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앱솔브-82화 (8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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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박. 속타(速打)."

최상의 휴양지와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블루 비치. 하지만 사냥터인 탓에 경치는 그리 유저들의 눈치를 끌지 못했다. 지금 가장 많은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사냥터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인 몬스터, 그 중 파라트라는 녀석이다.

검은색의 파라트 하나가 유하의 속박에 집게발이 묶여버리고 그에 잠시 생긴 딜레이를 노리고 들어온 유하의 끊어치기식 격타에 순간 앞이 들려버렸다. 그를 놓치지 않고 키리안이 콘센트레이트 오라를 이용, 배를 꿰뚫는 것으로 파라트 하나가 순식간에 이승을 하직했다.

"역시 RPG는 누가 뭐래도 레벨이 먼저라니까."

키리안이 흐릿하게 변해 사라지는 파라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함정까지 마련해서 힘겹게 죽이던 때완 달리, 레벨이 좀 올라버리니 유하와의 합작만으로도 너무나 쉽게 파라트를 잡는 것이 가능해졌다.

"뭐, 당연한 거잖아. 실력만으로도 모든 게 되진 않는 것이 현실이니……."

좁은 범위의 실력이 전부가 아니다. 인맥, 아이템, 능력, 레벨. 이것들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실력이 진짜 실력이다. 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열혈'이나 '의기(義氣)' 따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극도의 낭만주의다.

"에고. 사냥이 쉬워져서 괜찮긴 하지만, 역시 함정이 크긴 크네. 몰이도 못하니 이거 영 맛이 안나잖아."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키리안이 잠시 쉬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별로 맞는 경우가 없긴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꽤 오래 사냥했기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카디안도 마나와 기력을 상당히 소모했기에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아르니아야 전직 레벨이 되었으니 잠시 빠지는 거야 당연하지만, 디엔트 녀석은 도대체 뭐한다고 요새 두문불출인 거냐아."

일행이 블루 비치에서 사냥한 것도 이제 이주일. 아르니아는 어제 레벨 100을 달성하고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잠시 팀에서 빠진 상태였다. 그녀가 택할 2차 직업은 던전 어드벤처러. RPG에서 던전은 그야말로 '필수'라 할 수 있으니 파티에 있으면 상당히 좋은 직업임에 틀림없다.

아르니아가 그런 유용한 직업으로 전직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디엔트 녀석은 5일 전부터 갑자기 잠깐 사냥을 하고 볼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비우곤 했다. 오늘도 채 2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졌다.

"쩝. 녀석이 있으면 사냥이 상당히 편해질 텐데…… 뭐, 별 수 없지. 나도 이제 레벨 95! 곧 전직 레벨! 디엔트 녀석, 뒤쳐지고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 없다고!"

대충 체력이 회복되자 키리안이 힘차게 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하나의 목표를 달성한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어서 빨리 몸을 움직이고 싶다. 레벨이 96인 카디안 역시 그 감정은 비슷했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그럼 놀아볼까!"

키리안은 활달한 모션으로 인벤토리를 열고 마나 포션을 하나 꺼내들었다. 마나는 웬만하면 모자라는 일이 없지만, 그만큼 차는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사냥시엔 대부분 마나 포션을 준비한다(크게 비싸지 않기에 돈 많은 유저라고 크게 유리하진 않다). 그것은 키리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는 체력 회복 후엔 마치 중독자처럼 마나 포션을 마시곤 했다.

"아라? 마나 포션이 몇 개 없네."

마나 포션을 마신 후 마개를 닫고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며 재고를 확인해 보니, 이젠 쓰지 않는 소(小)는 겨우 3개, 요새 쓰는 중(中)은 방금 넣은 것 포함, 2개가 끝이었다. 그나마 거의 쓰지 않은 대(大)와 특대가 넉넉했다.

"음, 형. 일단 마을에 좀 잠시 다녀오자. 마나 포션 거의 오링(All in이 원류. '바닥났다'라는 뜻으로 쓰임)이다. 게다가 포스 블레이드도 좀 수리해야 하고."

기분 좋게 일어났던 카디안의 의욕을 단숨에 저하시키는 키리안의 말이었다. 하지만 카디안도 아이템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안이 찬성의 의사를 밝히자 키리안은 멀뚱히 서있던 아리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로 생색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별말없이 키리안에게 마나를 끌어오며 키리안이 던지던 것과 비슷한 시선으로 카디안을 보았다.

"……?"

영문을 모르는 그가 '왜?'라는 눈빛으로 보자 아리에는 당연한 듯 손을 척 내밀곤 말했다.

"돈."

"……."

턱-

너무나 강력한 포스와 허탈감에 카디안은 아무말없이 요금(……)을 지불했다. 과연 아리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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