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채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남자가 다가와 모든 것을 챙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해 주었다. 몸을 닦아 주기도 하고, 마른 입술을 물로 축여 주기도 했으며, 양치질을 도와주는가 하면, 무료한 시간을 위해 책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채는 그가 준책을 평소의 습관대로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채는 그가 면담을 위해 의사와 나가는 것을 보고는 책을 덮었다. 링거줄이 달린 팔목에는 아직도 끈으로 묶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채는 입고 있는 환자복의 바지춤을 살짝 걷었다. 그러자 발목에도 파란 멍이 들어 있었다. 이채는 자신의 팔과 발을 번갈아 보며 잠시 그렇게 있었다. 오전에 그는 자신의 몸을 닦아주며 끈 자국이 남은 팔과 발목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자신의 팔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채는 팔이 아팠지만 내색 할 수 없었다. 눈을 찌푸리며 참고 있는데 그가 푸르게 난 멍 위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는 입술이 참 뜨거운 남자였다. 눈이나 코, 이마에 스치듯 입맞춤을 해 줄때도, 혀를 얽히어 깊은 키스를 할 때도, 목과 가슴, 배 위에 흔적을 남길 때도, 그리고 발가락의 피를 빨아내 줄때도.
이채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숲에서 자신의 발을 잡고 망설임 없이 입을 가져다 대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하면 발가락도 빨아 줄 수 있어야한다. 손가락도 아닌 발가락을. 이채는 창틀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병실의 바닥에 퍼지는 것을 보며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참새가 내려앉은 듯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다. 병원 신세를 져야하는 꼴만 아니라면 피크닉을 가고 싶을 정도로 햇살이 맑았다. 이채는 링거줄이 매달린 팔을 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살짝 열려있는 창문가로 다가가 활짝 열어 제치자 봄바람이 이채의 얼굴을 휘감았다. 이채는 병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풀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환자들도 있고, 배드민턴을 치거나 농구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채는 언젠가 형과 함께 학교의 운동장에서 공을 가지고 놀았던 게 기억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정확히 몇 살 때의 일인지도 몰랐지만,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자신과 형은 그 운동장을 떠나지 않은 채 동그란 공을 쫒아 다녔다. 어쩌다가 힘껏 찬 공이 담장을 넘어가거나 창고의 지붕위로 올라갈 때 면 형은 늘 자신을 무등 태워서 공을 꺼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의 형은 아주 크고 대단해 보일정도로 이채의 자랑이었다. 지금의 그 남자만큼이나 따뜻하고 의지가 되었다. 이채는 등 뒤에서 뻗어오는 팔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팔이 이채의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입을 맞춘다.
“...우리 형은 어디 있어요? 살아 있다면 보고 싶어요.”
이채는 허리에 감긴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등에 와 닿는 단단한 몸에 안심이 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 했다.
“잠깐만 볼 수는 없을까요? 오래 붙들고 있진 않을게요.”
이채는 혹여 라도 형이 섬이나 배로 끌려가 노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금방은 볼 수 없겠지만 살아 있으니 그걸로 된 거였다. 나무위에 앉아 있던 참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이채는 숲에서 사냥을 하는 그를 방해한 것이 떠올라 조금 웃었다.
“보고 싶나?”
“형이잖아요...”
이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이고 형이다. 보고 싶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채는 그의 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품 안의 가는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남자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죽었다.”
“......”
“끌려오자마자 섬으로 보내졌는데, 자살했다더군.”
남자는 이채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풀밭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병실까지 들려왔다. 그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채를 안아 들었다. 링거줄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위에 눕혀주자 이채가 아까의 그 책을 집어 든다. 이채는 다시 책을 탐독했다. 그리고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채는 묵묵히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이 조금 전 대화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창가로 다가섰다. 활짝 열려진 창을 반 쯤 닫고는 팔짱을 낀 채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평화롭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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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도화정은 온통 흰색과 붉은색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나비와 벌은 꽃의 주변을 맴 돌고, 꿈틀대는 벌레는 나무를 기어올랐다. 도노인은 대청에 앉아 그 광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십이 넘는 세월동안 도화와 함께 하며 그것들이 봉오리를 맺고 터뜨리고 지는 것을 지켜봐 왔다. 하지만 오늘 만큼 도화가 지는 것이 안타깝다 여긴 적은 없었다. 도노인은 그세 얼굴이 많이 상한 정유를 보며 한 숨을 내 쉬었다.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어찌 하고 싶으냐.”
