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거즈를 덧댄 손가락으로 찻잎을 우려내던 정유는 생각만큼 움직여 주지 않는 손가락이 불편했다.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몇 일전 공연히 혼자서 신경질을 내다가 액자에 베인 손가락은 장우가 급히 사들고 온 소독약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알콜 냄새가 콧속에 스며들 만큼 상처위에 들이 붙고 붕대를 감아도 피는 멈출 기세가 없었고, 급기야는 시야가 까마득히 흐려지는 통에 장우의 손에 이끌려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파상풍의 위험이 있을 정도로 깊이 베인 상처라 말하며 그녀의 손가락에 꼼꼼히 바느질을 했다. 몇 일후면 실밥을 풀러 가야하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정유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정주에게 이채를 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유 자신이었다. 그녀는 이채가 약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게 강단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인 이채를 그냥 내버려 두기엔 도박에서 좋은 패를 썩혀 두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아까운 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채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녀 자신에게도 유리하고 이채에게도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거래.
그러나 정유는 막상 이채가 그 조건을 무사히 수행해 나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자 단순히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만큼이나 예쁜 이채가 조금씩 오빠를 무너뜨려 가고 바꿔 가기를 바랐건만. 그날 시장에서의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던 이채와 오빠를 떠올리며 정유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장우는 벌써 삼십분 째 찻물을 우려냈다가 버렸다가를 반복하는 정유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혹여 라도 거즈를 덧댄 정유의 손가락이 뜨거운 찻물에 빠질까봐 노심초사 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의외로 차분하다. 평소 늘 개구쟁이처럼 웃던 눈빛이 아니었다. 복잡한 머릿속이 아파오는지 살짝 이마를 짚는 정유를 보며 장우는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나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도도한 표정과 손짓으로 자신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때의 모습이 더 그녀답다. 지금처럼 창백한 얼굴로 안절부절하는 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장우는 녹색으로 울어난 찻물을 또 다시 화분의 흙에다 버리는 정유를 보며 소리 없는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정유의 고민을 대신 생각해 주고 싶었고, 그래서 대신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장우는 자존심 강한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낼 심산이었다. 그리고 찻잎을 잔에 띄우는 정유를 향해 막 입을 열려하는데, 그 순간 장우의 입을 막으며 화랑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정유 아가씨.”
중오는 급하게 뛰어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정유는 찻물을 따르려다 말고 의아한 눈을 하며 중오에게 앉기를 권했다. 중오는 뛰어 오느라 돌아간 넥타이를 바로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을 대충 닦는데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와 정유에 관해 끈질기게 묻던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개장우였던가? 중오는 암암리에 불려지는 장우의 별명을 생각하며 궁금증을 눌렀다. 지금은 저 남자 보다 더 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 그 산장 있잖습니까. 옛날에 사모님이 그림을 그리시던 곳이요.”
중오는 숨을 고르며 정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는 듯 정유가 이마를 찌푸린다.
“갑자기 거긴 왜?”
“사장님을 찾으러 가야하거든요.”
“오빠가 그 산장에 가기라도 한거야?”
“빙고. 그러니 위치 좀 알려주세요.”
중오는 땀을 닦으면서 안경을 치켜 올리는 와중에도 빙긋 웃었다. 그리곤 품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정유 앞으로 내민다. 그런데 정유는 급한 중오의 마음도 모르고 금방 약도를 그려 주지는 않았다. 정유가 말 했다.
“오빠가 갑자기 거길 왜 간거야? 오년이나 방치해뒀으면서.”
정유는 찻물이 다 우려져 나온 잔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침전물 까지 생기려 드는 찻잎이 뜨거운 물에 녹아 흐물흐물해 져 있었다.
“혼자 간 거야?”
“아마도요.”
“날 바보로 아는구나.”
정유는 주저 없이 거짓말을 하는 중오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중오는 자신의 상사에 대한 이야길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 정유의 따가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었다. 갑자기 중제를 한 것은 관망하고 있던 장우였다.
“자, 정유씨. 고운 얼굴에 주름지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예쁘실 테지만요. 장우는 씨익 웃으며 따가운 눈초리로 중오를 보는 정유를 말렸다. 그런데 의외로 그 말이 먹혀들었는지 정유는 중오를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펜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쉽게 그려 줄께.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중오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중제를 해 준 장우에게도 가볍게 목례했다. 금새 약도를 다 그린 정유가 종이와 펜을 중오에게 건넸다. 그녀는 약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다시 품에 갈무리하는 중오를 빤히 바라보다가 심술 맞은 표정을 지었다. 나이 어린 여동생을 괴롭히는 언니의 얼굴 같았다.
“이채랑 함께 간 거 맞지?”
“......”
“내가 이채를 가정부로 뽑았다는 걸 오빠한테 말 한 것도 너구.”
“......실수였습니다.”
정유는 대답한번 편하게 한다는 투로 웃었다. 그리곤 손짓을 하며 중오에게 빨리 사라지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그녀는 보기 싫다는 듯 인사를 하는 중오를 무시했다. 화랑의 문을 열고 왔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흘끔 보며 그녀는 못 마땅한 얼굴을 했다.
“충성도 저 정도면 개 수준이지.”
