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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디엔트를 만나 함께 이동한 덕분에 지루함이 상당히 줄어 들었다. 그는 꽤나 유쾌한 소년이었고 키리안과 같은 나이였기에 둘은 꽤나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하며 걷기를 이십 분. 그들은 3층의 마지막 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6존이다아! 이제 조금만 가면 4층이구나아!"
키리안이 좋다고 소리쳤다. 아무리 지루함을 덜었다해도 근본적으로 가야할 곳이 멀다는 압박감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 드디어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 그만 좋아하고 출발해 보자!"
디엔트가 만세삼창을 하는 키리안을 제지하곤 앞서 걸었다. 걸어가며 아리에가 말해주길, 6존은 V자 형상의 모습을 취하는데, 가끔 몬스터가 몰려 있으면 양쪽에서 죽 늘어선 돌연변이 몬스터 '크림슨 고스트'와 '블리자드 고스트'가 화염 마법과 빙결 마법을 날려 댄다고 했다.
길고 긴 길에서 양쪽에서 일자로 늘어서서 날리는 그 공포의 마법을 떠올리며 키리안이 표정을 확 구기자 아리에는 걱정 말라며 그의 등을 팡팡 쳤다. 그저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이 배리어 3스킬 포인트 12레벨 마스터다. 그것으로 답은 나왔다.
스페셜 스킬은 50레벨 단위로 하나씩 배울 수 있고 중복 선택이 가능한데, 그 한계가 세 번이다. 아리에는 세 개의 포인트를 사이 배리어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것을 12레벨 마스터했다. 사이 배리어를 배운 유저 중에선 최강이란 말이다.
사이 배리어는 내부에서 공격까지 가능한 점에서 그 가치가 상당히 높다. 더불어 한 가지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점은, 사이 배리어는 마법 방어에 있어서 보통의 실드보다 50% 이상 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대(對) 마법 방어용 배리어. 그것이 사이 배리어인 것이다.
아리에가 아무리 심하게 약해졌다지만 적어도 이런 허접한 던전의, 그것도 겨우 '쫄따구'들의 마법에 당할 정도는 아니다. 더불어 3스킬 포인트 12레벨 마스터의 사이 배리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화르륵-!
차분히 길을 걷고 있던 그들에게 뜨거운 화염탄 하나가 연기를 뚫고 날아왔다. 과거 키리안이었다면 '으아아아~!' 비명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렸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볍게 '검기(劍氣)'를 형성해서 화염탄을 향해 날리는 것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펑-!
완숙한 경지의 검기가 아니었기에 화염탄을 가르며 무력화시키진 못했지만 상쇄 시킬 순 있었다.
"돌풍,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기척을 살피는 키리안과 디엔트를 보며 아리에는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그 능력은 변함이 없었기에 단지 '돌풍'이라는 단어 하나로 4클래스의 주문을 완성시키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휘이잉-!
갑자기 주변에서 돌풍이 불어와 연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은신하고 있던 크림슨 고스트가 나타났다. 블러디 고스트의 돌연변이.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고 그 능력이 좀 더 강해졌을 뿐.
"헤엥, 허접이잖아. 자자 빨리 끝내자고!"
키리안이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다. 더불어 디엔트 또한 오른팔을 들어 허공에 휙, 휘둘렀다.
파아아-
청량한 물내음이 폐광의 텁텁함을 밀어내고 허공 중에 퍼졌다. 그의 손 근처엔 푸른빛의 물방울들이 빛과 함께 모여 있었다.
"헤에, 그거 정말 신기하네. 뭐야아?"
어느새 말을 튼 둘이었다. 키리안은 던전에서 처음 봤던 그 노란빛과 닮은 청색의 빛을 보자 궁금해하며 물었다.
디엔트가 그의 질문에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정령력(精靈力)이야. 디 앱솔브에선 정령사라고 해서 따로 정령을 소환할 수 없어. 씰이란 존재가 있으니까. 다만 그 힘은 끌어 쓸 수 있는데 그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다양한 형태의 응용이 가능하지. 지금처럼 말이야. 스피릿 인첸트(Spirit enchant)."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손을 일정한 모습으로 흔들며 시동어를 읊조렸다. 빛이 그에 반응하듯 한 번 출렁이더니 키리안의 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빛이 검에 머물자 기사의 검이 차갑고도 날카로운 푸른빛을 뿜어냈다.
"이건 인첸트의 방식이야. 자, 그럼 열심히 해! 내가 서포트 해 줄 테니까."
