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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레전드-31화 (31/123)

< -- 31 회: 상급던전 블랙세이펄 -- >

날이 어두워져서 한치 앞을 구분할 수 없게 됐지만 거친 파도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우욱."

몸이 붕 하고 떠오르는듯한 느낌, 이미 수백 번을 겪었지만 여전히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를 타고 내려올 때면 자유낙하를 하는 기분이 들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이다.

쾅쾅쾅!

대원들이 다들 파김치가 되어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부술 듯이 노크했다.

"무슨일입니까?"

대원들을 보살피고 있던 상현이 문을 열자 수염이 덥수룩한 선원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선원의 몸에서는 강한 알콜 냄새가 풍겼다.

이와중에도 술을 마실 수 있구나라며 참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을 때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모두들 빠져나와요~ 물을 퍼야 합니다~."

다 죽어가던 공격대는 배에 물이 차고 있다는 소리에 히익- 하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판 위로 올라가기도 전에 계단 위에서부터 엄청난 물이 밀려들어왔다.

"우엑!"

방금 전까지 멀미를 하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정도로 빠르게 그들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쪼개진 포도주통, 바가지, 모자, 물을 퍼낼 수 있는 도구를 닥치는대로 손에 잡아 움직였다.

보스에 가기도 전에 바닷속에 잠겨 죽는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곳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질 줄은 몰랐던 백종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블랙세이펄의 기상상황은 랜덤이죠. 열에 한 번 꼴은 이런 지독한 폭풍우를 만난다고 하더군요."

정석영의 말은 이 상황에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10퍼센트의 악운을 마주할 정도로 공격대가 운이 없다는 소리밖에 더되겠는가.

"이대로는 안되겠네요."

이건 지붕 뚫린 집에서 비를 안맞겠다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꼴이었다.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 환상현이 백종현과 함께 갑판위로 올라갔다.

갑판 뒤쪽에는 열심히 선원들이 배를 몰고 있었고 선원들은 돛이 찢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만약 돛에 문제라도 생기면 군함은 파도를 헤쳐나갈 힘을 잃고 꼼짝없이 깊은 바다속으로 처박힐 운명이었다.

"길을 뚫죠."

"길을 뚫어?"

"저와 선배가 교대로 배 정면의 파도를 뚫어보는 겁니다."

상현의 말에 종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라는 표정으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저 파도가 눈에 안보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라고!"

"이대로는 꼼짝없이 침몰한다구요!"

그 때 였다.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삼킬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선배 먼저 보여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상현은 막무가내로 백종현의 등을 떠밀었다. 어떻게 보면 상현의 조치는 매우 시기적절한 판단이었다. 파도를 한 번이라도 뚫어낼 수 있다면 지금 저 아래서 미친듯이 물을 퍼올리는 것보다 백 배쯤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에라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백종현의 창끝이 마력을 끌어모으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전신의 아이템을 새 것으로 구한 백종현이지만 흑창만큼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자 인생을 함께한 창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현역으로 통할만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부스트!"

증폭 주문 효과를 걸자 어마어마한 압력이 오른팔 끝으로 몰려들었다. 오른팔의 힘줄이 터질 듯 불거졌지만 예리한 창끝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거대한 파도를 향하고 있었다.

"투창 3식 파(破)────!"

그의 창과 같이 예리한 바람의 창날이 용이 승천하듯 파도를 헤치며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바닷속으로부터 거대한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충격과 함께 파도 한가운데로 둥그런 길이 열렸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한동안 좌우로 갈라진 바닷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한 번, 그 한 번의 공격으로 기진맥진해진 백종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헉...쿨타임이 길어...헉."

그의 말을 알아들은 상현이 곧바로 교대를 나섰다.

콰오오-

거대한 마력이 칼에 응집하더니 시리도록 푸른 빛을 뿜어냈다. 폭풍우가 몰아닥치는 궂은 날씨인지라 달빛을 받을 수 없는게 애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빛 섬광과 한 세트인 장갑들이 마력을 공명시키며 상현의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바람의 폭풍!"

백종현과 거의 맞먹는 거대한 돌개바람이 정면으로 휘몰아치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파도를 좌우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에 갑판 위에서 물을 퍼내던 선원들마저 손에 들고 있던 럼주병을 떨구며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캄사합니다!"

