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3)

22.

화랑의 일 층에서 정유는 그림들을 걸었다가 때었다를 반복했다. 얼마 전 신인 작가의 전시회를 마치고 바로 봄맞이 대청소를 하며 그림들도 바꿔 걸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유는 사람들을 시켜 걸려있던 그림들을 전부 이층의 창고로 올려 보냈다. 그리곤 새로운 그림들을 가져와 풍경화부터 나체화 까지 하나씩 걸어보고 다시 물리고를 반복했다. 시계가 어느새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 아직 안했죠?”

장우는 정유가 달리의 그림을 걸고 있을 때 나타났다. 그는 평소의 습관대로 씨익 웃으며 정유에게 다가서서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오다가 샀습니다. 불타는 빨간색이 어쩐지 정유씨를 떠올리게 해서요. 장우는 꽃다발을 내민 그대로 쑥스럽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나 정유는 그림을 거는 데만 열중할 뿐 꽃도 장우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장우는 이번만큼은 그녀가 기뻐 할 것이라고 예상한 자신을 통렬히 비웃으며 바닥에 세워놓은 액자를 집는 정유를 거들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가 가득히 그려져 있는 어느 풍경화를 벽에 걸며 장우가 말 했다.

“어제는 잘 들어갔습니까?”

정유는 반짝이는 그림 속 바다에 시선을 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액자의 유리에 먼지가 묻어있는 걸 발견하고는 손수건을 꺼내었다. 그러자 장우가 손사래를 치더니 잽싸게 자신의 소매로 액자의 먼지를 훔쳐냈다. 씨익. 이마를 찌푸리는 정유를 보며 장우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어떻게 늘 그렇게 웃을 수 있죠?”

“제 웃음이 어떤데요?”

“이를 보이면서 진짜로 기쁘다는 듯 웃잖......아니, 됐어요. 관두죠.”

정유는 손을 내저으며 피곤한 얼굴을 했다. 데자뷰. 언젠가 자신의 둘째 오빠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가까이 있는 테이블을 짚은 채 의자에 앉았다. 사는 게 그렇게 행복해? 왜 항상 웃는 거야? 붉은색 복숭아꽃이 활짝 핀 도화정의 앞뜰에서 정유는 둘째 오빠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그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정유는 테이블에 놓여진 화병안의 노란색 장미를 보며 정화의 대답을 떠 올려 보았다. 그런데 늘 다섯 송이가 꽂혀 있던 장미가 네 송이 뿐이다. 정유는 그것이 몇 일전 찾아왔던 정화의 못된 장난이란 것을 알아채고는 조금 신경질 적으로 웃었다. 그러자 자신의 물음에 정화가 했던 대답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날 정화는 그 복숭아나무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왜냐면 그 순간에도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유는 늘 부드럽게 웃던 그 얼굴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질끈 눈을 감았다.

“정유씨? 어디 아픕니까?”

장우는 빨간 장미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정유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로 어디가 안 좋은지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장우는 걱정이 된다는 듯 손을 뻗어 흘러내린 정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정유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탁 쳤다.

“...미안해요...”

“아뇨. 제가 나빴습니다.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는데. 제가 경솔했습니다.”

장우는 진심인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까지 했다. 그리고 정유는 그가 그렇게 까지 나오자 조금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그냥 말로 했어도 될 일을 손 까지 쳐 내 버려 어쩐지 미안했다. 그러나 정유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무안함을 무마시켜 보려고 조금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바닥에 세워져 있는 액자를 아무거나 대충 짚어들고 다시 벽에 걸려하다가 그만 액자의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정유는 작게 난 상처 안에서 피가 스며 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우가 급히 다가오더니 자신의 옷자락으로 정유의 손가락을 감쌌다.

“괜찮으십니까?”

장우는 방금 전 보다 더 걱정스런 얼굴로 정유를 보았다. 이정도론 죽지 않아요. 하지만 피가 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피를 흘렸다고 죽는 건 아니라고요. 그래도 피가 나고 있습니다.

