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서울의 시간은 이채가 없어도 한 달이 훌쩍 가버렸다. 그새 봄은 여름의 냄새를 품기 시작했고, 봄의 전유물인 개나리 진달래는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으며, 벚꽃은 이미 한참도 전에 졌다. 도정주는 취임식을 의도적으로 화려하게 치렀다. 바다 건너에서도 자신의 소식을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신문과 TV 취재에도 응했다.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행사가 끝나고 그는 옥상으로 올랐다. 높은 지대의 바람은 또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데 인공 화단이 있던 자리의 시멘트를 파는 무리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정주는 자신의 취임식만큼이나 야단스러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사, 사장님, 이런 곳에 시체가...”
도정주는 땅을 뚫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그 인부를 물러나게 했다. 시멘트의 석회가루를 쳐 바른 시체는 썩지는 않았지만 흉하게 변모했고, 자신이 반 토막을 냈던 그 남자가 맞았다. 도정주는 문득 깨지고 갈라져 볼품없이 변해버린 시계에 눈이 갔다. 사람의 팔로 추정되는 부위에 매달린 시계는 언젠가 자신이 망가뜨려놓은 그대로다. 그는 석회가루를 치우고 그 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인부들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며 기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트를 벗어 땅에 펼쳤다. 그리곤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는 시계를 수트위에 내려놓았다. 지켜보던 인부들이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을 했지만 그의 시체 발굴 작업은 계속 되었다. 중오가 어느 인부로부터 사장님이 이상하다는 보고를 받고 옥상으로 온 것은 그의 발굴 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은 채 토막 나서 잘 이어져 있지도 않은 시체를 끄집어내는 도정주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오는 말릴 수 없었다. 그가 시체를 손 수 꺼내는 이유가 어쩌면 이채에 대한 속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묵묵히 옆을 지켰다.
한 참의 시간이 더 지나자 그가 허리를 폈다. 땅에 펼쳐져 있는 수트위로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남자의 반 토막이 늘어져 있었다. 도정주는 심한 악취가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부들을 시켜 파 놓은 화단을 다시 메웠다. 그는 시체의 토막들을 중오가 가지고 온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병원의 영안실에 있는 나머지 반쪽과 함께 납골당으로 보내었다. 삼일 후, 둥근 단지에 하얀 뼛가루가 담겨 나왔고 그는 그 유골의 반을 납골당에 안치했다.
공항으로 가는데 중오가 말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며 조심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는 귀찮은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륙 시간을 확인했다. 비행기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지금쯤 강변을 걷고 있겠지? 그는 하얀 얼굴을 떠 올렸다. 실 같은 머리카락에 가는 몸이 애틋하던,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슬픔이 묻어나던.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채의 얼굴이 남자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부서질 만큼 안아주리라. 그는 드디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수림이 무성하게 형성된 강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기가 남기고간 모래가 가라앉은 강 에는 해가 져도 고기잡이가 한창이었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모래들을 쌓아 만든 높은 탑이 아이의 변덕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채는 조금 웃으며 다시 모래들을 모았다. 그리곤 둥근 지붕의 건축물을 만들어 갔다.
만일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하얀 물감을 칠하고 싶었다.
길게 난 대로 옆으로 연못의 자리도 만들고 강물을 떠와 채워 넣자 그럭저럭 모양이 갖추어 졌다.
이채는 늘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열쇠고리를 꺼내어 아이를 향해 흔들었다.
달랑달랑 움직이는 타지마할과 이채가 만든 모래건축물이 비슷해 보였다.
아이는 신기한 듯 조그마한 타지마할을 만져본다.
어느 나라의 왕이 죽은 부인을 위해 만든 성 같은 무덤이란다.
이채는 까만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이의 선한 눈망울에 하얀 궁전이 투영 되었다.
달랑이는 타지마할은 아이에게도 신비한 꿈을 꾸게 만드나 보다.
이채는 샌들 사이로 침입한 모래를 발을 탁탁 쳐서 빼냈다.
모난 돌 맹이 하나가 강물 까지 때구르르 굴러갔다.
말리의 하늘은 별이 일찍 뜬다.
그다지 어둡지도 않은데 억만년 밖의 별은 사람들을 인도해 주려는 듯 반짝임을 내 뿜는다.
마치 스스로를 빛내지 않으면 너무도 하찮은 존재들이 제 갈 길을 잃어버릴까봐 구도자처럼 은은하게 떠있다.
사람도 저 별처럼 먼 곳에서 온다 했다.
축복처럼 세상에 떨어졌다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별의 일생과 비슷하다.
어쩌면 인간의 짧은 생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사는 별의 시간을 축소 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 별을 보고 있나요? 이채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멀리 있는 그에게 속삭였다.
강바람이 이채의 머리카락을 흩고 지나갔다. 말리로 떠나와도 머리로 가슴으로는 단 한사람을 찾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일삼는 남자. 무표정하고 무관심 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남자.
입술이 뜨거운 남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남자.
배신이 될 마음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상관없다고 말 하던 남자.
아버지와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 자신 밖에 모르는 남자. 등이 푸른 남자.
심장이 부풀어 터질 것처럼 보고 싶은데, 마음은 바다를 건너 그에게로 몰아치는데.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습기 가득한 바람이 그를 따라 불어왔다. 멀리 나간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아이가 강물로 뛰어갔다.
이채는 흔들리는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정말로 그가 맞을까? 아니.
설사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말리가 보여주는 환상일지라도 상관 하지 않는다.
내 아버지를 죽였지만, 이곳은 말리다. 죽은 듯 잠을 잘 수 있고 내일이 없다는 듯 웃을 수 있는 곳.
시야를 가리는 눈물이 어느새 흘러넘쳤다. 남자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팔을 벌린다.
그가 태우던 담배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말리에서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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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