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yo - 등 푸른 짐승 (下)
18.
실금 같은 햇빛 줄기가 넓은 거실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다. 살아있는 초록의 관엽 식물과 이미 죽은 원목 가구, 빗살무늬가 정교하게 파여진 바닥의 장판과 쇼파 위에서 구르고 있는 인간 한 마리에게까지 햇빛은 공평하게 그 빛을 나누어 준다.
정화는 둘둘 말아서 머리에 베고 있던 니트를 주섬주섬 껴입으며 아까부터 말없이 걸레질만 하고 있는 이채를 돌아보았다. 오전에 형의 맞선 자리까지 배웅한다며 나갔다 오더니 만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한 시선으로 애꿎은 바닥만 줄 창 닦아대는 이채. 정화는 아무래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 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이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손가락을 펴며 말 했다.
“이채씨, 이거 몇 개?”
“...두 개.”
“와. 멀쩡하잖아.”
정화는 탄성을 지르며 다행이라는 듯 이채의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호텔에다 정신을 흘려놓고 온 줄 알았어. 정화는 싱긋 웃었다.
“못 볼 거라도 본거야? 그렇게 멍 하게 있으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 간다?!”
정화는 이채가 꼭 쥔 걸레를 가져가며 그것이 망태 할아버지인 냥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나 이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볼 뿐 웃지 않았고, 그래서 정화는 다시 고개를 갸웃 했다. 정화가 말 했다.
“정말로 못 볼 걸 봤나보네. 누가 길가에서 옷이라도 벗든? 아니면 옷 벗으면서 춤추는 걸 봤어? 것도 아니면 옷 벗으면서 춤추면서 실례라도 하든?”
“......”
옷 벗으면서 춤추면서 실례하는 광경을 가장 못 볼꼴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러나 이채는 정화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았다며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이 공채. 하나 뿐인 자신의 형.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 아버지의 아들이자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호적상의 형제. 도정주의 명령에 따라 먼저 어딘가로 끌려갔고, 현재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보고 싶은 가족. 그런데 택시를 타려던 자신의 발목을 잡은 그 남자는 공채형을 알고 있다고 했다.
‘공채랑은 고등학교 기숙사를 같이 썼어. 밤에 사감 몰래 기숙사를 나가서 술도 마시고 여자도 사귀고 하던 나쁜 친구랄까? 공채가 보여준 가족사진이 있었는데 동생이 너무 미인이라 다리 좀 놔 달라고 한동안 졸랐었지. 근데 남동생이라는 거야, 맙소사... 아마 그래서 널 알아봤나봐.’
넉살좋게 웃으며 자신을 장우라고 소개하던 그 의 말이다. 그리고 이채는 그 말의 진실여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가 약에 의지하는 밤이 잦아들자 형은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 그 눈을 피해 기숙사로 들어갔었는데, 낮에 만난 장우라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제력만 갖추고 있다면 형과 같은 방을 썼을 확률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옷차림과 능숙하게 운전하던 차는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입하는 전형적인 고가 품 이였다.
“이채씨, 말 하지 않아도 알아 라는 건 광고에나 나오는 문구야. 사실은 말 하지 않으면 단 하나도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이채는 투덜대는 정화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은 웃고 있지만 입은 심통이 났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정화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채는 다시 정화의 손에서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걸레를 쥔 손바닥 안엔 장우라는 남자가 적어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에 기억을 해 둔 상태라 지워져도 상관없다. 열 한자리의 전화번호. 어쩌면 배후의 아군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새로운 지원군이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채는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쓱쓱 문지르는데,
“나 내일 돌아가.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라구.”
담담히 말하는 정화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이채는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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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방콕이였지만 지금은 인도랑 파키스탄의 국경 어디쯤에 있을 거야. 직업은 네고시에이터. 폴 포트와 미군이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들 때 그도 거기 있었어. 음, 그 때 아마 열 살이라고 했던가? 여튼, 금발머리에 푸른 눈이 멋진 남자야. 게르만족 아버지와 영국 인 어머니의 사랑의 산물이지.”
