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3)

 28.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약을 쓴 건지 머리는 어지럽고, 위는 매스껍다. 그러고 보니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남자의 비서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고는 몇 분간 뜸을 들였다. 이채는 중오가 하기 힘든 말을 하려 한다는 것과, 그 말이 사장님을 흔들지 말고 나가라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중오는 그렇게 단도직입 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을 것 이다. 하지만 말의 뜻은 거진 맞을 것이다. 한 참을 머뭇거리더니 그 비서가 드디어 입을 열 때쯤, 자신은 약이 묻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힌 채 큰 벤 안으로 끌려갔다. 당황해 하는 중오의 얼굴이 어렴풋하니 보이는데 차는 순식간에 맨션의 건물에서 멀어졌다. 잠깐만. 저 맨션엔 그가 있는데... 이채는 멀어져 가는 의식 마지막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다.

이채는 힘겹게 눈을 떴다. 다행히 안대나 끈으로 눈을 가린 것이 아니어서 자신이 잡혀 있는 곳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시끄러운 소음의 정체는 TV였다. 무슨 드라마가 하는지 남녀가 사랑싸움을 하며 죽겠다는 둥 죽어보라는 둥 한다. 이채는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려 했다. 그러나 납치범들은 눈을 가리지 않은 대신 손과 발을 끈으로 묶어 놓았다. 이채는 그제야 자신이 의자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자의 나무다리와 함께 묶여져 있는 다리를 빼내 보려고 낑낑대는 이채의 앞에 누군가의 신발등이 보였다. 이채는 발을 빼 보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얼굴이나 보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장우...였지요?”

장우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TV를 보고 있는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했다. 이채는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손이 묶여 있는 통에 장우가 컵을 대주어 조금씩 간신히 마실 수 있었다. 사람을 시켜 다시 컵을 가져가게 하는 장우가 이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 했다.

“왜 여기 온줄 알아?”

이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자신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군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채는 스스로가 했던 멍청한 생각을 비웃으며 장우를 올려다보았다. 장우는 머리를 조금 긁적이더니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씨익 웃는 그가 말 했다.

“간단히 말 하면, 널 납치 했어. 이유는 정유씨 때문이고.”

“...정유가 절 납치하라 하던가요?”

“설마. 정유씬 그런 여자가 아니야. 널 납치한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장우는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을 한 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이 납치했다며 당당히 밝히는 꼴이 이채로써는 조금 우스웠다. 그러나 이채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우스워도 웃지 않는 이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유 때문이면서, 정유가 시키지 않았다니. 이상하네요.”

장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그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이채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편했다.

 “정유씨가 너 때문에 골치 아파 하고 있어. 늘 똑 부러지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안절부절하고, 도도하던 얼굴은 생기를 잃었어...그런데 네 얼굴도 그다지 생기 있어 보이진 않네.”

조금 미안한 걸? 장우는 그 웃음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는 걸아는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자신이 그렇게 웃으면 모든 여자들이 삼초 안에 쓰러진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그런 웃음이다. 그렇지만 이채는 그 것이 조금 무서웠다. 누구든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저렇게 웃으면 두려워하겠지만, 이채의 경우엔 그가 정유와도 관련이 있는 듯 하여 더 꺼림직 했다. 문득 호탕하게 웃던 장우가 웃음을 거두더니 이채의 눈을 응시했다.

“진짜로 미안하다.”

“납치 한 게요?”

“그것도 그렇지만, 네가 공채 동생이라는 게 더 미안하네.”

장우는 담담히 자신의 얘기를 듣는 이채를 보며 조금 머뭇거렸다. 납치범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공채 행방은...알았어?”

“전혀요.”

“그래...사실 나도 널 만난 뒤에 좀 알아봤지만, 걸리는 데가 한군데도 없더라.”

장우는 씁쓸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공채라는 친구는 똑똑하고 머리도 좋은,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기숙사를 빠져 나와 개자식과 함께 셋이서 숯 한 밤을 돌아다니며 마시고, 먹고, 뒹굴고, 깽판 치고 하던. 말하자면 의리에 죽고 살던 그 시절의 죽마고우였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대학을 가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겨 버렸다. 그리고 장우는 학교가 같은 개자식과 함께 어울렸고, 공채라는 친구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얼마 전, 도화의 도정주 사장이 한남 제약의 이명세 이사를 두 토막 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야 장우는 그 남자가 공채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떠 올렸다. 그렇지만 그 때도 그런가 보다 하며 안일하게 넘어갔다. 한 때 죽마고우씩이나 되었던 공채의 신변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았었다. 장우는 그 점이 미안했다. 그리고 그런 공채의 동생을 납치한 사실이 조금 더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 장우에겐 정유가 최우선 이였다. 그 때 공채가 먼저였던 것처럼, 언젠가 개자식이 먼저였던 것처럼. 씁쓸하게 웃는 장우를 보며 이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해 줄 수 있어요?”

“뭐든지. 대답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장우의 가벼운 대답에 이채는 안심했다.

“정유 때문에 절 납치했다 했는데...왜죠? 전 정유와 더 이상 볼 일도 없는데요.”

