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집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만일 바늘이 떨어진다 해도 그 소리가 크게 울릴 것 같은 적막함이 깃들었다. 그러나 집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넓은 집을 차지한 그 사람은 거실의 쇼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오는 문득 소리가 되려는 한숨을 얼른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자 자신의 상사가 서류를 탁자위로 내려놓으며 말 했다.
“장현기가 지분을 내 놨으니 진행시켜.”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누르며 쇼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생활 패턴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그는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함을 느꼈다. 그리고 중오는 서류를 챙기며 도정주를 흘끗 바라보았다. 요사이 자신의 상사는 새 버릇 하나가 생겼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퇴근은 늦게 하며, 집에 와서도 일을 하는. 누가 보아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하드한 생활이었다. 중오는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깊이 몸을 숙였다. 그러자 도정주가 알았다는 듯 대충 손짓을 한다. 중오는 몸을 돌렸다. 자신이 이대로 가고 나면 그는 또 잠깐 선잠을 잤다가 다시 회사로 나올 것이다. 문득 중오는 비서된 자로써 더 이상 이 사태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사장님의 행복은 나의 행복. 중오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며 팔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도정주의 앞에 가서 섰다.
“......”
그러나 중오는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침을 삼키듯 말도 삼켜야 했다. 중오는 다시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자신이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 봐도 지독한 감식의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중오는 좀 쉬운 방법을 택했다.
“티켓을 예매했습니다.”
중오가 말 한 것은 비행기의 티켓이었다. 하늘을 날아서 바다와 대륙을 건너는 그것 말이다. 수교가 되어 있고 돈만 있다면 누구든 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편리한 비행기. 라이트 형제는 얼마나 바람직한 물체를 발명했는가. 중오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자신의 상사가 무슨 반응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무응답, 무반응이다.
“싫으시면 헬기라도 띄울까요? 아니면 전용기라도?”
중오는 농담을 한다는 식으로 그에게 회유 적인 표현을 했다. 비행기가 싫다면 헬기를 타던가 전용기라도 타고 바다를 건너가라. 어디 있는지 알면서 왜 가지 않느냐.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중오는 공연히 애가 탔다. 예부터 남의 연애 사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은 어째서 이렇게 간섭 못 해 안달인 것인지. 중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한심하다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곤 다시 깊이 몸을 숙였다. 그러나 힘없이 현관을 나서는 중오는 지금 추진 중인 한남 제약의 인수 건이 끝나면 또 한번 도전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 마음이 중오를 다시 기운 차리게 했다.
커튼을 흩날리며 불어오는 바람은 가까이 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습기가 가득했다. 특히나 곧 우기가 닥칠 모양인지 바람 냄새가 평소보다 더 습한 것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나무로 만든 가옥의 부실한 부분을 판자로 덧대거나 망치질을 하면서 다가올 자연의 힘에 대비했다. 깊은 강까지 나간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끝내고 돌아오는지 여자들이 푼돈을 쥐고 달려 나갔다. 아이의 몸통만한 생선을 어깨에 짊어진 거친 남자들 주위로 금세 시장이 형성되었다.
먼 하늘엔 먹구름이 재앙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아래층에 사는 코레의 어린 아들이 비바람이 불거라며 창문을 닫으라고 손짓을 한다. 이채는 새까만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를 한 아이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들기 전 도대체 어떤 사람이 머물렀는지 창유리 한쪽에 잔금이 가 있었다. 이채는 과연 이 유리가 거대한 자연의 힘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안고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빗방울들이 유리를 때린다. 부옇게 변한 하늘엔 어느새 먹구름이 밀려와 있었다. 검회색의 그 구름은 서울의 하늘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 어디를 가든 하늘의 색깔만은 똑같은가 보다.
이채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세상은 비가 내리고 있고 가까이엔 강도 있건만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만한 물은 없었다. 이채는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다세대 가옥의 주인인 코레가 주는 물을 마시고 배탈을 앓은 것을 떠 올렸다. 눈물이 나고 머릿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통증을 동반한 배앓이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과실주에 대한 알레르기도 있다. 게다가 여기에 와서야 안 사실이지만 물갈이도 한다. 이채는 스스로가 예민한 채질이란 것을 처음으로 깨달으며 협탁 위의 사과를 집어 들었다. 사그작 베어 무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지만 색이 파랗고 단맛보다 신 맛이 강한 사과는 이채가 늘 먹던 그 맛은 아니었다. 그러나 물을 함부로 마실 수 없는 이채에겐 맛 보다는 수분의 함량이 중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과는 이채의 수통인 셈 이였다.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는지 나무로 만든 가옥이 삐그덩 소리를 냈다. 창 밖으로 어느 회교도 여인이 두르고 있었을 검은 챠도르가 부유물처럼 지나갔다. 이채는 문득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 낮선 세상이 두려워 졌다. 커튼을 치고 캄캄해진 방 안에 촛불을 밝히며 창가에서 조금 떨어졌다. 이런 날씨엔 정전이 되기 십상이라 될 수 있으면 전등을 쓰지 않는 것이 좋았다. 초 두개에 의지한 작은 방이 은은하게 밝아져 왔다. 이채는 의자위로 다리를 그러모아 두 팔로 감쌌다. 침대 하나에 협탁과 낡은 거울 뿐인 방 안이 우울했다.
