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나이트 레전드-43화 (43/123)

< -- 43 회: 알바리아 거미둥지 -- >

"소녀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푸시겠습니까."

돌침대 위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현의 발 아래서 아라크네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상현이 깨어난 지 이틀째, 매시간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상현은 정말 필요한 말 외에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화장실의 위치를 알고 난 뒤로는 하루에 한 두마디 할까 말까한 정도였다.

식사는 아라크네가 부하들을 시켜 직접 차려왔는데 볼일만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실례를 했더라도 아라크네는 오히려 좋아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라크네는 환상현에 대한 애욕과 연모가 극도의 중증상태에 빠져 있었다.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제 마음을 믿어주시겠습니까?"

한 번은 날이 번뜩이는 단도를 들고 심장을 내려찍을 기세로 아라크네가 말했다. 그러나 상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찔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딸그락-

단검 끝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찌를 것처럼 하여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라크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는 옆 방의 인간 동료들을 수습해서 그대로 돌아가 버릴 것이란 사실을. 그렇다면 그냥 자결하는 것은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쓸모없는 죽음은 하고싶지 않았다.

'덮치고 싶어.'

아라크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현의 옆모습을 보며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자신의 몸을 탐해줬으면 하고 하루에도 수 없이 상상을 했다. 어떨 때는 자신의 힘으로 그를 찍어누르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상상이 실제로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의 진짜 마음이지 육체 껍데기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풀어줘."

"풀어달라 하시면...?"

"일단 내 동료들을 먼저 지상으로 올려보내. 그러면 적어도 자살시도는 하지 않도록 하지."

일종의 도박이었다.

2일 동안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아라크네의 마수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살밖에 없었다. 일단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운이 좋아 지구상의 다른 인간의 몸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을 터, 그러나 동료들을 놔두고 죽는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죽은 것에 분노한 아라크네가 동료들을 비참하게 죽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동료들을 안전한 곳으로 내보내는게 최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공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한 분만 더 이곳에 남겨두겠습니다."

아라크네의 말은 열 세 명을 전부 풀어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자신을 포함하면 열 두 명이어야 할 미쏠로지 팀원이 왜 열 셋으로 불어났는가를 곰곰이 생각한 상현은 나머지 한 명의 존재를 깨달았다.

"어느 분을 이곳에 같이 모실까요."

상현은 그리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정석영 검사관."

"아니 개 씨발...아니...."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들은 정석영은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하다가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라크네의 눈빛을 보고서는 덜컥 겁이나 입을 다물었다.

환상현에 대한 모욕으로 기분이 나빠진 그녀가 내뿜는 투기는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급기야 정석영이 딸꾹질을 하며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자 환상현은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으니 언제든 불러주시길...."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환상현은 미안하다며 정석영에게 사과했다.

"어? 어 그럴 수도 있죠 뭐."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정석영에게 환상현이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제서야 그는 마음이 조금 풀어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후. 끊었던 담배생각이 간절하군요. 그래서 다른 미쏠로지 팀원들은 무사히 돌아갔습니까?"

"예. 아라크네는 거미의 여왕입니다. 그녀의 명령은 절대적이니 거미들이 일행들을 입구에 데려다 주기도 전에 잡아먹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뒤로 딴 생각을 하진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그 뒤까지는 생각 못해봤습니다."

차마 자살할 생각이었다고 정석영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죽어버리고 나면 혼자 남겨진 그가 무슨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 뻔했다.

"교주님,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교주님이란 호칭만 들어가면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교주님이 믿는 신을 불러내서 저 괴물년을 박살내 버리는 겁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심각하니 앞 뒤 가릴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내가 그 신이라서 말이죠.'

사실대로 말하기도 그렇고 상현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던 정석영이었으나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는 완전히 그곳에 적응해버렸다.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라 했던가? 근데 해도 너무 잘 적응해서 문제였다.

"여봐라. 교주님이 술이 드시고 싶으시단다."

정석영이 방문을 열고 외치자 거대한 흑거미가 쟁반위에 술을 가져왔다.

"물러나거라 허허."

