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33)

 14.

“예상한대로 지분의 반은 김회장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딸과 사위가 죽었으니 지금은 김회장이 반 중에서 다시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겠지요. 하지만 이사회는 이름뿐입니다. 실질적인 힘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다행이군. 이름뿐이라면 포섭하는 것도 쉬울 테니까.”

“예. 그래서 한남제약 이사회 쪽에 사장님 뜻을 전달했습니다. 꽤 동요하는 듯 하더군요. 그렇지만 그들이 동요를 보인다고 해서 사장님께 지분을 넘긴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만들어 놓기만 하고 아무런 실권을 주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겐 안전한 ‘울타리’ 가 있지 않습니까.”

“...장현기쪽의 접촉은?”

“현재까진 장사장 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오히려 김회장의 콜이 상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몸이 달았군.”

“사장님 말씀대로 회사가 조각나서 팔릴지도 모르니 김회장으로써야 백방으로 손 쓸 수밖에요.”

도화무역의 본사 건물 회의장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도정주와 그의 충실한 비서 한중오다. 하지만 둥그런 원탁에는 몇 명의 인사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며 국책 사업을 내던지고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는 한남제약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반질한 원탁에 팔을 괴며 도정주가 말 했다.

“제약회사를 창립할 때 분명 장현기에게도 지분을 떼어 줬을 거다. 비록 몇 프로 되진 않겠지만 김회장에겐 지금은 그것도 끌어 모아서 단속해야 할 때지. 그 늙은이가 장현기에게 어떤 식으로 접촉하는지 주의해라.”

짧은 말 속에 그의 뜻이 다 담겨있었다. 그래서 서류를 교환하는 중역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의견을 구하려고 이 회의를 연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정부의 국책 사업 쪽은 이미 손을 땠고 한남제약 인수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그들의 사장이 내 놓은 결정이고 이제 자신들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회의를 빙자한 일종의 통보인 셈 이였다.

안경을 치켜 올리는 중오가 두 번째 서류첩을 중역들에게 한 부씩 나누어 줬다. 그들은 그 서류를 빠르게 흩어보고 의견을 나누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들은 포켓에서 펜을 꺼내 한 사람씩 싸인을 해 나갔다. 싸인이 빽빽이 채워진 서류가 마지막으로 도정주에게 넘어왔을 때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빠르게 펜을 놀렸다. 도정주는 김회장에게 가장 효과 적으로 타격을 줄 방법을 빠르게 모색해 갔다.

또르락 또르락, 호두알이 겹쳐지며 손 안에서 굴러가는 저 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생각하며 장현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구리같은 영감은 반질하게 윤을 낸 소파위에 앉아서 벌써 십 분 째 저 짓을 하고 있고, 반대편 손 의 시가는 삼십 분 째 혼자서 잘도 타고 있었다. 장현기는 그것참 더럽게도 오래 탄다는 생각을 하며 눈앞의 와인 잔을 가볍게 쥐었다. 그는 저 영감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자신을 부른 건 확실한데 아직 별 감을 잡지 못해서 조금씩 초조해 오는 것을 향 좋은 와인으로 달랬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 김회장은 함께 식사나 하자면서 전화를 주더니만 자신을 대뜸 한정식 집으로 가 거하게 한상 차려 먹였다. 그리곤 식사가 끝날 때 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젓가락을 놀리는 자신을 입맛을 다시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장현기는 괜히 이 식사가 최후의 만찬 같아 찝찝했다. 한마디로 거하게 먹여놓고 못된 짓을 시키려는 주인의 심보가 김회장이었고 당하는 종놈이 장현기 본인과 겹쳐 보인 거다.

 “장 사장...”

김회장은 또르락 거리는 호두알을 멈추며 슬쩍 장현기를 쳐다봤다. 장현기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씀하시지요 하고 대답했지만, 늙은 영감은 조금 한 숨을 내쉬며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호두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현기는 세 번째 반복되는 대화의 패턴에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식사 내내 말이 없더니만 자신이 젓가락을 놓자마자 물로 입가심 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남제약 본사로 끌려 와 김회장과 벌써 한 시간 째 마주앉아 있었던 것이다.

