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세단 안에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세 남자가 있었다. 잘 생긴 얼굴이 아까우리만치 표정이 없는 남자와 목 아래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반 묶은 남자, 그리고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 쓰는 안경 쓴 비서.
“저녁 식사 전 까지는 함께 계셔야 합니다. 이번에도 내팽겨 치고 오시면 안 된다고요.”
신호를 받아 서는 틈을 타서 슬쩍 안경을 밀어올린 중오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상사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번 선은 회장의 딸이나 조카가 아니라 회사를 직접 경영하는 여자가 나오는 만큼 그 중요도가 크다. 아무리 졸지에 일가족을 다 잃어버려 회사를 물려받게 된 여자라도 그녀가 그 회사를 대표하는 여자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신호등의 색이 바뀌는 것을 보며 차를 출발시킨 중오는 다시 거울을 통해 뒷자리의 상사를 쳐다봤다.
“대답해 주세요. 이번에도 그냥 나오시면 저 그냥 못 넘어 갑니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도정주는 계속되는 중오의 잔소리에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오는 조금 만족한 얼굴을 하며 운전에 집중하려 애 썼으나, 보조석에서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이채 때문에 그것도 잘 안되었다. 중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안경이 미끄러진다.
“저, 이채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려 줄 테니 돌아가지 그래? 사장님은 나 혼자서도 배웅할 수 있는데 굳이 이채씨가 호텔까지 따라 갈 필요는 없잖아?”
중오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슬쩍 옆을 돌아봤다. 그러나 살짝 부은 눈을 한 이채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말에 대한 거절이라는 것을 안 중오는 소리 없는 한 숨을 내쉬었다. 사실 중오는 지난 번 이채에게 말실수를 한 이후부터 그가 껄끄러웠다. 자신의 상사가 그 에게만 묘하게 무르다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가 호텔까지 따라오는 건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채가 동승 한 것에 대해 도정주 또한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것이다. 중오는 목적지가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하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 푸념 같은 한숨소릴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잘...하고 오세요.”
이채는 한눈에도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담담한 얼굴이나 맞잡은 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평소 그대로이긴 했지만, 조금 숙인 고개와 살짝 말을 끄는 모습에서 힘겨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채와 마주보고 서 있는 도정주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얼굴도 시선도 바닥을 향해 있는 이채의 턱을 살짝 쥐며 도정주가 말 했다.
“여기 까지 따라온 주제에 할 말이 그것뿐인가?”
그는 이채의 턱을 들어올려 눈을 들여다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어떤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듯 흔들렸다.
“...창가 에 앉아 계시는 분이죠?”
이채는 턱을 잡힌 그대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로비에서 잘 보이는 창가 쪽을 흘끔 보았다.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원피스의 여자. 긴 생머리와 눈 꼬리가 매혹적인 인형처럼 생긴 미인. 이채는 시력이 좋은 자신의 눈을 저주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그가 저 미인을 처다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대답해. 할 말은 그것 뿐 인가?”
그는 턱을 쥔 손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이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채는 조금 숨이 막혔다. 고개를 저어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으면서도 그를 좀 더 잡아두고 싶기도 하다. 저 막강한 배경의 여자에게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차에 올라 집으로 가고 싶다. 이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도정주를 바라 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정지했으면. 결국 혼란스러움의 끝엔 솔직한 본심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어 말 할 순 없었다.
“...아파요. 놔 주세요.”
이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며 턱이 빨갛게 부어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들었는지, 이채의 턱 주위를 슬쩍 문지르는 도정주가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말 했다.
“뭘 하든 좋으니까 곧장 집으로 가라. 또 연극을 보거나 단걸 만들거나. 강변에 가도 좋고 술을 마셔도 상관없어. 단 정화하고 같이 있어라. 그러니...”
그는 이채의 콧등에서부터 하얀 이마까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런 얼굴 하지마라.”
