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회: 전진! -- >
백종현은 무자비하게 액셀을 밟으며 차를 몰았다. 그가 차를 끌고 들어간 곳은 청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이었다. 산의 초입에 차를 바친 그는 상현을 데리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등산 좋아하나?"
"등산 경험이 없어서요."
평생 신전에서만 살다 전쟁에 나가 칼맞아 죽어 지구에 떨어진 상현이 언제 등산을 해봤겠는가.
백종현은 금새 길이 아닌 곳으로 진입해 직접 길을 만들며 이동했다.
"아무래도 꼬리가 붙은 모양이야."
그의 날카로운 기감에 불청객의 기운이 포착됐다.
"조금 속도를 올리지."
커다란 바위를 단숨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나무를 밟고 날기도 하며 그들은 순식간에 추적자를 따돌렸다.
"이런 젠장, 대위님께 연락해."
그들을 뒤쫓던 군인들은 숨을 헥헥거리며 결국 추적을 포기하고 정석영에게 보고를 넣었다. 전화 너머로 분노의 외침이 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는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훈련에 몰두한 곳이지."
종현이 안내한 곳은 깊은 숲 안에 감춰진 오두막이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작은 냇가가 있었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작은 공터도 있었다.
"혼자서 수련하기엔 안성맞춤이라고 할까."
"여기에 몬스터가 나올 것 같진 않은데요?"
상현은 왜 종현이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괴수를 잡는 능력자, 본신의 힘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하려면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내가 보기보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거든."
"...?"
"아까 가상 대결로 미적지근한 끝을 봐버려서 말이지. 복귀 기념으로 자네같은 능력자와 한판 붙는다면 아주 좋은 일이겠지."
"설마 이것도 테스트라고 하실건 아니죠?"
"마음을 굳혔어. 지던 이기던 나는 자네 공격대에 들어갈거야."
명쾌한 대답에 상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전에만 해도 다른 대원들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고깃집에서 있었던 마력회로의 치료가 상당한 영향을 준 듯 싶었다.
"기왕 한솥밭을 먹게 됐는데 다치면 곤란한데요."
"내가? 아니면 자네가?"
"둘다요."
"내가 다칠 확률은 별로 없을걸."
종현은 창 끝의 붕대를 풀어내며 웃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치료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를 안했었는데...이건 정말 예상 밖이라는 말외엔 할 수가 없겠는데."
환상현의 치료 실력은 그야말로 신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직 느낌 뿐이지만 자신의 몸에 흐르는 활력은 전성기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창을 머리 위로 돌리며 자세를 고쳐잡은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창대를 꾹 붙잡았다.
"시작할까."
"그러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종현의 발이 상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걸음을 밟아나갔다. 가벼운듯 보이지만 심상치 않은 걸음걸이, 밟은 땅이 꾹 다져지는 것을 확인한 상현은 조만간 종현이 치고 들어올 것이라 예상했다.
쾅!
상체를 숙이며 디딤발이 전력으로 대지를 박찼다. 대포를 발사하는 것 같은 소리가 주변을 울리며 숲속의 새들이 하늘로 튀어올랐다.
흑룡창, 한마리 흑룡이 지상을 노니는 것과 같다 하여 동료들이 붙여준 기술 이름이었다. 사나운 흑룡의 발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상현은 지체없이 뒤로 몸을 물리며 상대의 속도를 줄였다.
흑창이 자신의 상체위를 휩쓸고 지나가자 공기가 일렁였고 그 뒤로 뻗어나간 충격파가 수십년은 자랐을 나무들을 단방에 도려냈다.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강맹한 공격에 상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난이 아니잖아?'
차라리 마력을 배제하고 초식대결이라도 하자고 제안했을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판은 벌어진 뒤였다. 맞서싸우기로 결심한 상현은 마찬가지로 뒷발에 힘을 주고 전방을 향해 솟구쳤다.
누군가 본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고속공방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졌다. 천둥과 불꽃이 두사람 사이로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못버틴다!'
전력승부에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거금? 3천만원을 들여 산 검끝이 미세하게나마 갈려나가고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단단한 금속으로 제련한 강검이 버티지 못할 정도의 전투였다.
이대로 더 겨루면 검이 깨져나가리라.
'대단하구나.'
그가 원래 강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정보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하자 새삼스러운 감탄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이런 고속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그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환상현이 감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종현 역시 상대의 실력에 감탄했다. 이 꼬마에 비하면 십년 전의 자신은 어떠했는가. 적어도 이 정도의 재능과 실력은 아니었다.
비록 그동안 마력을 잃고 비루한 삶을 살았다고 하나 지난 3년간은 정신을 차리면서 기술의 묘를 더욱 닦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기에 지금 당장 펼치는 창술만큼은 10년 전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어떤 정타도 허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격까지 곁들인다. 백종현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와같은 신나는 공방전을 펼쳐본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솔직하게 칭찬한다. 더럽게 강하구나!"
"제가 밀리고 있는데요."
폭풍 속에서 안부를 주고 받으며 동시에 산을 울리는 폭발소리가 그들의 중앙에서 터졌다.
"좀 더 놀아보자고!"
백종현의 도발에 상현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힘이 급작스럽게 불어난 탓이었다. 좀 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이었다.