거미가 방문앞에 쟁반을 두고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는 잽싸게 술을 챙겨 방으로 들어와 술병의 마개를 땄다.

뽕!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거미새끼들이 술은 아주 그냥...키아."

상현의 이름을 팔면 고기, 술, 과일을 수시로 시킬 수 있었기에 적어도 먹거리에서는 부족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맛있습니까?"

"죽이네요. 한 잔 하실래요?"

한 병을 다 비우고 거나하게 취한 정석영을 보며 상현이 묻자 그가 답했다. 석영의 권유에 상현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시면 돼지가 된다 하였으니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도 불쌍한 인간이었다. 환상현이라는 방패막이가 있다고는 하나 언제 거미들에게 몸을 뜯길지 모르는 극한의 공포 상황이었으니 이렇게 매일을 술로 찌들어 사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은신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탈출을 시도했지만 유일한 외길 통로의 끝을 킬롭이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헛숨을 집어삼키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는 사이 아라크네는 매일같이 그들의 방을 찾아왔다. 정석영이 불편함을 느끼니 방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상현이 호통쳤지만 그럴 수는 없다며 문밖에서라도 지켜보게 해달라며 아라크네는 방의 문을 열고서 밖에 무릎을 꿇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것에 절절한 마음이 묻어나왔다. 오죽했으면 정석영이 그냥 한 번 좋게 넘어가주고 탈출을 시도하는게 어떻겠냐는 이야길 했을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뭐 거미다리 좀 달려있는 것 뿐이지, 나머진 예쁜 미인 아니요. 그냥 거미 코스프레 했다고 생각하고 한 번 탁탁...."

"시끄럽습니다! 놈은 악신의 종이란 말입니다!"

"네...."

상현의 호통에 시무룩해진 정석영은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가 소리질렀다.

"여봐라! 교주님이 술을 드시고 싶으시단다!"

야심한 시각, 곤히 잠든 상현을 놔두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정석영은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방을 빠져나와 신전 바깥으로 향했다. 요 며칠 근처를 이잡듯이 뒤진 결과 이 숲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아ㅡ 들립니까? 아라크네님? 거미여왕니임?"

은은한 어둠이 스며있는 숲 앞에서 그는 뻘쭘하게 둥지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없나?'

자리를 비웠나 싶어 몸을 돌리려 할 때 그녀가 스르륵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이야기를 나누기 참 좋은 밤 아닙니까?"

이곳은 항상 어두웠기에 밖이 밤인지 낮인지 알 도리도 없었다. 모든 물건을 전부 빼앗겼으니 말이다.

"얘기하시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실례일지 모르나 저희 교주님을 연모하고 계시지요?"

아라크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모하다 뿐이겠는가 그의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고 싶어 애가 탈 지경이었다.

'젠장, 그놈이 직접 나서면 일이 수월해질텐데 내가 웬 개고생이냐.'

그냥 간단한 말 몇 마디면 죽고 못살 거미여왕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교주님을 20년째 모시고 있는 오른팔 격인 우호법이라고 할 수 있죠. 교주님이 측근중에 제일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저란 뜻입니다."

"그래서요?"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진 상태, 정석영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원래 교주님이 많이 바쁘신 분입니다. 지상에서 처리하셔야 할 일도 많고...아무래도 이런 칙칙한 신전에 갇혀 있다보면 여러가지 우울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풀어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껏 이완시킨 공기가 다시 얼어붙으려는 징조를 감지한 그는 과장스럽게 손을 휘저으며 얼른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리따운 분이 옆에 계신데 말이죠. 교주님 같이 신격이 드높은 분에겐 여왕님 같은 분이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이런 속보이는 말 한마디에 금새 분위기가 호전된다. 노총각 정석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찢어죽일 놈의 연애쟁이들!'

"그런데 요즘 교주님께서 고민이 많으시더군요. 신의 응답이 잘 들리지 않으시는듯 하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주님이 모시는 신 말입니다. 그 이름없는 신께서 요즘 신성을 내리시길 꺼리는 모양입니다."

아라크네는 정석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상현님께서 반신이신데 다른 신을 모시고 있다는 이야깁니까?"

