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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은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폈다. 우습게도, 그렇게 오랬동안 알아왔는데 오프(오프 라인. 현실)에서 알고 있던 지인은 겨우 재현 한 명 뿐이었다. 하영은 전학을 계기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천령, 그러니까 에스페란즈에서 류천(謬天)이라 불렸던 '백태민'은 지금 처음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중 2때 만났던 사람들. '에스페란즈'란 게임을 계기로 만났고, 서로 함께 다니며 게임의 정수를 맛본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일 뿐이었다. 적어도 하현에겐 말이다.
게임 속에선 그렇게도 방방 뛰어다녔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화상 전화는 커녕 음성 전화를 주고 받기도 힘은 녀석이 하현이었다. 일단 마음을 열면 재현의 말대로 '오버맨'이란 말이 어울리는 녀석이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일정 간격의 선을 그어두는 녀석이었다.
적어도 게임 속에서만은 신뢰 속에서 지내던 넷이었다. 하현으로서도 중요한 아이템을 맞길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셋이었다. 그게 무에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하현에겐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아이템을 맡긴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절친한 사이였지만 넷은 사소한 일로 인해 그 연락이 끊어졌다. 바로 하현과 태민, 하영의 싸움 때문이었다.
그당시의 자신은 스스로도 너무나 어리고 앞뒤도 볼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고 생각하는 하현이었다. 스스로는 그래도 매너를 지킨답시고 행동했지만 결국엔 조금만 틀어지면 제 기분대로 날뛰던 하현이었다. 그렇게 행동하던 중 자유전투장에서 약간 도를 넘어선 행동을 해버렸고, 하영과 천령의 제지가 어쩌다보니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일단 마음은 연 지인에겐 약한 하현이었기에 언쟁을 벌이다 결국 먼저 로그 아웃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들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재현은 그래도 지속적으로 알아오던 동생이었던 하현의 편에 좀더 가까웠다. 중재를 하려고 하긴 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래도 하현을 많이 봐주는 쪽이었다.
그와 반대로 하영과 태민은 하현과 싸웠기에 기분이 꽤 틀어진 상태였다. 그때 재현이 하현의 편을 드는 듯 하니 그것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서로가 자존심이 꽤 강한 편이었기에 사과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하현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린 날의 그 자리합리화와 자존심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결국 금이 간 사이는 위기를 맞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 물방울에 결국 물이 넘치듯, 꾹꾹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게 되었고, 하현과 하영이 싸우게 되었다.
싸움은 베스트 드레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격렬한 싸움. 지인에겐 모질게 하지 못하는 하현의 그 마음이 남아 밀리게 되었지만 결국 폭발해 버렸고, 약간의 눈속임으로 '붉은피'를 연출해 하영을 놀라게 했다. '블러디 앱솔루터'란 명칭은 그때 생긴 별명이다.
그 후 하현과 하영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기실 게임 자체를 접으려했던 하현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해오던 그것을 자의로 끊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재미도 느끼지 못하며 게임 속을 방황했고, 무차별적으로 시비를 걸고 다녔다.
한 번하면 캐릭터를 지우기 전엔 삭제할 수 없는 친구의 목록에 셋이 있던 하현에게 그들의 접속 여부를 알려주는 메세지는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유료 아이템으로 그것을 지움과 동시에 캐릭터의 아이디마저도 바꿔 버렸다. 리안 에스페르츠. 바로 그 이름으로.
그렇게 아이디를 바꾼 후엔 재현조차도 하현의 접속 여부 등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학교도 달랐기에 재현과도 얼마간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재현의 노력으로 그나마 둘이 예전의 사이로 돌아가고 오랜 시간이 지나 하현이 과거의 일을 덤덤히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재현이 또다른 게임을 추천해 주었다. 바로 'The Absolve(디 앱솔브)'였다.
Absolve. 죄를 사면한다는 뜻이 담긴 단어. 그것이 하현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현은 결국 그것을 재현과 함께 플레이하기로 했다.
