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앱솔브-89화 (8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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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나서자 입구에 친절하게도 '인간들의 마을로 가는 길' 이란 표지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린 숲이 보인다. 이곳을 통과하면 나올 듯 하다.

"좋아, 그럼 가볼까?"

키리안은 가볍게 유로아의 검을 뽑아 보았다. '쉬잉'하는 얇고도 날카로운 바람의 소리가 검명(劍鳴)을 대신했다. 이거, 느낌이 다르다.

"헤에, 이거 대단하네. 그동안의 검이랑은 차원이 다른 느낌이야."

이 느낌은…… 그래. 암은청한검을 뽑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그 분위기는 다르지만 무언가 차원이 다른 검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기검술사를 택한 이상 좋은 검은 필수야. 물론 기검술사의 클래스가 극에 달하면 검이 필요없는 경지까지 오르겠지만 그 전엔 검없인 안되지. 하지만 웬만한 검으론 기초의 기검조차 감당할 수 없어."

"윽. 좋은 검 맞추려면 돈 좀 깨지겠네."

지금의 유로아의 검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었는데 그 이상의 돈이 들거라 생각하니 머리부터 아파온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주인님은 앞으로 포스 블레이드와 에인션트 골드 블레스터만을 써나가면 충분해. 게다가 '위시 에이전트'까지 지니고 있잖아? 그거면 충분해."

"위시 에이전트는 그렇다치고, 포스 블레이드와 에인션트 골드 블레스터는 왜? 분명히 강한 것이긴 하지만 3차 직업만 되어도 부족한 검이 되어버릴 텐데?"

당연한 것이었다. 키리안의 현재 상태에서 좋은 검이긴 하지만 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검의 효율성은 떨어져 버릴 것이다.

아리에는 키리안이 당연히 그렇게 말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막힘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렇겠지. 검의 레벨을 그대로 1로 놔둔다면 말이야."

"응? 무슨 소리야?"

그녀의 말에 키리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보니 유로아의 검엔 그 레벨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가볍게 넘기긴 했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을 듯 하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기검사 계열로 간다면 그 검을 마련하기 위해 전재산을 탈탈 털어야 할 거야. 적어도 유니크 급은 되어야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검사란 직업은 검에 무리를 많이 주지. 하지만, 겨우 기검사 정도의 레벨로 유니크 급의 검을 착용할 수 있을리 만무하잖아. 그래서 있는 것이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Ancient Elemental Sword)'지."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 이 직업에서의 클래스 웨폰(Class weapon)이야?"

"그래. 다른 모든 옵션을 포기하고 오직 마력과 기력에 특화된 검. 그 본래의 날카로움마저 포기했지만, 기력으로 대신하는 검날은 이미 '물질'의 개념을 넘어서지. 그 마나효율과 친화도는 발군. 그야말로 기검사에겐 최고의 검이지."

듣고보니 상당히 대단한 검이다. 기검사란 것이 이토록 대단한 거였나.

"주인님, 이 퀘스트를 깨면 기검사 관련의 스킬 몇 가지를 얻게 될 거야. 그리고 클래스 웨폰도 얻게 돼. 그때는 '진짜 기검술사'에 한 걸음 내딛게 될 거야. 조금 적응하려면 힘들걸?"

그녀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곤 먼저 앞서서 걸어나갔다. 키리안이 급히 쫓아가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지만 아리에는 '스킬 얻어보면 알아~'라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곤 달려나갔다.

아리에와 투닥거리며(가끔 유하를 앞세워 골려주기도 하며) 걷다보니 숲의 기운이 바뀐 곳까지 도착했다. 배틀 필드다. 이곳을 지나면 인간들의 마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유하야 경계 부탁해."

"예. 존재를 관찰하는 매의 시선, 관찰의 눈."

주술과 함께 그녀의 주위에 몇 개의 하얀 구체가 나타났다. 새로 들어온 곳인만큼 적당히 견제해 줄 필요가 있다.

파아앗-!

얼마 걷지 않아 두 개의 구체가 밝은 빛과 함께 수풀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곧 '크왕!'하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늑대가 나타났다.

