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런, 도정주의 동거인 일 줄이야!’
하면서 벙거지 모자를 벗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는 그는 자신의 말이 꽤나 재미있는 듯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렇게 배낭도 벗지 않고 한참을 웃더니 그제야 자신의 등에 커다란 짐이 얹혀져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배낭을 푼다. 툭, 그는 배낭을 마호가니 벽장 옆에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두 다리를 주욱 펴며 쇼파 위에 들어 누웠다. 그리고는 장을 본 짐을 든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이채의 시선을 느낀 건지 누운 그대로 팔을 괴며 고개를 든다.
“안녕. 나는 도 정화. 정주 형의 동생 이죠. 그쪽은?”
“이 이채. 동거인이라기 보단 가정부예요.”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움직여 빙긋 웃는 그 모습에 이채는 짐작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정화도 이채를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부드러워 보이는 눈동자를 조금 크게 만든다.
“가정부?”
놀랍다 기 보단 신기하다는 듯 묻는 말에 이채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화가 다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진짜? 정말? 진심으로 가정부? 농담 아니죠?”
이채는 그 따라 갈수 없는 질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 별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정화도 이 가정부의 성격을 대충 파악한 건지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하지만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만은 거두지 못한다.
이채는 주방으로 들어가 장을 본 짐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등 뒤의 시선에 멈칫했는데,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다시 손을 놀렸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궁금하다는 그 시선은 더욱 짙어졌고, 결국은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헤헤. 들켰네.”
하며 버릇인양 머리를 긁적이는 정화의 행동에 이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도 정화. 오랜 여행 탓에 허름해 보이는 외모와 면도 하지 못한 수염도 그의 유한 인상과 부드러운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는데, 확실히 그는 도 정주 에 게서도 도 정유 에 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따뜻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채는 이런 타입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모든 것은 처음에만 어려울 뿐 익숙해지면 금방 괜찮아 진다는 아버지의 입버릇을 기억해 내며 눈앞의 이 남자를 대하는데 익숙해지고자 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주섬주섬 수납하기 시작하는 이채에게 정화가 가까이 다가왔다.
“봉자 할머니는?”
“그만두셨어요.”
“하긴. 할머니도 손놓을 때가 되셨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화가 턱에 손가락을 얹으며 끄덕끄덕 한다. 이채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냉장고에 물건을 채워 넣었다.
“형을 돌봐준 건 얼마나 됐어요?”
“말 놓으세요.”
“응. 얼마나 되었어?”
이주일 이요, 라고 대답하곤 냉장고 문을 닫은 이채는 ‘얼마 안됐네’ 하며 웃고 있는 정화와 눈을 마주했다. 그다지 키가 크다고 할 수 없는 자신보다 반 뼘 정도 위에 있는 정화의 눈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이채는 ‘돌봐준다’ 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는 정화에게 식탁 의자 하나를 빼 앉기를 권했다. 그러자 정화가 예의 그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다.
“고마워. 이채씨는 친절한 사람이네.”
사장의 동생을 멀뚱히 서 있게 할 수 없어 자리를 권한 것 뿐 이지 이채는 스스로가 한 번도 친절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고 정화는 또 그런 이채를 쇼파에서 처럼 장난스레 따라한다.
“......”
“왜?”
난감해 하는 이채의 얼굴을 보며 정화는 아래위로 움직이던 고개를 멈추곤 계속 웃고 있었다. 처음대하는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도 그 나름이지, 이렇게 자꾸만 미소 짓는 사람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채는 이 정화라는 남자만큼은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 예요.”
“뭐가 아무것도 아닌데?”
“......”
또 이런 식이다.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처럼 천진하게 되물어 오는 통에 이채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보통은 아무것도 아니라하면 그냥 넘어가는 것을 미덕으로 알지만, 일부러 인건지 진짜로 궁금한 것 인지 정화는 반문했고 그래서 이채는 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조금 소리 내어 웃는 정화가 말 했다.
“이채씨, 진짜 재밌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도리도리 젓더니 또 말이 없네. 귀엽단 말 자주 듣지?”
“......”
할 수만 있다면 이채는 이 자리를, 정화를 피하고 싶었다. 자신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질문을 계속하는 그가 당혹스럽다. 이채는 지금껏 자신이 보고 겪었던 타입의 사람들과 정화를 별개의 풍선 안에다 묶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파랗고 노란 색색의 풍선들 속에 속해 있다면 정화는 물에 씻기지 않는 유화물감을 칠하고 그 속엔 헬륨가스를 빵빵하게 채워 넣은, 세상의 단 하뿐인 풍선 안의 사람이다.