 “......”

정유는 조심스레 옷자락을 펼쳐 베인 손가락을 확인하는 장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 오후 그녀는 시장에서 이채와 자신의 오빠를 미행하다가 들켜버렸다. 아니, 들켜버린 건지 아닌 건지 확실히 알 순 없다. 하지만 분명 도정주는 뒤를 돌아 자신과 장우를 쳐다보고 있었고, 이채가 다가오자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다. 정유는 피가 스며드는 장우의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그에게 그만두라는 손짓을 했다.

 “물로 씻어야 겠어요.”

“그보단 소독약으로 닦아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그런 게 없어요. 무기를 거래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니까요.”

정유는 피곤한 얼굴을 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에서 옷자락을 때며 장우가 말 했다.

“기다리십시오. 금방 오겠습니다.”

장우는 황급히 화랑을 빠져 나갔다. 옷자락에 피를 묻힌 그대로 대로를 뛰어가면 분명 사람들이 놀랄 텐데. 정유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스며 나오는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더 깊은 상처일지도 모른다. 정유는 장우가 소독약을 사 들고 올 때 까지 그렇게 멍 하니 있었다.

그저께는 일찍 퇴근을 했고 어제는 결근을 하고, 오늘 또 일찍 퇴근을 하는 도정주를 보며 중오는 못내 찝찝했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으셨어요? 아니면 금덩어리라도? 중오는 묻고 싶었다.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신경은 온통 뒷좌석에 앉아있는 상사에게 쏠려있었다. 하지만 중오는 그저 혼자만의 추측을 남발하고 있을 뿐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서로써 라기 보단 오랜 시간을 옆에서 봐 온 친한 사이 라는 점을 내 세워 그에게 슬쩍 질문을 해 보려했다. 갑자기 왜 집에 일찍 가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도정주의 얼굴은 그런 것을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오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곤 얼마 전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는 정의 내리지 못할 찝찝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그 찝찝함은 이 이채라는 가정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게다가 중오는 얼마 전 이채에게 말실수를 한 적도 있어서 딱 집어 물어 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설사 자신이 철판을 깔고 다시 물어본다 하더라도 뭐라고 묻는단 말인가. 우리 사장님하고...무슨 일 있었어요? 중오는 마치 이채에게서 긍정의 대답이라도 들은 냥 맹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행여 라도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중오는 설마 설 마 하면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다짐하듯 머릿속에서 되 뇌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미 헛된 것이 된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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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주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늘 조용히 인사하던 하얀 얼굴이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풀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베란다에서 화초 잎을 닦고 있는 이채가 보였다. 그는 일부러 기척을 내려다 말고 소리 없이 이채의 뒤로 다가섰다. 젖은 수건을 들고 기다란 화초를 닦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인 이채. 문득 도정주는 이채가 저 화초 같다고 느껴졌다. 창백한 얼굴에 가는 몸. 부서질 듯 약해보이면서도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은. 정성을 쏟아도 금방 답례를 해 주지는 않지만 자신의 손길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보여주는 정적인 화초. 마지막엔 어떤 꽃을 피울 거냐? 그는 손을 뻗어 이채의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 그러자 어깨를 조금 움찔 하며 이채가 천천히 돌아본다.

“언제 오셨어요? 일찍 오실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이채는 몸을 일으키며 살풋 웃었다.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 그의 수트와 넥타이를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도정주는 이채의 팔을 붙잡고는 도로 바닥에 앉힌다. 그리고 이채는 그것을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다시 수건을 쥐었다. 닦던 잎을 조심스레 쥐고 끝에서부터 살짝 닦아 가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이채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는 가볍게 무는 듯한 입맞춤을 이채의 목에 남겼다. 그리곤 한동안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머리카락과 목에서 희미한 화초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그는 이채의 가슴으로 손을 둘렀다. 그러자 수건을 화초의 흙 위에 내려놓으며 이채가 돌아본다.

