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산 속에서 맞는 아침은 도시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가득히 스며드는 것에 머리가 맑아질 정도로 산의 아침은 상쾌했다. 그러나 아무리 상쾌한 아침이라도 노곤한 몸 때문에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채는 벌써 한 시간째 시트 속에서 꼼지락 거렸다.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꿈틀대는 것이 지겨울 법도 하건만 침대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햇살을 받아 달구어진 등이 뜨겁다 생각하며 엎드려있던 몸을 바로 하는데 쟁반을 든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별다른 요리법이 필요 없는 빵과 우유가 담긴 쟁반을 침대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누운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채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이채는 전혀 고맙단 마음이 들지 않았다. 눈썹을 찡그리며 우유 컵을 쥐는 이채가 말 했다.
“사냥은 물 건너갔어요.”
이채는 어젯밤 욕조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당초의 씻는 다는 목적은 저 멀리 제쳐두고 격렬하게 서로를 만지고 부비고 하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노송나무 욕조 안에 물이 다 흘러넘칠 정도로 열렬했던 밤. 이채는 그 밤의 흔적들이 문신처럼 새겨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스스로도 불타올랐던 밤이지만, 아침이 이렇게 노곤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도정주는 투덜대는 이채를 보며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투덜거림까지도 못 내 사랑스럽다는 듯 이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이채의 찡그린 얼굴도 서서히 풀려갔다.
도정주는 이채가 가진 것들 중에 실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한 손에 잡히기도 하고 좋은 냄새가 나기도 하는 머리카락. 반으로 묵었을 때는 그것대로 풀었을 때는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는 묘한 신비감.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조금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이채의 이마에 붙은 것을 보며 손을 뻗었다. 밤 새 자신의 품에 안겨있었던 탓인지 이채의 얼굴이 더운 듯 홍조를 띄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때고는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이채가 그만 좀 하라는 듯 얼굴을 붉힌다.
날씨도 좋고 분위기도 끈적한 아침은 산장에 온지 정확히 삼 일째 되는 날이다. 이채는 이 남자가 준 암시처럼 산장에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삼 일가지고는 부족하다. 좀 더 산 속에서의 일상을 누리고 싶다. 이채는 문득 집으로 돌아가면 이 평온한 일상이 깨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사실 집으로 돌아가도 그닥 달리질 것은 없었다. 자신은 그가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가정부 역할에 충실하면 되고 그는 지금까지처럼 밖으로 나가 일을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생활.
“......”
이채는 갑자기 마셨던 우유를 도로 토해내고 싶었다. 울상을 짓는데, 그의 손이 다가오더니 자신의 컵을 가져간다. 이채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평범한 생활이라니. 아버지의 일을 차치하고라도, 자신은 아직 그에게 말 하지 못한 정유와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이 남자가 알고 나면......
이채는 빵을 손에 쥐어주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과 어깨를 쓰다듬는 남자는 도시에 있을 때 보다 훨씬 평온해 보인다. 마치 언젠가 그의 동생이 처음 온 날, 그날의 술자리에서 풀려있던 넥타이만큼이나 편안해 보이는 얼굴. 이채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 행복을 망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넘어가지 않는 빵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그러나 사실 이채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이채가 부서질 듯 꼭 쥐고 있던 우유 컵을 가져 갈 때부터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또 무엇을 생각했길래 죽을 듯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그는 침잠하려고 하는 이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얀 목을 쓸어내리며 달래었다. 빵을 씹는 이채의 얼굴이 애써 웃음 지었지만 생기 없는 인형 같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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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오는 새벽부터 출발해 정오가 다 될 무렵에야 겨우겨우 산 밑에다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곤 양복과 넥타이를 맨 그대로 구둣발로 풀들을 짓이겨 가며 열심히 산에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산을 올라도 도무지 그 산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오는 받아 줄때 없는 화를 내 보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상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이 내 지른 고함소리뿐이었고, 그나마도 산이 되돌려 주는 메아리 소리가 스스로를 덜 처량하게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그리고 깊고 깊은 어느 골짜기, 은사시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그 숲에서 중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 돌아봐도 온 통 은사시나무뿐인 숲을 중오는 쳇바퀴 굴리는 다람쥐처럼 뱅글뱅글 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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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을 비행하던 새 한 마리가 은사시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몸통과 짙은 보호색이 흔히 볼 수 있는 산새 같았다. 남자는 Zabala의 12구경 산탄총을 메고 기척을 죽였다. 수평쌍대의 총열을 가지 위의 새에게 향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왁!”
