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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사박-
고요한 숲속. 햇빛이 푸르른 숲의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모습이 그야말로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하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스며든 피의 냄새는 어찌할 수 없어 그 분위기를 낼 수 없었다. 자연 애호가가 이곳에 왔다면 그야말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아리에, 우리 셋만으로 충분할까?"
키리안은 지도를 따라 류테스들의 본거지를 향해 걸으며 아리에에게 물었다. 왠지 류테스란 놈들에게 무럭무럭 적의를 느껴 딱 멋지게 브람스의 저택을 나오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승산은 극히 희박했다.
"…이건 싱글 RPG 게임이 아니지. 모든 유저들은 레벨 100에서 시작해. 여기서 미친듯이 레벨업을 해서 해결을 보는 수가 있지만 하브라스를 제외하면 이곳에서의 몬스터들은 경험치가 사급의 몬스터와 엇비슷해. 그런 짓을 할 바보는 없겠지. 결국에 남는 건 실력 뿐이야. 주인님에겐 실력 뿐이잖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나라는 '에디트'에 맞먹는 존재가 있어. 그러니 괜찮을 거야."
아리에의 말에 키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신이 그나마 자랑할 수 있는 건 실력 뿐이다. 아이템도, 돈도 극히 허접한 키리안에게 있는 건 실력 뿐이다. 장비가 안되면 실력으로 커버한다. 장비가 허접해 전투에서는 언제나 불리함을 느껴 악착같이 실력을 키운 덕에 지금의 키리안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필요없을 것이다.
"뭐, 문제는 전략인가. 안되면 텔레포트로 도망치면 될 테니까. 그럼 가보자고!"
성격상 치밀하게 전략을 짠 뒤에 공격하는 방식은 죽어도 못할 키리안이다. 그냥 부딪쳐 보는 거다. 싸우면서 전략을 짜내는 게 바로 그다. 시작도 하지 않고 머리 굴릴 필요는 없다.
류테스들의 본거지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숲속에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모습으로 봐서 먼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고된 산행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만약 현실의 몸이었다면 죽어났을지도 모르겠다. 한라산 왕복에 맞먹는 시간 동안 걸은 느낌이다.
"잠깐만. 거의 다 온 것 같아."
터덜터덜 생각없이 걷고 있던 키리안을 아리에가 잡아챘다. 혹시 류테스들을 만날지 몰라 디텍트 마나를 주변에 시전 중이었기에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찰 중인 류테스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대충 50m 앞에 있어. 수는 네 마리. 날카로움과 속도가 특기인 녀석이야. 음습하고 치명적이지. 하지만, 그게 오히려 주인님에겐 유리하게 작용할 거야. 그렇지?}
그녀가 말해준 류테스들의 장점. 그것들은 키리안의 앞에선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키리안의 특기는 속도와 한 방이니까. 같은 특기를 지니고 있다면 더 잘하는 쪽이 극히 우세하다.
{그러엄. 일단 근처엔 네 마리 뿐이지?}
{응. 하지만 기분 내려고 하진 마.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잠입이야. 힘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여.}
{예엡. 유하야, 가자!}
{예.}
키리안과 유하는 조심조심 소리나지 않게 앞으로 전진했다. 기척과 소음을 없애는 '귀행(鬼行)'의 주술을 유하가 걸었기에 류테스들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사일런스는 주술이나 마법마저 쓸 수 없고 하이드 마나 포스의 경우엔 그 마나의 소모도 소모지만 소리는 없앨 수 없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마법이었기에 유하의 주술을 선택한 것이다.
류테스들은 두 마리씩 흩어져 있었다. 일단 한 무리는 사정거리 내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쪽은 힘들었다. 머리를 굴려야 할 때다.
{유하야 신호하면 바로 속박-산으로 놈들을 묶어. 아리에는 유하가 주술을 쓰자마자 사일런스 필드를 주변에 펼쳐줘. 소리가 나면 다른 놈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까. 사일런스 필드를 펼친 후엔 바로 유하의 곁에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줘. 알았지?}
{예.}
{알았어.}
친화도가 한 단계만 오르면 합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기에 유하는 이제 인형같은 모습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키리안이 아리에를 만났기에 씰을 사람과 같이 느끼고 있지만, 실제는 유하와 같은 모습이 정상이다.