대자연의 힘에 대항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선원들의 눈에 그야말로 신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다.

"교체입니다. 교체!"

그다지 지치지도 않은 표정으로 상현이 백종현의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창을 꼬나쥐었다. 아무래도 아주 피곤한 밤이 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폭풍우는 새벽이 되자 사그러들더니 아침이 되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선원들이 구름 사이로 나타난 햇빛을 보며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갑판 위에는 시체 두 명이 쓰러져 눈을 붙이고 있었다.

"형, 일어나세요."

"어...음?"

얼마나 잠을 잔 것인지 상현은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선장님이 형 깨우래요. 블랙세이펄이 근처에 있어요."

재후의 말에 상현은 눈꺼풀을 비비며 갑판을 잡고 일어섰다.

두둥- 두둥-

일정한 북소리, 푸른색 연기를 뒤로 흘리며 나아가는 검은색 유령선, 블랙세이펄이었다.

"속력을 올려라!"

선장이 막대기를 잡아당겨 신호를 보내자 갑판 아래의 선원들이 일제히 노를 꺼내 힘차게 배를 밀기 시작했다. 돛이 있지만 노를 젓지 않으면 블랙세이펄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선원들이 젖먹던 힘까지 짜서 노를 젓자 작게만 보였던 블랙세이펄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육안으로 확실하게 구분될 정도가 되자 일행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랙세이펄에 비교하면 자신들이 올라탄 군함은 군함이 아니라 고깃배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쉬이익-

순간 불길한 소리가 대원들의 귀를 울렸고 곧이어 상당한 진동과 함께 수십미터 옆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치솟았다.

펑- 퍼펑!

블랙세이펄이 포문을 열고 대포알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유령놈의 자식들이 발악을 하는 구나."

작은 군함의 선장은 여유로운 태도로 한손엔 조타기를 한손엔 럼주를 들고 요리조리 배를 몰며 능숙하게 포탄으로부터 회피를 시전했다.

"재후야. 저거 막아!"

한쪽에만 무려 60문의 대포가 달려있는 블랙세이펄의 포탄 난도질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수히 날아드는 포탄 중에 배에 직격할 것만을 골라낸 환상현이 재후에게 방어을 요청했고 공중에 얼음 방패가 펼쳐지며 적의 포탄을 걷어냈다.

폭풍우가 물러가며 물벼락 공세가 그치나 싶었더니 이제는 바닷물이 공중으로 치솟아 배를 때리기 시작했다.

"맞고만 있을 수 없지!"

간밤에 대포가 젖는 것을 막기 위해 피신시켜둔 대포를 끌고나온 선원들이 연초를 뻐끔 태우며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콰쾅!

이름하여 맞불 작전, 그러나 8문의 대포로 60문의 대포를 막기엔 너무 초라했다. 심지어 저쪽 대포 성능이 좋은지 사거리도 길었고 명중률도 높았다.

점점 배 위로 떨어지는 포탄수가 많아지자 재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방패를 동시에 3개 이상 펴는 것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선장씨, 그만 꾸물거리고 저 배에좀 붙여달라고!"

종현이 닦달하자 원하시는대로 해드리겠다며 조타기가 맹렬한 회전을 거듭했다. 이윽고 군함이 블랙세이펄의 꽁무니 뒤로 숨자 그들은 대포의 사정거리에서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얍!"

떨어진 거리는 약 100미터, 일반 해전이었다면 밧줄을 걸기 무리가 있었지만 능력자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종현이 창대에 밧줄을 묶어 힘차게 투창하자 범선의 단단한 뒷갑판을 뚫고 창이 멋드러지게 틀어박혔다.

"하나 더!"

가로로 두 개의 줄이 틀어박히자 종현은 줄의 끝을 군함의 마스트(돛대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가자."

종현이 두 개의 밧줄 위로 올라타 순식간에 블랙세이펄을 향해 달려나가자 일행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밧줄이 두 개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묘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일행이 꾸물거리는 사이 블랙세이펄의 갑판 위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았다. 종현이 먼저 전투를 개시한 것이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던 일행들은 두려움을 눌러 앉히며 눈을 질끈 감고 뛰기 시작했다.

의외로 어렵지는 않았다. 능력자들이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한 편이었으니 말이다.

혹시라도 일행들이 떨어질까 싶어 제일 마지막으로 밧줄을 탄 상현이 블랙세이펄에 뛰어올랐을 땐 이미 난장판 그 자체였다.

