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알바리아 거미둥지 -- >
"돌파는 무리입니다...."
폭탄으로 던전 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무인 로봇 카메라를 들여보낸 지휘본부는 던전 입장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현대의 열병기에 노출된 던전은 화가 난듯 무시무시한 양의 몬스터를 벽에서 새로 뽑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던전 공략을 현대식 병기로 하지 못하고 능력자에게 맡긴 이유였다. 수류탄 정도라면 괜찮았지만 미사일 급 화력으로 던전을 때리면 이렇게 발악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가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던전에서 열병기는 안된다구요."
현장을 지켜보던 D.SWAT 정예팀 소속 김성식이 말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왜 현장의 의견을 무시하는 겁니까."
김성식의 계급은 소령, 듣고 있던 지휘관이 발끈하며 말했다.
"그럼 저 안으로 돌입하겠다는 건가!"
'너희들이 지랄만 안해놨어도 들어갔다!'
군인은 계급이 최고다. 차마 장성급에게 개길 수 없었던 지라 김성식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상층부에서는 어설픈 양이 아니라 작정하고 밀어붙인다면 열병기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엄청난 폭약을 투하한만큼 엄청난 양의 몬스터가 새로 튀어나왔다. 카메라의 시야에 잡힌 던전 내부는 발디딜 틈도 없이 거미로 가득 차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만한 물량이 던전 바깥으로 나오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저 몬스터들이 밖으로 몰려나왔으면 수습 불가능의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시간을 들여서 사태를 지켜봅시다. 돌입은 불가능하오."
"안 됩니다!"
명령에 제동을 건 것은 미쏠로지 일행이었다. 단 한 시간이 지날때마다 동료의 생사가 오락가락 할 수도 있었다.
잠시 뒤 들어가겠다는 대원들과 D.SWAT팀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개자식!"
지구에 건너온 뒤 처음으로 상현이 누군가를 향한 비속어를 사용했다.
"개자식!"
얼마나 열받았으면 두 번이나 사용했겠는가.
정석영은 설마 상현이 정신지배라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여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저기 환상현씨?"
"뭡니까?"
날이 서있는 말투는 몹시 화가 나있다는 걸 증명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의 인격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등 뒤에 난 다리는 뭡니까?"
"악종의 간교한 속임수 였습니다."
아라크네가 상현에게 건넨 봉인용 단검은 본래 영혼만을 봉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검이었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그것에 주술을 가미해 약간 다른 효과를 가지도록 만들었다.
봉인된 영혼이 단도를 쥐고 있는 착용자에게 흡수되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모양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그말은 즉, 현재 아라크네의 영혼이 상현의 몸 안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라크네의 영혼은 상현의 몸 속에서 기쁜듯 몸을 떨었다.
단검에 봉인될 때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상현에게 전달했다.
'언젠가 힘을 되찾으시거든 저를 꼭 부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신성만 뒷받침 된다면 살리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현이 아무 탈 없이 150년 정도 산다면 그 때는 아라크네를 몸에서 분리해낼 수 있게 되리라.
"우웩."
표정이 좋지 않던 상현은 결국 토악질을 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부담감에서 오는 고통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전혀 다른 영혼,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악신의 종이었던 아라크네의 영혼이 자신의 깊은 곳에 달라붙어 아양을 떨자 마음의 평정이 깨진 것이다.
"괜찮은 겁니까?"
정석영은 괴로워 보이는 상현의 등을 두들기며 물었다.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습니다만...."
봉인된 것은 그녀의 영혼일 뿐, 아라크네가 마신에게 물려받은 에너지는 모두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린 후였다.
본래 상현의 부상당한 부분을 메우고 있던 어둠의 신성은 거미의 힘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상현의 등 뒤에 거미 다리가 불쑥 튀어나온 것도 그런 탓이었다.