키리안은 조용히 유로아의 검을 잡았다. 처음으로 검의 성능을 시험해보는 거다. 멋지게 성공해줄 필요가 있다.
조용히 연환검의 스킬을 준비했다. 연환검은 그저 느린 게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가장 효율적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연환검이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검'이며,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는 것이다. 상황에 맞게 검을 휘두르며 낭비를 줄이는 것이 연환검이다. 즉, 융통성의 검이란 말이다.
"지금!"
"속박-산!"
"사일런스 필드!"
키리안의 낮지만 강한 외침과 함께 유하의 주술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류테스들의 그 빠른 기동성의 원천인 다리가 끈적한 주술의 거미줄에 의해 땅에 붙어버렸고, 사일런스 필드에 의해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소리없이 키리안이 움직였다. 컨트롤 바이탈리티와 점핑을 이용한 대쉬. 낮은 각도로 몸을 날린 그. 검의 사정거리 내에 류테스들이 들어오자 번개같이 검을 뽑아 휘두른다!
'콘센트레이트 오라, 오라 스플리트!'
파앗-!!
한줄기 강렬한 검흔(劍痕). 일순 세상을 가른 그 빛은 류테스들의 목에 가느다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연청빛의 파편. 꽤나 환상적인 모습이다.
검을 휘두른 그 힘을 낭비하지 않고 키리안은 한 바퀴 회전해 다른쪽 그룹의 류테스들에게로 접근했다. 회전력을 통해 얻은 힘과 스킬을 이용해 검을 긋는다. 아니, 긋는 '척'했다.
류테스들이 포효하며, 아니 그런 모습을 보이며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키리안은 그것을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왼쪽으로 돌아 등뒤를 점하며 회피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휘두르는 팔의 공격 범위는 뻔한 것이다.
이제 이 소리없는 연극을 끝낼 때가 왔다. 키리안은 은은한 연청빛을 흘리는 검을 가로로 강하게 그었다. 연청빛 궤적이 류테스들의 목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상황 종료.
류테스들의 시체가 재로 변해 흩날리며 그 흔적이 지워졌다.
전투가 끝나자 아리에가 사일런스 필드를 풀었고, 그제서야 부자연스러웠던 주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움의 극치다.
키리안은 검을 한 번 휘둘러 검을 휘감고 있는 연청색의 빛을 털어버린 뒤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이거, 엄청난데. 그 자체로도 미약한 오라 스플리트 급의 날카로움을 발휘하네."
베는 느낌이 포스 블레이드보다도 뛰어났다. 기력을 소모해 지극한 날카로움을 만들어내는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 그것이 유로아의 검이었다.
"레이가 처음에 얻은 건 라이오스였지. 그건 '한 방' 타입이었는데, 주인님의 그 대포단검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 일리오스는 파괴, 유로아는 절단, 라이오스는 필살의 특징이 있어."
"흐응, 그래? 역시 검마다 특징이 있네. 이거 기대되는 걸~"
모든 기검사들은 어찌되었든 두 가지 속성을 지닌 에인션트 엘레멘탈 소드를 얻는다. 거기에 키리안은 저번 던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에인션트 골드 블레스터까지 있으니 모든 속성의 검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초반에서나 유리하겠지만 일단 있다는 것 자체가 만족감을 준다.
'검 능력이야 업그레이드 해주면 되니까!'
하나만 해도 힘든데 여럿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는 뻔하다. 하지만, 어차피 즐기기 위한 게임이고 목표는 많을 수록 좋다.
처음의 류테스들 이후 두 번 정도 더 정찰조와 조우하긴 했지만 같은 패턴으로 가볍게 잠재울 수 있었다. 유로아의 검은 확실히 날카로워서 오라 스플리트와 오라 콘센트레이트 두 가지를 중첩할 필요없이 단 하나의 스킬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죽과 뼈를 가를 수 있었다(그 감각은 스펀지를 베는 듯 해서 게임임을 계속해서 인지시켜 주었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숲이 끝나고 넓은 공터가 보였다. 거의 운동장만한 크기의 공터엔 하브라스 몇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류테스들 역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삼엄한 경비. 현재 키리안들의 수준으로 뚫을 수 없을 것 같다. 겨우 하이드 마나 포스로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하는 게 한계다.
