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회: 일어서다 -- >
보통 x급 괴수가 나타났을 때 해당 괴수를 단독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능력자의 레벨에 +3을 더한다.
예를 들어 4급 카르키노스를 단독으로 격파하기 위해서는 최소 7레벨의 능력자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이것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능력자와 디멘션 홀 괴수간의 평균 공식이었다.
박현도의 진압부대에 7레벨 이상 능력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공식이 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4급을 처리하기 위한 7레벨 능력자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단독일 경우에 해당된다.
현성코퍼레이션에서 나온 진압팀의 인원은 박현도를 포함 열 명이 넘었다.
"산개!"
팀장인 박현도의 명령에 능력자들은 각자 정해진 위치로 뛰어갔다. 능력자들은 이미 민간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체스펙을 가진 자들, 주택과 빌라의 담을 넘나들며 벽을 박차고 옥상위로 튀어올라간 그들은 던전산 장비를 꺼내며 카르키노스를 요격할 준비를 마쳤다.
"잠깐."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으로 팀원들에게 정지명령을 내린 박현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민간 피해가 심할 것 같으니 저쪽으로 몰지."
"예?"
단 한 번도 이런 명령을 내린 적 없는 박현도의 모습에 팀원들이 반문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저쪽 방향은 저희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공간입니다만?"
"차야 또 사면 되는 거고 지금은 주택 피해를 줄이는게 더 중요하다."
'무슨 지랄병이야?'
현성 진압부대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박현도가 얼마나 망나니 새끼인지를. 솔직히 돈을 많이줘서 붙어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망나니 밑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듣는 것을 별로 고깝게 여기진 않았다.
피해지역에서 부상을 당한 여성에게 이송은 커녕 성범죄 물의를 빚었던 전력이 있을 정도, 여러가지로 놈의 인성은 쓰레기 그 자체였다.
"그럼 시작."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곳이 이곳의 규칙, 다시 위치를 잡은 능력자들은 괴수가 싫어할만한 소리와 주문을 걸며 카르키노스를 자신들의 차량쪽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환상현 일행이 있었다.
카르키노스의 공터 유도는 이것을 노린 계략이었던 것이다.
'씨발 띠꺼운 새끼.'
지금까지 자신에게 두눈을 제대로 뜨고 대항한 놈은 환상현 저놈이 유일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뒤에 있는 현성기업의 권력에 도전하지 않았지만 놈은 달랐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것처럼 고고한 자세로 나오는 것이 박현도는 몹시도 거슬렸다.
'콱 죽어버려라.'
대체 어떻게 그 뺑소니 사건에서 살아남았는지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잘 된 일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깔끔하게 마음에 안드는 놈을 처리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현도 일행이 사라진 자리, 상현이 조용히 말했다.
"재후야."
"네."
"저런놈은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걸까."
지금 열을 제대로 받은 것은 흥분해서 나서려고 했던 재후가 아니라 상현이었다.
박현도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환상현의 기준에 하나도 차는 것이 없었다. 물론 신체적인 능력은 박현도 패거리가 훨씬 우세했다.
환상현은 여전히 레벨3의 미약한 능력자일뿐, 팀단위로 움직이는 노련한 능력자팀을 상대로 싸움을 걸 수는 없었다.
방법이라면 신성을 이용하는 것 뿐이었는데 성신인 환상현이 인간을 살상할 목적으로 신성을 운용하면 좋지않은 일이 생길게 뻔했다.
처음에는 날뛰는 카르키노스에게 신성으로 광폭화를 시켜 능력자팀을 전멸시킬까 생각도 했지만 괜히 애꿏은 사람들만 박현도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격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 더러워서 피하지. 일단 자리를 뜨자구요 형."
솔직히 재후는 박현도 일당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고위 능력자가 민간인 하나 소리 소문 없이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란 이야기가 돌 정도로 능력자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시대였다.
'재후만 없다면.'
똥이 더러워서 피하면 누군가는 밟는다. 환상현은 오늘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똥을 치워버려야 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재후야."