 “오늘은 담배냄새가 약하네요.”

“안태웠거든.”

“왜요? 늘 달고 사시잖아요.”

“네 말대로 종자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이채는 조금 웃어버렸다. 사장님이 그런 농담도 다 하시네요 하면서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나 하는 듯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새 수염이 자란 남자의 턱이 까칠했다.

 “어제 산 건?”

“여기요. 너무 작아서 있는지도 잘 모르겠죠?”

이채는 문득 생각난 듯 물어오는 도정주에게 풍란 화분 옆에 숨어있는 손바닥만한 황토 화분을 들어올렸다. 아직은 새초롬이 싹만 돋아난 그것은 어제 시장에서 유일하게 구입한 메리골드인데, 원래 사람의 허리높이 만큼 자라지만 품종을 계량해 팔뚝만큼만 큰다며 몇 개 남지 않았으니 사 가라고 하던 원예가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반 충동적으로 구매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채는 충동구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서리가 내릴 때 까지지만, 화려한 꽃을 피운데요. 어떤 모양의 봉오리가 나올까요?”

이채는 자그마한 화분을 다시 풍란의 옆에 내려놓으며 여러 가지 꽃의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작은 잎이 겹겹이 쌓인 민들레 같을까? 불타는 듯 화사한 장미 같을까? 아니면 이름 모를 들꽃처럼 가녀릴까? 이채는 즐거운 듯 다양한 꽃을 떠올렸고 그럴수록 저 메리골드가 자라날 것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도정주는 작은 화분 하나에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이채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표도 나지 않는 새싹을 틔운 메리골드 화분에 시선을 주었다.

 정말로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기만 한 푸른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이채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꽃을 떠 올리진 않았지만 진짜로 꽃을 피우기나 할 까 하는 의문은 들었다. 그러자 의심을 하는 심드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이채가 눈을 찡그렸다.

“주제에 꽃이 피기는 할까...라는 얼굴 이예요.”

 “귀신이군.”

그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히 말 했다. 그리고 이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 쉬고는 그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 도정주의 팔 안에 갇힌 이채가 담담히 말 했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 화분도 그렇겠죠. 지금은 너무 작아서 표도 안 나지만, 정성을 들이는 만큼 예쁜 몸을 보여 줄 거예요. 가녀린 새싹 안에 잎도 꽃도 다 품고 있으니까요.”

이채는 그의 팔이 자신의 종아리를 쓸어내리는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무언가 대답을 원하는 시선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탐할 뿐이다. 그래서 이채는 또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작은 것이 맵다는 것에 대해 더 얘기 해 봤자 무의미 하겠죠?”

이채는 조금 심통이 났다는 투로 말 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팔짱을 꼈지만, 그의 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허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채는 맨 살에 닿는 갑작스런 손의 감촉을 느끼며 당황해 버렸다. 작은 것에 대해 늘어놓으려고 하던 말들도 어느새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채는 문득 몇 일전 이 남자에게서 강제로 당할 뻔 했던 사건이 기억났다. 그날도 그랬다. 거칠지만 너무도 빠르고 순식간에 진행되어 가는 통에 조금만 더 방심했다면 일을 치루어 버렸을 지도 몰랐다. 이채는 자신의 목과 쇄골에 흔적을 만들어 가는 그를 밀치며 몸을 뺐다. 그리곤 뒤를 돌아 거실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발목을 잡아채는 강한 힘에 넘어져 버렸다. 이채는 무릎에 전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가 수트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더니 셔츠의 단추도 풀어갔다. 이채는 갑자기 무서워 졌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역광으로 남자를 비추고 있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해요...”

이채는 조금 힘겹게 그 말을 내뱉었다.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엎어진 그대로 다시 기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잡힌 발목이 주욱 잡아 당겨졌다. 이채는 자신의 몸이 들려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눈 떠. 네 깊은 속을 채우려면 시간이 빠듯해.”