"예썰!"
키리안은 힘차게 대답하고 오라 스플리트를 시전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장난이 아니게 상승한 검의 예기, 그것이 키리안을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크오오오-!
공기를 진동시키는 으르렁거림과 함께 크림슨 고스트가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키리안은 그대로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켜 그것을 스치듯 피하곤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깔끔한 솜씨. 고수가 봐도 감탄할만한 멋진 움직임이었다.
"콘센트레이트 오라!"
날카로움이 응축되어 강력한 타격력까지 갖춘 기력이 크림슨 고스트의 복부에 작렬했다.
콰아앙-!
푸른 기력은 단숨에 크림슨 고스트의 복부를 꿰뚫으며 놈을 저 멀리 구석으로 처박았다. 전투 시작 후 5초만에 키리안은 크림슨 고스트를 날려 버린 것이다.
"음틋틋틋. 그 누가 나를 이기랴!"
이번에도 패턴을 달리한 괴이한 웃음을 보이며 뿌듯해 하는 키리안. 그리고 역시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아리에.
꾸욱-
오른팔로 그의 목을 힘주어 둘렀다. 그리고 막 그를 끌어 당기려는 차였다. 강력한 마법탄이 감각에 걸려 들었고 그녀는 왼팔을 들어 올려 사이 배리어를 시전했다.
파즈즈-
반투명한 푸른 막이 펼쳐졌고 그것에 청색의 빙탄(氷彈)과 화탄(火彈)이 날아 들었다.
츠즈즈즈-
마법이 사이 배리어를 두들길 때마다 그것이 울 듯 진동했다. 부서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날아온 구체의 수가 꽤 되었기에 아리에는 긴장하며 감지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쳇. 주인님, 도망쳐야겠다."
그녀는 넓어진 감지 영역 안에서 느껴지는 몬스터들의 숫자에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왜?"
"크림슨 고스트가 다섯 마리, 블리자드 고스트가 네 마리야. 주인님이 점점 '왕년의 실력'을 되찾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아홉 마리는 역시 무리지?"
키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에 익숙해져 가면서 그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움직임으로써 그 실력을 높일 수는 있었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는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리에와 함께 디엔트에게 다가갔다. 디엔트 역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백색 여우가 '갸르릉'하고 작게 울고 있었다.
"루아가 우는 걸로 봐서 상당히 골치 아픈 녀석이 있나 보네."
"응. 저쪽 구석탱이에 기형아들이 몰려 있대. 고로, 도망 가자아아아~"
키리안이 신이 난 듯 소리치곤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아리에가 한숨을 쉬면서도 뒤쫓았고 마지막으로 디엔트가 뒤따랐다.
투두두둥-!
달리는 그들의 뒤에서 마력탄의 발사 소리가 연신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리에가 사이 배리어를 시전한 상태라 모두 튕겨나가거나 흩어져 버리긴 했지만 역시 뒷통수가 간지러운 건 별 수 없는 현상이다.
"으갸아아아아~"
키리안이 역시 참지 못하고 해괴한 비명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여 달렸다. 유하가 결국 그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고 결국 '바람의 조력(助力)'을 시전하여 그 차이를 메꿔야 했다.
한창 달리던 그들의 앞으로 유턴(U-turn)해야 할 길이 보였다. 넷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길을 돈 뒤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 사이 고스트 녀석들은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거리를 줄였다. 츠층하는 사이 배리어 특유의 소리가 나는 간격이 더욱 줄어 있었다.
"헉?"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열심히 달리던 키리안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그들의 눈 앞에, 약간은 기운 직선주행도로(?)의 양 옆에 마치 귀빈을 기다리는 보디가드마냥 고스트 녀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이 배리어 안이라지만 아리에를 제외한 셋(+동물 하나)이 순간 굳어 버렸다.
"디, 디엔트. 곱게 죽어야 할까?"
"그, 글쎄. 적어도 레벨 150은 넘어야 그럭저럭 해결이 가능한 수준이니 아무래도 무리겠지?"
둘의 절망적인 대화에 지켜보던 아리에가 표정을 구기며 소리쳤다.
"으이그 화상들아! 적어도 마나가 고갈되지 않는 이상 겨우 저런 허접탱이들한테 사이 배리어가 뚫리진 않으니까 걱정마! 주인님! 어서 마나 포션 퍼 마셔! 마나 고갈 되면 다 죽는 거야 앙?! 죽기 싫으면 열심히 달려!"