빠르게 다가온 이채가 지른 소리에 새는 속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남자는 허무한 시선으로 새가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새침한 얼굴을 한 이채가 모르는 척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다른 곳을 바라본다. 남자는 이제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번번이 이런 식으로 사냥감을 놓친 것이 벌써 네 번째다. 그가 쉬고 있는 새나, 목을 축이러온 산 짐승을 향해 총구를 겨누면 어느새 이채가 다가와 회방을 놓았다. 그리곤 뭐 하는 짓이냐며 쳐다보면 이채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그를 피해버린다. 남자는 자신과 다른 방향을 향한 채 딴 청을 피우고 있는 이채를 보며 총을 어깨에 걸쳤다. 괜히 심술 맞은 짓을 하는 하얀 얼굴이 얄미울 정도로 귀여웠다. 남자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채의 팔을 당겨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채가 총을 둘러멘 그의 뒷모습을 흘끗 보며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숲은 하늘을 가린 은사시나무 덕에 울창하고도 조금 어두웠다. 나뭇잎으로 뒤덮인 흙바닥은 축축해서 사람의 발소리를 감춰 주었고 밀림 같은 숲의 공기는 습하고 더웠다. 어디선가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남자가 놓친 새 일지도 모른다.
이채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가는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세상을 사는 그는 뒤쳐진 자신을 기다려 주는 타입은 아니다. 대신 이렇게 손을 붙들고 끌고 간다. 언제든, 어느 곳이든 그는 자신을 데려가 준다. 마음을 고백한 이례로 절대 혼자였었던 적이 없는 이채는 그가 자신을 얼마만큼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단 한번도 좋아한다던가,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 준적 없는 남자.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지금 이채에겐 언어가 되어 나오는 말이 더 중요했다. 심장에 와서 깊이 박힐 수 있는 단 한마디. 이채는 그것이 절실할 정도로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오 분 남짓 걸었을 때 쯤, 산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게 보였다. 이채는 자신이 본 새를 그가 못 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새가 앉은 나무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채는 조금 갸웃하며 잡힌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돌아보지 않고 말 했다.
“네 심술에 사냥 할 마음이 안나.”
뜻은 냉정하지만 어투는 전혀 그렇지 않은 말에 이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심술을 부리는지 이해 할 수 없어 딱히 뭐라 변명할 길도 없다. 그런데 남자가 자신의 보폭에 맞추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따라가지 못 할 까봐 걸음의 수를 줄여주는 남자. 지독하고, 잔인하고, 차가운 주제에 자신에게 만큼은 다정한 남자. 이채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에게 말 하지 못한 단 하나의 사실이 자꾸만 이채를 괴롭혔다. 반쪽만 남은 아버지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보다 더한 괴로움. 그것이 크나큰 불효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순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남자에게 말 하지 못한 하나의 사실이다. 이채는 더 이상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걷는 것이 힘겨울 만큼 몸의 힘이 빠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그리고 결국은 낙엽 위로 솟은 돌부리조차도 피하지 못해 그만 넘어져 버렸다.
“......”
남자는 자신의 손이 허전하다 느끼며 바로 돌아보았다. 하늘색 샌들을 신은 이채의 발가락에 피가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이채의 발을 들었다. 피가 몽글하게 맺힌 발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내자 따가운 듯 이채가 눈을 꼭 감는다. 그는 빨아낸 피를 뱉어냈다. 빨갛게 부어오른 하얀 발가락이 애처롭다 생각하며 이채의 눈가를 만져주었다. 그는 이채가 우는 것이 비단 돌부리에 벗겨진 발가락의 아픔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엎혀.”
