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 회: 전진! -- >
상현을 뒤에 데리고 훌쩍 앞서나가는 남자의 이름은 백종현, 약 10년 전 아직 한국에 고레벨 능력자가 없을 당시 최초로 7레벨을 달성했던 최고의 기대주였다.
그당시엔 백종현이란 이름 석자만 불러도 능력자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모실 정도였다.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능력자를 뒤로 세우면 연병장을 가득 메울 정도.
그런 그가 몰락하게 된것은 안타깝게도 믿었던 후배의 배신이었다. 어딜가나 1인자의 자리를 시기질투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 그는 믿었던 후배가 세운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5급 디멘션 홀에서 튀어나온 괴수와 레이드를 하는 순간 후배는 부상을 핑계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밑에 있던 대원들을 전부 데리고!
대원들이 뭉텅이로 빠져나가자 전열이 유지될 리 없었고 레이드는 커녕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 자신의 몸은 피할 수 있었던 백종현은 나머지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고 괴수와 맞서 싸웠다.
덕분에 전멸 위기에 처했던 그의 공격대는 절반의 사상자를 내는 것으로 피해를 줄이며 레이드에 성공했다.
상처만 남은 레이드, 그는 국내 첫 5급 레이드에 성공한 것과 동시에 능력자로서의 인생이 절단나고 말았다. 강한 각성제와 무리한 전투 탓으로 전신의 마력회로가 전부 가닥가닥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를 따르던 대원들도 큰 상처를 받았다. 선량한 대원들은 남의 목숨까지 위협해가며 명예를 노리는 능력자들의 세계에 치를 떨며 은퇴해버렸고 대충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후배의 밑으로 빠져나갔다.
백종현의 밑에 남아있고 싶어하던 사람들도 그의 재기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자 몇 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다. 그 사고가 있은뒤 얼마동안은 자살을 생각했다.
'이런 더러운 인생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레이드에서 헛된 죽음을 맞이한 대원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그는 후배를 찾아갔다.
따지고 싶었다. 그깟 국내 1인자가 뭐라고 이런 미친 짓을 벌였는지. 그러나 백종현은 후배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백종현이 후배를 찾은 것은 처절했던 레이드가 끝난지 3개월 후였다. 후배는 자신을 제치고 국내 최고의 능력자 자리에 올라있었다. 많은 능력자들에 둘러쌓인 후배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백종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배, 내가 마지막으로 선배대접해줘서 그냥 보내드리는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내 멱살잡고 멀쩡히 걸어나갈 사람 이제 없어요. 이제 옛날의 우성진이 아니란 말이야.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니까 다시 얼굴 보지 맙시다. 예?"
좌절, 굴욕, 모멸감.
그는 벌어둔 돈으로 흥청망정 세월을 보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여느때처럼 술집을 전전하며 반쯤 취해있던 백종현 앞에 괴수가 나타났다. 초보 능력자들도 어떻게든 힘을 내면 해치울 수 있다는 렛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도 자살을 생각했던 그는 렛맨을 보자마자 죽고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했다.
'죽어도 렛맨이 뭐냐. 하다못해 신화급 괴수는 되야지.'
그것은 변명아닌 변명이었다. 가게 문앞에 있던 각목을 들고 백종현은 싸움을 시작했다. 무려 7년간이나 술에 쩔어있던 몸은 과거 대한민국 1인자라 칭송받던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겨우 1분의 짧은 전투였음에도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전신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남자 고등학생들 체력도 이것보단 좋을 것 같았다. 거대 쥐와 뒹굴기를 수십분, 치열한 사투 끝에 백종현은 렛맨의 대가리를 박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비록 전성기 때로 되돌아가지는 못할지언정 노력만 하면 중급 능력자까진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아있는 것은 자신의 옆을 항상 지키던 창 한자루가 전부였다. 노름과 술, 여자로 전부 팔아버리고 남은 것이 딱 그것 뿐이었다.
