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소극장의 입구 앞에 길게 깔린 조약돌위로 까만 점이 퍼져갔다. 토독토독, 흩날리듯 내리는 빗방울이 알 굵은 돌 맹이를 때리자 입구를 나서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와. 비 님 이시네.”
정화는 소극장의 입구 밖으로 손을 뻗으며 미소 지었다.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던 재미있는 연극이었는데 아쉽게도 관객이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하더니 오랜만에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풀렸나 보다.
“이채씨, 이렇게 내리는 비를 뭐라고 하는 지 알아?”
이채는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고 없는 입구에 서서 비가 내리는 광경을 가만히 관찰했다. 시내의 외곽에 자리 잡은 소극장 주변엔 건물도 차도 뜸하게 있는지라 보이는 것도 내리는 비였고, 들리는 것도 빗소리 뿐 이었다. 만일 이 비 내리는 광경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어떤 식일까? 포슬포슬? 보슬보슬? 아니면 부슬부슬? 이채는 그 귀여운 단어 모두 이 비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날 비’ 야. 놋날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란 뜻이지.”
정화는 스며들 듯 촉촉이 젖은 손을 거두며 빙긋 웃었다. ‘날 비’ 라. 어쩐지 자신이 생각한 귀여운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이채는 고개를 갸웃 했다. 그러자 정화가 입고 있는 하얀 스웨터에 손을 스윽 문질러 닦으며 말 했다.
“놋날 이란 건 돗자리를 칠 때 날 실로 쓰는 노끈이야. 비 내리는 모습이 꼭 촘촘하게 짜여진 돗자리 같달까? 봐. 벌써 다 젖었잖아.”
이채는 정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다시 비 내리는 세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세찬 바람은 없었지만 우산이 없으면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물투성이고 그래서 묘하게 운치가 있었다.
이채는 문득 비 내리는 세상과 소극장을 경계 짓는 입구 끝에 주저앉았다. 두 팔로 턱을 괴고 하늘로 시선을 주자 끝없는 빗줄기가 점점이 되어 내리는 게 보였다. 이채는 다시 길을 따라 주욱 깔려있는 조약돌로 시선을 내렸다. 백사장의 모래처럼 하얀 그것들이 이제는 먹구름이 앉은 하늘처럼 회색빛깔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인도에 갔을 때도 봄 이였어. 그리고 이렇게 ‘날 비’ 가 내렸지.”
조근한 빗소리를 가르며 들려온 목소리에 이채는 괴고 있던 팔을 풀며 정화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렇듯 정화는 부드러운 두 눈동자를 얇은 눈꺼풀 아래로 감추고 있었고, 길고 마른 팔은 쪼그려 앉은 다리위에 포개고 얼굴의 각도는 조금 하늘을 향한 채였다. 감은 눈 속에서 또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이채의 소리 없는 물음에 정화가 꿈꾸듯이 입을 열었다.
“잔시에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아그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마음먹은 건 바로 실행하랬다고 그날 당장 기차표를 끊었지. 근데 인도라는 데가 기차 연착이 밥 먹듯이 이루어지는 곳이잖아. 기다려도 기차는 안 오지, 날은 덥지.......여튼, 원래는 3시간 거리를 네 시간 반 걸려서 겨우 아그라에 도착했어.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는데 마치 축복처럼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로 떨어지는 거 아니겠어.”
정화는 그때의 기분을 표현하고 싶은 듯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부실한 검표소 를 빠져 나와서 릭샤를 탔어. 그리고 대뜸 타지마할로 가자고 했지...한 이십분쯤 달렸나? 그건 비 내리는 창 밖으로도 단 한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애잔했어. 타지마할......왕이 두 번째 아내를 위해 지은 슬픈 건축물 이였지.”
이채는 지금 정화의 감은 눈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길게 뻗은 새 하얀 길과 단조롭지만 고요한 연못, 우뚝 솟은 둥근 지붕과 그 위를 지나가는 바람, 구름, 태양, ‘날 비’ 까지.
“그런 무덤을 지어 주려면 얼마나 사랑해야 할까? 재정이 기운다던가, 신하와 백성의 원성까지 무시하면서 왕궁 같은 무덤을 만들다니.......이채씨, 상상이가? 그런 사랑 말이야. 아내가 죽었지만 불멸의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샤자 한과, 그 것을 하늘에서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뭄타즈......샤자 한은 결국 타지마할을 다 만들고 난 뒤 아들에게 뒷방으로 쫓겨 난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죽어서는 뭄타즈 옆에 묻혔으니 그는 아들을 용서했을 거야.”
정화는 다시 부드러운 눈동자를 들어냈다. 대기의 습기 탓인지, 그의 눈이 촉촉해 보인다는 착각을 하면서 이채는 다시 비 내리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위해 왕궁 같은 무덤을 지어 준 왕의 이야기.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오래전의 이야기고, 사진으로 밖에 본 적이 없는 외로운 타지마할의 이야기.
그런 사랑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채는 정화의 물음에 늦은 대답을 하면서 감싸 안은 두 팔위로 파묻듯 턱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채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정화도 이채를 따라 팔을 감싸 고개를 파묻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몸살처럼 늘 신열이 가시지 않는데.”
신열이라. 얼마나 달콤하고 지독한 고통이면 신열에 비유할까. 이채는 고개를 파묻고 있는 탓에 웅얼거리듯 들려오는 정화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이채씨는 그런 사랑 해 봤어? 보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그런 일차적인 감정 보다는. 내 목소리, 내 심장, 내 눈짓, 몸짓, 머릿속의 생각 까지도 다 그 사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야.”
“...신열이 오려면 그런 느낌이어야 하나요?”
“아마도. 그냥 만지거나 보고 싶거나 하는 건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건 귀여운 강아지나 예쁜 꽃에도 해당 되는 말이니까. 강아지나 꽃은 좋아할 순 있어도 나를 지배하진 못해.”
정화는 고개를 파묻은 그대로 슬쩍 옆을 보았다. 팔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채의 슬픈 눈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정화는 빙긋 웃었다. 그리곤 감싼 한 쪽 팔을 펴며 이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채씨, 우리 형을 좋아해?”
질문은 느닷없이 튀어나왔고, 정화는 너무 이른 질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젯저녁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이채의 눈이 너무나 복잡하고 슬퍼 보여서 한 번은 집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묻지 않으면 평생 말 하지 않을 사람. 정화는 오랜 시간 함께 하진 않았지만 이채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채씨, 말 해봐. 좋아해?”
이채는 파묻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비와 정화의 얼굴이 섞여서 보이는 것 같아 어지러웠다. 그날 밤, 자신은 그 남자의 손에 의지했다. 지속적으로 쓰다듬고 만져주던 손의 감촉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손길이 그리워서 일지도 모른다.
이채는 눈을 감았다. 그 날 이후로 감은 눈 속에서 보이는 것은 늘 그 남자 뿐 이다.
“모르겠어요...”
이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조금 고개를 저었다.
“샤자한 같은 사랑은 아니 예요......”
그런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화는 순진한 이채의 대답에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조금 전 입구에서 표를 받던 남자가 극장의 문을 닫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정화의 눈에 보였다. 철컥, 자신들이 앉아있는 입구 뒤의 유리문이 잠기는 것을 보며 정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대답을 듣긴 틀렸구나 하며 이채에게 손을 내미는데 이채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살려구?”
정화는 놀리는 것처럼 웃었지만 이채는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려지는 담담한 얼굴.
“...하지만 열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게 신열 인가요?
톡톡톡... 톡톡톡... 빗소리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