정유는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기분은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던 장우는 그녀가 다시 예전의 그 도도함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도정유는 도정유다워야 한다. 그는 정유의 근심거리를 하루 빨리 제거하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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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을 잘라 만든 직사각형의 반듯한 욕조는 이 산장에 있는 것들 중 이채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다. 원래는 산중이라 욕조를 쓸 만큼의 물을 구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이곳은 호수가 가까워서 깨끗한 물을 쉽게 끌어올려 쓸 수가 있었다. 이채는 펌프에서 받은 물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도정주가 그 물을 욕조 속에 한가득 붓는다. 노송의 청아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것에 이채는 미소 지었고,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욕조속의 맑은 물을 손으로 휘저으며 이채가 말 했다.
“대나무 향기 같아요.”
이채는 나무가 늙으면 대부분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모든 늙은 나무들은 다 대나무의 향기를 지니고 있을까? 바람 소리에 따라 다양한 소리와 다양한 냄새를 풍기는 어진 대나무처럼 나이 든 나무들도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곧은 성품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무들을 잘라 인간의 향락품을 만들다니. 이채는 자신도 이 노송의 욕조 속으로 몸을 담글 기세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스워 조금 고개를 저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옷을 벗기 시작하는 그가 말 했다.
“벗어.”
남자의 팔과 어깨 근육은 약동하는 듯 움직였다. 복근은 권투 선수의 그것처럼 잘 짜여져 있었고 단단한 다리는 인상적 이였다. 그렇지만 이채는 저 멋진 몸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먼저 하세요.”
수줍다기 보다는 무언가 꺼려하는 목소리에 그는 버릇처럼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채는 또 뭐가 불만이냐는 듯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난감했다. 사실 이채로써도 호수 위에서 몸을 섞는 것 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함께 욕조에 들어가는 행위는 어쩐지 선뜻 응하기 어려웠다. 겁이 난다고 해야 할까?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달콤한 시간. 서로가 끔찍하게도 좋아 욕조에 붙어 앉아 상대방의 몸을 바라보고 탐하고. 그런 것은 연인들의 전유물이지 않는가.
이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도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곤 불안할 때의 습관대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못 말린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 쉰 남자가 이채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는 뭘 하려고요 하는 묻는 듯한 눈빛을 무시하며 이채의 몸을 욕조 속으로 빠트렸다.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곧 이어 이채의 몸이 떠올랐다.
“......”
이채는 기침을 하느라 원망의 말을 내 뱉지도 못했다. 눈, 코, 입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귀로도 물이 들어간 것 같아 찝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던 남자는 이채의 젖은 옷을 능숙하게 벗겨냈다. 허물을 벗듯 한 꺼풀씩 벗겨지는 옷에 이채는 눈을 감아버리는 것을 택했다. 금방 알몸이 된 듯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이채는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물결이 일며 등 뒤로 남자가 다가서자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친다. 자신의 허리로 팔이 감겨오는걸 보며 이채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문득 이채는 투명한 물 속으로 보이는 남자의 발을 자신의 발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보았다. 문질러 보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하는데 그가 귀엽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에 키스를 남겼다. 이채는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산장의 풍경보다 호수 위에서의 정사라든가 욕조 안에서의 장난 같은 것들이 더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김이 서린 천장에서 물방울이 길을 내며 미끄러졌다. 그가 말 했다.
“사냥이나 갈까?”
“불법 아니 예요?”
“법 타령 하는 건 새삼스럽지.”
그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뭘 사냥할건데요?”
“사슴이나 새 정도.”
“...먹기도 할 건가요?”
“가지고 온 게 바닥나면.”
이채는 물을 손안에 가두고 장난을 치다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왜 라는 물음을 담고 이채를 응시했다.
“삼일만 있을 거라면서요.”
“그래.”
“그럼 가지고 온 음식이 바닥 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채는 정확히 삼일치의 식량을 싣고 온 배낭을 떠올렸다. 조금 넉넉하게 담았으니 많이 먹는다손 쳐도 삼일은 거뜬히 보낼 수 있는 양이라 생각하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런데 그가 이채의 얼굴을 잡고 다시 눈을 마주한다.
“더 머무를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 봤나?”
꿈에도요. 이채는 소리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삼일 간의 계획만 잡고 왔는데 설마 더 머무르기야 할까. 그런데 갑자기 그가 짧게 웃는다. 이채는 눈썹을 찡그렸다.
“왜 웃어요? 무슨 의미죠?”
남자는 이채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놓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채는 그 행동을 이 산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실 그와 함께라면 장소는 상관없다. 다만 바쁜 시기에 산으로 떠나는 것이 못마땅하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그의 비서와 일곱 번이나 남은 맞선이 마음에 걸렸다. 이채의 목과 어깨를 따라 붉게 돋아난 정사의 흔적을 흩어보며 남자가 말 했다.
“총은 만져봤나?”
“세상 사람들이 다 사장님 같진 않아요.”
“다행이군. 가르치는 보람이 있겠어.”
그는 이채의 하얀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뿌옇게 올라오는 김 사이로 불그스름한 흔적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는 애무하듯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이채의 어깨가 흠칫 떨리면서 목 주변엔 소름이 돋아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손을 좀더 미끄러트려 안 쪽으로 파고들자 이채가 살짝 돌아본다. 수증기를 쐰 하얀 얼굴이 들떠 보인다 생각하는데 팔을 뻗더니 안겨온다. 그는 이채의 엉덩이를 받쳐 안으며 화답했다. 혀가 뜨겁게 엉키고 애무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짙어지자 욕조속의 물도 찰랑이며 밖으로 넘쳐났다. 높게 난 창밖으론 버드나무가 춤을 춘다. 산장에서의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