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8 회: 주목 -- >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수연이 이해하기 전에 제 3자가 끼어들었다.
"뭐하시는 분이에요? 혹시 우리 언니에게 작업 거시는거에요?"
신채은이나 성하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소녀가 이수연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상현을 가볍게 견제했다.
"우리 언니가 원체 유명해서 오빠 같이 접근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구요. 그래도 돈을 갚겠다면서 접근하는 방법은 참신했지만요."
"조용히 해!"
부끄럽다는 듯이 이수연은 소녀의 입을 막고서는 상현에게 말했다.
"혹시 제가 언제 돈을 빌려드렸나요?"
"예.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고 받아주세요."
상현이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수연의 손은 치마 옆으로 딱 붙어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현이 그냥 받아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의 하울링이 A동 훈련장 전체를 울렸다.
"환상현!"
목소리만 들으면 요절을 내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했다.
'앗!'
흉신악살의 얼굴을 한 백종현이 자신을 잡아먹을듯 서있는 것을 확인한 상현은 험한 꼴을 보이기 전에 먼저 떠나기로 했다.
"자요."
수연의 손을 강제로 잡아 수표를 딱- 하고 건네준 그는 잰걸음으로 백종현에게 다가가 일단 나가자고 부드럽게 권유했다.
종현은 콧김을 훅훅 뿜는 것이 밖으로 나가면 한 대 패줄 기세였다.
"일단 나가지."
이를 갈며 백종현이 인파를 가르며 환상현을 데리고 나갔다. 붙잡지만 않았다 뿐이지 영락없는 코뚜레 묶인 소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뒷모습을 수표를 꼭 쥔 수연이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능력자 교습소는 실내 금연이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침묵,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상현을 건물 밖으로 끌고 나온 종현은 3년 전에 끊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공격대장님."
"예."
"환상현씨?"
"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선배 왜 그러세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상현의 말에 긴 한숨이 후우- 하고 세어나왔다.
"우리가 지금 어딨냐고."
"교습소 앞이죠."
"여기가 의사가 편히 안정을 취하라고 만든 곳인가? 응?"
더 열 받는 건 상현의 꼬락서니였다. 어디 가서 몇 대, 아니 수백 대는 맞고 왔는지 전신의 장비는 너덜너덜 한데다가 온몸이 그슬려 머리털은 펌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대답해."
대답하면 무슨 소리가 날아들지 몰라 상현은 입술을 달싹달싹 거리기만 했다.
"으아익!"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백종현은 분을 삭이기 위해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그 충격으로 옆에 있던 소화전이 펑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물을 뿜었고 길가던 시민들이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봤다.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러니까...능력을 올려두면 팀원에 도움이 되잖아요?"
"의사선생님과의 면담은 아예 지우개로 머리에서 슥삭 지워버리셨나? 안정을 취하라고 해서 같이 훈련도 못하는데 힘 조절도 염두에 안두는 생면부지인 능력자들한테 능력개발을 위해 흠씬 맞으셨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환상현 공격대장 나으리?"
그야말로 암의 화신이었다.
두시간 전.
대원들에게 자체 훈련을 시키고 상현과 대화를 나누러 온 종현은 그가 남긴 메모를 보고서는 하우스를 지키는 가드들에게 종현의 행방을 물었다.
가드는 상현의 위치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정부 관계자와 백종현을 연결시켜줬다.
"예? 시내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현이 시내로 향했다는 말에 백종현은 슬그머니 불길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헬기를 타고 서울로 도착해 관계자와 통화하자 이제는 능력자 교습소에 위치가 찍힌다는 말에 종현은 걷기를 멈추고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상현은 뛰어난 재능, 누구보다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험이 너무 없었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 유동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경험 말이다.
안내데스크에 들러 상현의 위치를 물은 그는 한동안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회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알려줄 수 없다는 직원, 당장 찾아야 한다고 얼굴을 붉히는 종현, 결국 평행선 상에서 밀고당기기를 하다 지친 종현이 정석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의 압력이 교습소에 떨어졌다.
"이제 순순히 말할 마음이 듭니까?"
빡친 표정의 백종현에게 직원은 꼬리를 말고 깨갱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모를 남긴지 많은 시간이 지난 상태, 서둘러 A훈련장에 도착한 상현의 모습을 본 종현은 차마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더 기가 찼다.