"에게? 겨우 늑대?"

아리에가 등장한 몬스터, 아니 '비스트(Beast)'를 보곤 김빠진다는 듯 말했다.

비스트. 말 그대로 몬스터가 아닌 평범한 짐승들을 뜻하는데, 신수(神獸) 급에 달하는 사신(四神) 정도가 아닌 이상 기껏해야 레어 정도가 한계인 녀석들이며 보통은 최하급에서 일급 이하에 머문다. 늑대는 이급 상급의 녀석들로, 현재의 키리안에게도 너무 간단한 녀석들이다.

"이거, 잡기도 그렇잖아. 유하야."

키리안 역시 전의를 상실해 버렸기에 간단히 유하의 주술, 속박으로 그 발을 묶어버린 뒤 패스했다.

그 뒤에 등장하는 녀석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기껏해야 늑대들이 전부. 거대한 곰이 한 마리 등장하긴 했지만 몬스터가 아니기 때문일까. 거부감이 느껴져 아리에의 '슬립(Sleep)'으로 재워버렸다.

아쉽게도 유로아의 검은 쓸 기회가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아 숲이 끝나고 잘닦인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표지판에 '일로즈'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마을 이름인 듯 하다.

검을 다시 검집에 꽂고 좀 걸으니 산으로 둘러싸인 그림같은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벽돌집이란 점에서 인공적인 모습이 나타났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인공적인 미'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마을이었다. 문제는, 지금 마을이 반파(半破) 상태란 점에 있었다.

몬스터를 막기 위해 세웠을 높은 성벽은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으며 그 주위의 집은 폭삭 주저 앉았다. 성문 주변엔 환자 수습을 위해 여기저기 성직자와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멀쩡한 것은 마을의 저쪽 끝부분 뿐이었다.

"…여기도 하브라스의 습격을 받았나보네."

여기는 그럭저럭 좋은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제대로 빗나가 버렸다. '좋은 분위기'는 커녕 말 걸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도 제모습을 유지하는 마을의 입구로 향하자 두 명의 병사가 그를 막아섰다. (겉보기에는)청순가련의 미소녀 아리에와 (실제로)가련한 유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빛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에에, 왜이러세요?"

그들은 경계가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보여라. 너는 이 마을엔 없던 인물. 류테스가 변신한 것이란 것일 수도 있으니 그것이 아님을 증명해라."

어느새 주위엔 여러 명의 병사들과 성직자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거, 붉은 날개의 일족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진 않은 경계다.

"어,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데요?"

당황하는 키리안. 그는 병사를보며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방법을 물었다.

"간단하다. 내 유로아의 힘이 담긴 창을 만져보기만 하면 된다. 그 괴물놈들은 고대 정령의 힘엔 도저히 버틸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창 끝부분을 키리안에게로 향했다. 창날을 보니 은은한 연청빛이 머물러있다. 분명한 유로아의 빛이다.

키리안은 병사의 대답에 창을 만지는 대신 검을 뽑아들었다. 청명한 소리가 주변에 녹아든다.

검을 뽑아드는 그를 보곤 긴장하며 창을 세우는 병사들. 역시 몬스터인가?!

"아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갑자기 증폭하는 적대적인 기운에 키리안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유로아의 검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 어떻게 그대가 이 검을 얻을 수 있었던 거지?"

그들은 키리안이 보여주는 검을 잠시 응시하더니 놀라서 소리쳤다. 그들은 무슨 아이가 맛있는 군것질거리를 쳐다보듯 유로아의 검을 응시했다.

{아아, 이 동네는 아무래도 고대 정령의 힘에 관심이 많나보네.}

인간들의 반응에 아리에가 피곤하다는 듯 키리안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한창을 떠들던 그들 중 이내 처음의 병사가 정신을 차린 듯 키리안에게 다가왔다. 유로아의 검을 보인 효과가 확실했는지 그의 눈에 더이상 적의는 깃들어있지 않았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정을 안다면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자세한 것은 마을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브람스 님의 저택에서 듣도록 하게. 그 검을 보여준다면 바로 브람스 님에게로 안내해 줄 거다."