"예, 예썰!"
박력 넘치는 아리에의 반협박성 어조에 키리안은 굳은 모습으로 마나 포션(상)을 꺼내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녀의 닦달에 키리안과 디엔트는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츠즈즈즈즈증-!
이중으로 펼친 사이 배리어의 겉면을 청색과 적색의 마법이 수없이 때려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사이 배리어를 따라 키리안과 디엔트의 마음 역시 흔들렸다. 하나 다리는 쉴 수 없었다.
피를 말리는 시간. 뒤에선 고스트 떼거리가 몰려오지, 양쪽에선 뒤와 함께 마법을 갈겨대지, 앞에선 놈들이 좋다고 대기를 타고 있지, 멈추면 그대로 갇혀서 얻어 맞는다.
실제론 10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겐 10시간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어두운, 하지만 그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터널이 보였다.
"해, 해방이다아아아아아!!"
환호하며 힘차게 달리는 키리안과 디엔트. 그들이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아리에는 왼손으로 일정한 모양을 이루는 선을 그리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파앗-!
그녀의 왼손을 중심으로 육망성이 백색의 빛을 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툭'하는 소리와 함께 아리에가 위시 에이전트를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츠즛-
사이 배리어가 풀렸다.
"으, 으갸아아아아!!"
수없이 날아오던 마법탄들이 방해물이 사라지자 그대로 키리안과 디엔트, 유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셋은 기겁하며 그것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했다.
"여섯 힘의 정점. 그 정점의 중심에 존재하는 근원의 빛. 지금 나의 검이 되어 강림하리라. 세인트 블레이드(Saint blade)!"
파아아앗-!
뒤에서 둘이 무슨 쇼를 벌이든 상관없다는 듯 아리에는 고요하게 서서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앞으로 떠오른 육망성의 중심에 위시 에이전트를 밀어넣었다. 둘이 마주치자 육망성은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위시 에이전트의 앞에 모여 광검(光劍)을 형성했다.
"아리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아아!"
뒤에서 절규하듯 키리안이 소리쳤다. 아리에는 그 소리에 '흐응'하고 웃으며 답해 주었다.
"어이 주인님. 이런 꼴로 그냥 가면 안되지이. 주인님은 터널로 달려. 나는 한 방만 날리고 갈게."
"으아아아, 그냥 가도 된단 말이다아아아!"
키리안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터널을 향해 달리는 듯 하다.
아리에는 키리안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면을 보았다. 군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많은 수의 고스트 녀석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날아오는 마법탄을 가볍게 피해내며 그녀는 위시 에이전트를 들었다.
"큰 거는 역시 무리고… 적당하게 스톰 라이트(Storm light)로 가자."
그녀가 검을 살짝 뒤로 옮기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놈들이 사정거리내로 다가오자 폭발적인 속도로 튀어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빛이여, 나의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폭풍의 잔혹함을! 스톰 라이트!"
그녀는 기검술사 계열이었다. 힘(Str)과 지력(Int)을 함께 상승시키는 클래스. 그 둘의 시너지(synergy) 효과로 인해 능력치의 분산을 메꾸는 기검술사는 검에 막대한 기력(그녀의 경우 마나)를 두르고 보통 검사 그 이상의 파괴력을 보이는 클래스였다. 초, 중반만 잘 넘기면 엄청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대기만성' 타입의 직업인 것이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말에 따라 기검술사가 강력한 파괴력을 내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주문을 외워야 했다. 그 파괴력이 높을 수록 주문 또한 긴데, 그 때 타격을 받으면 평소의 3배 이상의 데미지를 받게 된다. 주문 또한 당연히 캔슬. 아리에는 놈들이 다가오는 사이 주문을 외웠던 것이다.
파아아아앗-!!
위시 에이전트의 광검신(光劍身)에서 막대한 빛이 터져 나오며 검기의 폭풍을 형성했다. 그것은 다가오던 밀집 대형의 고스트들을 한순간에 휩쓸며 난자해 버렸다.
크오오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수많은 고스트들이 쓸려 나갔다. 그녀는 광검을 흩으며 키리안이 레벨업을 한 것을 알았다. 데이터베이스의 공유로 인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럼 나중에 보자고."
아리에는 위시 에이전트를 다시 꽂아 넣고는 키리안들이 갔을 터널을 향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위시 에이전트 아리에. 그녀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삼인방(三人幇)
으음.-_-;
삼인방은 사전에도 없더라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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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Eight - 삼인방(三人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