내뱉듯 한 마디를 남겨놓고 그가 등을 돌린다. 자신이 골라 준 검은색 수트와 은색의 셔츠로 몸을 감싸고 호텔의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조금 전 자신이 지목했던 그 여자에게로 다가간다. 그가 짧게 목례하자 그녀도 일어서며 차분히 고개를 숙인다. 저 여자의 남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 계획에 따르면 아직 선은 일곱 번이나 더 남았고 그러니 벌써 결정할 리는 없다. 이채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 추측이라 여기며 힘없이 호텔을 빠져 나왔다.
회전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자신을 데려다 주기 위해 중오가 차를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와 단 둘이서만 차 안에 있는 건 거북하다. 이채는 택시가 즐비한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도미노처럼 쭉 늘어선 택시 중 가장 앞선 차량으로 다가가는데,
“공채 동생...맞지?”
이채는 손을 뻗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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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커피 맛이 아주 좋네요. 아마도 좋은 설탕을 쓰나 봐요.”
커피 맛의 척도를 당도로 결정하는 건지 그녀는 기쁜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생긋 웃는 미소가 정유와 약간 닮은 듯하면서도 그녀 보단 말이 많은 타입 같았다. 허리 아래로 늘어 뜰인 긴 머리카락은 색이 옅었으며 얇은 화장을 한 눈은 크고 속눈썹도 풍성했다. 전체적으로 인형을 닮은 여자. 정유가 동양적으로 생긴 미인이라면 진청아는 인형처럼 생긴 서구적인 미인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눈앞에 그런 굉장한 얼굴을 두고도 도정주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다른 미인이라는 점이었다.
‘잘 해주지 마세요’
도정주는 어제 저녁 강변에서의 이채가 떠올랐다. 녹아내리던 아이스크림만큼 끈적하고 달콤하던 하얀 손가락.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움직이던 목과 어깨의 떨림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이채를 안고 그 몸을 탐 한 듯 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린 어깨와 몸에 손을 얹고 달래주듯 등을 쓸어내린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 사장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끄러미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에게 청아는 커피 잔을 든 채 생긋 웃으며 호칭의 여부에 대해 물었다. 정주씨, 도정주씨, 오빠, 자기 등등. 무수히 많은 호칭 중에 ‘사장님’ 이란 다분히 사업적인 호칭보다 더 친근감을 줄 수 있는 호칭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요구 한 것은 ‘도 사장님’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도 사장은 그것을 허락 할 마음이 없었다. 사장님이라니. 자신을 사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이채 하나로 족했다.
“도 사장님, 도 사장님...어째 도사견이 떠오르네요. 발음이 비슷해서 일까요?”
청아는 조금 재미있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일가족을 다 잃은 여자라고는 생각 되지 않을 만큼 생기 넘치도록 밝은 웃음이었지만, 도정주는 아무 감흥 없이 슬쩍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네? 뭐를요?”
“‘도 사장님’ 말이다. 다른 걸로 찾아봐.”
그는 담배를 물며 습관대로 중오를 기다렸다. 그러나 밖에서 대기 중인 비서가 불을 들고 나타날 리 만무했다. 그러자 슬쩍 인상을 구기며 주머니를 뒤지는 그에게 청아가 지포라이터를 내민다.
“준비성이 좋군.”
“뭘요. 저도 입이 심심할 때가 많거든요.”
라이터를 핸드백에 넣으며 청아가 생긋 웃었다. 그리곤 연기를 내뱉는 도정주를 보며 두 손을 깍지 껴 턱에 괸다. 갸우뚱. 45도로 고개를 내린 그녀가 말했다.
“아까 로비에 함께 있던 남자는 누군가요? 굉장히 가까워 보이던데.”
“말 할 의무 있나?”
“어머. 그런 말은 상처가 되잖아요.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꿈이 크군.”
“자주 듣는 말 이예요.”
청아는 다시 재미있다는 듯 깔깔깔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유쾌했다.
