찍힌 상자와 방금 딴 와인과 똑 같은 모양의 병 하나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내 주는 사람처럼 선심 쓴다는 얼굴을 했지만 도정주는 시가도 와인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짧게 고개를 저어 거절을 표시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 젊은 남자의 거절이 못 마땅하면서도 한사코 그의 손에 한 가지를 쥐어주려는 듯 제차 권했다. 그러자 이번에 선심 쓴다는 거만한 얼굴을 한 사람은 도정주다. 그는 정 그렇다면 받아주마 하는 승낙의 뜻을 나타냈고 김 회장은 또 다시 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크기와 굵기 만큼이나 오래 타는 시가의 연기가 만들어낸 잔상을 보며 도정주가 말했다.

“정 주시겠다면 다른 걸로 받지요.”

그는 기호품은 필요 없다는 듯 시가 상자와 와인 병은 쳐다 도보지 않았다. 그러자 김 회장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 회장은 아침 일찍부터 급하게 진행되었던 컨소시엄 회의를 떠올리며 그가 아마도 지분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 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끝난 뒤에 각 기업의 주요 인력들이 자신들의 회사로 급히 돌아간 것에 비해 도정주 사장만은 회의장에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김 회장은 그가 가장 늦게 회의장을 빠져 나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예상은 맞았다. 자신의 ‘식사나 함께 하겠나?’ 라는 말에 그가 응했던 것이다.

 “지분이라면 내 줄 수 있네. 사실 정부에서 하는 국책 사업 같은 건 흥미 없거든.”

김 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제약 회사라는 입지가 있으니 국책 사업을 몰라라 할 수 없어 컨소시엄 회의에도 참여한 것이지, 사실 그는 발전가능성도 희박한 국책 사업 같은 것엔 관심 없었다. 정부에서 벌이는 그런 사업 같은 것은 이미지 쇄신이 필요한 조직폭력배들이나 열을 올릴 법 한 일이다. 김 회장은 여유롭다는 듯 웃으며 진짜로 지분을 내 줄 양인지 키폰을 누르며 비서를 부르려 했다. 그리고 도정주는 그 행동을 제지하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늙은 회장을 보며 뇌까리듯 말 했다.

“한남 제약 본사를 사고 싶습니다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국책 사업 같은 건 제가 더 관심 없으니까요.”

 김 회장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꽤 호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싸한 공기가 흘렀다. 김 회장은 삼분의 일 쯤 타들어간 시가 연기가 갑자기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이러는 이유가 뭔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 쓰는 김 회장이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눈으로 쫒았다. 남자가 재떨이 위에 놓아둔 시가와 손도 대지 않은 와인 잔이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도정주가 말 했다.

“직접 세운 회사가 조각나서 팔려지는 것 따윈 보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

“호 답을 기다리지요.”

도정주는 돌을 던지듯 한 마디를 내뱉고는 짙은 갈색의 문을 열었다. 시가연기 가득하던 곳의 답답함과는 다른 깨끗한 공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느긋하게 제약회사의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미끄러지듯 깔끔하게 차를 모는 기사에게 집으로 가자는 말을 하며 눈을 감는다. 곧 보게 될 가정부의 얼굴이 감은 눈 속에서도 선명했다.

‘몇 달 만에 보는 동생도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지’

이채는 도정주 사장이 아침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장을 봤다. 긴 여행에서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사람이니 만큼 식단을 가장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이니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모른다. 이채는 정유에게 전화라도 해서 너희 둘째 오빠의 입맛이 어떠냐고 물어봐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아마 그 성격에 다시는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채는 그다지 정유를 탓 하고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간절히 원하는 여자가 도정주 사장의 그런 제안을 거절할 리 없잖은가.

 이채는 만일 그날 저녁 정유가 오빠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장을 보는데 집중했다.

마트에서 맨션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그건 차로 이동 할 때 의 얘기다. 이채는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가기에는 꽤 긴 코스라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오르막으로 막 접어드는데 누군가 자신의 짐을 획 낚아채 간다. 이채는 언젠가 있었던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조금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말았다.

“누구시죠?”

노란색의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얼굴 아래로 밤송이 같은 턱수염이 눈에 띄었다. 옷차림은 허름했고 신고 있는 신발은 낡았으며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게 전체적으로 꽤 말랐다는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이채는 경계하듯 그를 관찰하며 빼앗긴 짐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방랑자의 냄새가 물신 풍기는 남자가 조금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가는데 까지 들어 줄 게요.”

그러면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남자. 이채는 잠시 황당해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를 쫒아갔다. 방금 전의 놀랍도록 부드러운 웃음과 매끄러운 목소리가 그의 차림새나 덥수룩하게 난 수염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채가 또 한번 놀란 것은 이 이상한 남자의 목적지가 자신과 같은 층, 같은 집이라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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