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33)

 21.

한 낮의 시장은 열기와 인파와 소음으로 넘쳐났다. 더군다나 그 장이 열리는 날짜가 7일에 한 번 백화점의 호의로 열리는 벼룩시장이다 보니 조금 더 싼 값에 싱싱하고 좋은 물건들을 사려는 사람들의 땀내 까지 후끈 했다. 그리고 노점의 품목 또한 다양했는데, 사과, 배, 복숭아, 바나나, 키위, 딸기 등의 과일과 치마나 블라우스, 티셔츠와 청바지, 다리 마네킹에 씌워진 스타킹과 양말 등의 옷가지와 도자기나 액자, 족자, 엔틱 가구 같은 호사가들의 눈에나 들 법한 사치품도 있었다.

 “봐요. 저기선 코코넛 열매도 파나 봐요.”

이채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북적이는 인파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벼룩시장은 사과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과일 뿐만 아니라 열대의 나라에서 온 생경한 과일이나 식물 같은 것도 파는 것 같았는데, 이채는 털이 몽실하게 난 동그란 코코넛 열매가 신기했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열대과일을 파는 가판대로 걸음을 옮기며 이채가 말 했다.

 “키위의 확대판 같아요.”

“비슷하군.”

“그렇죠? 껍질이 까끌 해요.”

이채는 코코넛 하나를 들어 만져보았다. 몽실한 털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이 확실히 키위를 만질 때와 엇비슷한 감촉 이다. 이채는 손을 털며 코코넛을 내려놓곤 한 동안 그것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챙 넓은 모자를 쓴 인상 좋은 아저씨가 두꺼운 빨대를 꽃은 열매하나를 이채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곤 말없이 자글한 주름을 만들어 보이며 웃는 아저씨가 손짓을 해서 이채에게 마셔보라 권유했다. 이채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았다.

 “...생수 맛이 나요.”

이채는 눈을 찌푸리며 도정주에게 코코넛을 내밀었다. tv에서 봤을 때만 해도 상당히 달콤한 과육의 맛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실체를 접하고 보니 그 맛이 아니었다. 이채는 그가 다시 코코넛을 주인아저씨에게 건네주는 것을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두 번 다시 저 신기한 모양에 속지 않으리라. 그러나 코코넛 과육은 실망스러웠어도 시장의 소음을 비집고 그와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채를 만족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은 도정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표정만큼은 평소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보통의 일상을 맞는 것처럼 시장을 누비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한편, 정유는 종아리 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자락을 쥐고 노점에 몸을 숨겨가며 자신의 오빠와 이채의 뒤를 밟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의 틈에 섞이어 두 사람을 쫒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정유는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는 듯 집요하게 미행했다. 그리고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가리키는 이채 때문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따라오고 있는 장우의 뒤에 숨어야 했다. 혹시 나를 발견한건가? 정유는 장우의 어깨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이채와 자신의 오빠가 향하는 곳이 어느 노점의 가판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장우는 자신을 밀치며 다시 앞서가는 정유를 뒤 따르며 현재 그녀가 집요한 시선으로 쫒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복잡한 인파속에서 코코넛 열매를 들고 서 있는 예쁜 남자. 장우는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그 얼굴을 보다가 다시 정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유씨?”

“시끄러우니까 말 걸지 말아요!”

사람들의 틈에 섞이어 신경질을 내는 정유는 너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장우를 무시했다.

그리고 장우는 정유가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 보다는 현재 그녀가 지키려던 품위까지 잃어가며 뒤를 밟고 있는 사람이 이채라는 것에 더 놀랐다. 장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리 보이는 이채와 정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이채의 옆에 서 있는 검은 셔츠의 남자를 보게 되었고, 자신이 그 얼굴 또한 알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이런...”

장우는 갑자기 뒤 돌아보는 검은 셔츠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급히 정유의 팔을 잡아챘다. 그 남자 보다 조금 앞서가던 이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의아한 눈을 하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장우는 심장이 뛰었다. 이대로 정유를 데리고 시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주친 그의 눈이 장우를 놓아 주지 않았다.

“이봐요! 왜 이래요? 미쳤어요?”

잡힌 팔을 빼려는 정유가 거칠게 장우를 밀쳤지만 장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 낮의 열기와 시장의 소음이 한데 섞여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듯 했다. 그리고 장우가 과연 저 남자를 피해 무사히 이 시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할 무렵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채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며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남자. 장우는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이마와 정유를 잡은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높이 뜬 해가 살짝 기울 무렵 시장의 열기도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 보였다. 조금이라도 비싼 값에 물건을 파려는 사람도, 그들이 부르는 값 보다 더 싼 값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도 드디어 허기를 느낀 것이다. 가판을 늘어놓은 노점들이 하나 둘 씩 삼십분 간의 휴업을 선포했다. 그러자 이번엔 시장의 한 쪽에 늘어선 간이음식점 쪽으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채는 그 틈을 타 병풍을 파는 노점 옆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집에서 살림만 해서인지 오랜만에 제 몫을 다한 발이 붓는 것만 같았다. 이채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조금씩 지압해 나가는데 차가운 생수 병을 건네는 도정주가 이채의 옆에 앉았다.