키리안. 바로 그것이 디 앱솔브 내에서의 하현이었다. 그는 키리안으로 저번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했다. 과거의 쓰라린 일을 교훈 삼아 좀더 생각도 깊어졌다.
한데, 정말 진한 인연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동안 연락조차 없었던 태민을 만나고 하영을 유저와 씰이란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정말 만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난 그들이었고 하현의 그 행동 탓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긴 시간을 함께 해온 그들이었기에 완전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영과는 서로가 의도적으로 회피하다가 여러 일이 있은 후 베스트 드레서를 계기로 결국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첫만남 이후 긴가민가하던 태민 역시 그 장면을 보고 접속을 끊은 후 황급히 전화번호를 뒤져 처음으로 화상 전화를 걸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온에서의 가느다란 인연의 실이 끊겼던 넷이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 것이다.
"정말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지……."
대화를 하자고 해놓고 모두들 침묵하고 있다. 하긴, 좋지 못한 일로 헤어지게 되었고 연락조차 없이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그 벽이 쉽게 허물어질 리가 없다.
재현은 무거운 공기를 날려보내고자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뭐 다시 모이게 된 계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난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인연이잖아? 묵은 건 정리하는 게 어때?"
주위를 스윽 둘러보는 재현. 하현과 하영은 그 시선을 피했지만 태민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난 지금도 놀라고 있는 걸? 소설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는 구나, 하고 말이지. 어이 거기 둘. 저번처럼 그렇게 끝낼 거냐? 서로 진심을 속이지 말라구. 우물쭈물해서는 아무 것도 못해.]
태민의 말에 둘이 움찔한다. 역시 스물을 넘어선 '성인'이기 때문일까? 정확히 둘의 상태를 꼬집고 있었다.
"…저기."
먼저 말을 연 것은 하현이었다. 태민의 말이 맞았다. 용기없이 꾸물거리기만 해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분명히 과거의 일의 발단과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자신이었다. 사과라면 자신이 먼저 해야 한다.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이 깊어졌다고 여기고 있는데, 과거의 바보같은 모습으론 살지 말자고 계속해서 되뇌었는데 이런다면 과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기어들어갈 듯한 하현의 말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하영에겐 천둥소리만큼이나 컸다. 그녀가 슬금 고개를 하현 쪽으로 돌린다.
그녀의 모습을 마주보자니 덜덜 떨리는 하현이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해서 복잡한 감정을 꾸욱 누르고 말을 꺼냈다.
"미안해. 난 말주변이 없어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어. 이게 내 진심이야. 그리고, 모두에게도 미안해요. 바보같이 나 때문에 그 사이가 틀어져 버렸으니까. 정말, 정말 미안해요."
하현은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태민이 웃는다. 좀더 어려울 줄 알았는데 너무 쉬웠다. 적어도 게임 속에서의 그는 이런 약한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다만, 재현만은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라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쳇! 바보같잖아. 이렇게 쉽게 사과 할 거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끈 거야?"
하영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역시 그녀도 고 1의 소녀일 뿐이었다. 그리고 하현 역시 조금은 소심한 고 1의 소년일 뿐. 정말로 별 거 아닌데, 그런 한 마디가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뭐, 이걸로 된 건가? 정말 간단하잖아. 에잇 이놈아! 너 때문이라고! 더 반성해!"
딱-!
재현이 하현의 뒷통수를 유쾌하게 후렸다. 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는 하현. 낄낄거리며 한 대 더 때리려는 것을 하영이 감싸안는다.
"왜 애꿎은 애를 때려 오빠는! 절루가(저리로 가)!"
하영의 구박에 재현이 깨깽, 꼬리를 내리며 물러났다. 그것을 보며 태민이 기분좋게 웃는다.
'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바보같았잖아.'
그렇게, 오랜 시간 짐으로 남았던 일이 유쾌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씰 콘테스트 - 듀얼 토너먼트
어찌어찌 넘긴 건가요.
젠장. 베스트 드레서 때문에 완전 말렸군요..-_ㅠ
다시는 이 챕터를 생각도 하지 않으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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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Thirty one - 씰 콘테스트(Seal contest) - 듀얼 토너먼트(Dual tourn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