{아리에, 뭐 방법이 없을까?}
공터의 가운데는 작은 동산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 주위는 물론이고 입구 앞까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 동물적인 감각은 인간 그 이상이었기에 어설픈 은신 마법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아리에는 주변을 스윽 훑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른 방법이 없네. 나혼자라면 어떻게 들어가는 건 가능하겠지만 셋은 절대 무리. 물론, 내 본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침투고 나발이고 필요없이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역시 그건 안되겠지.}
그에 관한 방법이라면 한 가지가 있긴 하다. 바로 위시 큐브. 하지만 2x2만을 계속해서 돌리고 있는 건 내키지 않는다. 운 좋으면 한 번에, 운 나쁘면 수백 번을 해도 안 될 위시 큐브. 재미없게 그것만 돌리긴 싫다.
{흐음, 그럼 어쩌지?}
골치 아프다는 감정이 가득 담긴 키리안의 말에 아리에는 은근한 말투로 방법을 제시했다.
{흐으응~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녀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키리안이 입을 열었다.
{뭔데?!}
키리안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리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폴리모프.}
{폴리모프?}
폴리모프. 한 마디로 변신마법이다. 그게 답이라고?
{응. 폴리모프. 그러니까, 주인님이 류테스로 변신해서 들어가는 거야. 유하랑 같이.}
{호오, 그거 재밌겠네. 지금 가능해?}
{물론! 유효 시간은 주인님의 마나가 바닥날 때 까지. 주의할 점은, 스킬을 사용하려하면 그 효과가 바로 사라진다는 점이지. 어때. 재밌겠지?}
{응응!}
예상했던대로의 반응이다. 일단 아리에는 뒤로 물러가자는 몸짓을 보이며 류테스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좋아. 그러면 둘은 들어가서 에리네들을 구해오도록 해."
아리에가 자연스럽게 둘에게 말하자 키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너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노노노. 나는 여기에 남을 거야. 그런 녀석으론 별로 변신하고 싶지 않아. 난 여기에 남아 있을 테니까 혹시 그들을 구출하면 내게 알려줘. 밖에서 멋지게 놈들을 흔들어놓을 테니까 그 틈에 빠져나오는 거야. 알았지?"
들어보니 꽤 멋진 전략인지라 키리안은 '좋아!'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변신 시켜줄게."
폴리모프는 꽤 고위의 마법이었기에 현재 그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아리에는 12초 가량 주문을 외워야했다.
한참을 중얼중얼거린 뒤에야 주문이 끝났다. 주변을 휘감은 마나가 절정에 달하자 아리에는 시동어를 외쳤다.
"폴리모프 그룹, 류테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키리안과 유하를 가르키자 그녀의 주위를 휘감고 있던 빛이 둘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빛이 순간 강하게 빛났고, 그것이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두 마리의 류테스였다.
키리리릭-
수컷 류테스가 신기한 듯 뭐라고 말했지만 나오는 건 거북한 동물의 목소리 뿐이다.
{어, 어라라. 말도 못하는 거야?}
키리안은 말을 할 수 없자 별 수 없이 귓속말로 아리에에게 물었다.
"응. 그러니까 들어가서 사람들 찾으면 변신을 풀어야 할 거야. 그들에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귓속말도 통하지 않으니까. 나오는 건 주인님의 재량이야. 알았지? 그럼 가!"
{…예예예.}
역시 속셈이 있었다. 결국 탈출의 고생을 하기 싫어서 남으려 했던 거잖아.
투덜거리는 키리안이었지만 별다른 수도 없었고, 그녀의 말도 확실히 타당했기에 유하와 함께 터덜터덜 류테스들의 본거지로 향했다.
기검(氣劍), 빛나다!(2)
으냐냐..마이트가인 자막 지니신 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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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Twenty three - 기검(氣劍), 빛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