청중은 둘, 무표정한 도정주와 벙찐 얼굴의 이채. 화자는 하나,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싱긋 웃는 도정화. 그리고 주제는 그의 혼혈 애인에 대한 간단한 신상.
봄바람은 선선하고 열려진 베란다 창으론 보름달이 교태롭게 떠 있는 늦은 저녁.
정화의 커밍아웃이 계속 되었다.
“만난지는 한 오년쯤? 우리학교 로스쿨에 초빙강사로 일주일쯤 왔었는데, 그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어. 사실 꾸준히 만나고 있는 건 아니라서 애인이라고 하는 건 좀 애매하지만. 뭐, 내 마지막 종착점은 항상 그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도 내가 없으면 어딜 가든 킬링필드를 걷는 것 같데. 그러니 애인은 아니라도 사랑은 맞지.”
정화는 혼자서 만족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부드러운 눈망울이 평소보다 더 평온해 보여 내일 길을 떠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남길 것도 없고 남기지도 않는 방랑자의 습성 그대로인 정화. 이별을 준비하는 것조차도 방랑자답게 담백했다.
“그럼...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응. 일 년 만에 보는 거라 좀 떨린다.”
정화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모아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무척 들뜨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채는 그 행복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복잡하고 힘든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정화인데. 만나자 마자 이별이라더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줄이야. 이채는 조금 당황스런 얼굴로 도정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정화가 익숙한 듯 이렇다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정주가 말 했다.
“졸업은 어쩔 거냐? 육년간 다녔으니 성과는 내 놔야지.”
“그렇잖아도 가을엔 돌아가서 졸업할거야. 육년 동안 거의 놀면서 학교 다녔으니 학위는 못 따겠지만, 졸업장은 받아야지. 형이 말하는 ‘성과’ 란 거랑은 거리가 멀지만, 난 만족해. 그리고 할아버지도 내가 이만큼이나 했으니 족하다 하실 테고.”
정화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를 멀리 유학길로 보내어 방랑벽을 자극한 것은 삼남매의 할아버지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모냥이 보기 싫다며 비행기 티켓을 던져주며 당장 대한민국을 떠나라고 낮게 윽박지르던 할아버지. 정화는 고집 센 입매를 한 채 늘 대청마루에 앉아 복숭아나무를 쳐다보고 계시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때보다 흰머리도 흰 수염도 더 느셨겠구나. 정화는 옹고집 할아버지를 누가 꺾으랴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채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 정화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화가 가면 다시 저 남자와 단 둘 뿐인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적진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왔고, 그와 단 둘 만인 생활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당장 정화가 없는 내일 오후를 떠올리니 끔찍했다.
이채는 그가 눈치 챌 수 없게끔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버릇인 듯 팔짱을 낀 채 정화와 얘기중인 남자는 강변에서의 그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무관심 하면서도 때때로 다정하게 대해주고, 무표정 하면서도 가끔씩 자신을 챙겨주고. 분명 다정함이 몸에 밴 남자는 아닌데, 자신에게 만큼은 묘하게 마음을 써 준다는 것을 이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채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처음 이 집에 온 날 아버지에 대해 얘기 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만큼.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책임감도, 그에 대한 거부감도 느낄 필요 없었을 텐데. 이채는 자꾸만 짓눌러 오는 울적함을 떨쳐버릴 수 없어 반사적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그때 짐을 말끔히 챙겨둔 정화가 배낭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낸다.
“자. 이채씨 거야. 가져.”
이채는 정화의 손바닥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돌로 정교히 조각된 타지마할. 우뚝 솟은 둥근 지붕이 앙증맞은 열쇠고리다.
“팔 빠지겠어. 얼른 받아.”
뻗은 손을 좀 더 이채에게로 내미는 정화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채는 이 이별 선물을 받아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막막했다. 받으면 그걸로 끝일까? 늘 어딘가로 흘러 다니는 정화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채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자 정화가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더니 이채의 손바닥을 홱 잡아당겨 타지마할을 쥐어준다.