12연패의 초 유망주, 6레벨 탱커의 정점, 온갖 수식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것들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켰다. 그가 이곳에서 제대로 한바탕 뛰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몸이 근질거렸던 걸까?
도저히 백종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재생능력자가 재생이 제대로 안되서 요양해야할 정도면 크라켄과 싸우며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7레벨 상급능력자들과 두셋도 아니고 열 두 명과 싸웠다지 않은가.
머리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근신해."
게스트 하우스로 상현을 데리고 돌아온 백종현은 그를 집에 붙잡아두고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세상에 공격대장을 감금시키는 대원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환상현이란 인간은 상식을 벗어난 인외의 존재로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상현의 곁에는 종현을 제외한 미쏠로지 대원들이 붙어서 종일 밀착감시를 했는데 대원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함부로 전투를 치른 상현에게 왜그랬냐며 질책하긴 했지만 그 시간이 백종현의 지옥훈련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에 기뻤던 것이다.
살풍경한 방, 검을 대신해 손에 쥘만한 건 전부 빼앗긴 상현은 결국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느리지만 회복은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들 너무 걱정이 심하단 말이야.'
백종현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현은 명상에 잠겼다.
백종현이 환상현을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후폭풍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모인 능력자, 스카우터, 교습소 관계자, 너 나 할 것 없이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환상현의 재능을 지켜봤다.
대기업 출신들은 물론 옆 동에서 인재들을 체크하던 중소기업팀의 인원들까지 전부 그를 주목했다.
재생능력좀 키워보겠다고 찾은 그 짧은 시간동안 환상현은 능력자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아주 강하게 새겨넣은 것이다.
"언니 무슨 생각해요?"
기업 아리아의 정규공격팀 막내 신지혜는 고민에 빠져있는 공격대장을 보며 신경쓰인다는 듯 기웃거렸다.
아리아의 스카우터겸 공격대장인 이수연은 책상위에 자신이 직접 체크한 능력자 인원들에 대한 파일을 풀어놓고 어떤 사람들을 더 선발해야 할 지 고민중이었다.
팀을 지원하는 모기업에서는 굳이 2군 팀을 만들지 않더라도 정원을 20명까지 올리길 원했다.
인원이 늘어날 수록 더 높은 단계의 레이드나 던전을 보다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받아서는 곤란했다. 기업 정규팀 정도 되면 아무리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실력을 가려 받아야 했다. 상급 던전은 아무 대책 없이 진입하고서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고 지상의 고 위험군 레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공격대의 인원은 딱 10명, 추가로 열 명이나 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왜 아직도 안자?"
작업실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세면을 막 하고 나온 박현정이 파자마 차림으로 들어섰다.
"언니가 새로운 대원을 뽑는데 고민이 많은가봐요."
"솔직히 나는 지금 10인 체제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위에서 풀을 늘려달라는데 어쩔 수 없지."
"다들 그렇게 생각해?"
팀원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10인 체제가 익숙한 모양이었다. 한 번 이대로 유지하는 걸 다시 말해볼까 잠시 고민한 이수연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한 번 말해봤지만 되도록이면 늘려달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리아 컴퍼니는 이수연을 영입할 당시 그녀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지인들에게도 매우 높은 수준의 고액 계약을 안겨주며 정규팀을 창설했다.
당시 친구들과 자신을 한꺼번에 받아줄 곳이 있나 찾고 있던 이수연 입장에서는 반가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기업의 경영 수익이 악화되자 그들은 운영중인 던전팀에게 더 많은 활약을 원했다.
기업팀은 산하의 정규팀이 더 많은 활약, 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수록 정부의 여러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세금 감세, 면제등의 혜택이 있었다.
괴수 퇴치가 국가 안보와 직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기업팀의 정규팀 운영을 적극 돕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정부가 처리하는 방식보다 이렇게 자율적으로 운영되게 하는 편이 훨씬 더 관리측면에서도 수월한 점이 있었다.
또한 고랭크의 팀이 될 경우에는 대외적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며 매출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성능이 같은 제품이 있다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기업의 물건을 구입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등으로 아리아 컴퍼니는 공격대에게 더 높은 활약을 원했지만 10인으로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임무를 나설 때 대원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를 고르는 공격대장은 거의 없다.
이수연이 8레벨 능력자라곤 하지만 다른 대원들의 실력이 처지는 탓에 고위험군 임무를 처리하기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물량으로 때우겠다는 작전인 것이다. 심지어 인원수를 늘리면 여차할 때 매각절차에 돌입할 경우 더 많은 금액으로 팀을 매각할 수 있었다.