이채는 그 말이 외설적이라고 생각했고, 괜한 모욕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낮게 웃더니 이채의 면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채는 황급히 눈을 떠 버렸다.

 “말 했잖아요...이러면 마음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하지 말아요!”

이채는 눈을 크게 뜨며 움직이려는 그의 왼손을 잡았다. 이럴 수는 없다. 그 날은 마음 운운했던 자신의 말이 먹혔는데 오늘은 그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할 무용지물이었다. 이채는 한 눈에 보기에도 당혹감과 위기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도정주는 마음 운운하는 이채의 말에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가 말 했다.

“강제로 했다면 그날은 정말로 네 마음을 얻지 못했겠지.”

이채는 비웃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나? 이미 마음을 줬잖아.”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이채의 옷자락을 들추었다. 그리고 이채는 자신이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관하며 옷이 하나씩 빠르게 벗겨져 가는 것을 보았다. 이채는 한기를 느꼈다. 그래서 차라리 동정심을 유발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채가 말 했다.

“추워요.”

“금방 뜨거워 질 거야.”

“......”

소용없었다. 남자는 더 이상 늦출 생각도 기다릴 생각도 없는 건지 퍼붓는 키스는 끈적했고 움직이는 손은 야했다. 이채는 그의 손이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이채는 마지막 부탁을 힘겹게 내뱉었다.

“여기선 싫어요. 너무 밝고 등이 아파요...제발.”

남자는 물끄러미 이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제발 이라는 말이 나온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혀뿌리가 얽히고 깊고 짙은 키스를 하며 이채는 이것이 정신이 깨어있을 때 하는 첫 입맞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었지만 침대위에 눕혀진 이채는 더 이상 쑥스럽지 않았다.

23.

밝은 대낮에 한 남자의 신랄한 몸을 대면하고 있는 것은 생경스런 공포를 자아냈다. 자신의 몸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애무해 가는 손길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휘돌게 했다. 넓은 방은 사람의 호흡과 살의 부딪힘이 만드는 열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한쪽으로 활짝 열어둔 유리창덕에 더운 공기가 만들어 지지는 않았다.

 이채는 남자의 손이 유도하는 대로 흥분해 갔다. 천장의 기하학적 무늬가 빙글빙글 돈다고 느끼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자신을 깊숙이 찔러 왔다. 

이채는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악문 이사이로 주체 못할 신음이 흘러 나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노련한 무용수의  발처럼 이채의 발등과 발가락도 힘 있는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 좁은 곳에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 올 때는 인내심을 발휘해 보려던 이채도 드디어 눈물을 맺고 말았다.

 그리고 도정주는 이채의 그 눈물이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슬퍼서 우는 것인지, 쾌락의 고통 때문에 우는 것인지. 

지그시 깨문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이채가 사온 메리골드의 싹처럼 가련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목에 팔을 감고 마치 새끼고양이처럼 매달려오는 이채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삼켜버릴 것 같은 입맞춤을 시도했다. 서로의 혀  뿌리가 얼키고 설켰다. 각자 다른 말을 내뱉고 다른 음식을 탐했을 혀로 서로의 냄새와 부드러운 타액을 알아갔다.

 약간 벌어진 채 떨어지는 입술과 입술 사이로 기다란 실금이 연결되었다가 반짝임과 함께 사라졌다. 

도정주는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채의 도톰한 귓불에 이를 세웠다. 선분홍색의 앙증맞던 귓불이 그의 타액으로 젖어갖고 이채는 다시 신음을 토해냈다.

 “...볼레로 같아......”

이채는 자신의 목 주위를 배회하는 남자의 입술을 느끼며 헐떡이듯 중얼거렸다. 반복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그의 손길이 볼레로의 정의 내릴 수 없는 선율처럼 이채를 뒤 흔들었다.