“내가 늘 가지고 다니던 거야. 이슬을 맞으면서 잠 들 때 이걸 꼭 쥐고 잤지. 그럼 꿈속에서 타지마할을 볼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이채씨도 잠 잘 때 꼭 쥐고 자봐. 내가 꿈꾸는 타지마할과는 또 다르겠지? 궁금하네.”
이제는 이채의 것이 된 타지마할을 가리키며 정화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채는 그 미소를 보다가 가만히 손을 오므렸다. 내일이면 비어버릴 정화의 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듯 손바닥 안의 타지마할이 까칠하게 느껴진다. 이채는 못내 슬픈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정화의 손이 다가와 이채의 어깨를 가만히 붙든다.
“뭐야. 내가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그런 얼굴 하지마.”
정화는 장난스레 빙긋 웃었다.
“어디에 있든 난 잘 있을거야. 사막에 떨어뜨려놔도 내가 살아남을 거란 거 알지? 그러니 이채씨도 잘 있어야 해.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이채씨답게 강한 마음으로. 알았지?”
이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넘칠 것 같았지만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며 토닥이는 정화의 말에 이를 물고 참았다. 정화의 말처럼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강한 마음으로 살아있다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마음의 길은 염원하는 곳으로 닿기 마련이니까. 이채는 고개를 들어 정화의 부드러운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활짝 갠 웃음을 지어보였다.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응. 언젠간 반드시.
정화는 이채를 꼭 끌어안고 주문처럼 속삭였다. 달이 인간들에게 성큼 가까이 와 있는 밤이었다.
평일의 공항은 한산했지만, 곧 보게 될 가족과, 연인, 친구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 없이 들떠보였다. 그리고 여권과 티켓을 들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정화도 몹시 들뜬 얼굴이다.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연인을 생각하는 건지 부드러운 눈을 접으며 미소 짓고 있는 정화. 이채는 그런 정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도시락 이예요. 기내식은 싫다고 하셨잖아요.”
정화는 쇼핑백을 열어 가지런히 쌓여있는 찬합을 보고 빙긋 웃었다. 어제 밤 잠들기 전 기내식을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다며 푸념했었는데 언제 또 그걸 듣고 이렇게 이쁜짓을 하는 건지. 정화는 이채가 못내 귀엽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채의 볼을 콕콕 찔렀다. 그러자 이채가 뭐 하냐는 눈을 하며 이마를 찌푸렸지만 정화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볼을 찌르는 손을 거두는 정화가 갑자기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이채씨,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마치 국가기밀을 발설하는 사람처럼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주위를 살피는 정화 때문에 이채는 덩달아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채의 귓가로 다가온 정화가 조용히 말 했다.
“내가 처음 온 날 기억나? 사과주를 마시고 알레르기를 앓았잖아.”
이채는 사과주를 꺼내더니 노르망디산이라고 자랑스레 얘기하던 정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술을 마시고 자신이 과실주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고, 더불어 그 남자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도 알게 된 날이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채는 그것이 비밀과 무슨 상관있냐는 얼굴로 정화를 보았다. 싱긋 웃는 정화가 다시 입을 연다.
“사실 그날 이채씨는 사과주를 한잔도 마시지 않았어. 이채씨가 술자리에 합류했을 땐 이미 사과주가 동이 났었거든. 생각해봐. 술이 다 떨어진걸 알고 이채씨가 위스키를 가져다 줬잖아. 그래서 내가 고맙다며 이채씨를 자리에 앉혔고. 기억나?”
이채는 더듬더듬 그날의 술자리를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동이 난 사과주 병을 거꾸로 들고 핥으려 하던 정화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이 벽장에서 위스키 몇 병을 꺼내왔고, 그러자 정화는 가져다준 답례라며 위스키 잔을 건넸다. 그리고 그 바람에 자신은 술자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해 버렸었다.
“...하지만 과실주를 마셔서 알레르기가 생긴 거라고...”
이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하며 정화를 쳐다보았다. 그 날 자신이 사과주를 한잔도 마시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내긴 했지만, 의사는 분명 과실주에 대한 알레르기라고 진단 내렸었다. 이채는 그럼 그 의사가 오진을 내린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정화가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 했다.