이채는 아직도 미소 짓고 있는 정화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자신의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정화의 얼굴을 보며 따라서 웃어줘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데, 때 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정주였다.
.
.
.
.
봄바람이 시원하게 휘감기는 이른 저녁. 해가 간당하게 떠 있는 밖은 소란스럽지도 그렇다고 고요하지도 않다. 노을이 없는 저녁은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같기도 한 듯, 이채는 지금 시간이 오후 다섯 시 인지 오전 다섯 시 인지 헷갈렸다. 또르르륵, 거실 가운데서 살구색의 술이 따라지는 맑은 소리가 난다. 노르망디에서 가져온 사과주라고 했던가? 이채는 조금 전 배낭을 뒤적여 커다란 술병을 꺼내들던 정화를 떠올렸다. 자고로 방랑자는 종이컵에 술을 따라 마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피력하며 도정주에게 종이컵 하나를 쥐어주던 정화. 밑둥이 찌그러지고 어지러운 영문이 난해하게 새겨져 있는 그 종이컵을 로마에 갔을 때 어느 대형 할인점에서 훔친 것이라며 정화는 자랑스레 얘기 했다.
"비었어. 따라줘.”
취기가 한껏 오르는 건지 정화는 몽롱한 눈에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며 도정주를 보았다. 그러자 아직 수트도 벗지 못한 도정주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정화의 종이컵을 채워준다.
“카, 좋다. 역시 술은 장소에 따라서 취기도 달라진다니까. 내 나라에 와서 마시니까 위장에서 착 소화가 되네.”
밤송이 수염을 움직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 정화가 컵을 비워냈다. 방랑자의 술은 언제 어디서든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도정주의 말에 정화는 그런 건 따지는 게 아니라며 또 활짝 웃는다. 열어놓은 발코니의 창으로 바람이 날아들어 온다. 밖은 조용하지도 고요하지도 않고 적막하던 집 안엔 처음인 냥 소란스럽지 않은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집 주인은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동생 때문인지 느슨하게 풀어진 넥타이 만 큼의 유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딱 그 넥타이 만큼이었지만, 이채는 저 남자에겐 그 정도도 놀랍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돈 놀이는 잘 되가?”
“아아.”
“그런 건 이미지가 좋아야 쟎아. 불우이웃 돕기 성금도 좀 내고 그래.”
정화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 얼굴이 장난 이란 것쯤은 누구도 알 법 했다.
“정유는? 지지배 여전히 까탈스럽지?”
“너 만 할까.”
“무슨 소리. 난 까탈스런게 아니라 예민한거라구.”
대화는 그런 식이였다. 그다지 의미도 없어 보이고 농담 같기만 했지만 편안한 듯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채는 술이 모자라다며 입맛을 다시는 정화에게 벽장에 있는 위스키 몇 병을 꺼내 주었다. ‘와’ 하는 아이 같은 환호를 지르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정화가 이채씨는 센스만점이야 하면서 팡팡 등을 두들기는 바람에 순간 술병을 놓칠 번도 했다.
“자, 이채씨도 한 잔 받아. 가져다 준 답례야.”
술병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는 이채를 잡아 앉히며 정화가 종이컵 하나를 내 민다. 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이채는 거절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잠시 고민했지만 어쩐지 정화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거절의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체념하며 그 훔쳤다는 종이컵을 받아 들고 정화가 따라주는 위스키 한잔을 조금 홀짝였다. 술이란 것은 알콜과 도수의 무서움을 감안하고서라도 맑은 빛깔과 따를 때의 영롱한 소리가 사람을 홀리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채는 독한 위스키를 반 정도 비워냈다.
“어때, 종이컵이라도 로마 제는 역시 틀리지?”