그는 총을 손에 쥐고 이채에게 등을 보였다. 이채가 그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울음을 삼키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른다. 남자는 등에 매달린 무게의 가벼움 때문에 슬쩍 혀를 찼다. 다시 몇 발자국 때는데,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사람이 저 쪽 편에 서 있었다. 중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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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오는 지나치게 피폐한 몰골을 한 채 자신의 상사와 그 등에 엎힌 이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채는 인사도 없이 남자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만, 중오는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마음은 없었다. 중오는 통나무집으로 향하는 도정주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의 등에 엎혀 있는 가는 체구의 남자를 보며 중오는 ‘드디어’ 라는 심정이 앞섬을 깨달았다.
중오는 숲에서 길을 잃고 한 참을 헤매었다. 이리가도 저리가도 그 길이 그 길 같았지만 말 없는 은사시나무 들은 자신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중오는 발을 잘못 디디기도 하고 땅을 뚫고 올라온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숲을 뱅뱅 돌았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총성을 들었고, 띄엄띄엄 네 발이 연달아 발포되는 그 소리를 따라 겨우겨우 자신의 상사를 발견했다. 중오는 기쁨에 환호성이라도 지르며 그를 부르려 했다. 사장니임. 막 소리를 지르려 하는데, 그가 몸을 돌려 세웠다. 중오는 의아해 하며 조금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늘 자신을 헷갈리게 만들고 묘하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가정부의 발에서 피를 빨아내는 것이 보였다. 중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그 광경밖에 보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다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한 숨을 죽였다.
중오는 저 가정부가 올 때부터 일이 이상하게 꼬여갔다며, 정유가 그를 처음 소개해 준 날을 떠올렸다. 창백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이채라는 남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큼 미인이었다. 하지만 중오는 그가 남자라는 것을 금방 알았고, 그래서 그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상사가 가정부를 자빠뜨리기야 할려구.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그 생각이 잘 못된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후회했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남자에게 성별이 무슨 상관있겠는가. 중오는 이채를 처음 본 그날, 자신이 미인이라 생각했다면 그도 미인이라 생각할 것이란 걸 알았어야 했다. 그냥 봉자 할머니에게 계속 맡겼어야 했어. 중오는 이미 한 참 전에 일손을 그만둔 전 가정부를 그리워하며 다시 한 숨을 죽였다. 그 사이 검은 물의 호수가 보였고, 이내 통나무집으로 도착했다. 중오는 거의 육 년 만에 보는 집을 둘러보며 도정주가 이층에서 내려오길 기다렸다.
“여기까지 웬일이냐?”
이채를 내려두고 오는 건지 혼자인 그가 담배를 꺼내 물며 의자에 앉았다. 중오는 그의 뒤에 있는 테이블 위의 다기세트가 언젠가 사모님이 사용하던 그것 이라는 걸 금방 알아보았다. 늘 레이스가 달린 흰 브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던 그녀는 자신에게도 자주 찻물을 우려 주곤 했었다. 중오는 오래된 추억을 한 쪽으로 밀어두며 도정주를 쳐다보았다. 라이터를 꺼내어 그의 입에 매달린 담배에 불을 붙이자 그가 한 모금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뱉는다. 중오가 말 했다.
“어르신께서 내일 집으로 오시겠답니다. 진청아씨가 종종 어르신께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도 그 일 때문인 듯 합니다.”
중오는 그가 두 번 묻지 않아도 되도록 한 호흡에 보고했다. 그러자 도정주도 예상했다는 듯 별 다른 반응 없이 담배를 태웠다. 중오는 인내심 있게 그의 입이 열릴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장초가 다 타버릴 때 까지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가 실겁니까?”
중오는 한 걸음 다가서며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산을 헤집고 구르며 여기까지 찾아온 자신의 성의를 봐 서라도 돌아가 달라는 의지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다 타 버린 꽁초를 바닥에 버리려다 창 밖으로 내 던지는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마치 삼 년을 무인도에서 표류한 사람 같은 꼴을 한 자신의 비서를 보며 말 했다.
“차는?”
“산 밑에 있습니다.”
“먼저 내려가 있어. 뒤 따라 간다.”
중오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집을 나섰다. 버드나무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머리채를 가르며 휘날리고 있는 것에 조금 웃으며 왔던 길을 꼼꼼히 되짚어 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차가 있는데 까지 내려가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그러나 중오의 마음은 왔을 때 보다 더 무거웠다. 금기를 훔쳐 본 자의 버거움이 중오의 속에 들어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