'헉.'

아라크네의 입술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석영은 뒤통수에 해머를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 되어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도 베일에 감춰진 환상현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모아볼 겸 해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건 너무 큰 떡밥을 물어버린 셈이었다. 설마하니 그가 신급의 존재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정석영이었다.

"아, 그...그렇죠. 반신이신데 다른 신을 모시고 있는 거죠.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안가르쳐 주셨으니까."

"예."

"요즘 교주님께서 다른데 관심을 두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왕님에 대한 관심도 그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레 생겨날 거라 생각합니다만...그 전에 여왕님께서 저희 교주님과 나누신 이야기를 좀 더 알 수 있으면 더욱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제가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어째서 제게 도움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정석영의 제안은 물론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였지만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정석영은 얻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본래 인간이었던 자, 일단 좀 더 이유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라크네에게서 미약한 경계심이 느껴지자 정석영은 이쯤해서 진실을 살짝 가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본래 거짓말을 제대로 하려면 1할 정도의 진실을 섞으란 말도 있지 않은가.

"요근래 교주님이 무리를 심하게 하시는 바 안정을 찾으실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는 분에게 안주인의 자리를 드리려는 마음과...."

아라크네는 그 대목에서 빙긋 웃었다.

"...교단의 성세를 위하여 다시 교주님을 위로 모시기 위함입니다. 여왕님께서 저희 교주님과 어떤 결착을 짓지 않는 이상 저희를 풀어주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실로 적절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충직한 수하를 두셨으니 환상현님의 복인 듯 합니다."

'복 같은 소리는 니미.'

"도움이 될 진 모르겠으나 제가 그 분과 나눈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라크네의 입이 열리자 정석영은 속으로 옳커니!를 연발하며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속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한 신에 관한 이야기가 베일을 벗으려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 할 일을 다하는 정석영...뼛 속까지 군인!

(환상현 일행에 대해 머리털 갯수까지 알아내는게 그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42편에 보면 백월량님과 검은고양이님이 환상현이 갑자기 다른 캐릭터가 된 것 같아 괴리감이 느껴진다고 말씀 해주셨는데요.

그 이유를 좀 더 정확히 말씀해주시면 제가 어느 정도 답변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웹연재의 장점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부족한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구멍을 후기로 다시 전해드릴 수 있다는 거요.

일단 제가 짐작한 괴리감의 원인을 두고 설명을 드리자면

아마 괴리감을 느끼신 분들은 그동안 상현이 호구같긴 하지만 동료들을 챙기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드는 모습을 보며 이놈이 그래도 착한 편이라 여기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편에서 아라크네를 대하는 모습은 차가웠기에 괴리감을 느끼셨으려나요?

지구에 떨어지기 전의 환상현은 천신의 편에 서서 악신들을 베던 전사였습니다. 지금 아라크네는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여신에게 맞고 자살까지 한 불쌍한 인물로 나오지만 결국 악신의 힘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의 인격 형성에 가장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은 천년동안 같이 산 어머니, 아이라발디아 인데요. 천신 입장에서 악신은 사실 말 섞을 가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냥 태초부터 싸워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아라크네는 상현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습니다. 지금 상태로는요.

악신파인데다가 이미 인간도 아닌데 무슨 사랑을 구합니까.

제가 그리스 신화를 요즘 다시 훑는 중인데(그리스 신들이 나올테니까요) 성격이 모난 신들이 무척 많습니다. 굉장히 파격적인 소재도 많구요. 헤스티아처럼 흠잡을 데 없는 신이 아니고서야 환상현 정도면 무척 준수합니다.(강간마 제우스, 찌질이 아레스등등 있네요)

인간에 대해 자비로우며 자기생각도 확고합니다.

(그리스 신은 인간에 대해 자비는 커녕 좀 삭막하더군요. 이기주의가 지립니다)

만약 다른 이유에서 괴리감을 느끼셨다면 다시 한 번 댓글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락가락 하지 않는 캐릭터를 쓰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는데 그게 대다수 독자님들이 느끼는 문제라면 수정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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