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벨벳 스카프를 화사하게 맨 정유가 화랑의 그림들을 바로하고 있었다. 삼일을 연달아 치룬 신인작가들의 등단식 때문에 화랑 여기저기에 사람들의 흔적이 비재했고, 다음 주 엔 다시 정상 영업을 해야 했기에 그녀는 용역업체를 불러 화랑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초봄의 밝은 햇살이 화랑의 유리창을 투과해 부유하는 먼지들이 잘 보였다. 정유는 간결하게 메니큐어를 칠한 손으로 그것들을 흩으며 바닥과 유리벽을 청소중인 사람들을 감독했다.
그들은 용역업체의 직원들로써 고객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만지지 말아야 할 값비싼 것과 자신들의 업무를 위해 쓸고 닦아야 할 것들을 잘 구분 한달까. 정유는 벽에 걸린 그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화랑을 정리해 나가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해서 다음에도 이 용역업체를 불러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그녀의 코앞으로 불쑥 나타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이층은 다 끝났습니다. 창틀의 먼지하나 까지 말끔하게 닦아냈거든요.”
장우는 손에 든 걸레를 지나가는 용역업체 직원에게 던져주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리고 정유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 냥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장우는 늘 그래왔다는 듯 태연히 고개를 돌리더니 박수를 탁탁 치며 청소중인 사람들을 독려했다. 빨리 끝내고 점심을 먹자는 둥 유리창을 제일 깨끗이 닦는 사람에겐 보너스를 얹어 주겠다는 둥, 마치 화랑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정유가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유는 이마를 찌푸린 그대로 획 몸을 돌려 애꿎은 벽의 그림들을 이리저리 맞추었다. 저 장우인지 개장운지는 벌써 일주일째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집을 나서면 어디서 나타 난건지 오 분도 안 되어서 뒤를 따라 붙었고, 화랑에 도착하면 잽싸게 다가와 차 문을 열어준다. 그런가 하면 점심때는 싫다는 자신을 교묘하게 끌고 가 한정식, 중식, 양식 등 메뉴도 다양하게 선별해서 함께 식사를 했고, 다른 볼 일이 없을 시엔 집까지 따라와 자신이 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 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정유는 흘끔 장우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몇 번 두드리더니 물걸레를 든 사람을 밀치곤 스스로 직접 바닥을 닦으며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정유는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면 가히 스토커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는 장우를 고소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했다. 솜씨 좋은 사진사를 고용해 그가 항상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습을 몰래 찍고는 그것으로 고소를 해서 다시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밀 수 없도록 망신을 주는 거다.
그러나 정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늘 잊지 않고 자신의 화랑에 들러주며 꽃을 사 주기도 하고 함께 차를 마시며 그림 이야기와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 주던 장아저씨의 얼굴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정유는 고운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정이란 것이 무섭다더니, 장아저씨 때문에 저 찐득이를 떼어 내지 못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액자들을 바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홱 뜨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클림트의 모조 액자를 팔다 남은 신인작가의 그림과 바꿔 걸때였다. 잘 닦여진 액자 유리에 자신의 둘째 오빠가 비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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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분명 있다. 모르는 것과 다 아는 것의 차이는 알고 있다는 것을 말 하느냐 말 하지 않느냐의 미묘함이다. 그리고 이채의 경우엔 대부분의 것들을 말 하지 않는 편에 속했지만, 도정주에게 만큼은 한 가지를 이야기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자신의 부모가 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사실 그리 큰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널 가슴으로 낳았단다. 입양된 자식에게 들려준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대부분의 입양아들에게 부모에 대한 더 큰 사랑과 감사를 새겨 줄 뿐, 큰 반감을 심어주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채도 아버지와 형이 피로 묶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지는 않았다.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생김세여야만 가족 인가. 혼인신고를 하는 부부도 처음엔 남남이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이 사실은 이씨가 아니고, 아버지가 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타인에게 밝히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남들에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 각인시킴과 동시에 내가 어떤 입장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채는 도정주에게 양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복수를 위해 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성당에서 막 돌아온 이채는 말없이 신문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일엔 항상 일이 바쁜 터라 휴일만큼은 늦게 일어나서 늦은 식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집에서 보낸다. 그래서 이채는 늘 혼자서 지내던 낮 시간을 휴일엔 하루 온종일 그와 함께 지내야 했다.
“식사 하세요.”
옷을 갈아입고 다가오는 이채의 말에 그는 신문을 접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채는 오늘따라 소매를 걷은 그의 팔과 손에 괜시리 눈길이 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밥과 국을 펐다.
식사는 늘 그렇듯 조용히 이루어 졌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씹는 소리 뿐, 아무런 대화도 특별한 행동도 없었다. 이채는 정화가 함께 있는 요란스런 식탁이 그리워 졌다. 흘리기도 잘 하고 주워 먹기도 잘 하며, 밥을 입에 넣고 말 도 잘 하는 정화. 하필이면 저 남자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오늘 같은 날 외출을 할게 뭐람. 이채는 정화에 대한 소리 없는 원망을 하면서 의욕 없는 식사에 열중했고, 그 와중에도 그의 손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것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그리고 도정주는 직업의 특성상 눈치가 빨랐다. 밥그릇을 다 비운 그가 이채를 보며 말 했다.