8레벨 능력자인 이수연이 포함된 공격팀은 상당히 인수 메리트가 있는 팀이었으니 말이다.
"언니, 그 사람은 어때요?"
"응?"
"그 왜, 언니한테 천만원 주고 간 사람요."
"누가 수연이한테 천만원을 줬어?"
"원래 빌린 돈이라면서 건네주던데 언니는 모르는 사람이래요. 돈 빌려준 기억도 없다고 하구요."
"그거 완전 선수 아냐?"
"생긴걸로만 봐서는 그럴 타입은 아닌 것 같았는데. 뭐, 사람은 얼굴만 봐선 모르는 법이니까요."
지혜와 현정이 나누는 이야길 들으며 수연은 곰곰히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표를 받을 때 닿은 남자의 손, 온기였다.
'왜 이걸 먼저 떠올리는 거야.'
수연은 당황하며 고개를 젓고서 곧바로 스카우터답게 냉정한 평가를 시작했다. 다른 팀들 역시 눈독을 들일만한 인재였다.
비록 자신 정도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고액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만약 그를 영입한다면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에게 어떻게 영입의사를 전달할 것인가. 격식따위를 문제삼는게 아니라 현재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언제부터 활동한 것인지 등의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나름의 루트를 통해 알아보려 했지만 그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정보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첫 번째가 해결된다고 해도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고액 계약이 확실한 그를 붙잡을만한 자금을 모기업이 내줄지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아리아에서는 이수연을 영입한 이후 FA(자유계약 선수 free agent)라는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듯 선수 영입을 뚝 그친 상태였다.
이번에 10명을 추가 영입한다는 계획도 전부 실력 검증이 되지 않은 유망주 위주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적당한 유망주는 값을 후려치기 좋으니 말이다.
"사실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영입 제안을 한 번 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역시, 역시."
이수연의 말에 그럴줄 알았다는듯 팔짱을 낀 신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에도 꿈쩍않던 우리 언니가 그런 이름도 모르는 풋내기 능력자에게 마음을 강탈당할 줄이야!"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리고 그 실력이 어딜 봐서 풋내기 능력자니."
"벌써 편드는거 봐요. 언니 보셨죠? 지금 우리 공격대장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일을 처리하려고 해요. 빨리 말려요."
신지혜는 수연을 놀리는 것에 불이 붙었는지 박현정의 소매를 붙잡고 가담을 요청했다.
"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겠지. 그건 그렇고 정말 모르는 사이야? 왠지 지혜의 말이 영 신빙성이 없는 것도 아닌거 같은데?"
박현정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자 수연은 그럴리 없잖아! 라며 소리를 질렀다.
"요거 요거 소리지르니까 더 수상한걸?"
"그렇다니까요?"
그녀들의 작업실에 한바탕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 작품 후기 ============================
환상현 : 우리 부모님한테도 혼난 적 없는데....
백종현 : 이것은 1등급 암의 냄새다...인외마수 같으니.
이 작품이 끝날때쯤 상현의 성격은 많이, 어쩌면 조금 변할 겁니다. 끝까지 초지일관 멍청이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편은 제법 쓰는데 오래걸렸습니다. 거의 두 배 정도 걸렸는데
첫째는 제가 졸린 탓이고...(원래 제가 몸이 아프거나 졸리면 글에 손을 안댑니다.)
둘째는 내용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조금 들어가서 입니다.
제 글을 읽으면서 대체 기업은 무슨 이윤이 남는다고 팀을 굴리지 하는 분들도 계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편으로 어느정도 고민이 해결 되셨으리라 봅니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구간은 최대한 쉽게 쓰려고 더 생각하기도 하는데 딱딱하지 않게
느끼셨다면 성공이겠죠.
현재 아리아 컴퍼니의 상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아 우리가 이번에 경영실적이 안좋으니까 니들이 고렙 괴수도 좀 잡고 해서 홍보효과도 좀 보고 수익도 늘리자.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좋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연재 주기를 맞추기 위해 한 번 글을 싹 묶었다가
12시에 맞춰서 푸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아무때나 올리는게 좋을까요.
저야 뭐 그냥 낼름 써서 낼름 올려드리고 낼름 평가받는걸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독자분들이 보시기엔 정시 연재가 더 편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지라...
의견 남겨주시면 꼭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