"예에."

병사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마을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기본적으로 중앙대로(中央大路)를 중심으로해서 체계적으로 설계된 도시였지만 입구 쪽이 대파(大破)된 관계로 그 깔끔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처음 목표가 된 '브람스의 저택'은 쭉 뻗은 길을 따라 시선을 주니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 그중에서도 중심에 세워진 3층의 커다란 집. 저게 브람스의 저택일 것이다.

"좋아, 그럼 가보자고."

이방인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과 병사들이 적대적인 시선을 주긴 했지만 마을의 모습을 보자면 이해 못할 것이 아니었기에 딱히 불쾌감이 들진 않았다.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었기에 금방 브람스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앞에는 마을의 입구에서처럼 두 명의 병사가 좌우에 서있었다. 그 외에도 입구에서의 병사가 말했던 그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류테스'란 놈을 경계해서인지 여기저기에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멈춰라! 이곳에 출입하려면 인간임을 증명해라."

이방인에 대한 경계는 확실했다. 키리안은 한 번 겪어봤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저 유로아의 검을 뽑아 그들에게 흔들어보였다.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

입구에서의 광경이 재현되었다. 잠시간 그들의 눈요기거리가 되어준 후 키리안들은 겨우 저택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문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 중 하나가 용건을 묻는다. 키리안은 문앞에서 병사가 말해준대로 검을 보이곤 브람스에게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다.

"따라오십시오."

시종을 따라 키리안들은 3층으로 올라갔다. 저택은 꽤나 단순하고 실용적이었기에 얼마 걸리지 않아 브람스의 방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시장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시종이 안으로 기별을 넣자 문 너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붉은 날개 일족의 사자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를 지니셨지만 인간이시기에……."

"인간이라고? 당장 모셔라."

"예."

대화가 끝나고 시종은 문을 연 뒤에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키리안과 아리에, 유하는 시종이 열어준 문을 지나 브람스의 방으로 들어섰다.

고풍스럽지만 그렇게 사치스러워보이지는 않는 디자인의 방이었다. 가운데엔 테이블이 놓여있고 저 뒤에 또 문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실질적으로 생활하는 방은 저 문을 지난 방이고, 이곳은 응접실에 가까운 듯 하다.

테이블의 한쪽에 브람스가 앉아 그들을 맞아주었다.

"어서오게. 인간이면서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를 지녔다니…… 상당히 흥미가 가는군. 일단 앉게."

그의 제안에 따라 키리안들이 자리에 앉자 브람스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면서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를 얻은 자는 그대가 두번째로군. 첫번째는…… 그래, '레이'라 불렸던 청년이었지. 우리 인간들의 마을이 터를 잡는 중에 습격해온 류테스 떼를 막아준 멋진 청년이었지."

그의 눈은 추억을 회상하는 듯 했다. 그리고, 키리안은 익숙한 그 이름에 아리에에게 전음을 보냈다.

{레이라면, 아리에 너의 원주인?}

{응. 아직까지 레이에 대한 데이터가 남아있나보네. 뭐, 넘어가자.}

"이봐요, 시장 아저씨. 우리는 물어볼 게 있어서 온건데 대답해줄 수 있어요?"

아리에는 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는지 회상에 잠긴 브람스를 현실 세계로 돌려놓았다.

그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브람스가 잠시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흠흠, 그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지만 붉은 날개 일족에게 인정을 받았다면 우리도 믿을 수 있겠지. 무엇이 궁금한가?"

"어찌해서 이런 참사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간단명료한 아리에의 대답이며 질문이었다. 그것은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상당히 길 터였다.

"그래. 꽤 긴 이야기지. 일단 발단부터 설명해야겠군. 그러니까…… 이야기는 붉은 날개 일족의 족장인 카일의 하나뿐인 손녀딸의 외출에서부터 시작된다네."

그렇게,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기검(氣劍), 빛나다!(2)

으랴랴랴랴!

얼마만의 연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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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Twenty three - 기검(氣劍), 빛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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