'이건 뭐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정석영은 상현이 검지와 새끼만 내밀고 손목을 꺾으면 하얀 거미줄이 튀어나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환상현씨 맞죠? 거미가 흉내 내는거면 곤란합니다?"
아라크네가 상현의 탈을 쓰고 있었으면 배때기에 칼맞을 소릴 하면서 정석영은 상현를 부축했다.
"일단 나가죠."
"잠깐만요. 검사관님, 장비 챙겨야죠. 우리 장비 비싼데...."
"내 정신 좀 봐."
정석영은 얼른 달려가 상현과 자신의 장비를 챙긴 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히든 보스 보상을 찾았다. 그러나 보상이 있을 리 없었다.
히든 보스였던 아라크네의 영혼이 상현의 몸속에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말이다.
"시팔, 히든보스를 잡았는데 보상도 없이 빠져나가야 한다니!"
이번에도 엄청난 가치의 마력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어있던 정석영은 개고생만 했다며 투덜거렸다.
숲의 세계를 빠져나가자 다시 축축한 습기가 베어있는 동굴로 나올 수 있었다.
"저쪽입니다."
상현은 워낙 힘겹게 일행을 끌고 이곳까지 온 터라 신성을 발휘한 곳까지의 길을 빠삭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거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모든 거미들이 아라크네의 명령에 따라 입구 쪽으로 몰려 올라간 듯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탈출하실 겁니까?"
정석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입구까지 용케 올라간다 쳐도 그곳엔 거미여왕의 명령을 받은 킬롭과 거대 거미들이 진을 치고 있을 터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상현은 저 멀리 거미줄을 치고 있던 작은 새끼 거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석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상현의 시선을 받은 새끼거미는 짓던 집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일행은 수직으로 급속히 추락했던 통로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로 위를 쳐다본 정석영은 핼쑥한 표정을 지었다.
불빛에 비춘 그곳엔 새카만 거미들이 높은 사다리를 이루며 서로의 몸을 타고 수직으로 오르락 내리락 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거미의 수가 너무 많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테니."
무슨 자신감인지 상현은 정석영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손을 입 앞에 모아 웅크렸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놀랍게도 상현이 거미의 언어를 말하며 거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정석영은 깜짝 놀랐지만 상현이 괜찮다며 붙잡는 바람에 차마 도망치지 못했다.
이윽고 상현의 부름을 받은 거미들이 발판을 만들어 뻥 뚫린 수직 통로에 나선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미 여왕이 거미 왕으로 바뀌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설마 아라크네의 능력을 흡수한 겁니까?"
"의도치 않게도 말이죠."
아까 집을 짓던 새끼거미를 쳐다본 것도 말을 걸어보기 위함이었다. 등에 거미 다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반신반의하며 말을 걸었는데 거미는 상현의 말을 아주 잘 따랐던 것이다.
상현은 아라크네의 거미 지도자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거미 인간 특유의 강인함까지 흡수한 터라 알바리아 던전에 나서기 전과 비교하면 월등한 신체능력이 향상된 상태였다.
유전자 레벨에서부터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상현이 거미를 움직이는 광경을 지켜보던 아라크네의 영혼은 마치 나 잘했죠? 하는 것처럼 감정을 발산했는데 상현은 입을 꾹 다물고 거미들을 조종했다.
검은색 바다처럼 꽉꽉 들어찬 거미들을 좌우로 물러서게 하며 그들은 편하게 지상쪽으로 이동했다. 그랬던 일행이 고비를 맞은 것은 지하 3층에서였다.
그곳에 킬롭의 거미군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현과 마주친 킬롭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상현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의 등에 달린 아라크네의 다리, 상현이 아라크네를 흡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킬롭은 거미 군단에게 놈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비록 아라크네가 거미의 여왕이긴 했지만 보스방의 거미군단은 마신의 명령을 듣는 종족이었다. 아라크네는 임시 담당자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녀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킬롭의 명령에 보스방의 거미들이 일제히 상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능력을 흡수했다면서요!"