괜히 재후보고 너 먼저 가있어라고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현은 재후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간 후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카르키노스가 방향을 돌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공포스러운 집게발이 사방으로 건물을 파헤치며 거대 꽃게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하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상현은 재후에게 달려가 뒷목을 내려치며 그를 강제로 기절시켰다. 아직 멀쩡한 슈퍼 안으로 재후를 던져넣은 상현은 가게 벽에 세워져 있던 쇠파이프를 들었다.
'강화.'
신성이 파이프에 깃들자 잠시 은은하게 빛을 뿜던 쇠파이프는 금새 평범한 상태로 돌아갔다.
이 가벼운 신성 작업 만으로도 놈을 상대하기엔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신성 발현이 카르키노스의 눈알을 좌우로 떨게 만들었다.
"이놈의 게새끼가 왜이래?"
카르키노스를 유도하던 진압팀은 당황했다. 괴수가 벽에라도 가로 막힌듯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사방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뭐해! 빨리 저쪽으로 몰아!"
"이 게가 안움직입니다 팀장님!"
"젠장 물리 공격을 퍼부어봐!"
박현도는 즉시 오라를 발현시켰고 그의 힘을 전해받은 팀원들은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얼음, 불꽃, 강철의 화살등 다양한 공격이 카르키노스의 푸른 등딱지에 닿으며 폭발했다.
공격을 당할 때마다 집게발을 까딱거리며 건물을 파헤치는 것이 분명 고통을 받는 것 같았지만 절대로 앞으로 나서려고 하진 않았다.
위이이이잉-
시민들의 대피를 촉구하는 거대한 사이렌의 홍수 속에서 박현도 휘하의 한 진압부대원은 게가 나서지 못하는 방향쪽에 서 있는 한 인간을 포착했다.
'저건 뭐야?'
아까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청년이었다. 얼핏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무래도 팀장과 악연을 맺은 것 같은데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 없는 걸로 보아 민간인이거나 아주 낮은 능력을 소유한 능력자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대피 사이렌 속에서도 움직이긴 커녕 싸움을 구경이라도 하듯 떡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어디서 줏어온건지 파이프 하나 들고 정면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은 크게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캬가가각!"
카르키노스가 울부짖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괴수의 등을 떠밀고 있던 부대원들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주문이 깨짐과 동시에 마력이 역류한 것이다.
박현도는 머저리새끼들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까부터 환상현을 주시하고 있던 남자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파이프를 들고 있는 남자가 한걸음 전진한 타이밍과 카르키노스가 뒷걸음질 친 타이밍이 교묘하게 일치한 것이다. 미친 생각처럼 여겨졌지만 4급의 대형괴수가 청년의 손에 들린 파이프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미친건가.'
그럴 리 없다고 결론지은 부대원은 곧바로 피를 토하며 쓰러진 대원들을 커버하기 위해 위치를 변경했다. 괴수를 눌러두고 있던 주박이 깨진 이상 힘겨운 싸움을 각오해야 했다.
"팀장님 안되겠습니다. 일단 카르키노스를 이 자리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씨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이렇게 된게 전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박현도는 씨근덕거리며 부상자들을 뒤로 물리며 전투에 나섰다. 그의 진압부대는 철저하게 박현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이다.
박현도가 오라를 발생시키면 지원사격을 받은 팀원들이 각자의 방위를 지키며 몬스터를 압박, 살상하는 간단한 전법, 간단하지만 효과조차 약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차륜전은 실력이 딸리는 다수가 하나의 강자를 상대할 때 좋은 방법이지 않던가.
"공격 집중!"
박현도가 외치자 부대원들이 일제히 카르키노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저들에게는 잘못이 없지.'
이 자리에서 잘못된 것은 오직 박현도 뿐, 그는 이미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던 전적이 있다. 상현이 아무리 성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해하려 드는 존재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주라는 어느 성자의 말이 떠올랐지만 요즘 시대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 할 수 있었다. 냉혹해진 세상은 내것도 내꺼, 네것도 내꺼 하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무리를 할 것을 각오한 환상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빛살처럼 빠른 신성줄기가 카르키노스를 향해 뛰어오르던 부대원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커, 커헉!"