“떨어져 봐.”

그는 가까이 앉은 이채와 자신의 사이를 벌렸다. 그리곤 이채의 발을 들어 무릎위로 당겼다. 그는 이채의 하얗던 발이 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보며 조금씩 만져갔다. 발가락을 지압하고 발등과 바닥을 차례로 눌러주자 처음엔 간지럽다며 웃던 이채도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나직히 호흡하며 이채가 말 했다.

“지금 일 그만둬도 먹고 살 걱정은 없겠어요.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거든요.”

이채는 눈을 감은 그대로 조금 웃었다. 그가 만져주는 발에 기분 좋은 통증이 어린다 생각하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채는 하늘과 마주보기를 포기하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발을 만지고 있다. 원래 그다지 표정이 없는 사람이지만 남의 발을 만질 때조차 저런 얼굴이라니. 이채는 그 사실이 못내 재미있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자 그가 발을 내려놓으며 손짓으로 반대쪽을 요구한다.

 “뭐가 그렇게 재밌지?”

이채는 신발을 벗고 반대쪽 발을 내 밀며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의 그 진지한 얼굴이 웃겨요 라고 솔직히 말 하면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무섭다, 잔인하다 등의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는 자신에게 만큼은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이채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캄캄하던 주방에서 나체로 서 있던 남자. 갑자기 나타난 가정부에게도 아무런 탓을 하지 않던 남자.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이제부터 맞춰 가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남자. 어느 회사의 옥상에 시체의 반이 있다고 말 하던 남자. 의외로 따뜻한 손을 가진 남자. 커다란 그림을 등에 새긴 남자. 그 그림의 무게만큼 짊어진 것이 많은 남자. 언젠가는 다른 여자와 결혼 할 남자......

이채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 했다.

“아직도 일곱 번이 남았어요...”

“......”

“열 번이나 맞선을 보는 건 결혼할 여자에겐 못할 짓 이예요...”

이채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못 할 짓이라고 말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 호텔 로비에서 봤던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냐고도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의 입에서 그녀와 결혼 한다는 말이 나오면 어쩌지? 그것은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두렵나?”

“......”

“내가 선을 보고 결혼 하는 것 말이다.”

그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꺼내면서도 자신의 발을 만지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다. 그리고 이채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내 의사는 중요치 않잖아요. 이채는 가슴으로 대답하며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그러자 남자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일어나. 요리사가 정성들여 만든 게먹고 싶다며?”

그는 이채의 발을 내려놓고 먼저 일어섰다. 그리고 이채는 그 행동이 어쩐지 야박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양말을 신고 신발에 발을 밀어 넣는데 괜히 그런 걸 물어봤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으로 함께 걸어보는 길 위에서 일부러 맞선 얘기를 꺼내어 그를 시험했고, 그런 주제에 더 이상 선을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솔직히 하지 않았다. 이채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인간은 원래 약하고, 자신 또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행동은 이 기분 좋은 날을 망칠만큼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약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 되지는 않는다. 이채는 자꾸만 스며드는 자기혐오를 떨치기 어려웠다. 그리곤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자 그의 팔이 다가와서 가볍게 일으켜 준다. 하지만 이채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이채는 먼저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이 스쳐가고 자신의 발은 남자의 걸음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채는 어느 순간부터 발을 멈춘 채 멀어지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떠나갈 남자. 아니, 먼저 떠나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일 지도 모른다. 이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참을 수 없었다. 함께 한 낮을 걷는 것에 만족해하던 조금 전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과 그의 미래는 비극이었다. 그것도 극단적인 비극. 웬 삼류 드라마란 말인가. 이채는 울고 싶었고, 참아보려고 이를 물었다. 그런데 어느새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남자의 발이 보였다.

 “청승맞군.”

그는 언젠가 자신이 내렸던 평가가 옳았다고 생각하며 폐병 환자보다도 더 하얗게 질린 이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에 드리워진 슬픔은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채에게 슬픔을 안겨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지독하게 잘 알고 있었다. 웃으면서 안겨오지만 진짜 속내를 비추지 않는 이 이채. 너는 그렇게 발을 뺄 염두를 하고 있겠지? 도정주는 조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채의 팔을 붙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간의 휴점 을 선포한 노점들이 다시 장사 준비에 한 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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