말리는 정화의 말처럼 아름다운 곳 이였다. 분쟁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수도는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지만 이채가 내려온 남쪽의 사람들은 나이저 강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험담도 모략도 없는 조용한 곳. 이채는 정화도 이 곳을 다녀갔을까 하며 그러모은 다리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창문을 꼭 잠그라는 코레의 외침이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아름다우며 조용한 낮선 나라에서 이채는 모국어로 된 꿈을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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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저강은 말리 사람들의 젖줄 이었다. 새벽부터 황혼이 질 때 까지 강을 끼고 시끌벅적한 시장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상한 생김새의 생선이나, 과일, 천 같은 것들을 사고팔며 소박한 생계를 꾸려갔다. 가난하지만 모략이 없는 사람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 물론 수도인 바마코에선 날로 범죄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채가 있는 나이저강의 남쪽은 평온하기만 했다.
나흘간 불어 닥친 비바람이 물러가자 강물이 붉게 변해버렸다. 사하라에서 불어온 모래가 강 아래로 가라앉으려면 다시 나흘은 기다려야 했다. 그 기간동안 남자들은 바람에 부서진 배와 집들을 고쳤다. 여자들은 깨끗한 물을 받아다가 아이들과 얼마 되지 않는 가축을 씻겼다. 이채는 코레의 어린 아들과 함께 닭 우리를 청소했다. 푸드득 푸드득 날아다니는 닭을 한쪽으로 몰아넣고 깃털과 배설물들을 치웠다. 어린아이는 능숙하게 청소했고 이채는 서툴렀다. 하얀 이를 들어내 고 환희 웃는 아이가 닭들의 홰 날개 짓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만 이채에게 손을 내민다. 이채는 마주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넘어진 것이 조금 민망했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잠시 일을 중단했다. 이채도 어린 아이와 함께 나무그늘에 앉았다. 토마토와 생선으로 만든 소박한 도시락을 꺼내는 아이가 이채에게 사과를 가져다주었다. 벌써 일주일째 사과로 연명하고 있는 이채는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시큼한 사과향이 입안에서 퍼졌다. 그나마도 이것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못 한다. 굶주려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채는 괜한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사과를 반으로 갈랐다. 아이에게 하나 내밀자 이채의 점심 식사를 나눠먹을 순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다. 아마도 이채가 그 파란 과일 이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린 아이답지 않은 그 배려에 이채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사과를 베어 물었다. 강변의 수림위로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문득 생선을 발라 먹던 아이가 남쪽을 가리키며 한참을 내려가면 사하라를 횡단하는 도로가 나온다고 말 한다. 이채는 사막의 붉은 모래를 떠올리며 아이의 말을 경청했다. 흙으로 뒤덮인 강물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말리에서의 일상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강변의 수림에서 코레의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하고 물장난을 치기도 했다. 또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에게 간단한 셈과 영어도 가르쳤다. 이채는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아이가 굳이 영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코레는 하나뿐인 아들이 좀 더 많은 것들을 깨우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여행을 온 영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강변을 따라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다. 한 참을 걷자 아이의 말 대로 정말 사하라가 보였다. 입자 고운 모래의 둔덕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뜨거운 사막. 이채는 그 모습을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뜨거운 태양에 달구어진 사하라 어딘가에서 터번을 두른 베두인족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사막의 전사들은 오아시스를 능숙하게 찾아낸다. 그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은 수초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전사들을 맞이할 테고.
이채는 끝없이 펼쳐진 모랫길 위에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을 했다. 손을 잡고 함께 온 아이가 이채의 팔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채는 해선 안 될 짓을 들킨 사람처럼 퍼뜩 놀랐다. 고개를 갸웃 하는 아이가 까치발을 들고 이채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준다. 기념촬영이 끝났는지 관광객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이채는 사막의 풍경을 눈에 새기듯 한참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금발의 어느 관광객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묻길 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오늘 난 해외 토픽 기사에도 한국인이 나왔다고 떠들어 댔다. 젊은 남자가 거대 제약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며 대단한 출세라고 소란을 피운다. 그러나 발목까지 빠지는 모랫길을 걷는 이채는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33.
서울의 시간은 이채가 없어도 한 달이 훌쩍 가버렸다. 그새 봄은 여름의 냄새를 품기 시작했고, 봄의 전유물인 개나리 진달래는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으며, 벚꽃은 이미 한참도 전에 졌다. 도정주는 취임식을 의도적으로 화려하게 치렀다. 바다 건너에서도 자신의 소식을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신문과 TV 취재에도 응했다.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행사가 끝나고 그는 옥상으로 올랐다. 높은 지대의 바람은 또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데 인공 화단이 있던 자리의 시멘트를 파는 무리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정주는 자신의 취임식만큼이나 야단스러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사, 사장님, 이런 곳에 시체가...”