그 것은 사실이었다. 얼마 전 정유가 그 남자를 찾아 왔을 때, 그는 정유에게 무시 못 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정유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곤 자신의 손을 놓아버렸다. 이채는 앞으로 다시는 정유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 설사 내가 보고 싶더라도, 자존심 강한 정유는 나를 거부할 것이다. 이채는 수렁에 빠졌을 때 그러하듯 담담하게 보이려고 애 썼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울며불며 난리치지 않는 이채가 장우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정을 주어선 안 된다. 장우는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 잡으며 말 했다.

“정유씨가 널 좋아하거든. 그래서 네 뒤를 밟기도 하고, 널 보며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네. 안 들어...”

이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끝을 흐리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장우를 보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장우는 더 이상 이채와 대화하기 싫은 듯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TV를 시청하던 그 남자에게로 갔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물 줘. 내가 올 때 까지 손대지 말고.”

장우는 이채를 가리켰고,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 했다. 이채는 자신을 힐끗 보고는 문을 열며 나가는 장우를 급히 불러 보았다. 그가 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면 이 납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우는 이채의 부름을 외면하며 사라졌다. 이채는 허무하게 닫히는 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어떤 머릿속을 하고 있길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단 말인가. 만일 세상이 멸망하고 자신과 정유 단 둘만 남는다 해도,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여자다. 이채는 풀길 없는 억울함에 애가 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시끄럽게 TV를 틀어 놓고 있던 남자가 이채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숙인 이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가만히 떠지는 눈을 보며 사진하나를 이채의 얼굴 옆에다 대보더니 심각한 얼굴을 한다.

 “...너, 진짜 이 공채 동생이냐?”

이채는 모르는 남자에게서 형의 이름을 듣는 것이 두 번째라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개자식, 석성범은 역시 어디서 봤다 했어 라며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의 손 안에는 이채와, 공채, 그들의 아버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들려져 있었다. 이채는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사진을 들고 있단 사실보다, 환히 웃고 있는 형이, 아버지가 더 반가웠다. 이채는 남자가 든 사진 속에 얼굴을 파묻듯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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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주는 전에 없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사실, 평소에도 동요를 보여주거나 냉정을 잃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오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상사를 보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심정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얘기 할 것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지만 않았어도. 끌려가는 그 순간 멍하니 있지만 않았어도. 유도를 검은 띠 까지 수련하면 뭘 하나. 중오는 자책하며 반성했고, 반성하며 자책했다. 그러나 그 반성을 무의미 하게 만든 것은 아직도 자신이 이끄는 정보팀이 아무런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납치해간 차량의 조회가 끝나면 울리기로 한 데스크 위의 내선 전화기가 침묵을 지켰다. 중오는 더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조차 들지 못 했다. 지금껏 팔짱을 끼고 있던 도정주가 그런 중오를 흘깃 보며 말했다.

“안절부절 할 것 없어. 무사 할 테니까.”

그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손짓으로 중오를 불렀다. 그러자 중오가 라이터를 켜며 그가 문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자책감에 어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중오에게 별 도움이 안 되리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채는 진짜로 무사 할 것이다. 비록 그 안전이 오늘을 넘기면 사라지겠지만, 납치범들은 아직까진 이채 몸의 털 끝 하나 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협상을 해 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였거나 이쪽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무리 배포가 큰 납치범이더라도 자신의 밑에 있었던 이채를 함부로 대 할 순 없을 것이다. 도정주는 연기를 내 뱉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 내내 침묵하고 있던 전화가 울렸다. 중오는 이 보다 더 반가울 순 없다는 심정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알아냈어? 어디 차야? 그러나 대답은 절망적인 수준 이였고, 중오는 또 다시 실망했다. 그리고 도정주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중오를 보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더는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오늘 안에는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넥타이를 조금 풀며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뒤를 중오가 급히 따랐다. 어느 때 보다도 침착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분노를 가득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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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주의 첫 타깃은 한남제약이었다. 그는 언젠가 회사를 손에 넣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김회장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걸 알았다. 떨떠름한 얼굴의 김회장은 그의 생각 대로였다.

“자네 아직도 내 회사를 노리나.”

김회장은 사무실로 불쑥 찾아온 도정주를 보며 꺼림직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피어 물고 있던 시가를 데스크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싫지만 억지로 한다는 듯 도정주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어 간단히 거절했다. 그는 시간이 촉박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본론을 말 했다.

“회사에 불필요한 이사들이 많더군요.”

도정주는 와인 병이 가지런히 정리된 벽장을 쳐다 볼 뿐, 김회장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김회장이 신경질 적으로 시가를 바닥에 던지곤 발로 밟았다.

 “원 하는 게 뭔가?”

“말 했지 않습니까. 회사를 손에 넣겠다고.”

“그럼 손에 넣지 그러나?”

김회장은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며 띠꺼운 눈을 했다.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네까짓 게 설쳐 봤자 뭘 어쩌겠다는 거냐. 김회장은 거만하게 도정주를 쳐다보았다.

 “이사들이 다 돌아섰습니다. 아직 모르셨습니까?”