빈틈없던 상현의 방패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힘이 너무 세서 반동을 주체하기 힘들어진 탓이다.
'열려라. 열려라.'
대련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둘 다 전력으로 승부에 임하고 있었다. 백종현은 상현의 방패 뒤에 숨겨진 상체 중심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렸다.
마력격차에 아이템 격차까지 벌어지니 상현은 죽을 맛이었다. 백종현의 창은 10년 전 기준으로 한국 최고의 장창이었다. 당장 내다팔아도 100억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명창인 것이다.
물론 상현이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중고로 산 C급 방패보다 좋을 것이란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흰색 창술이 배꽃처럼 휘날리더니 기괴한 궤적을 그렸다. 분명 제대로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창끝이 품 안으로 파고들어온 것이다.
'젠장!'
상현은 진심으로 놀라며 사력을 다해 상체를 움직였고 그의 창끝을 간신히 겨드랑이 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웅웅-
그러나 백종현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미 그렇게 나올줄 예상이라도 한듯 그는 창대를 무자비하게 흔들었고 그 힘은 고스란히 창촉으로 전달됐다. 좌우로 후려치는 창대가 상현의 어깨와 팔을 강타했다.
"크헉!"
가까이 붙으면 어느정도 창의 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속설이 무색하리만큼 그는 근접공방도 뛰어난 창잡이였다.
'이쯤하면 됐으려나.'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전신에는 힘이 용솟음쳤으며 강하다고 생각했던 상대와 대결해 우위를 점했다. 웃음을 지으며 힘을 거두려던 순간 백종현은 깜짝 놀랐다.
마주친 환상현의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것은 패배를 인정한 눈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상대의 회색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그대로 자신의 왼팔을 찔렀다. 다급한대로 조악한 권법을 펼쳐 검병을 두들겼지만 당연히 허사였다.
환상현이 있는 힘을 전부 짜낸 필살의 공격이었으니 말이다. 궤적이 조금 틀렸을 뿐인 검은 그대로 종현의 팔뚝 위를 베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젠장!'
이번엔 백종현 쪽에서 욕지기를 삼켰다. 분명 어깨를 통째로 절단할 수 있는 공격권이었다. 한마디로 대련이라는 것을 인식해 상현이 봐준 셈이었다.
치료 능력자도 없는 이런 산중에서 어깨를 싹둑 베어버리면 무슨 난리가 나겠는가. 상현도 이쯤에서 검을 거두려고 했지만 옆구리와 팔뚝으로 붙잡아둔 창대에 다시 힘이 들어오더니 자신의 몸을 그대로 내동댕이 쳤다.
지면에 있는 힘껏 부딪친 상현이 고통의 신음을 흘릴 때 물러선 종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대련하다가 사람 잡겠군."
"제가 잡을 뻔 했는데 놓아드렸죠."
"유치하기는! 내가 이겼어!"
상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가슴팍으로 창이 치고 들어온 순간 패배였다는 사실을, 실전이었다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심장을 꿰뚫었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왠지 인정하기가 싫어진 상현이 대꾸했다.
"저도 사정이 있어서 조금 여유를 뒀더니 큰 코 다쳤네요."
"뭐라고?"
감히 누가 누굴 상대로 여유를 부린단 말인가 종현이 기막혀하자 상현은 신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못 믿으시겠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는데요?"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지. 내 새로운 공격대의 대장님께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어차피 쓴 신성인데 오늘 하루 한 번쯤 더 쓰는것은 괜찮겠지.'
숨을 고르며 상현은 전신에 마력을 가득 채우며 준비자세에 들어갔다. 처음 수원에서 신성력을 발휘했을 때랑은 사정이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능력이 오르며 몸도 단단해졌으며 마력의 순환도 익숙해졌다.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강한 검을 뿜어낼 수 있을듯 싶었다.
'흉내정도라면야.'
왼손으로 검병 끝, 오른손을 받치며 검을 세운 환상현이 눈을 빛냈다.
"단 한 번만 갑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들어와!"
흥분이 채 식지 않은 창을 휘두르며 종현이 외쳤다.
그의 당당한 자세에 대항해 환상현의 검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한 어둠이었다.
빛을 빨아들이듯 상현의 주변이 어두워지자 백종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빛을 흡수하는건가? 아니면 빛의 왜곡? 저건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환상현의 기세가 완전히 변했다는 점이었다. 백종현은 전신의 솜털이 쭈뼛섬과 동시에 어떤 두려움이 마음속에 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만한 성질의 힘이 아니었다. 상현의 검은 이제 완벽히 어둠에 녹아들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검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검을 둘러싼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보다도 더욱 새카만 칠흑을 붙잡은 검이 원초적인 무색 신성을 발하며 일순간 정점을 찍었다.
"다크 블레이드!"
강렬한 어둠이 전방의 공간을 집어삼켰다.
============================ 작품 후기 ============================
우리의 주인공, 쓸데 없이 큰 기술을 벌리는군요.
삼팔님께서 이 글은 대체 무슨글일까 라고 질문해 주셨는데
이 글은 주인공 환상현이 근심없이 150년 수련을 닦기 위해 노잣돈 마련하는 일상소설입니다.(써놓고 보니 막장이군요.)
부디 취향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