감전이라도 당한듯 몸을 부르르 떨며 땅에 떨어지는 팀원들을 보며 박현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이새끼들아. 빨리 안일어나?"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허나 그가 상황을 이해하건 말건 환상현은 눈을 감고 신성에 집중했다. 집중해서 일으키지 않으면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신성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괴수여, 만약 네가 저 인간을 죽인다면 너를 살려주겠다.』
상위 신성이 직접 전달하는 언령의 엄청난 압박, 카르키노스는 게거품을 물며 박현도에게 돌진했다.
이미 주변엔 박현도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원형의 결계를 친 상황, 수원 사건 때보다도 더한 신성력을 사용한 상현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하아 하아...."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모면하고 자리를 피한 상현은 기절한 재후를 태우고 진압팀이 남겨두고 간 SUV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기왕 사용한 신성, 시동쯤 건다고 해서 더 안좋아질 일도 없었다.
부바바방-
호쾌한 배기음 소리가 울리자 상현은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시내로 자동운전을 맡겼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내로 간 것은 혹시라도 SUV차량을 이용한 뒷추적을 염려해서였다.
지난 일년간 어느 정도 잡다한 지식이라는 것을 쌓아온 상현이었다.
'너의 최후를 지켜보지 않는 것은 나의 마지막 자비다.'
그렇게 차량이 현장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는 찰나, 상현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백미러에 박현도가 거대한 집게발에 붙잡혀 들어올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강화된 시력에 의해 환상현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카르키노스를 홀로 쓰러트려 살아날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자의 운명이다.
"이익, 씨발! 이렇게 뒤질 순 없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도 잠시 박현도는 카르키노스의 집게발에 의해 간단하게 두동강 나버리며 최후를 맞이했다. 초라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디멘션 홀 발생 45분 뒤, 정예 진압부대 D.SWAT팀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차원틈을 통해 나타난 거대 괴수가 쥐죽은 듯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괴수들은 파괴와 학살을 행했는데 놀랍게도 이녀석은 파괴를 하다말고 얌전한 동물처럼 자리만을 지키고 있었다.
거대괴수가 꼼짝도 않고 눈알만 굴리는 상황에 진압부대원들도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일단 생존자들 확인하고, 최대한 놈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수색시작해. 놈이 일어나면 죽여야겠지만."
"지금 미리 죽이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는 일단 처음이니까 상부에 보고해야 할 것 같다."
소령 김성식,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진급, 신도시로 발령을 받은 그는 노련한 D.SWAT의 일원이었다.
"대장님 이쪽으로 와서 이것좀 보셔야 겠습니다."
김성식은 부하의 말에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를 부른 것은 마력을 측정하는 검시관이었다.
"무슨 일인가."
"이것 좀 보십시오."
그가 들고 있는 마력 검침계, 디멘션 홀이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마력이 들끓는다. 마력이 순간 집중되는 정도로 디멘션 홀의 발생을 예상하는 원시적인 방법도 오라클 기관 출범 이전에는 자주 쓰이던 방법이었다.
"이게...뭐지?"
검시관이 들고있는 검침계의 바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미친듯이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장난 것 아닌가?"
"보통 4급 괴수가 나타난 자리에는 초기 한시간 이내에 4000K정도의 마력잔해가 검출됩니다."
"그런데?"
"보통 마력이라는 것은 일정한 흐름을 띄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 양이 폭발적으로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있어도 폭락과 상승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늘을 보시면 현재 이 지역의 마력은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
"일대에 퍼진 마력잔해가 제각각인데다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검시관의 심각한 표정에 김성식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그게 언제인가?"
"수원 하급던전 대사고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디멘션 홀의 발생빈도가 증가를 시작했습니다. 소령님, 이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쪽 물건을 좀 보시죠."
김성식의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보에 쌓여있는 흔한 파이프였다.
"쇠파이프?"
"그냥 쇠파이프가 아닙니다."
호흡을 한 번 거른 검시관이 주위에 들릴새라 조용한 말로 김성식의 귀에 속삭였다.
"신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