“잘 들어. 여기서 부터가 진짜 비밀이니까.”
정화는 다시 이채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무어라 속삭인다. 몇 분이 지나고,
“......알겠지? 형한테 아는 척 하는 건 이채씨가 알아서 할 문제지만, 내가 말해줬다고 하면 절대 안돼.”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는 정화에게 이채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모두가 잠 든 밤에 그런......
이채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화가 탑승할 시간이 가까워져 왔음을 알고는 이채가 준 도시락을 보물인 냥 품에 꼭 안는다.
“이제 진짜 갈께.”
“진짜 가세요.”
어제완 다르게 담담한 이채의 인사에 정화는 ‘너무하네’ 하며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그리곤 아쉬운 듯 한동안 이채를 바라보다가 손을 맞잡기도 하고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떠나야 할 사람이 그러한 것처럼 정화는 조금 냉정히 몸을 돌려 성큼성큼 스튜어디스가 친절히 맞아주는 출국 심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채는 손 안의 타지마할을 꼭 쥔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심사대를 막 통과하기 직전 갑자기 정화가 몸을 돌린다.
“...새벽마다 우는 닭이 있었어. 사람들은 그 닭이 우는 소리에 맞추어 하루일과를 시작하지.”
이채는 빠르게 다가오더니 느닷없는 얘기를 꺼내는 정화가 의아했지만 가만히 경청했다. 정화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닭이 울지 않는 거야.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내버려둔 채 늦잠을 자고 말았지. 그래서 그들은 닭이 다시 울게 만들도록 방법을 강구했어...만일 이채씨 같으면 어떤 방법을 쓰겠어?”
이채는 조금 생각해야 했다. 늘 울던 닭이 갑자기 울지 않고 사람들에겐 그 닭의 울음소리가 필요하고. 그렇다면 이채로써는 한 가지 방법밖엔 생각 할 수 없다.
“다시 울 때 까지 기다려야죠.”
정화는 참으로 이채다운 대답이라며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안에는 안타까움도 숨어 있었다. 정화가 말 했다.
“그래. 이채씨는 기다릴 사람이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닭을 사거나, 그 닭이 쓸모없어졌다고 무시 할 동안 이채씨는 끝 까지 기다릴 거야.”
정화는 조금 뜸을 드리다가 줄을 선 사람들이 심사대를 통과하는 것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때려서라도 닭을 울게끔 만들 사람을 알고 있어. 그리고 아마 때려도 그 닭이 울지 않는 다면 결국은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방법으로 죽여 버리겠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걸 확인한 정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채가 보였다.
“...이채씨. 내가 말 한 사람이 누군지 이채씨도 알거야...어쩌면 그 는 이채씨랑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만큼 극의 끝에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정화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이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꼭 쥔 새 하얀 손안엔 필시 자신이 준 타지마할이 쥐어져 있을 것이다. 정화는 이 소년처럼 어려보이고 가냘픈 남자에게 슬픔을 준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었다.
‘큰 오빠가 이채의 아버질 죽였거든. 그래서 내가 이채를 오빠에게 보내줬고. 왜? 그러면 안돼?’
정화는 화랑에서 정유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채가 받았을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그 가해자가 자신의 형이란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채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 자신은 곧 떠날 사람이고,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지 않을 방랑자에 불과하니까.
정화는 이채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다시 싱긋 웃어보였다.
“이채씨 마음은 누구보다 강해. 그 마음을 잃지 마. 그리고 내가 이채씨 편이란 것 항상 기억하고.”
정화는 이채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미안해. 용서해 줘. 자신의 형 대신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으로부터 사과했지만 이채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채는 소리 없는 정화의 사과를 받아 주기라도 하는 듯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 심사를 받고 터널 저 너머로 사라지는 정화. 미련 없다는 듯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는 그 뒷모습을 다시 만날 때 까지 기억하겠노라고 이채는 다짐했다. 손 안의 타지마할이 까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