“할 얘기가 있으면 해봐.”
그는 왜 손을 쳐다보고 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껴서 손을 가리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러자 짧지만 아쉬운 듯한 기색이 이채의 눈을 스쳐갔다. 그는 그것이 조금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젓가락 끝을 씹으며 머뭇거리던 이채가 말 했다.
“아침에 한비서님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내일이 맞선 날이라고......그랜드 호텔인데, 이번엔 안 오시면 안 되니 절 더러 잘 준비하래요.”
이채는 참 하기 힘든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뭘 준비할건데?”
“네?”
“호텔까지 데려다 주기라도 할 건가?”
“......”
이채는 이것이 저 남자가 며칠 째 계속하고 있는 무시하기의 연장 이란 것을 알았다. 이유도 알 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괜한 심술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 심술에도 자신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였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힘없는 아들이자 한낱 가정부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는 그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입을 막아버릴 때 특히나 더 했는데, 이채는 그 것이 죽고 싶을 만큼 분했다.
“...데려다 드릴게요.”
“뭐?”
“호텔까지 데려다 드린다고요.”
이채는 단순히 오기가 치솟아서 한 말은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를 신부 감으로 찾고 있길래 맞선을 열 번이나 보려 한단 말인가. 이채는 이미 물 건너 간 그의 첫 번째, 두 번째 맞선 상대에겐 관심 없었지만 세 번째는 궁금했다. 그 깐깐하던 비서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옷차림을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한 것만 봐도 아마 지금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배경의 여자일지 모른다. 물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이채가 말 했다.
“제가 호텔 앞 까지 배웅할게요. 괜찮죠?”
담담히, 하지만 당당히 물어오는 물음에 도정주는 잠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이채는 한 번도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첫 번째로 요구하는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맞선 보는 호텔에 따라 오겠다니. 도대체 그 머리엔 무슨 생각이 들어 찬 거냐. 도정주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채는 그 행동을 허락의 뜻으로 해석했다.
“짠. 선물이야.”
저녁이 되자 밖의 공기가 시원해 진 것 같아 이채는 베란다의 창을 다 열고 환기를 시키고 있었다. 발코니에 늘어놓은 화분에 물을 주며 젖은 수건으로 잎을 잘 닦고 있는데 그물 같은 방충망 사이로 맨션안으로 들어서는 정화가 보였다. 그리고 정화도 열린 창 안에 이채가 서 있다는 것을 본 모양이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더니 삼분도 안 되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이채의 손에 노란 장미 하나를 쥐어 주며 싱긋 웃는 것이다.
“...조화네요.”
정교하게 만들어 졌지만 향기도 없고 질감도 푸석한 것이 조화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채는 조화를 다발이 아닌 한 송이씩 파는 꽃집도 있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정화가 큰 소리로 웃으며 이채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훔친거야. 조화를 한 송이씩 파는 꽃집이 어딨어.”
정화는 빙긋 웃으며 그런 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하고 치더니 두 손을 어깨위로 으쓱 한다. 그리고 이채는 조금 뾰루퉁한 얼굴로 정화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훔치는 버릇은 안 좋아요.”
“괜찮아. 과한 것만 아니라면 훔쳐도 돼.”
“그런 논리가 어디 있어요.”
“하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걸.”
이채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방금 전의 정화처럼 어깨를 으쓱 했다. 여행을 많이 하면 정화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위험하기도 하지만 마법 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채는 봉우리가 예쁘게 맺힌 조화를 코끝으로 가져갔다. 향기 따윈 절대로 없을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만일 바람에게 냄새가 있다면 이런 냄새일지도. 이채는 노란 꽃을 보며 오늘 도정주와 하루 종일 함께 있어서 긴장한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 배고프다. 밥 아직 안 먹었지?”
욕실의 문을 열어놓고 바지를 둥둥 걷은 채 쪼그려 앉아 발을 씻고 있던 정화가 거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주방으로 들어가던 이채가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형 꼬셔서 외식할까?”
“외식이요?”
“응. 가끔은 이채씨도 남이 해 주는 음식을 먹어봐야 할 거 아냐. 음식 하는게 얼마나 고생인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딱, 손가락을 부딪혀 소리를 내는 정화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뭘 먹을까나 하면서 발과 손을 비누로 문지르더니 빠르게 씻어나가는데, 이채는 그 아이 같은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어버렸다.
“다 됐다. 근데 형은 어디 있는 거야?”
수건으로 대충 손발을 닦는 정화가 이채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벌컥 열자 누군가와 통화중인 도정주가 보였다.
“형!”