 미끄덩한 젤을 바른 그의 손가락 한 개가 더 이채의 속으로 틈입했다. 그러자 동공을 크게 뜨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는 이채에게 남자는 달래는 듯한 키스를 해 주었다. 

이채는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무엇이 어떻게 끝을 맺게 될지 두려웠지만 그의 몸과 다정한 눈빛이 이채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채는 자신의 내면을 핥아 버릴 듯 깊숙이 들어온 남자를 올려다보며 생전 처음 경험하는 동통을 느꼈다. 그는 이채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이대로 너를 알아가도 될까...”

이채는 힘겹게,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땀에 젖은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이채를 안아 들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가는 상체를 받쳐서 부서질 듯 끌어안아 준 다음 다시 조심스레 눕혀 준다. 

그사이 눈물이 이채의 눈 밖으로 흘러넘쳤다. 남자는 배와 배를 붙여 몸을 밀착시킨 그대로 천천히 움직여 갔다.

 한 사람의 내부와 한 사람의 외부가 연결 되어 질퍽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채는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아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 이라고 말 하지 못하게 만드는 쾌락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리저리 나부끼는 자신의 팔을 남자의 등으로 감았다. 힘을 조절해 움직이는 그의 등이, 어깨가, 팔이, 다리가, 자신의 속에 들어와 있는 그것 까지. 남자의 모든 것이 이채의 몸을 읽어갔고 잠식해 갔다. 이채는 마지막 순간 만개하는 꽃처럼 입을 벌리고 허리를 휘었다. 모든 세포가 밖으로 쏟아져나가 버릴 듯 한 감각이 이채의 전신을 울렸다. 그리고 도정주 또한 거친 호흡을 내 뱉었다. 그는 눈도 뜨지 못하고 헐떡이는 이채에게 입을 맞추곤 가만히 끌어안았다.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던 이채의 손도 격하게 남자의 등 뒤로 둘러졌다. 열어둔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며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이채와 남자는 밝은 한 낮에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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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지만 밖은 여전히 밝았다. 그러나 멀리 떠다니는 구름이 주홍빛으로 물 드려는 기미가 보이는 게 저녁이 다 되어가는 듯도 싶었다. 이채는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도정주를 돌아보았다. 빨갛게 부은 눈을 크게 뜨기 어려워 살짝 문지르는데 그가 혀로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이채는 그것이 간지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가 이채의 허리를 잡고 마주보도록 돌려 눕힌다.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이채가 말 했다.

“이제 떨어 질 수 없게 됐어요.”

이채는 눈을 접으며 가만히 웃었다. 한 번의 정사가 손가락 끝 까지 빨갛게 물들여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녹진해진 팔을 들었다. 이채는 그의 이마와 콧날을 살며시 만져보다가 가슴과 배를 지나 왼쪽 옆구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 곳에는 팔뚝만한 길이의 오래된 창상이 있었다. 있어선 안 될 것처럼 툭 불거져 나온 긴 흉터. 이채는 그 처음과 끝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 갔다.

“아까 절 알고 싶다 하셨죠?”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셨나요? 저는 어떻던가요?”

이채는 그의 상처에서 손을 때지 않은 채 담담히 질문했다. 그러자 그가 이채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안 쪽에 점이 있더군. 의외 였어.”

그는 살짝 눈을 찡그리는 이채를 무시하며 애무하듯 그 가는 허벅지를 만졌다. 그리곤 손을 조금 뒤로 넣어 좁은 그곳을 찾아냈다. 흠칫 몸을 떨며 자신의 손을 잡고 빼내려 하는 이채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가 말 했다.

“여기도 상당히 뜨거웠지. 네 얼굴 보다 마음에 들어.”