도정주는 땅을 뚫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그 인부를 물러나게 했다. 시멘트의 석회가루를 쳐 바른 시체는 썩지는 않았지만 흉하게 변모했고, 자신이 반 토막을 냈던 그 남자가 맞았다. 도정주는 문득 깨지고 갈라져 볼품없이 변해버린 시계에 눈이 갔다. 사람의 팔로 추정되는 부위에 매달린 시계는 언젠가 자신이 망가뜨려놓은 그대로다. 그는 석회가루를 치우고 그 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인부들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며 기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트를 벗어 땅에 펼쳤다. 그리곤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는 시계를 수트위에 내려놓았다. 지켜보던 인부들이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을 했지만 그의 시체 발굴 작업은 계속 되었다. 중오가 어느 인부로부터 사장님이 이상하다는 보고를 받고 옥상으로 온 것은 그의 발굴 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은 채 토막 나서 잘 이어져 있지도 않은 시체를 끄집어내는 도정주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오는 말릴 수 없었다. 그가 시체를 손 수 꺼내는 이유가 어쩌면 이채에 대한 속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묵묵히 옆을 지켰다.
한 참의 시간이 더 지나자 그가 허리를 폈다. 땅에 펼쳐져 있는 수트위로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남자의 반 토막이 늘어져 있었다. 도정주는 심한 악취가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부들을 시켜 파 놓은 화단을 다시 메웠다. 그는 시체의 토막들을 중오가 가지고 온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병원의 영안실에 있는 나머지 반쪽과 함께 납골당으로 보내었다. 삼일 후, 둥근 단지에 하얀 뼛가루가 담겨 나왔고 그는 그 유골의 반을 납골당에 안치했다.
공항으로 가는데 중오가 말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며 조심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는 귀찮은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륙 시간을 확인했다. 비행기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지금쯤 강변을 걷고 있겠지? 그는 하얀 얼굴을 떠 올렸다. 실 같은 머리카락에 가는 몸이 애틋하던,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슬픔이 묻어나던.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채의 얼굴이 남자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부서질 만큼 안아주리라. 그는 드디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수림이 무성하게 형성된 강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기가 남기고간 모래가 가라앉은 강 에는 해가 져도 고기잡이가 한창이었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모래들을 쌓아 만든 높은 탑이 아이의 변덕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채는 조금 웃으며 다시 모래들을 모았다. 그리곤 둥근 지붕의 건축물을 만들어 갔다.
만일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하얀 물감을 칠하고 싶었다.
길게 난 대로 옆으로 연못의 자리도 만들고 강물을 떠와 채워 넣자 그럭저럭 모양이 갖추어 졌다.
이채는 늘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열쇠고리를 꺼내어 아이를 향해 흔들었다.
달랑달랑 움직이는 타지마할과 이채가 만든 모래건축물이 비슷해 보였다.
아이는 신기한 듯 조그마한 타지마할을 만져본다.
어느 나라의 왕이 죽은 부인을 위해 만든 성 같은 무덤이란다.
이채는 까만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이의 선한 눈망울에 하얀 궁전이 투영 되었다.
달랑이는 타지마할은 아이에게도 신비한 꿈을 꾸게 만드나 보다.
이채는 샌들 사이로 침입한 모래를 발을 탁탁 쳐서 빼냈다.
모난 돌 맹이 하나가 강물 까지 때구르르 굴러갔다.
말리의 하늘은 별이 일찍 뜬다.
그다지 어둡지도 않은데 억만년 밖의 별은 사람들을 인도해 주려는 듯 반짝임을 내 뿜는다.
마치 스스로를 빛내지 않으면 너무도 하찮은 존재들이 제 갈 길을 잃어버릴까봐 구도자처럼 은은하게 떠있다.
사람도 저 별처럼 먼 곳에서 온다 했다.
축복처럼 세상에 떨어졌다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별의 일생과 비슷하다.
어쩌면 인간의 짧은 생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사는 별의 시간을 축소 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 별을 보고 있나요? 이채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멀리 있는 그에게 속삭였다.
강바람이 이채의 머리카락을 흩고 지나갔다. 말리로 떠나와도 머리로 가슴으로는 단 한사람을 찾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일삼는 남자. 무표정하고 무관심 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남자.
입술이 뜨거운 남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남자.
배신이 될 마음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상관없다고 말 하던 남자.
아버지와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 자신 밖에 모르는 남자. 등이 푸른 남자.
심장이 부풀어 터질 것처럼 보고 싶은데, 마음은 바다를 건너 그에게로 몰아치는데.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습기 가득한 바람이 그를 따라 불어왔다. 멀리 나간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아이가 강물로 뛰어갔다.
이채는 흔들리는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정말로 그가 맞을까? 아니.
설사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말리가 보여주는 환상일지라도 상관 하지 않는다.
내 아버지를 죽였지만, 이곳은 말리다. 죽은 듯 잠을 잘 수 있고 내일이 없다는 듯 웃을 수 있는 곳.
시야를 가리는 눈물이 어느새 흘러넘쳤다. 남자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팔을 벌린다.
그가 태우던 담배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말리에서의 재회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