정화는 자신의 느닷없음에 그가 슬쩍 인상을 구기거나 말거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통화중인 그의 전화를 뺏고 ‘도정주는 지금부터 바쁩니다’ 하는 짧은 인사를 수화기 너머에 내 뱉은 뒤 그의 등을 떠밀며 거실 밖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도정주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옷과 지갑을 챙겼다. 그는 정화의 이런 억지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별로 놀라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어리둥절해 있는 이채의 팔을 붙들고 현관으로 나가는 정화가 말 했다.
“이채씨, 우리 뭐 먹을까? 비싼 거 먹자. 제일 비싼 거.”
이채는 정화가 얼마나 비싼 것을 먹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그가 말 하는 비싼 음식의 가격대가 궁금해 졌다. 돈에 항상 초연하고 필요한건 그때그때 훔쳐서 쓰는 생활이 정화의 일상인 것 같은데 과연 비싼 메뉴를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채의 그런 예상은 맞아 들었다.
“......확실히. 비싸긴 하네요.”
다른 집에 비해 서는요. 이채는 ‘민트 맛 초코’ 라고 앙증맞게 쓰여진 분홍색 라벨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뾰족하게 뿔이 솟은 아이스크림 끝에 혀를 가져다데자 상큼한 민트 향이 풍기는 게, 이백그람에 오천 원 하는 아이스크림과 집 앞 슈퍼에서 파는 칠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의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채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보라색의 알록달록한 구슬이 박힌 아이스크림을 든 도정주도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달다.”
당연히 달겠죠.
이채는 잔디밭에 앉아 강물을 쳐다보며 아이스크림을 할짝 이는 정화를 흘끔 돌아보았다. 단 것은 좋아하지만 이 차가운 것을 저녁 대신으로 먹는 건 좀 그렇다며 극구 사양하는 자신과 아이스크림 같은 단것 자체를 싫어하는 도정주에게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고른 아이스크림을 쥐어주더니 질리면 바꿔 먹자며 싱긋 웃던 정화. 이채는 어느새 달이 둥실 뜬 하늘을 올려다보며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강물 소리는 맑고...초승달은 매혹적이고 밤하늘은 공단 같네......”
정화는 벌러덩 잔디밭에 드러눕더니 아이스크림을 들어올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말리의 밤보다도 아름다워...”
그리곤 또 무엇을 상상하려는 건지 지긋이 눈을 감고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사막의 모래, 활동적인 새카만 친구들, 북적대던 니이저강과, 열대과일이 즐비한 시장, 사하라를 횡단하던 밤의 도로 까지. 정화는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그리워하며 조용히 눈을 떴다.
“...기회가 되면 꼭 셋이서 말리에 가자.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사람이 많지도 않아. 뭘 하든 모두 웃으면서 바라봐 줄 뿐, 험담도 모략도 없어.”
강변의 바람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는 정화의 이야기가 꿈결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채는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험담도 모략도 없다는 천국 같은 말리를 그려보았다. 사막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그 들도 우직하고 선량한 입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친 땅을 파 헤친 손은 투박하지만 저 남자처럼 가끔은 따뜻할지도 모른다. 활력을 느끼고 싶으면 강가의 시장에 가고, 고요한 평화를 원하면 오아시스의 마을로 돌아가고. 그곳에 가면 아버지의 시체도 형의 행방도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얀 옷을 입고 죽은 듯 잠을 자며 내일 세상이 멸망할 듯 기쁘게 웃고 떠들어야지.
이채는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민트 맛의 아이스크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형이 먼저 어딘가로 끌려가고 뒤이어 자신도 섬으로 팔려갈지 모를 위기에 쳐해 졌었지만, 운 좋게도 그때 정유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자신이 처한 위기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며 무시 못 할 제안을 해 왔다.
‘복수는 네가 선택할 문제지만, 아버지의 시체는 찾을 수 있을거야.’
고운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속삭이던 정유. 이채는 본능적으로 받아 들여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그녀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저 남자의 가정부로 오게 되었고,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복수할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이채는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주시했다. 상큼한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 손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렇지만 손수건도 휴지도 없다. 이채는 뚝뚝 떨어지는 끈적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아침에 그렇게도 눈으로 쫒던 그의 손이, 얼굴이 다가왔다.
“칠칠맞기는.”
그는 들고 있던 보라색 아이스크림을 어느새 정화에게 넘기고는 이채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초코렛 섞인 민트 맛이 많이 단지 슬쩍 인상을 구겼지만, 이채의 손가락을 입에서 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채는 그의 입과 혀가 닿는 부분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잘 해주지 마세요.”
속삭이듯 가늘게 터져 나오는 말에 도정주는 이채의 손을 든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복수할 거라고 생각 하고 있죠?”
울먹임을 참는 듯 이채의 목소리가 힘겨웠다.
“잘 해주지 마세요...사장님은 내 아버지를 죽였어요...”
그러니 잘 해주지 말라구요.
두 손 가득 고개를 파묻는 이채의 어깨가 격하게 떨렸다. 강변 아래로 분홍색 라벨의 아이스크림이 때구르르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