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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필드는 상당히 넓었다. 일단 숲이 모두 사라졌기에 본래의 것보다 더욱 넓게 느껴졌다. 더불어 깨끗한 호수도 몇 보인다. 뭐 바위 더미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흐음. 여기가 바로 그 좋다는 여덟 번째 필드로군요."
과연 초보들이 파티를 이뤄 많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많은 유저들이 떼를 지어 씰들과 함께 투닥거리고 있었다.
짜리몽땅한 몸에 연갈색 몸. 심통이 나 보이는 얼굴에 박힌 주먹코. 드워프를 닮은 듯도 하지만 강인함보단 심통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몸에 비해 약간은 기다란 팔을 휘두르며 유저와 씰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초보들에겐 꽤나 강력한 공격력이었다.
"저 놈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더라…?"
아리에가 쿠루들을 보며 약간은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초보 때의 기억이란 부끄러우면서도 즐겁다. 고수가 되어 보는 꿈을 꾸는 초보, 그것은 권태로움을 느끼는 고수보다 훨씬 더 즐겁다.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보자꾸나! 키리안, 도움이 필요해?"
카디안이 활기차게 외치며 키리안을 보았다. 레벨 업에 도움이 필요하냐는 눈빛이었다.
"아냐아냐. 괜찮아. 포션도 든든히 준비해왔고 아리에도 있고 유하도 있으니까."
아리에의 전음도 있었지만 키리안 또한 굳이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자존심 등이 아니라 이런 건 본래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위기를 겪어야 한다. 고통이 크면 댓가도 크다. 그리고 그렇게 도움 받는 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다.
"알았다. 그럼 노력해라. 나랑 같이 1차 전직한 뒤에 던전에 가자구!"
"예썰!"
활기찬 대화가 끝난 후 카디안은 필드 저편으로 씰들과 함께 사라졌다. 아직까진 함께 사냥할 수 없다. 레벨이 비슷해도 마찬가지다. 레벨 50이전의 몬스터들은 파티 사냥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초보들이 저렇게 파티를 모여 우르르 모여 다니는 건 다 조금이라도 빨리 레벨 업을 해보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종의 '꼼수'다.
사실 레벨이 20은 넘어야 그럭저럭 사냥이 가능한 것이 쿠루족인데 초보들은 파티를 이뤄 죽을 각오를 하면서 억지로 쿠루들을 잡는 것이다. 그렇게 몇 마리만 잡고 죽어도 떨어지는 경험치보다 얻는 경험치가 많기에 유저들이 굳이 파티를 이뤄 이곳을 찾는 것이다.
더불어, 20쯤 되면 파티 사냥은 비추천일 정도로 경험치가 적당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지만 말 그대로다. 한 명의 유저에게 적당한 경험치. 그것이 쿠루족이 주는 경험치다. 그런데도 레벨 50까지 사냥이 가능한 것은 상승하는 사냥속도에 있다. 그 속도가 떨어지는 경험치를 상쇄하는 것이다.
"자자, 그럼 나도 사냥해 볼까나~!"
키리안은 다시 한 번 활기차게 소리치며 카디안이 갔던 반대 방향으로 아리에, 유하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유하와는 붙어 있는 상태였고 아리에가 앞장을 섰다. 아리에 왈,
"넌 잘못 스치기만 해도 저 세상이야."
꽤나 존심 상하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어디서 7짜리가 30짜리 몬스터 앞에서 설치겠나. RPG에서 레벨이란 절대적이다(치트, 에디트, 그 외 먼치킨 빼고). 저 23이란 엄청난 차이 앞에 키리안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아리에를 따라 유하와 함께 쫄래쫄래 걷기를 몇 십초. 드디어 쿠루 한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녹색의 천을 걸친 녀석이었는데 손에 끝이 둥그스름한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오크나 오우거 녀석들이 들고 있는 것보단 그래도 좀 깔끔한 모습이다.
그래도 여덟 번째 필드의 녀석이라 선공을 취하는지 키리안 일행을 보자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주인님. 대충 내가 힘은 빼놓을 테니까 마나 포션 잘 준비해. 마나 딸려서 나 못 움직이게 되면 주인이고 나발이고 세인트 블레이드(Saint blade) 갈겨 버릴 거야."
전.혀.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달고 할 대사는 아니었건만 아리에는 당당했다. 세인트 블레이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불길한 대사였기에 키리안은 고개를 꼬닥거렸다.
"좋아, 그럼 간다."
아리에는 말을 마치자 레이피어를 빼들고 쿠루에게 달려갔다. 놈은 아리에가 달려들자 가로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단순한 패턴. 아리에는 그대로 몸을 숙이며 찌르기를 시도했다. 피하지 않는 쿠루. 물러나는 것은 오히려 아리에였다.
"쳇."
레이피어를 들고 특수 스킬도 쓰지 않은 채 한 방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더불어, 쿠루쯤 되는 녀석을 상대로 지금 그녀의 상태론 한 방이 불가능하다. 괜히 역습을 받아서 죽으면 그만큼 쪽팔리는 일도 없다.
'드래곤 브레스를 정면에서 맞고도 안 죽었는데 쿠루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 레이가 비웃지.'
그야말로 '개망신'이었기에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쿠루 녀석, 단순한 면이 오히려 아리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유리함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작전을 바꿔 슬쩍슬쩍 쿠루를 건드리며 작은 상처를 내는 쪽으로 방법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꼭 자신이 이 녀석을 죽여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쿠루 녀석이야 광분하겠지만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