흑색의 장창 한자루를 들고 그는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고독하게 산을 타고 바람을 맞기를 3년, 그는 상당한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인생을 낭비한 것인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쳤다.
나이 서른 다섯, 그는 비록 마력회로가 조각났지만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 1분 정도는 7레벨급 창잡이의 힘을 쓸 수 있게 됐다.
"잘듣게. 지금 저기 떨어져있는 내 창 보이지?"
상현과 백종현은 다 찌그러진 트럭 옆구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자네 탱커지? 아니면 딜탱?"
"딜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이제 앞으로 30초 정도밖에 못움직여. 만티코어 시선 한 번만 끌어주면 내가 잽싸게 저 창을 집어다가 최후의 일격을 꽂아볼게. 할 수 있겠나?"
"가능할까요?"
소근거리는 백종현의 얼굴엔 땀이 가득했다. 30초는 커녕 훅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아저씨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폼이 영락없는 환자, 상현은 그가 큰 사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됐다.
"이렇게 말하는 시간도 아까워. 한 번만 막아주게. 만티코어는 5급 중에서는 근접 공격력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니까, 여차하면 내빼버리라고."
"차라리 지원을 기다리죠. 아저씨께서 날개를 뚫어주신 덕분에 놈은 멀리 못갈텐데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저놈 지금 무척이나 열받았어."
백종현이 말할 때 만티코어의 입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뿜어져나와 건물을 몽땅 불태웠다. 일대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놈은 빠르기까지 하지, 날아가면 정말 답이 없지만 기어다녀도 무척 곤란한 놈이야. 지금 공격을 가해두지 않으면 어떤 참사가 도시에 일어날지 모른다고."
"왜 D.SWAT은 출동하지 않는거죠? 시간이 꽤 지난것 같은데."
"전투기의 미사일로도 안되는 놈을 땅깨가 무슨 수로 잡아? 고위 능력자들을 모으느라 정신 없을거야. 자,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어. 뛰어 나가게!"
"잠, 잠깐만요. 정비할 시간을 30초만 주십시오."
"젠장, 30초면 나 숨넘어간다고."
백종현이 투덜거리건 말건 상현은 등에 메고 있던 짐을 풀어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딱 봐도 싸구려잖아!"
"이거라도 입는게 도움이 됩니다."
미친듯이 빠른 손놀림으로 옷 위에 갑옷을 걸쳐입은 상현이 준비 완료라는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달려!"
백종현의 말에 상현이 철컥거리는 군화와 함께 지면을 달렸다.
"만티코어!"
건물 위로 올라간 상현은 방패 위로 검을 두드리며 괴수의 시선을 끌었다.
"네 상대는 나다!"
효과가 있었다. 거대한 붉은 괴물이 훌쩍 건물을 뛰어넘어 상현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놈이 이동을 시작하자 백종현은 골목길 어귀를 돌아 만티코어가 짓누르고 있던 자신의 창을 집으러 달려갔다.
콰오-
직경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기둥이 상현이 있던 자리를 휩쓸었다.
'도저히 정면에선 승산이 없겠는걸.'
우측으로 재빨리 내달리며 방패를 앞세우자 만티코어의 불뿜는 아가리도 상현을 향해 움직였다. 환상현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잿더미만 남은 상황, 엄청난 열기에 상현의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죄다 그슬리고 말았다.
좌우로 요리조리 피하며 만티코어의 힘을 빼고 있을때 뒤쪽의 건물 위로 백종현이 올라오는 모습을 확인한 상현은 있는 힘껏 검기를 발산했다.
목표는 눈, 그러나 반사신경이 좋은 만티코어는 머리를 흔드는 것만으로 상현의 공격을 튕겨냈다.
백종현이 쉽게 날개를 찢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핫!"
환상현이 벌어준 틈, 그 찰나의 시간을 놓치지 않은 백종현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다시 한 번 가공할 투창실력을 과시했다.
퀴이잉- 푸확!
바람을 가르며 살을 뚫는 묵직한 흑창이 괴수의 옆구리를 제대로 찔렀다.