코를 찡긋 하며 장난스레 말 하는 정화의 물음에 이채는 국산도 질기고 좋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는데, 오랜만에 가지는 이 여유로운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은 탓에 괜 시리 흠을 잡고 싶지 않아서다. 또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정화는 현재 주정뱅이 이기도 했다. 자고로 술 취한 놈의 말은 애써 반박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술이 한껏 오른 정화가 눈을 부드럽게 접고 수염을 씰룩이며 주정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유연한 바람은 정화를 스치고 도정주에게로 다가갔다가 다시 이채의 반 묶은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정화는,
“미국에서 5달러를 주고 쿠바 비자를 사서 바야모에 갔는데. 거기는 길다란 대리석 벤치가 아주 많더라. 돈은 다 떨어졌지 배는 고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어쩐지 그 벤치에는 앉기가 그런 거야. 왜냐면 내 차림이 너무 더러웠거든. 그리고 그 벤치는 대리석이고 말이야. 여튼 그래서 벤치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머리에 꽃 꽂은 여자가 와서 칵테일 한잔을 주는 거야. 새카만 눈에 곱슬거리던 머리카락이 아주 멋진 여자였지. 근데 난 처음엔 그 여자 머리의 꽃만 보고 미친 여잔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길 건너 노점가게로 가더니 그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 하는 거 아니겠어. 음악도 없이, 사람들이 쳐 주는 박수소리에만 박자를 맞춰서 아주 경쾌하게 몸을 움직였어... 살사 였을까? 차차차? 아무튼 그래서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한참을 구경했어. 그리고 그 여자가 춤을 멈췄지. 그런데 주위에서 박수를 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내기 시작하는 거야. 난 영문을 몰라서 어리 둥절 해 있는데 돈을 내는 사람들 손에 나랑 똑 같은 칵테일이 들려져 있더라. 일단 쥐어주고 춤을 추고 돈을 받고... 그게 그 여자의 장사수완 이었나봐.”
같은, 자신이 여행을 하다가 보고 겪었던 것을 주로 풀어놓고 있었다. 무슨 신전에 갔더니 너무나 볼품없고 초라해서 놀라기도 했고, 어디에선 골목을 잘 못 들어가 들이대는 총 앞에서 몇 푼 없는 지갑을 던져 주기도 했으며, 성자의 나라엔 가난한 사람들이 널렸고 차별이 난무하는데 어째서 그런 곳을 성자의 나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정화는 한참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손을 쉴 새 없이 놀려 입 안으로 부지런히 술을 날랐다. 위스키 한 병과 꼬냑 두 병이 정화의 손에서 동이 났다. 정화는 처음보다도 더 몽롱한 눈을 하며 빈 술병을 들어 거꾸로 뒤집는다. 병의 주둥이에 혀를 가져다 대고는 한 방울의 자비라도 내리게 해 달라며 비는 행동이 못내 우스웠다.
그래서 이채는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주정뱅이라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웃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았지만 방금 정화의 행동이 재미있어 이채는 자신이 웃은 줄도 몰랐다.
“어. 나 이채씨 웃는 거 처음 봐.”
정화가 술병을 다시 내려놓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채를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니 당연히 웃는 것을 처음 보는 게 아니냐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는데 지금껏 별 말 없던 도정주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군.”
“응? 형도?”
함께 살고 있으면서? 라는 뒤엣 말을 줄였지만 정화의 동그랗게 뜬 눈 만으로도 그가 어떤 것에 놀라워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채는 도정주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정화의 동그란 눈을 보며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런 걸로 저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채는 태연한 척 애 쓰며 새 위스키 한 병을 땄다.
“저도 사장님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없는걸요.”
그러니까 공평하죠, 하면서 정화의 컵에 술을 채워주는 이채의 말에 도정주가 미간을 찌푸려 버린다. 그리고 정화는 이주일 째 같이 살고 있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풋 하며, 하하하 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그러나 이채는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채씨가 이해해. 우리 형이야 원래부터 잘 안 웃는 남자거든.”
취했음이 명백하면서도 정화는 발음만은 멀쩡했다. 자신의 형을 가리키며 ‘힘든 남자지’ 하고 말 하는데 이채도 그 의견엔 동의 했다. 그리고 아직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도정주는 조금 고개를 저을 뿐 주정뱅이 동생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반 쯤 남은 자신의 술을 비워내고 술병을 들고 있는 이채에게 내밀었다.
“채워봐.”
명령조의 그 말에 이채는 조금 심통이 났지만 직접 따라 마시라며 술병을 건 내 줄 용기도 없었다. 체념하며 그의 컵으로 술병을 가져가는데 남자의 오만함을 단죄한 것은 정화다.
“그렇게 말 하면 안 돼지. 형은 사람을 좀더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니까.”
정화는 몽롱한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이채에게선 술병을, 자신의 형에게선 종이컵을 빼앗아 간다. 그리곤 두 사람의 것을 바꾸어 쥐어준다.
“......”
“자. 따라줘.”