장현기는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저 시가 타는 연기에 질식해서 죽거나, 병이 비어가는 와인에 취해 죽거나, 아니면 이 지긋한 시간이 고루해서 짓눌려 죽거나 필시 셋 중에 하나일 거라고. 그는 나중에 자신의 아들에게도 이 방법을 한 번 써먹어 보리라 다짐하며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회장은 드디어 입질을 하는구나 하고 반색했지만 장현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게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와인을 계속 마셨더니......”

그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찌뿌둥한 얼굴로 문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김회장을 뒤로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장현기는 살 것 같았다. 빌어먹을 노인네가 시가 따위를 피우다니 하는 욕을 속으로 퍼부으며 그는 김회장의 비서가 안내해 주는 화장실로 갔다. 탕, 문을 닫고 그는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그리곤 차지 못하고 계수대로 빠져 나가는 물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김회장이 늘어놓을 법 한 모든 이야기들을 생각했고 거기에 하나씩 응수해 나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우리가 못 본지 삼년이 넘었군.’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들놈 단속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허허. 아직 돈가? 자네는 그 장남 때문에 바람 잘날 없구만.’

‘하나 있는 딸도 사위도 다 앞서 보낸 회장님 만 하겠습니까.’

‘......’

‘......’

이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른 것을 상상했다.

‘도화정에서 발을 뺀 지 얼마나 되었나?’

‘이제 일 년 이 넘어갑니다.’

‘음. 아직 새 살림을 차리기엔 이르겠구만. 생각은 있나?’

‘......’

이것도 아니다. 도화정의 그늘에서 벗어 난지 일년이 갓 넘었으니 아직 시기적으로 이런 대화가 오고가기엔 일렀다. 장현기는 좀 다른 것을 생각해 내기 위해 애를 썼다. 딸도 사위도 앞서 보낸 노인이 관심 가질 법 한 일이 뭐가 있을까. 무슨 일로 자신을 불러서 저렇게 밥의 뜸을 들이듯 질질 끄는가.

 그는 최근 김회장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딸이 먼저 죽고 약에 중독된 사위가 뒤이어 죽었다. 둘 있던 손자중 큰 놈은 행방이 묘연하고 작은 놈은 장기라도 팔아서 빚을 갚게 할 심산인지 도정주 사장이 끌고 갔다고 들었다. 또 김회장은 사위의 시체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사위의 몸을 다 찾거들랑 그때 장례를 치루겠다고 공언한 지독한 영감이다.

 장현기는 문득 김회장을 향한 혐오감이 치밀었다. 약에 중독 된 사위를 나 몰라라 팽개쳤고 그가 빚으로 인해 도정주 사장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체를 다 찾으면 장례를 치르겠다니. 장현기는 김회장이 사위의 장례를 치러주기 싫어서 사체의 일부를 유기했다는 세간의 소문이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장사장님, 다 되셨습니까?”

화장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비서의 말에 장현기는 상념을 접어야 했다. 대충 바지를 추스르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와서 비서를 향해 겸연쩍게 웃어보이자 딱딱한 얼굴의 비서가 다시 회장실로 안내한다. 장현기는 마음을 다 잡았다. 어찌되었건 먼저 호출한 것은 김회장이었고 자신은 좀 더 시간을 끌며 그의 의중을 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현기는 일부러 느긋한 얼굴을 만들며 회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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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매의 어머니는 첫 아들을 출산하고 몇 년 뒤 그림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탔다. 옛날 상인들이 낙타와 함께 걸었을 비단길을 걸으며 돌, 사막, 삐쩍 마른 나무와 풀 등을 그렸고 지중해를 돌며 푸른눈과 금발 머리카락의 사람들도 화폭에 담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그녀를 찾아온 남편과 조우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 부부는 서로를 어루만지고 끌어안으며 열정의 밤을 보냈고, 곧바로 둘 째 아들을 출산하기에 이르렀다. ‘더위와 흙먼지가 사방을 덮었을 때 너를 낳았단다. 넌 사막의 축복이었지.’ 둘 째 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가 입버릇처럼 되 뇌이던 말 이었다.

 그리고 그래서일까? 뱃속에서부터 열대의 기후에 적응한 채 태어난 정화는 더위에 강했다. 달력의 날짜는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다고 항변하지만 날씨는 달력에 맞추어 오는 게 아니라는 듯 지나치게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정화는 때 잃은 더위로 인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맺는 이채완 달리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에 불린 밤을 까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밤의 껍질을 까는 정화가 소매로 땀을 훔쳐내는 이채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채씨 많이 더워?”