그것은 진정한 분노의 시작이었다. 만티코어는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꼬리를 사방으로 흔들며 강침을 발사했다.
'괜히 화만 돋군거 아니야?
끔찍한 고통에 이미 만티코어는 상현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옥상 뒤편에 숨어 숨만 헐떡거리는 백종현도 마찬가지, 반경 수백미터 이내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대피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옥도 한편 그릴 뻔 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뛰어다니진 않네.'
옆구리의 부상이 걸려서일까 만티코어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걸음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도보보다는 월등히 빠른 속도로 불길이 닿지 않은 시가지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오긴 오는건가.'
백종현이 말한 고위급 능력자들로 구성된 레이드팀은 도저히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만티코어의 걸음이가 빨라지고 있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튀어나왔지."
레벨 5급 이하 능력자는 물론 그 이상의 능력자도 코빼기도 안보이는 상황, 상현은 한숨을 쉬며 만티코어의 앞으로 달렸다.
그는 몰랐다. 다른 능력자들이 안나오는 이유를, 군대가 침을 발라놓은 괴수는 치사해서 건들지 않는다는 능력자 전통의 규칙을 말이다.
지금쯤 힘이 되는 능력자들은 군과 교섭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만티코어를 잡아서 온전히 자신들이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상현처럼 메신저 호출만 듣고 달려나오는 능력자는 그냥 얼간이 취급이었다.
"더 이상은 안 보낸다."
칠이 왕창 벗겨져 흉물스러운 방패를 들이민 상현이 패기롭게 외쳤다.
'저 미친 새끼....'
여전히 은신해서 상현을 밀착감시 하고 있던 정석영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주시했다. 그의 능력은 은신, 그가 힘을 발휘하면 천하의 괴수들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능력자들에게도 통하는 힘이었다.
상현이 기감이 뛰어나도 인간인 이상 그의 은밀한 기척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는 군이 자랑하는 스텔스요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정석영이 보기에 상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능력자들이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군이 그런 인간들을 나무랄 이유도 없었다.
군도 이익이 날법한 부분에선 가차없이 교섭을 했기 때문이다. 능력자와 군대의 사이가 나쁜 이유였다. 항상 세금을 뜯어내려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군(정부)과 능력자의 사이가 좋을리 만무했다.
정석영의 상식으로는 상현도 이자리에 나타나지 말했어야 했다. 그냥 시켜놓은 볶음밥이나 처먹으면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그랬으면 앞호실에 묵고 있던 자신이 이렇게 밖으로 나와 가슴 졸이고 싸움구경을 할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만티코어의 앞발이 아스팔트를 할퀴며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상현이 벽을 발판 삼아 회피했다.
'설마 삶에 미련이 없다든가 하는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상현의 얼굴이 너무나 필사적이었다. 만티코어가 시가지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백색 검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견제작업에 들어갔다.
정석영의 입장에선 상현이 죽는 것은 곤란했다. 그냥 정신병자라서 자살하려고 튀어나온 놈이라면 그동안 밀착감시한 한달 넘는 시간이 너무 억울했다.
반드시 마력불안정 현상과 관련이 있는 놈이어야 했다.
'뒤지지 마라 썅놈의 자식아!'
귀가 가려움을 느끼며 상현은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만티코어의 앞발에 맞서 최대한 마력을 집어넣고 몸을 비틀며 힘을 흘려보낸다.
전생에 검사로서 최고 클래스의 자리에 올라선적 있는 상현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움직임이었다.
만티코어의 발톱이 방패표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순간 검기가 괴수의 피부를 때리며 얕은 자상을 입혔다. 미약하게나마 딜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왕 시작한거 수련으로 생각하자.'
누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상현은 정신을 최고조로 곤두세웠다. 단 한 방, 한 방을 잘못 맞으면 죽음이 확정지어지는 전투. 백 번 곤두세워도 모자람이 없는 전투속에서 상현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開闢 댓글 감사합니다!
쿠폰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이름이 안나오기에 어느분이신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쓰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