강제로 위스키 병을 들게 된 도정주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따라줘 라고 하는 주정뱅이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고 졸지에 그의 술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된 이채도 컵을 쥔 손이 낭패스러웠다. 그러나 정화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형도 남을 위해 봉사해 보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도정주는 천천히 이채에게로 병을 뻗었다. 그리고 이채는 그의 팔이 다가오는 것에 맞추어 얼른 컵을 내밀었다.
또르르륵. 맑은 액체가 따라지고 위스키 특유의 시큰한 냄새가 확 코를 찔러온다. 이채는 그가 술병을 거두어 가는 걸 보며 조금씩 홀짝여 술을 마셨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태우듯이 넘어가서 또 반도 채 비우지 못했다.
“어때? 도정주가 따라주는 술은 맛이 달라?”
컵을 내려놓는 이채에게 개구쟁이 얼굴을 하고 물어보는 정화는 자신의 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했다. 그리고 슬쩍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내는 도정주의 얼굴을 보며 이채는 정화의 장난에 응하기로 했다. 스스로도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의아할 노릇이다.
“한 잔으론 모르겠어요. 한 번 더 따라주실래요?”
하면서 컵을 도정주에게로 내미는 이채.
정화는 눈물까지 뽑아내며 하하 하고 웃었고 도정주는 기가 막혔지만 그다지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밖의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내린 어둠은 세상을 검게 물들였다.
그러나 세 남자의 술자리는 그 밤의 끝을 잡고 놓을 생각이 없는 듯 계속 진 행 됐다.
어떻게 파장이 났고 누가 먼저 지쳐서 나가 떨어 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날의 분위기가 꽤 좋았다는 것 만 큼은 세 남자의 머리에 선명했다.
어른거리는 햇살에 눈을 떴을 때 이채는 파묻히듯이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고 속에선 위액이 넘어올 것처럼 불이 난 듯 따가웠다. 이채는 눈앞을 흐리게 만드는 전날의 과음을 탓하며 자신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무거운 팔을 들어올렸다. 조금 힘겹게 들어올리고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서 팔의 주인을 확인했는데...
“사장님.”
이채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의도치 않은 과음으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쇼파와 테이블을 등지고 나란히 누워있는 자신과 그의 모습만으로 봐서는 그냥 한 명씩 차례대로 뻗어버리지 않았나 추측될 뿐이다.
“일어나셔야죠.”
이채는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이 남자도 잠 든 얼굴만큼은 편안해 보이는구나 하면서 다시 한번 그를 흔들자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몇 시지?”
소리 없이 눈을 뜨고는 햇살이 눈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게 이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머리가 아파서 시계가 제대로 안보여요.”
이채는 아직도 몽롱한 눈에 초점을 잡기가 힘든 듯 그의 얼굴과 목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도정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채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체온계는?”
뜨거운 이마에서 손을 때며 도정주가 물었지만 이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집에 처음 온 날 능숙하게 가운도 찾아내었건만, 지금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도정주는 힘없는 얼굴로 자꾸만 허물어지려는 이채를 안아들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히고 전화를 걸어 의사를 호출하는데 열려진 문 사이로 벽장에 붙어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정화가 보였다.
그는 의사에게 십분 안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는 조금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열이 끓고 있는 이채는 점점 숨쉬기가 불편한지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힘겨워 했다. 그는 문득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동생의 태평한 얼굴을 발로 차주고 싶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이라지만 술 만 가지고 오지 않았어도 이채가 열이 올라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거실의 시계가 정확히 십 분이 지날 때 까지 그는 땀에 들러붙은 이채의 머리카락을 때어 주며 침실을 지켰다. 도정주는 왕진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의사가 급하게 청진기를 꺼내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의사의 뒤를 화난 얼굴로 따라 들어온 중오는 진찰중인 의사 옆에 서서 가만히 이채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사장에게 어째서 두 번째 맞선 자리에 나오지 않았냐고 따질 수 없었다.
“알레르기입니다. 아무래도 술이 원인인 것 같은데...과실주를 마셨습니까?”
왕진 가방을 챙기며 진단을 내리는 의사의 말에 도정주는 인상을 구겼다. 벽장에 붙어서 자고 있는 정화를 흘끔 보며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역시 저 놈이 화근이군.
그는 간단한 처방을 내리고 집을 나서는 의사를 배웅하는 중오를 손가락으로 불렀다.
“갖다버려라.”
동생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중오는 진심이냐고 절대로 물어 볼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정화를 집 밖으로 쫒아내며 중오는 소리 없는 애도를 표했는데, 두 번째 맞선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