“진짜 누구예요? 소문의 그 깐깐한 비서는 아닌 것 같고...뒷모습 뿐 이었지만 굉장한 미인이던데, 혹시 애인?”
청아는 고개를 좀 더 옆으로 숙이며 반짝 눈을 빛냈다. 한참동안 혼자서 웃던 것이 진정되자 다시 인형 같은 그 얼굴로 변모했는데, 큰 눈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냥 동공이 확대 되어있었다. 그러나 도정주는 그 흥미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은 그가 말 했다.
“공연히 힘 빼지 말고 일어나지.”
“저도 거절해도 되죠?”
“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거절은.”
“어머. 협박인가요?”
“몰랐나? 그게 내 직업인데.”
“더불어 살인을 포함한 갖은 범죄도?”
“똑똑하군.”
도정주는 네모반듯하게 잘린 크리스털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자 턱을 괸 손을 푸는 청아가 손바닥을 쫙 펴곤 앞으로 내민다.
“저도 한대 주세요.”
눈과 입에 선을 그리며 생긋 웃는 모습에 도정주는 담배를 곽 채로 던져주었다.
“한 대면 되는데.”
“가져.”
“와아. 기뻐요. 선물인가요?”
“이별 선물이지.”
잘 받아 치더니 이번만큼은 그녀도 조금 주춤해 버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생긋 미소 짓는다.
“도 사장님, 아니, 도정주씨 할아버님은 날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요?”
“널 마음에 안 들어 할 영감도 있나?”
귀찮다는 듯 무심히 대꾸하는 그의 말이 맞았다. 청아는 큰 눈을 가늘게 좁히며 도정주를 흘겨보았다. 자신이 곱사에 추녀라도 등 뒤에 버티고 있는 막대한 재산과 회사는 곱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어느 집안도 손에 넣을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 집안의 아무 남자는 안 된다.청아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보다는 솔직히 나가기로 했다. 그녀가 말 했다.
“제가 어떤 입장인지 잘 아시는 것 같으니 괜히 둘러말하진 않겠어요.”
그녀는 각설탕의 포장을 벗기며 커피 잔에 빠트렸다. 퐁당, 퐁당, 퐁당, 퐁당, 퐁당. 정확히 다섯 개였다.
“아버지도 오빠들도 다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어요. 방법만 다를 뿐, 제 눈앞에서 사라진 건 똑같죠...그래서 올라앉은 대표 이사 자리지만, 난 그걸 누구에게도 넘겨 줄 마음이 없어요. 설사 도정주씨와 결혼 한다 해도 내 사업은 내가 단속할거예요.”
달디 단 커피를 조금 홀짝인 그녀는 단호한 눈을 했다. 계속해서 웃음 짓던 인형 같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난 강한 여자예요. 어떤 의미로든요...하지만 내 뒤엔 호시탐탐 내 자릴 훔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난 아직 그들을 완전히 물리칠 힘이 없어요.”
“장현기는? 너를 이 자리로 보냈지 않나?”
“물론 외삼촌도 강해요...하지만 사장님, 아니, 도정주씨 만큼은 아니죠.”
청아는 으스러질 듯 커피 잔을 쥐고는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잠시 눈을 굴리던 그녀가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건지 긴 호흡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 했다.
“전 도정주씨가 필요해요. 그리고 도정주씨도 할아버님이 계시는 한 내가 필요할거예요...사랑은......노력하는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 살면서 이루어 낼 것들 중 하나죠.”
상당히 앞서가는 그녀의 발언이 짜증날 법도 했지만 도정주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결심한 듯 커피 잔을 꽉 쥐며 고개를 든 청아의 눈이 결의로 가득 찼다.
“결혼 해 주세요. 후회 없는 선택이 되게 해 드릴게요.”
뭔가를 지키기 위해 치열이 된 여자. 그런 여자는 무섭도록 진행속도가 빠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