“네.”

이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히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 지친 듯 바가지안의 밤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정화가 부드러운 눈을 곱게 접는다.

“아마 열이 내린지 얼마 안 되서 더 덥게 느껴질거야. 이거 참, 괜히 미안하네. 내가 밤 양갱이 먹고 싶단 말만 안했어도 이채씨 까지 이런 수고 할 필욘 없었을 텐데.”

겸연쩍게 웃었지만 정화의 말 어디에서도 미안한 기색이 별로 묻어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화는 이채가 땀을 흘리며 밤을 까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는 듯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채같은 타입이 한번 골이 나면 제대로 다는 생각에 정화는 끝끝내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다시 땀을 훔쳐내는 이채를 보며 정화가 말 했다.

“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항상 양갱을 하루에 두개씩 주셨었어. 아침에 등교할 때 한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또 한번. 형은 양갱의 단 맛 때문에 싫어했고 동생은 너무 어려서 싫어했지. 그런데 난 두개가 아니라 스무개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양갱이 좋았어.”

“토속적인 입맛인가 보죠.”

“글쎄...그런가?”

이채의 간단한 정의에 정화는 머리를 조금 갸웃했다. 그리곤 이내 빙긋 웃더니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아니, 토속적인 입맛이라기 보단...아마 어머니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였을 거야...사실 그때의 우리 어머닌 몸이 아프셨거든. 의사는 그게 향수병같은 열병이라고 했어.”

“향수병 같은 열병요?”

“응. 좀 이상한 병이지? 나도 처음엔 의미를 몰랐어. 향수병이면 향수병이고 열병이면 열병이지. 향수병 같은 열병은 또 뭐래 하면서 그 의사가 돌팔이라고 생각했지.”

정화는 다시 빙긋 웃었다.

“근데 지금은 그 병을 알 것 같아. 어머니가 그 병에 걸린 건 나를 낳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라고 했거든... 어머닌 다시 여행하고 싶으셨던 걸지도 몰라. 지중해 바다나, 사막의 모랫길, 태양아래서 춤추는 사람들이나, 가뭄이 들어 한 잔 마실 물도 없는 오지까지...그 여행에서 보고 겪고 그렸던 것들을 잊을 수 없었던 거야. 꽤 낭만적인 병이지?”

이채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낭만적인 병인지 고통뿐인 병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지금 정화가 그의 어머니를 꽤나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하얗게 깐 밤을 쟁반에 담는 정화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어머닌 그 병 때문에 잘 웃지 않으셨어. 항상 방의 창문을 열어두곤 밖만 내다 보셨지. 그런데 우리가 집을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만큼은 양갱을 주시면서 가만히 미소 지으시는 거야. 마치 우리가 문 밖의 전쟁터로 나갔다가 다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야. 그리고 난 어머니가 웃으시는 것과 양갱을 결부시켜서만 생각했어. 왜냐면 너무 어렸거든.”

정화는 부드러운 눈을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이채는 정화가 자신의 이야길 할 때면 항상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감은 눈 속에 어머니를 보기라도 하는 걸까? 이채는 살짝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나 환한 대낮 탓인지 아버지의 얼굴은 갑작스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채는 눈을 뜨며 자신의 상상력 부족을 탓 했다. 새 밤을 쥐는 정화가 말 했다.

“이채씨 어머닌 어떤 분이셔? 분명 미인이겠지?”

느닷없는 정화의 물음에 이채는 스스로도 자신이 곤란한 얼굴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정화의 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야 비로써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인지했다. 이채는 빙긋 웃으며 밤을 까는 정화를 보곤 잠깐 머뭇거렸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머니의 이야길 자세히 해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려웠다. 그리고 정화가 쥐고 있던 밤을 다 깠을 때 쯤 차분한 이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어머닌 폐렴을 앓으셨어요. 낭만적인 병은 확실히 아니죠...제가 가장 처음 기억하고 있는 것도 어머니가 자리에 누워 계시던 모습이니 아마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앓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채는 정화처럼 추억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어머닌 언제나 소독약 속에 묘하게 섞여 나오던 피냄새를 숨기려고 분주히 화장을 하던 여자였다. 그다지 자신에게 다정하지도 자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채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만, 그 날이 제일 추운 날은 아니었어요. 아침에 인사를 하는데 그날따라 절 안아주시면서 학교 잘 다녀오란 말을 하셨죠...아마 죽는다는 걸 알고 계셨던 듯해요.”