“거짓말.”

“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전 회사의 지분 삼십 프로가 제 손에 있다는 것을 말 하고 싶을 뿐입니다.”

도정주는 여전히 벽장을 바라보았다. 코르크로 밀봉한 와인들이 은은한 붉은 빛을 띄었다. 그는 문득 이채의 목과 등에 돋아났던 정사의 흔적들을 생각했다. 그것은 하얀 이채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붉은 색이였다. 지금 어디 있는 거냐. 그는 벽장에서 시선을 때며 김회장을 돌아보았다.

“지분의 반이 채워지면 그때 명함을 파지요. 그 자리에 제 이름이 올라갈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도정주는 김회장이 앉아 있는 데스크를 가리켰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성난 외침을 무시했다. 저 늙은이는 아니다. 회사를 지키느라 스파이를 보내는 것밖엔 머리를 굴릴 수 없는 늙은이다. 애초에 이채가 자신의 집에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고, 이채에 관해 한마디 운도 때지 않았다. 도정주는 한남 제약의 건물을 빠져 나가며 다음 목적지를 생각했다. 장현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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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기를 찾은 것은 의외의 장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그림을 그리던 손을 놓고 그림을 팔게 된 여자. 도정주는 정유의 화랑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장현기와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정유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 봤을 때는 장현기도 의외라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정주는 장현기가 뜻밖의 장소에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말 했다.

“조카분이 사람을 구슬리는 재주가 좋더군요.”

“...무슨 말인가?”

장현기는 의자에 앉는 도정주를 눈을 가늘게 뜨곤 쳐다보았다. 아들놈이 열심히 손을 뻗치고 있는 정유인지라, 오랜만에 들려 마음도 떠 볼 기세로 왔건만. 장현기는 자신의 장남은 비록 개장우지만, 조카인 청아는 야무지고, 똑똑하고, 야망도 큰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친 딸처럼 생각하고 아끼는 청아를 묘한 어투로 깔아 뭉게는 남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 조금 인상을 썼다. 그러나 도정주는 정유가 우려낸 찻물에 시선을 두며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결혼해도 회사는 자기가 지키겠단 생각은 당차더군요. 하긴, 회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아버님께 점수를 따겠지요.”

장현기는 의아해 하는 정유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탁, 내려놓으며 도정주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다 할 수는 없었다. 장현기가 말 했다.

“내 조카와 혼인하기 싫으면 말게. 괜히 여자아이 혼삿길 막을 말은 하지 말고.”

장현기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고, 조카를 생각하는 그 마음은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라.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여자가 그 재산을 들고 시집을 가겠다면 모든 남자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재산을 시집에 한 푼도 풀어놓지 않고 자신이 관리 하겠다 하면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쉽게 받아들이진 못 할 것이다. 옛부터 남자들은 여자가 가진 돈 앞에선 두 가지 자세뿐 이였다. 흉악하게 접근하여 빼앗거나, 믿게 만든 뒤에 빼돌리거나. 그리고 장현기는 은근히 후자를 선택하고 있었다. 자신의 조카가 시집을 가기 전에  내조에 충실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의 회사를 대신 살펴줄 생각 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진청아가 힘을 필요로 한 이유의 실상은 장현기 때문 이라 할 수 있었다.

“조카분과 결혼 할 일은 세상이 두 쪽 나도 없을 겁니다.”

“......”

“하지만 그녀가 회사를 이끌어 나가도록 도와 줄 의향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사장님껜 꽤나 수난이지요.”

도정주는 재미있다는 듯 말 했지만 표정은 없었다. 그리고 장현기는 그 것이 더 공포스럽다 생각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원 하는 게 뭔가?”

“한남 제약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압니다. 제게 양도하십시오.”

장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것뿐인가 하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가 다시 말 했다.

“진청아양에게 할아버님께 가는 짓을 당장 그만두라 하십시오. 힘을 써서 끌어내고 싶진 않습니다.”

장현기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힘을 쓰고 싶진 않다고 말 하는 것이 참 우스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리곤 이것이 끝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도정주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마지막입니다...어디 있습니까?”

“뭐가 말인가?”

“그 장남 말입니다. 개장우라 불리지요?”

장현기는 얼어 죽을 놈의 아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놈이 기어이 사고를 낼 줄 알았지. 이제는 너무 늙어 버린 아버지는 아들을 급히 호출했다. 하지만 장우는 세 번이나 통화를 넣어도 아무런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고, 그래서 도정주는 더 확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하고 있던 정유만이 당황한 얼굴로 오빠가 나가는 뒤를 급히 쫒아갔다. 그녀는 차에 대기하고 있던 중오를 다그쳐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중오는 도정주가 차에 오르자마자 빠르게 출발 해 버렸다. 정유는 자신의 오빠가 한 말을 떠올렸다.

 ‘개장우라 불리지요?’

정유는 처음으로 장우를 걱정했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거예요. 급하게 차를 빼서 몰고 나가는 그녀는 장우가 필시 자신 때문에 일을 쳤을 것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정유의 차가 급회전을 하며 도로 위를 달렸다. 목적지는 도정주의 사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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