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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비치는 작은 언덕에 아름다운 빛이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성스러운 백색 광검(光劍)이 만들어내는 그 궤적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빛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면 게임 오버라는 결과를 맞아야 될 것이다.
탓-!
빛의 궤적을 그리는 검을 든 존재는 은청색 머리카락을 허공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씰 아리에였다. 그녀는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으로 거대한 거인의 위에 위치할 수 있었다.
"천중(天重)!"
아리에가 짧고 강하게 소리치며 거인에게 검을 내리쳤다. 곧 거인이 전과 마찬가지로 두껍고 거대한 방패를 생성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서걱-!
검은 너무나 쉽게 방패를 갈랐다. 검기조차 어쩌지 못했던 거인의 방패를 세인트 블레이드는 너무나 쉽게 갈라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땅에 착지한 그녀는 그 힘을 이용해 거인의 품으로 파고들며 소리쳤다.
"폭렬(爆裂)!"
콰아아앙-!
빛이 다시 허공에 빛의 수를 놓았다. 이번엔 그 주위로 푸른빛의 작은 입자가 떠돌며 그 아름다움을 더하기까지 해 그 중간에 있는 아리에는 그야말로 여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카디안이 그녀의 드러난 실력에 놀라며 낮게 읊조렸다. 그동안 함께 다니며 많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레어 스킬을 사용할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가 버렸다.
아리에는 주변의 감탄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붉은 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디그(Dig)!"
아사트가 기겁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하급 마법이었지만 달리는 상대의 앞에 작은 구덩이를 파는 효과적인 수법을 보이는 것이었다. 창졸간에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행동이 몸에 익었다는 증거, 그녀의 실력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리에는 갑자기 앞에 구덩이가 파였지만 우습다는 듯 그것을 뛰어넘었다. 전혀 속도조차 줄지 않는 그녀에게 아사트는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시전이 가능한 마법을 날렸지만 세인트 블레이드를 앞세우며 달리는 그녀에겐 무용지물이었다.
탓-!
다시 한 번 아리에가 땅을 박차며 거인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아사트가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플레임 아머(Flame armor)!"
화르르륵-!
아사트의 외침과 함께 붉은 거인의 몸에서 대기를 태우는 홍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너무나 강렬한 열기에 아리에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오호호호! 철검마저도 엿처럼 녹이는 플레임 아머다.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그대로 녹아버리지."
"쳇. 역시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가?"
아리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이 배리어를 펼치고 달려들어 세인트 블레이드를 휘두른다면 저 정도야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모두 키리안의 마나량 때문이다.
씰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체가 마나다. 씰은 그 마나를 모두 주인에게서 끌어와 사용한다. 하지만 무한정 쭉쭉 끌어올 수는 없다. 유저에겐 그 마나량과 능력에 따라 끌어올 수 있는 마나량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 빨대와 같은 양부터 폭포와 같이 무한에 가까운 양까지 그 한계는 크다.
아리에가 본래의 레벨로 모든 능력을 발휘하려면 그 폭포와 같은 마나를 단숨에 끌어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 실력이 현격하게 줄어버린 지금이라도 그 능력을 모조리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은 마나가 필요한데, 키리안은 그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아리에가 세인트 블레이드를 시전하며 움직이는 것만 해도 키리안에겐 엄청난 부담이 따른다. 그렇기에 커다란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작은 스킬과 움직임, 세인트 블레이드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이 배리어를 더한다면 키리안은 감당할 수 없다.
'별 수 없군.'
아리에는 결국 내키진 않지만 다른 수를 쓰기로 마음 먹고 다시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 거인이 거대한 팔을 내리쳤다. 피해야 했다. 하지만 아리에는 오히려 검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미련하군. 잘가라!"
아사트가 그 모습에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리에는 얼굴을 구기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누가 이 무식한 불덩어리를 상대한다고 하든!"
파악-!
아리에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세게 땅을 박찼다. 많은 양의 마나가 그녀가 박찬 땅을 향해 뿜어졌고, 아리에는 그야말로 총알과 같은 빠르기로 아사트에게 당도해 검을 휘둘렀다.
"……!"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아사트는 아리에의 검에 의해 양단되었다. 흐릿하게 변하는 아사트의 캐릭터. 그와 함께 주변을 달구던 붉은 거인들 또한 서서히 사라졌다.
"역시 아리에! 멋지다~!"
키리안이 싱글싱글 웃으며 아리에에게 소리쳤다.
사람은 가끔 눈에 보이는 상황을 고정관념에 의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바로 지금의 경우처럼. 아리에는 그런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아사트와 같은 실력자를 쉽게 무너뜨린 것이다.
"대단한데? 저 정도의 기동력이라니. 그리고, 키리안 너의 작전 역시."
카디안이 감탄하며 키리안에게 말했다. 하지만 키리안은 미약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아리에의 독자적인 행동.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씰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보통의 씰은 아니야.'
분명 일반적인 씰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리안은 잡생각을 털었다. 뭐 버그면 또 어떤가. 심각하면 회사측에서 다 알아서 할 것이다. 깊은 사이도 아니고 골치 아픈 일을 사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 그럼 이 기세를 몰아 모조리 끝장 내라고!"
디엔트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아니, 여기까지. 아리에."
"키리안?!"
키리안은 너무나 의외의 말을 했다. 승기를 잡아놓고 다시 물리는 것은 뭐란 말인가?
놀라는 일행. 하지만 가장 크게 반발할 것 같던 아리에는 의외로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세인트 블레이드를 해제하곤 키리안의 옆에 섰다.
"어째서 물린 거야?"
당황하며 묻는 디엔트에게 키리안은 씨익 웃으며 답해 주었다.
"마나 오링(본래는 'All in'이다. 그것이 일본화(化)된 것이 '오링'이다. '마나 오링'은 마나 제로 상태)."
"…미, 미치겠군."
그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카디안과 디엔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겨우 승기를 잡았다 했는데 이런 어이없는 경우라니. 사실 이 정도까지 해낸 것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부터 꼭 매직 마스터리랑 인트(int. 마법 공격력을 상승시켜 줌), 위즈(wis. 최대 마나량과 마나 회복력을 상승시켜 줌)에 투자 좀 해라. 이게 뭐냐고."
한탄하듯 말하는 아리에에게 키리안은 연신 미안하다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우습지도 않군. 마나 오링이라니. 뭐, 우리로선 다행이려나?"
게임 오버 당한 아사트를 제외한 세 명의 유저가 거인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왔다. 셋은 아리에를 흘끔거리며 견제하면서도 위협적인 모습으로 일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햇빛을 가리는 거인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뭐, 분전은 이걸로 끝인 것 같군."
디엔트의 말에 키리안과 카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울 것은 없잖아?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잡는 건 금방이니까 곧 복수할 날이 오겠지."
카디안은 낙천적으로 말했다. 그것이 거인들의 주인을 자극한 듯 했다. 곧 거인이 크게 움찔거리며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일행 역시 마지막이라는 듯 마나와 기력을 끌어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작은 움직임과 함께 그것이 터지려 할 때였다. 갑자기 거인들마저 포용할 정도의 거대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을. 그리고 들을 수 있었다. 조용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든 음성을.
"거기까지."
라시드 카인(Ra-seed kain)
요오오오=_=)
늦었습니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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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Thirteen - 라시드 카인(Ra-seed k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