"인간...죽어라!"

전생에는 사람이었는지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는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갹갹 거리며 검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행은 전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멀미의 영향이었을까 한바탕 녹초가 됐던 일행들은 멀미가 싹 가시자 날라다닐듯 움직였고 스켈레톤은 대원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200체에 가까운 해골들이 단순한 뼈조각으로 변해 사방으로 굴러다니자 거대하고 무거운 울림을 자랑하는 목소리가 갑판을 뒤덮었다.

"누가 이 몸의 잠을 방해하는가."

갑판 중앙에서 쑥하고 올라온 것은 블랙세이펄의 선장, 상현 일행이 처리해야할 보스 바보사였다. 온 몸이 초록색으로 반투명한 인광이 이글거리는 바보사가 손을 휘두르자 유령들이 갑판 위로 솟구쳐 형체를 이뤘다.

"바보사를 먼저 타격해야 돼! 놈이 사령술을 쓰기 때문에 잔챙이에 휘둘리면 한도 끝도 없어!"

백종현이 바보사를 처리할 방법을 일러주자 대원들은 침착하게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진형을 꾸렸다. 방패를 앞세운 상현이 한 발자국씩 전진하며 길을 트자 그 뒤를 종현과 유창식, 유창호 형제가 보조했다. 상현의 옆으로 달려드는 적을 쳐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달라붙지 마!"

S급 검이 궤적을 그리자 스펙터들은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절정의 매직아이템이었기에 영체 속성 몬스터도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스 스톤!"

이윽고 상현의 전방, 유령들이 밀집해 있는 공간에 거대한 얼음기둥과 마법화살의 세례가 비오듯 쏟아졌다. 5급 대원들이 주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대화력이었다.

자신이 소환한 유령군단이 불과 1분사이에 반 수 이상 쓰러지자 바보사의 표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급던전 블랙세이펄의 최대 난관은 극악의 폭풍우와 쫓고 쫓기는 함선 추격전이었는데 이번엔 너무 빨리 붙잡힌 것이다.

"크아아 감히 인간놈들이!"

등장 몇 분 만에 죽을 위기에 처하자 바보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엄청난 마나가 응집하기 시작했다.

"놔둬선 곤란하겠는데."

그렇게 말한 백종현이 창으로 바보사를 저격하려 자세를 잡았지만 바보사의 손동작이 한 발 더 빨랐다.

"어스퀘이크! 더스트윈드!"

배 위에서 웬 대지마법인지 의아했지만 그 의문은 곧 몸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거대한 진동이 갑판위를 휩쓸자 바보사가 불러낸 유령들이 터져나가며 거센 기운이 일행을 덮쳤다.

"솔이 누나!"

의외의 반격에 기운을 버티지 못한 한솔이 튕겨나가는 것을 채은이 붙잡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녀들의 손은 닿지 않았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솔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빠져들었다.

"크케케케!"

거슬리는 녀석 한 명을 보내버렸다는 생각에 바보사는 낄낄 웃으며 재차 유령들을 소환했다. 단일 공격은 약해도 잡몹을 소환하는 마력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바보사였다.

"대원들을 부탁합니다."

"야! 안 돼!"

상현은 종현에게 뒤를 부탁하며 한솔이 떨어져나간 바다쪽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차갑고 검은 바다가 가벼운 물보라를 일으키며 상현의 몸을 삼켰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두 명의 대원이 바닷속으로 사라지자 종현은 이를 악물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단 바보사를 처리하죠!"

재후의 말에 백종현은 고함을 질렀다.

"바보사를 처리하면 던전이 닫혀버려! 저 둘이 미아가 되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재후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꼴좋다며 비웃어대는 바보사를 뒤로하고 일행들은 후퇴를 해야만했다.

치욕스런 패배였다.

============================ 작품 후기 ============================

상현 :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어디서 타는 냄새 나지 않아?

한솔 : 저 때문에 누군가 속을 끓이고 계신 것 같아요.

상현 : 알면 잘해....

쓸모없는 부록.

블랙세이펄 3층 구조 좌우 대포 60개씩 총 120문. 유령선원 1500명 승선중.

알콜호 1층 구조 좌우 대포 8개씩 총 16문. 알콜중독 선원 90명 승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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