정석영이 깜짝 놀라 화염방사기의 스로틀을 당겼다. 용의 푸른 화염이 공간을 관통하자 킬롭의 부하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딜 감히 거미 새끼들이! 훠이~ 저리 비켜라."
그러나 물러서는 것은 잠시뿐, 화염방사기의 사각에서 접근한 킬롭의 입에서 엄청난 속도의 독탄세례가 뿜어졌다.
차마 피하지 못한 정석영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상현의 거미다리가 재빨리 움직여 독탄들을 전부 받아냈다. 상현의 다리 끝의 날카로운 촉에도 독이 발려져 있었는데 이쪽이 킬롭의 독보다 더 강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닌데?"
의도치 않게 거미언어로 얘기하자 킬롭은 격분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킬롭이 비명을 지르자 거미군단이 피해를 감수하고 저돌적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몰려드는 괴수의 파도를 보며 상현은 천천히 붉은색 장검을 뽑아들었다. S급 화염부여 마법검이 상현의 마력을 받아 붉은 불꽃을 뿜었다.
"난 형을 구하러 가야겠으니까 막지 마요!"
입구를 막아선 D.SWAT 대원들과 한판 벌일 기세로 신재후는 양손에 거대한 얼음창을 쥐며 소리쳤다.
"그쯤 하시지. 어차피 12명 밖에 안되는 인원으로는 저 안에 들어가도 개죽음이니까."
D.SWAT에서 몇 안되는 7레벨 고위 능력자인 김성식이 말했다. 그는 근력 능력을 극한까지 올린 타입이었는데 힘을 주면 거대한 몬스터도 양손으로 잡아 뜯을 수 있을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그만해라 재후야."
백종현 역시 돌입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상황이 너무 안좋았다. 카메라가 부서지기 전에 잡힌 던전 내부 상황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온갖 거미가 꽉 들어찬 던전은 7레벨 한 명과 6레벨 인원들이 뚫을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다.
팀원들이 흥분한 재후를 말리는 사이 종현은 침착하게 관계자들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열병기로 폭주한 몬스터들의 숫자가 사그러드는 경우는 없습니까?"
"과거에 보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몬스터 숫자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기록이 있습니다. 10년전 기록이라 지금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자료가 기록된 던전은 중급 던전이었으니까요."
보름,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이미 환상현이 던전에 입장한지 보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또 보름을 기다린다면 한 달의 시간이다.
상현과 정석영이 저 험한 거미둥지 속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블랙세이펄에서의 일을 되풀이 하는 것만 같아 착찹해진 그 순간 거미둥지 입구로부터 굉음이 터져나오며 시뻘건 불길이 입구 광장을 향해 뿜어졌다.
미쏠로지 일행을 견제하고 있던 D.SWAT팀은 갑자기 등 뒤에서 거대한 불길이 뿜어지자 깜짝 놀라 사방으로 피했다. 거대한 불기둥이 날름거리는 광경은 흡사 거대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수 초간 지속된 화염이 사그러들자 모든 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한 채로 입구를 주시했다.
저벅저벅-
뭉게뭉게 연기구름을 토해내는 던전 속으로부터 그림자가 나타났다.
"내가 돌아왔다!"
정석영은 지상으로 올라온 기쁜 마음에 두 팔을 벌리며 환호했지만 주변의 반응은 무척 휑했다.
이럴 분위기가 아니구나 싶어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고 그의 뒤를 이어 갑옷 안으로 거미 다리를 숨긴 상현이 연기를 헤치며 걸어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와아─!"
순식간에 터지는 환호성, 모두에게 기쁜 순간에 정석영은 혼자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비 인기인의 슬픔이었다.
============================ 작품 후기 ============================
스파이더맨 1탄 보신 분들은 대부분 해보셨다는 거미줄 쏘는 손동작입니다.
저도 해봤는데요.
안나가더군요.