그날은 진짜로 가장 추운 날은 아니었다. 눈보라가 치던 그 전날보다도 훨씬 포근한 겨울이었고, 발 목 까지 싸이던 눈더미도 많이 녹을 만큼 햇살도 있었던 날이었다. 그리고 이채는 그 날 아침의 어머니와 저녁때의 어머니가 틀리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렇게 슬픔이 올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침에 날 안아주셨어. 이채는 장례식을 치르는 온 종일 그녀의 따뜻하던 품을 떠올리며 그 말만을 되풀이했더랬다.

“다 됐다. 삶는 건 내가 할께.”

어느새 하얀 밤이 수북하게 쌓였다. 정화는 그 밤 더미를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른 듯 싱글벙글 웃으며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냄비에 물을 받아 불에 올리며 양갱을 만들 한천과 아침 일찍 사가지고 온 이런저런 도구들을 준비해 나가는 모습이 꽤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이채는 살풋 웃으며 정화의 작업을 도와주었다. 언제나 혼자 서 있던 주방에 두 사람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 묘하다 생각하며 밤을 삶고 채에 거르고 모양 좋게 양갱을 굳혀 나갔다. 저녁쯤이 되자 집안에 달짝지근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도정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집으로 들어서야 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맛있다고 해 줘봐.”

양갱 하나를 집어먹고 두 번은 손대지 않는 도정주를 향해 정화는 검지손가락을 내밀며 애걸했다. 그러나 도정주는 신문에 시선을 둘 뿐 마치 약을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화의 말에 관심 두지 않았다. 손가락을 내민 그대로 한참을 있던 정화가 가만히 앉아있는 옆자리의 이채를 툭 쳤다. 맛있다고 말 하라고 해봐. 이채는 별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자신도 이 양갱을 함께 만들었기에 솔직히 그의 평이 어떤지 알고 싶기도 했다.

“입에 안 맞으세요?”

언젠가 처음 식사를 준비했을 때처럼 이채는 담담히 물었다. 그렇지만 반응은 정화 때와 별 차이 없다. 그는 여전히 무심했고 눈은 신문을 향해 있었다.

 “너무 단 가요? 입에 안 맞으시면 다시 만들어 볼게요.”

이채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신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신문은 여전히 접힐 기미가 안 보이고 그의 반응도 없다. 그러자 참다못한 정화가 나무 그릇을 들고 양갱을 주섬주섬 입에 넣는다.

“됐어 이채씨. 우리 형은 원래 단거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신경쓰지마. 우리나 많이 먹자. 오늘, 밤 깐다고 고생했잖아.”

정화는 먹으면서 웃으면서 잘도 말 했다. 그리고 이채의 손에 양갱 두 어 개를 쥐어주며 어서 먹으라는 듯 재촉했다. 하지만 이채는 쥐고만 있을 뿐 먹으려 들지 않았고, 정화는 그런 이채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채씨?”

이채는 고개를 돌려 정화의 부드러운 눈을 마주봤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따뜻한 남자에게 의논하고 싶었지만 곧 그런 성질의 것이 못된다고 판단했다.

 도정주는 오늘 아침 식사도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입에 안 맞으세요 하고 묻는 자신의 말도 고개를 저어 가볍게 무시하곤 별 다른 말없이 회사로 출근 했다. 이채는 그가 아침 식사를 다 비우지 않은 것 외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무언가가 더 있었다. 은근한 무시라고 해야 할지 갑자기 차가워 졌다고 해야 할지. 분명 자신이 아프던 그날 밤엔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는데.

 이채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정주는 벌써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이채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이채씨.”

정화가 이채의 손에서 부스러진 양갱을 가져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손을 들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행동에 이채는 그를 돌아 봤다.

 “내일 바람 쐬러 나갈까? 오늘 만큼 덥진 않을 거야.”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 하는 정화에게 이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하게 웃는 정화와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즐거울 것 같아 기분이 좀 풀리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채는 굳게 닫혀 진 그의 방문을 보며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날 밤 이후론 저 남자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이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선명히 보이는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다. 차가운 눈과 단호한 입매. 등에 푸른 문신을 새긴 커다란 남자. 이채는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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