정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도노인도 그것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꽃처럼 고이고이 키워온 손녀딸이 천하의 개망나니와 혼인을 한다니. 도노인은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결혼 이예요. 그러니 속상해 하지 마세요.”
정유는 그나마도 정략결혼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상대가 호랑말코든 개망나니든, 어찌되었건 그녀는 자신의 반려를 스스로 결정했고 거기에 만족했다. 비록 쫓겨 가듯 도화정을 떠나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의 오빠와는 더 이상 부딪히지 않는 것이 장우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이것이 도화정에서의 마지막 찻물이라 생각하며 이젠 많이 늙어버린 할아버지의 앞으로 잔을 밀었다. 도노인이 체념한 듯 그 찻잔을 받았다. 그리고 정유는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동안 쭉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 했다.
“제가 그림 그리는 걸 그만 뒀을 때, 왜 제겐 일을 주시지 않았어요? 아들이 아니라 서요?”
정유는 자신이 붓을 놓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의 부고 소식 까지 들었다. 한 달세 두 번의 상을 치룬 집은 누구도 제정신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큰 오빠는 바람이라도 불었냐는 듯 감흥 없이 굴었고 둘째 오빠는 여전히 밖으로 돌았다. 그녀는 이 큰 집에서 의지할 것을 찾는 걸 포기했다. 그래서 사업의 일선으로 나가 일을 배우며 홀로 서는 방법을 찾아야 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녀가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기 보단 신부수업을 하며 정략결혼의 예행연습을 하길 더 바랐다. 그리고 나는 희생물이 아니라며 항변하는 그녀를 도씨 성을 가진 남자 중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정유는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복숭아나무에 시선을 주고 있는 도노인은 손녀에게 아무것도 얘기 해 줄 것이 없다는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물어봤자 소용없다. 이미 지난 일이고, 이제 와서 따져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집에서의 마지막인걸 알면서도 이별의 슬픔이나 눈물은 없었다. 그녀는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집에 애착이 없다는 것에 조금 놀라워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이마위로 들었다. 큰 절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사락사락 떨어지는 복숭아 꽃 같았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는데, 열릴 것 같지 않던 도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들을 낳으면 데려오너라.”
“...오빠도 그런 말을 했었어요.”
“그렇겠지. 그 놈은 자식을 낳을 수 없을 테니 네 아들에게 자리를 주겠단 뜻일 게다.”
정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날 장우를 데리고 나오면서 들었던 그 말이 그런 뜻 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집을 떠나는 것 보다 오빠의 그 말이 더 슬펐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에게 하려 했던 일을 반성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것이 가족일까, 남매 일까, 형제 일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흐드러진 복숭아꽃잎을 밟으며 정유는 도화정을 떠났다. 그녀가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은 조금 먼 미래의 일이다.
이채가 입원한지 이주일이 넘어갔다. 치료를 받고 어깨를 제대로 쓸 수 있을지의 여부를 검사받고. 이채는 가정부 생활을 할 때보다도 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삼 주가 다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의사는 퇴원 허락을 했다. 약을 꼬박꼬박 복용하고 통원 치료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의사에게 이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채는 중오가 자신을 보는 것이 껄끄러울 거라며 그에게 혼자만 오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늘 그렇듯 이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채는 전선처럼 주렁주렁 달린 링거줄을 빼고 나니 날아갈 듯 홀가분하다 느끼며 그동안 병원에서 늘어버린 짐들을 쌌다. 한 달이 못되게 지낸 병실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려서인지 막상 떠난다고 하니까 조금 아쉬웠다. 깨끗이 치운 건가하며 병실을 둘러보고 있는데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이채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줄 알았고, 그래서 빠르게 병원을 나섰다.
그런데 입구에 주차된 차에 오르는 이채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채를 태우고 출발하는 차도 남자의 세단이 아니다. 이채는 자신이 탄 택시와 비껴가는 그의 차를 보며 얼른 몸을 숙였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병원의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차와 자신이 탄 택시가 점점 거리를 띄워 간다. 지금은 이만큼이지만 곧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겠죠.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나를 찾아주세요. 이채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주차를 한 뒤에 이채의 병실로 들어선 남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성격만큼이나 말끔히 정돈 되어 있는 침대위엔 그가 이채에게 가져다 준 책과 짐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책을 들어 올리자 메모 한 장이 떨어진다. ‘사랑 합니다’ 반듯하게 쓰인 글씨가 이채만큼이나 단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