그는 짓궂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 이채로 하여금 당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말 보다 더 무서운 말이네요. 하지만 이채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손이 자꾸만 입구를 더듬으며 파고들 틈을 노렸기 때문이다. 이채는 그에게서 조금 멀어지려고 애 썼다. 그러나 이내 뒷골까지 당겨오는 통증에 허리를 접고 말았다. 그러자 도정주의 손이 이채를 바짝 당겨왔다. 그는 귀한 것을 품는 것처럼 이채의 등에서 엉덩이 까지 쓸어내렸다. 그 바람에 하얀 이채의 엉덩이가 다시 긴장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또 파고들지는 않았다.

“안 해. 뻣뻣하게 굴지 마.”

조금 경계하는 듯, 밀착 되 있으면서도 안겨오지 않는 이채를 보며 도정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채가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시선이 부딪혔을 때 살며시 팔을 뻗었다. 그는 그 작은 움직임을 무시하지 않았다. 무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허리를 안으며 이채의 팔을 자신의 목 뒤로 넘겨주었다. 훤히 들어난 이채의 목과 쇄골에 정사의 흔적이 울긋불긋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흔적들을 입술로 되 집어 갔다. 그러자 이채가 간지럽다며 소리 내어 웃는다.

“저도 사장님을 알아버렸어요...얘기해도 되나요?”

이채는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때지 않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그가 허락대신 이채의 머리위에 키스를 남겼다. 이채는 기분 좋은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며 말 했다.

“왼쪽 옆구리, 왼쪽 어깨에 칼로 베인 흉터가 있어요.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잘 움직이지 않고 왼쪽 무릎 근처엔 조그만 화상 자국이 있어요. 또 제 몸에 집착 하는 것과 다리가 떨릴 만큼 키스를 잘 한다는 것...사실 그건 좀 의외였지만요.”

이채는 스스로가 대견한 듯 거만하게 살짝 눈을 치켜떴다. 확실히 등에 푸른 문신이 있다는 것만 알던 때 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육체에 관한 것뿐만은 아니다. 물론 대낮의 정사가 서로를 오롯하게 알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긴 했지만 지금껏 한 집에서 지내며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식사를 하고 서로의 가족과 직업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아파하는지 이해해 갔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기억하는 시간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더 많이 쌓여갈 수록 키스하는 입술은 때지 못 할 것이고, 맞잡은 손은 놓지 못할 것이며, 집착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지만 이채는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가 서로 소중하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는 지금이 천국에 있는 것 마냥 행복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꼭 말리의 강변이 아니어도 좋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시간도 장소도 상관없다. 이채는 그 마음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떨어지면 죽어버릴 기세로 그렇게 포옹을 했다. 애틋한 포옹 이였다.

“내일도...오늘 같았으면 좋겠어요.”

이채는 그의 가슴에 살짝 얼굴을 부볐다. 내일도 모레도, 매일 매일이 오늘처럼 벅찬 하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채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도정주는 자신의 품속에 파묻혀 있는 이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가 좋아하는 사슴처럼 큰 눈망울이 조금 부어오른 채 붉게 변해 있었다. 그는 그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그러자 이채가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미소 짓는다. 예쁘면서도 붉은 눈가가 안타까운 그런 미소다. 그가 말 했다.

 “...오래된 호수가 있지. 낡았지만 배도 있고.”

이채는 자신의 눈가에서 손을 때지 않고 말하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냐는 듯 갸웃했다.

 “태풍에 휩쓸려 가지 않았다면 집도, 그 산발한 나무도 아마 그대로겠지.”

도정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을 보이는 이채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하얀 이마와 땀 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그는 그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쥐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말리는 아니지만, 거기도 만만치 않게 조용한 곳이거든.”

그는 눈을 깜빡이는 이채를 잠시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한 듯 보이는 눈망울이 아직까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해야 할 일들과 잔소리를 늘어놓을 비서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천천히 말 했다.

“함께 가겠나?”

놀라움에서 기쁨으로 변해가는 하얀 얼굴이 대답대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팔 안의 가는 몸이 그에게 만족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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